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과 권능
Description
책소개
오랫동안 서구 교회가 구원론 중심적인 성령론을 발전시켜온 데 반해, 20세기 들어 비서구교회, 특히 제3세계 교회들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오순절 운동은 성령론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도록 자극했다.
한국교회 역시 20세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 체험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맛본 강렬한 영적 경험에 비해 그 경험을 성경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성찰은 아직까지도 현저히 부족한 편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가 노정한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에 성령론에 관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저서가 드디어 우리말로 나왔다.
본서의 저자인 막스 터너는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성령론 전문가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 자체가 한국 신학계를 위한 귀중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 역시 20세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 체험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맛본 강렬한 영적 경험에 비해 그 경험을 성경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성찰은 아직까지도 현저히 부족한 편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가 노정한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에 성령론에 관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저서가 드디어 우리말로 나왔다.
본서의 저자인 막스 터너는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성령론 전문가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 자체가 한국 신학계를 위한 귀중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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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감사의 말
약어표
1부 현 학계에서 말하는 누가와 성령
1장 초석 놓기: 종교사학파와 그 도전에 대한 반응
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
2부 누가-행전의 배경으로서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
3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원형적 은사들
4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초자연적인 “능력”
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
3부 성령의 메시아
6장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메시아 도래
7장 세례 요한의 약속: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8장 메시아적 아들의 능력 부여
9장 새 출애굽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예수
10장 오순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즉위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그의 능력으로서의 성령
4부 제자들과 성령
11장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사역 시작부터 승천까지의 성령
12장 사도행전 교회에게 주어진 오순절 은사 506
13장 교회의 삶 안에서의 오순절 은사의 효과들과 사도행전에서의 “구원”
14장 결론
참고 문헌
성구 색인
감사의 말
약어표
1부 현 학계에서 말하는 누가와 성령
1장 초석 놓기: 종교사학파와 그 도전에 대한 반응
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
2부 누가-행전의 배경으로서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
3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원형적 은사들
4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초자연적인 “능력”
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
3부 성령의 메시아
6장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메시아 도래
7장 세례 요한의 약속: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8장 메시아적 아들의 능력 부여
9장 새 출애굽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예수
10장 오순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즉위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그의 능력으로서의 성령
4부 제자들과 성령
11장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사역 시작부터 승천까지의 성령
12장 사도행전 교회에게 주어진 오순절 은사 506
13장 교회의 삶 안에서의 오순절 은사의 효과들과 사도행전에서의 “구원”
14장 결론
참고 문헌
성구 색인
책 속으로
우리는 이미 누가에게 있어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성령을 한 인격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은 과연 어떤 행위 또는 어떤 일련의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아들 됨의 시작과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동시에) 가리킨다는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이제 보다 더 명확해진다.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개념상 잠재적으로라도 서로 상당히 다른 성령의 활동을 수반한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전자를 필요로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교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사로 간주하고,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차후에 따라오는 은사로 간주한다.
혹자는 누가가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통한 선교를 독려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회심-입문 때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그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만일 누가가 성령이 오직 후대에 와서, 그리고 오직 일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그러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면, 그가 회심-입문 때에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 간주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되고 만다.
---「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중에서
앞서 3-5장에서 나는 유대교의 “예언의 영” 개념에 대해 오늘날 제기된 많은 해석에 커다란 물음표를 찍었다.
나는 “예언의 영”에 대해 적절한 정의를 내렸고, 이와 관련된 원형적인 은사들(은사적인 계시와 지혜, 돌발적인 예언자적 발언, 은사적인 찬양)에 주목했다.
비록 “예언의 영”이 (유대교 내에서) 은사적인 말씀 선포(이것은 기독교에서 발전한 것임)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성령과(보다 더 구체적으로)“예언의 영”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적·윤리적 갱생을 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이것은 특히 누가가 근거로 삼은 이사야 11:1-4에 반영된 “메시아 전승”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유대교 내에는 멘지스가 주장하듯이 “예언의 영”과 “은사적인 영” 간의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예언의 영과 “구원론적인 영” 간에도 뚜렷한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의 영”이 누가의 구원 개념과 무관하다고 전제할 수 없을뿐더러,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라는 부차적 은사로 간주될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누가가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사역과 구분했다고도 추론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가 이러한 유대교 사상의 흐름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중에서
내러티브 안에서 세례 요한(또는 다른 인물)에게 귀속된 견해와 내레이터/내재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분리될 필요가 있다.
