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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승리
연구소의 승리
Description
책소개
연구소는 과학을 도약시키는 ‘사회의 발명품’이다
그 안에서 개인의 열정은 제도가 되고,
지식은 산업으로, 혁신은 역사로 거듭난다


과학의 진보는 한 사람의 재능에서 시작하지만, 그 성과가 지속되려면 조직과 리더십, 재정과 제도가 필수적이다.
과학이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연구소는 새로운 시대의 핵심 제도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연구소는 단지 실험실의 집합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과학자의 이상과 함께, 정치적 판단과 산업의 이해, 지역의 요구와 시민의 세금이 얽혀 있다.
연구소를 어디에 세울지 무엇을 연구할지를 둘러싼 논의 속에서 과학은 지식 탐구를 넘어 사회적 선택과 국가의 비전으로 확장된다.

『연구소의 승리』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세계의 연구소가 과학의 발전과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추적한다.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막스플랑크협회, 이화학연구소, 로런스버클리, NASA, 그리고 KIST로 이어지며 과학을 체계화하고 산업을 성장시키며 사회를 변화시킨 연구소의 힘을 보여준다.
과학을 사회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며 이 책은 묻는다.
연구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연구소,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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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추천의 글
들어가며
1부 과학의 국가화 - 연구소의 탄생과 근대 과학의 체계 구축
1.
국가 연구소의 출현: 1887년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
2.
기초연구의 독립 선언: 1911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3.
전쟁에 동원되는 과학: 1915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4.
거대과학의 시대: 1931년 미국 버클리 방사선연구소
5.
흩어진 과학자들: 1933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6.
핵분열의 연쇄반응: 1938년 독일 카이저빌헬름협회
7.
세상의 파괴자: 1945년 미국 로스앨러모스연구소
8.
정치가 쏘아 올린 로켓: 1958년 미국 항공우주국
9.
기술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1969년 미국 고등연구계획국

2부 기술이 만든 도약의 힘 - 추격의 기술과 과학 강국의 부활
10.
서양을 추격하는 동양: 1917년 일본 이화학연구소
11.
과학의 자력갱생: 1921년 일본 이화학연구소
12.
새로운 기회의 땅: 1933년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13.
패전국에서 부활한 과학: 1948년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14.
축적의 시간 78년: 1949년 일본 이화학연구소
15.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 1959년 한국원자력연구소
16.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17.
400조 번의 실험: 2016년 일본 이화학연구소

3부 지구가 하나의 연구소가 되다 - 경계를 넘는 협력과 연결된 세계의 과학
18.
퀀텀점프: 1922년 덴마크 이론물리연구소
19.
거대연구시설의 가치: 1974년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
20.
불확실한 투자의 효과: 1975년 미국 국립과학재단
21.
사회를 통합하는 과학: 1990년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22.
유럽 물리학의 역전: 2012년 유럽 입자물리연구소
23.
두 여성과 유전자가위: 2020년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24.
초고속작전이 만든 백신: 2022년 미국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25.
지구방위대의 결성: 2022년 미국 항공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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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연구소는 낯설고, 어렵고, 불투명한 공간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다수 국민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공감하는데도 이렇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과학기술 투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에 하나다.그런데 그 일에 세금을 내는 국민은 정작 연구소가 뭘 하는지 모르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연구소 내부에 있다.
연구소가 그만큼 자신을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할 언어도 만들지 못한 탓이다.
--- p.10

연구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곧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해법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인구절벽, 저성장, 국제적 기술경쟁, 기후변화, 신종 감염병 등과 같은 미증유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연구소야 말로 이를 해결할 ‘오늘의 해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의 과제를 과학의 논리로 전환하고, 과학의 성과를 사회의 언어로 번역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연구소는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과학을 설명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시민과 신뢰를 쌓아야 한다.
--- p.15

이러한 복잡한 고려 끝에 1937년 카를 보슈가 3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보슈는 프리츠 하버와 함께 하버-보슈법을 고안해서 1931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화학자였다.
동시에 거대 화학 회사 이게파르벤(IG Farben)의 대표이기도 했다.
즉 과학자이자 기업가이기도 했던 인물로, 이론물리학자이자 교수였던 플랑크와는 대조적인 정체성을 가졌다.
보슈는 회장 임기를 시작한 뒤에도 이게파르벤 대표직을 그만두지 않았고, 오히려 직원들을 협회의 고문단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협회 본부가 있는 베를린이 아니라 회사와 가까운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했다.
카이저빌헬름협회보다 회사 경영을 우선시한 것이다.

