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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Description
책소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은 18세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변동을 다루었다.
지식, 자아, 글쓰기, 감각ㆍ취미 등이 새롭게 구성된 18세기를 학문적으로 문화사적으로 정리한 이 작품은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글쓰기와 사유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정민 교수가 쓴 18세기 문화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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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

1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세계 인식
1.
18세기의 문화 개방과 조선 지식인의 세계화 대응
2.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벽'과 '치' 추루 경향
3.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
4.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통변 인식과 그 경로

2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적 경향
1.
18세기 산수유기의 새로운 경향
2.
18,19세기 문인 지식인층의 원예 취미
3.
18세기 지식인의 완물 취미와 지적 경향
4.
18세기 원예 문화와 유박의
5.
이덕리가 지은 의 차 문화사적 자료 가치

3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내면 행간
1.
에 실린 이언진의 필담 자료와 그 의미
2.
18세기 시단과 일상성의 시세계
3.
18세기 우정론의 맥락에서 본 이용휴의 생지명고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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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지식의 힘’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켰다
―18세기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 시대였다

변화를 불러온 것은 정보화였다.
꽉 막힌 유교 사회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과학문명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을 들쑤셨다.
정보 처리 방식과 정보의 유용성에 대한 판단 근거가 바뀌었다.
물적 토대의 변화도 한몫했다.
한마디로 하면, 자기 좋아하는 것에 미쳐 돈을 쓸 만한 경제력이 생겼다.
이에 힘입어 전에 보지 못한 괴상한 지식인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무엇에 미쳤던가? 이들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 우리 사회에 나타난 변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들어 갑자기 ‘벽(癖)’ 예찬론이 쏟아져 나온다.
일종의 매니아 예찬론이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이란 말은 이 시기 지식인의 한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제가(朴齊家)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또 ‘치(癡)’, 즉 바보 멍청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경향도 생겨났다.
관습적 기준에서 볼 때 비정상적으로 미친 ‘벽’이 사회적 통념으로는 ‘치’로 인식되었다.
설치(雪癡), 치재(癡齋), 매치(梅癡), 간서치(看書癡), 석치(石癡) 등 치자가 들어간 이름이나 호가 부쩍 많아지는 것은 그 반영이다.

이들은 미쳤다거나 바보 같다는 말을 오히려 명예롭게 여겼다.
미치지도 못하고 그럭저럭 욕 안 먹고 사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에서 근대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지식의 패턴이 달라지고, 정보의 인식이 바뀌었다.
삶의 목표 또한 궤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편집광적인 정리벽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이 동지적 결속 아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성현의 도를 실현하는 군자적 삶의 이상은 시정(市井)의 목소리에 점차 파묻혔다.
서울과 지방의 문화 격차는 하루가 다르게 현격하게 벌어졌다.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란 사정의 칼날을 빼들지 않을 수 없었으리만큼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지방의 지식인들에게 서울 문화계의 이런 풍조는 그저 해괴한 망국의 조짐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 본문 13~14쪽, 〈18세기의 미친 바보들〉에서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과 세계인식
― 자의식의 양상과 변모, 우정

18세기 중반 이후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도시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고, 그것과 함께 생활 패턴에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생한다.
개인을 둘러싼 외부 환경의 변화는 제도의 모순과 갈등하며 자의식의 변모를 가져온다.
18세기 이후 자의식 변모의 구체적 방향과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 동안 저자는 18세기 지식인의 새로운 지적 경향과 변화된 문화 환경에 관한 탐색을 계속해 왔다.
문화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이 시기 지식인들의 의식을 강렬하게 지배한 변화의 축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타난다.
첫째, ‘도(道)’를 추구하던 가치 지향이 ‘진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둘째, ‘옛날’로 향하던 가치 지향이 ‘지금’으로 선회했다.
추구해야 할 이상적 가치는 과거에 있다고 믿었던 퇴행적 역사관은 이제 힘을 잃었다.
셋째, ‘저기’에 대한 관심이 ‘여기’를 향한 관심으로 바뀌었다.
즉 중국을 기준으로 삼던 사고는 조선 중심의 사고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는 겉으로 보아 사소하지만 그 의미는 크다.
사람들의 의식은 빠르게 변모해간 반면에 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보수화되어갔다.
제도는 변모된 의식을 포용할 여유가 없었고, 지식인들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제도의 억압을 답답해했다.
이 시기 지식인들에게서 감지되는 자의식의 변화는 이러한 갈등의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자의식의 확대는 이 시기 성행한 ‘조선풍(朝鮮風)’이나, ‘조선시(朝鮮詩)’ 주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 주장의 핵심만 말한다면 우리는 중국 사람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다.
우리는 옛날 사람이 아니고 지금 사람이다.
그런데 왜 지금을 살아가는 조선 사람이 옛 중국 사람 흉내만 내고 있는가? 이런 앵무새 짓이나 광대 흉내는 걷어치우고, 조선 사람의 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그런 문학을 해보자는 것이다.
정약용은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박지원은 또 내 시를 읽은 사람이 내 시에서 조선 사람만의 체취와 풍습을 볼 수 없다면 그런 시는 쓰나 마나한 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짜 나를 버리고 참 나를 찾겠다는 추구가,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지금 여기’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했다.
…… 다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고, 기득권을 쥔 계층의 폭력적 억압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유난히 우정의 문제가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본문 131~132쪽,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 변모와 그 방향성〉에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지적 경향
― 산수유기와 완물 취미 그리고 원예