누가의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바로 그 예언자였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절대 성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가브리엘이 독자들에게 요한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임을 확신시켜주고(1:15), 예수가 세례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큰 자”이며,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더라도(7:26-28),51 누가는 요한이 이해한 것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참조.
7:18-21).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구원사적 사건이 전통적인 소망과 결합하면서 그동안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자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4:21)며 절망하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독자들을 바로 그 아이러니의 심장부로 이끈다.
사실 누가 자신도 3:16-17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약속이 대부분 오순절을 넘어(행 1:5; 11:16)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세례 요한의 말의 핵심을 그대로 보존한다.
---「7장 세례 요한의 약속」중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의 왕권에 대한 소망은 누가복음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의 새 출애굽 해방과 회복에 대한 소망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장차 오실 이가 이스라엘을 성령과 불로 “정화”시킬 것을 약속한다(3:16).
누가는 예수가 그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이러한 소망을 부분적으로 성취한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왕적 통치(1:32-33)는 심지어 그의 예루살렘 도착 저 너머에 있다(눅 9:51; 19:11-27; 23:42).
사도행전 2:33-36은 예수가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 우편으로의 승귀(시 110:1)를 통해 이 약속된 통치를 시작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위치에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누가복음의 마지막 단락(24:44-49)과 사도행전의 프롤로그(1:3-8)와 오순절 연설이 제시하는 답은 그가 자신을 주로 만드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이 통치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나머지 부분은 성령을 높임을 받은 메시아의 실행 능력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지지하며, 주요 핵심 본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미 진행 과정에 있음을 암시한다.
---「10장 오순절」중에서
성령 받음과 관련이 있는 본문들 가운데 오순절을 제외하고는(행 1:8; 2:4, 11) 성령의 첫 번째 선물이 직접 설교와 증거를 위한 능력 부여로서 주어진 경우는 단 한 번의 경우(행 9:17, 20)뿐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했다.
이것은 다른 사도행전의 그림과 일치한다.
비록 증거를 위한 성령의 능력 부여가 누가의 성령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측면이지만, 전반적으로 누가는 그리스도인들 대다수가 복음 전도에 왕성하게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표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행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사도들이었다(6:2; 참조.
4:33).
누가가 보는 복음 전도는 주로 에베소의 열두 제자, 바울, 그리고 특별히 스데반(6:8, 10), 빌립(8:5-40), 바나바, 요한, 마가, 실라, 디모데, 아볼로 등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과제다.
그들은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누가가 8:4, 11:19-20 (등)에서 언급한 자 이상인 복음 전도자와 협력자(참조.
19:22; 20:4)였다.
---「12장 사도행전 교회에 주어진 오순절 은사」중에서
따라서 오순절 성령은 단순히 “성화된 삶 위에 주어진 능력의 은사”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형성하며, (성화시키기도 하며) 공동체의 선교를 이끌며, 능력을 부여하는 은사적인 예언의 영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바울과 사도행전에 대한 고든 피의 저서에 제시된 것과 레덜리의 보다 더 신학적인 분석에 명시된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가에게 있어 회심자들은 지체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예언의 영은 천상의 주가 그의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확신시켜주며, 죄 용서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며, 순종을 촉진시키고, 변화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와 이해를 수여하며, 또한 그들의 봉사와 증거의 삶에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 예언의 영이 없이는 화해의 공동체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즐겁게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이 회중을 통해 덜 강렬한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조명해주는 횃불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성령이 회심-입문의 폭넓은 복합체 안에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반면 이 안에서 어느 정도 신적인 주권과 성령의 자유를 보존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말하는 도전은, 이미 폭넓은 은사주의 교회의 전통에 있는 저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있는 것처럼 회심의 세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일관된 교리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은 과연 어떤 행위 또는 어떤 일련의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아들 됨의 시작과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동시에) 가리킨다는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이제 보다 더 명확해진다.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개념상 잠재적으로라도 서로 상당히 다른 성령의 활동을 수반한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전자를 필요로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교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사로 간주하고,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차후에 따라오는 은사로 간주한다.