이는 협회 운영 기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돌프 하르나크와 막스 플랑크의 시대에는 과학의 자율성과 순수 연구를 중시했다면, 이제는 기업을 위한 목적 연구와 응용?개발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 기업을 매개로 나치와 카이저빌헬름협회의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것은 과학 연구의 방향과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카이저빌헬름협회는 무기 개발은 물론, 나치 이념에 과학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도 맡아야 했다.
--- p.88~89

부테난트는 회장으로 재임(1961~1972년)하는 동안 68운동이 낳은 진보적 경향에 호응했다.
학생운동의 여파로 연구 현장에서도 자율성과 참여에 관심이 커졌고, 젊은 과학자들도 발언권 확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1972년 협회 본부는 정관 개정을 통해 이러한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다.
그 결과 연구소장의 권한이 분산되었고, 내부 의견 조정 기구가 만들어지는 등 조직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69년 튀빙겐에 세워진 프리드리히미셔 연구소는 젊은 과학자를 위한 실험 공간을 제공했다.
오늘날 막스플랑크협회의 자랑인 젊은 과학자 육성 프로그램은 이때부터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박사과정을 갓 마친 젊은이들이 독립적인 연구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설립 초기 하르나크가 세웠던 연구자 자율의 원칙이 더욱 굳건한 토대를 얻은 셈이다.

--- p.187

거대한 제철소 용광로를 돌리고, 공장을 밤낮으로 가동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까지 전국의 발전 설비로는 그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기가 모자라 제철소와 공장이 멈추고, 경제개발계획도 심각한 차질을 빚을 것이 분명했다.

이때 이승만 정부에서 도입한 원자력이라는 대안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착수했고, 1978년 4월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준공되었다.
전 세계에서 21번째로 이룬 성과였다.
시슬러의 예측대로 촛불에서 원자력으로 전깃불을 켜는 나라가 되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물론 고리 1호기의 원자로와 주요 부품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에서 들여왔다.
그러나 이를 운영하는 인력은 대부분 한국인으로 채워졌다.

--- p.213

이러한 특징은 KIST의 벤치마킹 모델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미국이 제안한 KIST의 모델은 벨연구소(Bell Labs)였다.
전화?전신 회사인 AT&T가 설립한 벨연구소는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했다.
(……) 하지만 최형섭은 이런 시스템이 KIST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역제안한 모델이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였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산업계와 정부로부터 연구과제를 위탁받아 운영된다는 점이다. CD, 복사기 토너, 연료전지 등 혁신적 산업기술이 그렇게 탄생할 수 있었다.
이를 본받아 KIST도 ‘한국판 바텔’을 목표로 삼았다.

--- p.218~219

KIST의 이러한 연구 방식은 하나의 국가 발전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다.
학술 용어로는 추격형 연구개발 또는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라고 했다.
선진국의 기술을 흉내 내서 빠르게 따라잡는 전략이다.
이 패러다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종합연구소로 출범한 KIST가 꾸준히 성장하면서, 1970~80년대에는 여러 연구소가 스핀오프하여 각 기술 분야로 전문화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정부출연연구소, 대덕특구의 기원이다.
이들이 이끈 과학기술 기반의 수출 주도 전략 덕분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경제와 산업적 측면에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 최초로 과학기술자들이 국가의 명운을 뒤바꾼 일대 사건이기도 했다.
--- p.227~228

출판사 리뷰
“과학이 세상을 바꾸는 순간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연구소가 있었다”
과학과 산업, 그리고 국가 전략을 움직여온 연구소의 설계도를 밝히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람이 이루어 내지만,
조직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지속되지 않는다.

_ 장 모네

- 연구소라는 ‘사회적 장치’의 탄생
국가의 약점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등장한 제도적 발명품