18, 19세기는 한국 문화사에서 이채를 발한 시기이다.
정쟁으로 분화된 지식인 집단은 내적 결속을 다지며 문화적 교류를 강화했고, 당시 활발한 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한 청나라 문물의 수입과 출판문화의 보급 등 제반 분위기의 변화는 경화사족을 중심으로 생활 패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흥적 소비적 형태를 띤 문화활동이 활성화되었고, 전 같으면 완물상지라 하여 금기시 되던 골동서화 수집이나 원예 취미 같은 것들이 문인의 아취로 여겨져 적극 애호되었다.
이 시기 문인지식인층에게 나타나는 지적 경향과 다양한 문화 현상들은 생활 속의 예술을 추구하는 이러한 경향은 서책과 골동 서화에 대한 취미를 부추기는 한편으로, 원림과 정원을 꾸며 갖가지 진기한 화훼와 수목을 심는 원예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각종 문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원기(園記)나 원예 관련 언급들을 보면 이 시기에 이러한 분위기가 얼마나 널리 확산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18세기 지식인 집단 내부의 새로운 지적 경향은 다양한 방향에서 감지된다.
‘벽’과 ‘치’로 대변되는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 집단이 대두되는 양상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핀 바 있다.
본고는 이 글과의 연관 아래 방향을 돌려, 이들이 완호(玩好)했던 사물들과 이를 통해 확인되는 독특한 지적 경향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최근 발굴 소개된 자료에 완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내용을 담은 《발합경(??經)》이 있다.
앵무새와 관련된 이서구(李書九)의 《녹앵무경(綠鸚鵡經)》은 그간 박지원의 서문만 전해지다가, 이번에 일부 자료가 확인되었다.
이렇듯 비둘기나 앵무새를 기르며, 그에 관한 기록을 모아 한 권의 소책자로 묶는 방식 등은 이들 두 책 뿐 아니라 한 시기에 유행했던 특이한 지적 풍토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새롭게 확인된 이들 두 자료를 중심으로 당시 성행했던 새로운 지적 경향에 대해 살펴보고, 그 의미를 검토하려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금기시되었을 관심이 오히려 격물치지하는 공부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는 변화 속에는 18, 19세기 조선 사회의 물적 토대의 변화와 세계관의 변화가 일정부분 반영되어 있다.

― 본문 221~222쪽,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완물 취미와 지적 경향〉에서


새로운 자료 발굴과 소개
― 《 화암수록》, 《동다기》, 《동사여담》 등

이 책에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소개도 실려 있다.
우리나라 원예 문화사에서 손꼽을 저작인 《화암수록(花庵髓錄》의 작자를 유박으로 확정하고 그 자료 가치를 소개한다.
또한 일부 내용만 전해지던 《동다기(東茶記)》(《기다(記茶)》 전문을 발굴하여 그 내용과 함께 작자가 이덕리(李德履)임을 최초로 밝혔다.
동다기는 차 문화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소중한 자료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기록 《동사여담(東?餘談)》에 실린 이언진 관련 자료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동다기》의 저자 이덕리와 책의 내용에 대해 일별해 보았다.
이제 이 자료의 차문화사적 가치를 간략히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첫째, 우리나라 최초로 차문화 관련 전문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차를 전혀 마실 줄 몰랐다.
상고당 김광수 같은 일부 호사가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차를 마시긴 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생활 공간 근처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차나무를 보고도 그것이 어디에 쓰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고작 약용으로 쓸 줄만 알았다.
《동다기》는 차의 각종 명칭과 마시는 법, 그리고 각종 효능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둘째, 차의 국가 전매와 국제 무역을 통한 국부 창출을 주장했다.
기호품인 차가 국제 교역 시장에서 갖는 상품 가치를 꿰뚫어 보고 국가적 차원에서 차를 관리하고 전매해서 그 이익으로 국방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그 실행 방법과 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 방법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셋째, 당대 차에 얽힌 사건과 주변 정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1760년에 차무역선이 남해에 표류해서 온 조선이 10년간 마셨다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당시 지식인들이 중국 차를 가져다가 마시던 정황 등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가운데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보면 “나는 황차(黃茶)를 실은 배 한 척이 표류하여 남해에 정박한 것을 본적이 있다.
온 나라가 그 황차를 10여년 동안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은 대목이 있다.
이 책의 기록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에서 차문화의 실상과 주변 정황을 좀더 생생하게 알 수가 있다.

넷째, 우리나라 식으로 차 만드는 법과 마시는 법을 제시했다.
떡차와 향차의 차이,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 약효와 그밖에 차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들을 소개해서 객관적 실상 파악이 가능하게 하였다.

― 본문 312~313쪽, 〈이덕리가 지은 ‘동다기’의 차 문화사적 자료 가치〉에서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07년 02월 20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445쪽 | 651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58621720
- ISBN10 : 895862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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