혹자는 누가가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통한 선교를 독려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회심-입문 때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그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만일 누가가 성령이 오직 후대에 와서, 그리고 오직 일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그러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면, 그가 회심-입문 때에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 간주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되고 만다.
---「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중에서
앞서 3-5장에서 나는 유대교의 “예언의 영” 개념에 대해 오늘날 제기된 많은 해석에 커다란 물음표를 찍었다.
나는 “예언의 영”에 대해 적절한 정의를 내렸고, 이와 관련된 원형적인 은사들(은사적인 계시와 지혜, 돌발적인 예언자적 발언, 은사적인 찬양)에 주목했다.
비록 “예언의 영”이 (유대교 내에서) 은사적인 말씀 선포(이것은 기독교에서 발전한 것임)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성령과(보다 더 구체적으로)“예언의 영”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적·윤리적 갱생을 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이것은 특히 누가가 근거로 삼은 이사야 11:1-4에 반영된 “메시아 전승”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유대교 내에는 멘지스가 주장하듯이 “예언의 영”과 “은사적인 영” 간의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예언의 영과 “구원론적인 영” 간에도 뚜렷한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의 영”이 누가의 구원 개념과 무관하다고 전제할 수 없을뿐더러,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라는 부차적 은사로 간주될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누가가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사역과 구분했다고도 추론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가 이러한 유대교 사상의 흐름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중에서
내러티브 안에서 세례 요한(또는 다른 인물)에게 귀속된 견해와 내레이터/내재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분리될 필요가 있다.
누가의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바로 그 예언자였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절대 성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가브리엘이 독자들에게 요한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임을 확신시켜주고(1:15), 예수가 세례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큰 자”이며,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더라도(7:26-28),51 누가는 요한이 이해한 것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참조.
7:18-21).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구원사적 사건이 전통적인 소망과 결합하면서 그동안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자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4:21)며 절망하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독자들을 바로 그 아이러니의 심장부로 이끈다.
사실 누가 자신도 3:16-17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약속이 대부분 오순절을 넘어(행 1:5; 11:16)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세례 요한의 말의 핵심을 그대로 보존한다.
---「7장 세례 요한의 약속」중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의 왕권에 대한 소망은 누가복음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의 새 출애굽 해방과 회복에 대한 소망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장차 오실 이가 이스라엘을 성령과 불로 “정화”시킬 것을 약속한다(3:16).
누가는 예수가 그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이러한 소망을 부분적으로 성취한 것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그의 온전한 왕적 통치(1:32-33)는 심지어 그의 예루살렘 도착 저 너머에 있다(눅 9:51; 19:11-27; 23:42).
사도행전 2:33-36은 예수가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 우편으로의 승귀(시 110:1)를 통해 이 약속된 통치를 시작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위치에 있다.
그런데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누가복음의 마지막 단락(24:44-49)과 사도행전의 프롤로그(1:3-8)와 오순절 연설이 제시하는 답은 그가 자신을 주로 만드신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이 통치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나머지 부분은 성령을 높임을 받은 메시아의 실행 능력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지지하며, 주요 핵심 본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미 진행 과정에 있음을 암시한다.
---「10장 오순절」중에서
성령 받음과 관련이 있는 본문들 가운데 오순절을 제외하고는(행 1:8; 2:4, 11) 성령의 첫 번째 선물이 직접 설교와 증거를 위한 능력 부여로서 주어진 경우는 단 한 번의 경우(행 9:17, 20)뿐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했다.
이것은 다른 사도행전의 그림과 일치한다.
비록 증거를 위한 성령의 능력 부여가 누가의 성령론에 있어 매우 중요한 측면이지만, 전반적으로 누가는 그리스도인들 대다수가 복음 전도에 왕성하게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표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을 행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무리가 아니라 사도들이었다(6:2; 참조.
4:33).
누가가 보는 복음 전도는 주로 에베소의 열두 제자, 바울, 그리고 특별히 스데반(6:8, 10), 빌립(8:5-40), 바나바, 요한, 마가, 실라, 디모데, 아볼로 등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과제다.
그들은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누가가 8:4, 11:19-20 (등)에서 언급한 자 이상인 복음 전도자와 협력자(참조.
19:22; 20:4)였다.
---「12장 사도행전 교회에 주어진 오순절 은사」중에서
따라서 오순절 성령은 단순히 “성화된 삶 위에 주어진 능력의 은사”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서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형성하며, (성화시키기도 하며) 공동체의 선교를 이끌며, 능력을 부여하는 은사적인 예언의 영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바울과 사도행전에 대한 고든 피의 저서에 제시된 것과 레덜리의 보다 더 신학적인 분석에 명시된 것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누가에게 있어 회심자들은 지체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예언의 영은 천상의 주가 그의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확신시켜주며, 죄 용서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며, 순종을 촉진시키고, 변화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와 이해를 수여하며, 또한 그들의 봉사와 증거의 삶에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저자에게 있어 예언의 영이 없이는 화해의 공동체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즐겁게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이 회중을 통해 덜 강렬한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조명해주는 횃불이다.
그렇다면 누가가 성령이 회심-입문의 폭넓은 복합체 안에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반면 이 안에서 어느 정도 신적인 주권과 성령의 자유를 보존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말하는 도전은, 이미 폭넓은 은사주의 교회의 전통에 있는 저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있는 것처럼 회심의 세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일관된 교리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14장 결론」중에서
출판사 리뷰
오랫동안 서구 교회가 구원론 중심적인 성령론을 발전시켜온 데 반해, 20세기 들어 비서구교회, 특히 제3세계 교회들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오순절 운동은 성령론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도록 자극했다.
한국교회 역시 20세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 체험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맛본 강렬한 영적 경험에 비해 그 경험을 성경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성찰은 아직까지도 현저히 부족한 편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가 노정한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에 성령론에 관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저서가 드디어 우리말로 나왔다.
본서의 저자인 막스 터너는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성령론 전문가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 자체가 한국 신학계를 위한 귀중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국제 신약학계는 세 명의 대가가 성령론에 관한 논의들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던, 로버트 멘지스, 막스 터너가 그들이다.
제임스 던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성령론 해석자들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을 새 언약적 삶으로 입문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예수와 (오순절 이후) 그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의미를 지닌다.
즉 성령의 가장 큰 기능은 구원론적이다.
반면, 로버트 멘지스 같은 학자는 성령을 회심 이후에 주어지는 선교적 은사 혹은 능력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이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소위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선교를 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본다.
이것이 그들이 누가-행전을 이해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하지만 막스 터너는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의 본질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예고된 “예언의 영”과 맥을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제적인 신약학자답게 구약,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 신약의 텍스트들을 일일이 정밀하게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또한 성령론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신학계의 논의들을 꼼꼼히 살핀다.
터너는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은, 그가 구약에서 예고된 왕-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본다.
특별히 구약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메시아적 아들과 종-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광야로 나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사탄의 시험을 이긴 후 갈리리로 돌아와 이사야 61장에 예고된 대로 이스라엘을 “노예와 가난”, “포로됨”, “눈먼”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예언자 요엘이 약속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고, 각종 은사와 능력을 교회에 나누어주시는 “주님”이 되신다.
이렇듯 예수가 지상 사역에서 소유한, 그리고 부활과 승천 이후 교회에 부여하신 성령은 정확히 구약-유대교에서 나타난 예언의 영이다.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을 중재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신다.
따라서 오순절 이후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 체험은 단순히 구원의 입문이나 선교를 위한 능력을 얻은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수여하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이 부여하시는 모든 신령한 복―각종 은사, 능력, 기쁨, 말씀과 영감, 성화 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교회의 선교의 원동력이 여기 있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의 예언의 영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터너의 해석이 현대 교회의 성령론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터너 자신은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는 먼저 전통적인 교회―성령론을 오로지 구원론에 국한시키려는 사람들―를 향해 신약의 성령론이 제시하는 성령의 초월적인 활동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복할 것을 권면한다.
다음으로, 그는 오순절 계열의 사람들―성령을 오로지 은사적 측면에만 국한하려는 자들―을 향해서는 성령의 포괄성을 회복할 것을 당부한다.
즉 성령은 단순히 은사나 능력으로만 치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유익들을 수여할 수 있는 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런 터너의 성령론은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전통적 해석과 오순절주의 해석 사이의 벽을 뛰어넘어 통전적 관점에서 성령론을 정립할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한다.
이 방대한 저서는 필경 한국 국 신학계의 성령론 논의를 한 차원 더 높여줄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본서의 제목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다시 한번 “열방을 향한 빛”으로서 새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서 있다 하겠다.
한국교회 역시 20세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 체험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맛본 강렬한 영적 경험에 비해 그 경험을 성경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할 수 있는 신학적 성찰은 아직까지도 현저히 부족한 편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가 노정한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에 성령론에 관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저서가 드디어 우리말로 나왔다.
본서의 저자인 막스 터너는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인정받는 성령론 전문가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취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것 자체가 한국 신학계를 위한 귀중한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국제 신약학계는 세 명의 대가가 성령론에 관한 논의들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던, 로버트 멘지스, 막스 터너가 그들이다.
제임스 던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성령론 해석자들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을 새 언약적 삶으로 입문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예수와 (오순절 이후) 그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의미를 지닌다.
즉 성령의 가장 큰 기능은 구원론적이다.
반면, 로버트 멘지스 같은 학자는 성령을 회심 이후에 주어지는 선교적 은사 혹은 능력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이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소위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써 선교를 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고 본다.
이것이 그들이 누가-행전을 이해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하지만 막스 터너는 이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의 본질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예고된 “예언의 영”과 맥을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제적인 신약학자답게 구약,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 신약의 텍스트들을 일일이 정밀하게 주해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또한 성령론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신학계의 논의들을 꼼꼼히 살핀다.
터너는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은, 그가 구약에서 예고된 왕-메시아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본다.
특별히 구약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능력을 부여받은 것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메시아적 아들과 종-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광야로 나가 성령으로 충만해져 사탄의 시험을 이긴 후 갈리리로 돌아와 이사야 61장에 예고된 대로 이스라엘을 “노예와 가난”, “포로됨”, “눈먼”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예언자 요엘이 약속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고, 각종 은사와 능력을 교회에 나누어주시는 “주님”이 되신다.
이렇듯 예수가 지상 사역에서 소유한, 그리고 부활과 승천 이후 교회에 부여하신 성령은 정확히 구약-유대교에서 나타난 예언의 영이다.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현실을 중재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신다.
따라서 오순절 이후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 체험은 단순히 구원의 입문이나 선교를 위한 능력을 얻은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수여하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이 부여하시는 모든 신령한 복―각종 은사, 능력, 기쁨, 말씀과 영감, 성화 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교회의 선교의 원동력이 여기 있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의 예언의 영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터너의 해석이 현대 교회의 성령론에 던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터너 자신은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는 먼저 전통적인 교회―성령론을 오로지 구원론에 국한시키려는 사람들―를 향해 신약의 성령론이 제시하는 성령의 초월적인 활동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복할 것을 권면한다.
다음으로, 그는 오순절 계열의 사람들―성령을 오로지 은사적 측면에만 국한하려는 자들―을 향해서는 성령의 포괄성을 회복할 것을 당부한다.
즉 성령은 단순히 은사나 능력으로만 치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유익들을 수여할 수 있는 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런 터너의 성령론은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리던 전통적 해석과 오순절주의 해석 사이의 벽을 뛰어넘어 통전적 관점에서 성령론을 정립할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한다.
이 방대한 저서는 필경 한국 국 신학계의 성령론 논의를 한 차원 더 높여줄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본서의 제목처럼 오늘 한국교회는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다시 한번 “열방을 향한 빛”으로서 새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서 있다 하겠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0년 02월 21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736쪽 | 1,188g | 168*233*40mm
- ISBN13 : 9791161291413
- ISBN10 : 11612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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