연구소는 과학자의 실험실을 확장한 조직이 아니다.
국가가 자신의 약점에 직면했을 때 ― 산업의 표준이 필요할 때, 모방의 한계에 닿았을 때, 기반을 다시 세워야 할 때 ― 유사한 형태들로 등장한 ‘사회적 장치’였다.
19세기 말 독일은 정밀 측정과 기술 표준의 부재가 산업 경쟁력의 약점이 되자 제국물리기술연구소를 만들었다.
이후 막스플랑크협회로 이어지는 기초과학 체제는 과학을 국가 전략의 장기 기능으로 끌어올린 제도적 실험이었다.
일본도 산업화는 이뤘지만 서구 모방을 벗어나지 못했던 1910년대, 다카미네 조키치가 국민과학연구소를 제안하며 제동이 걸린 발전 경로를 다시 그리려 했다.
그 문제의식은 학계·재계·정계를 묶어냈고, 결국 이화학연구소라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추격 전략의 끝에서 일본은 기초과학을 ‘자기 힘으로 서기 위한’ 돌파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엔 조건이 또 달랐다.
해방 직후의 단전 사태, 기술과 원자재의 해외 의존, 냉전과 오일 쇼크로 인한 에너지 공급의 불안정은 곧 국가 생존의 문제였다.
법과 조직을 서둘러 만들고 해외의 지식과 제도를 도입하며 연구소는 한국에서 산업 기반·전력 안보·국가 재건을 떠받치는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가 되었다.
1959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설립은 그 응축의 결과였고, 이후 국가 R&D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협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 미국의 국립연구소 체계가 시대를 건너며 택한 경로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국가는 언제 연구소를 만들고, 왜 그 제도에 미래를 걸었는가?”
이는 달리 말하면, ‘위기와 필요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연구소는 어떻게 발명되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과학, 산업, 국가 전략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연구소의 기원은 언제나 과학 자체보다 더 넓은 배경에서 시작된다.
연구소의 탄생에는 언제나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라는 명제와 함께 ‘누가 이끌 것인가’라는 물음이 함께했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미래를 설계했다.
오늘의 한국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이 보여주는 반복된 장면 중 하나다.

- 해외 모델을 해석한 현장 경험으로, 한국 연구소의 새로운 도약을 묻다
연구소의 탄생·성장·전략을 ‘안에서 본 사람’이 풀어낸 최초의 서사

연구소를 이해하는 일은 실험 장비 목록이나 연구 성과 리스트를 보는 것 그 이상이다.
교육, 산업, 정치적 선택과 인재의 흐름은 물론 국가의 비전까지 얽힌 복합적 장치를 읽어야 한다.
《연구소의 승리》는 이 장치가 어떻게 생겨났고, 오늘 날 왜 더 중요해졌는지를 세계의 역사와 기술 경쟁의 흐름 속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15년 이상 연구소 기획과 해외 제도 이식을 담당해 온 실무자다.
연구소의 논리, 예산, 정치, 인재의 이동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본 경험이 세계 연구소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힘이 되었다.
사회학적 시야를 바탕으로 과학·정책·제도·사회를 한 체계 안에서 바라보는 저자는 세계 연구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엮어낸다.
막스플랑크협회, 이화학연구소, 미국 국립연구소의 탄생과 전환, 그리고 그 뒤에 놓인 시대적 요구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연결된다.
그는 연구소를 단순한 기관이 아닌 ‘국가의 문제 해결 능력’으로 본다.
이 관점 덕분에, 왜 지금 한국에서 연구소에 대한 이해가 전략적 자산인지가 명확해진다.
현장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흐름이 매끄럽고 명확한 글쓰기는 저자의 큰 강점이다.
꾸준한 글쓰기 훈련에서 나온 균형 잡힌 문장 덕분에, 독자는 지난 100여년에 걸친 변화 ― 근대 국가 연구소의 탄생에서 국제 협력이 중심이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 를 자연스럽고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연구소가 무엇인지 궁금한 일반 독자에게는 가장 명료한 입문서가, 과학기술정책을 고민하는 독자에게는 미래 전략을 상상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책이 될 것이다.

- 연구소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정치학
통일 독일의 막스플랑크 모델에서 드러난 구조, 그리고 오늘의 한국이 반복하는 장면

연구소에는 언제나 과학적 이상과 정치적 현실이 맞물린다.
이 책은 이런 충돌과 조율의 메커니즘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사례로 독일 재통일기의 막스플랑크협회를 다룬다.
1990년, 서독의 세계적 연구체제와 연구 기능이 약한 동독 시스템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은 단순한 통합이 아니었다.
막스플랑크협회는 ‘연구의 자유’와 ‘조직의 자율성’을 기준으로 삼아 서독 모델을 전국 표준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동독 대학에 일단 연구그룹을 심어 연구 기능을 복원한 뒤, 1990년대에 걸쳐 동독 지역에 18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정부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고, 협회는 자체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연구소의 구조조정과 직위 감축까지 단행했다.
외부에서 영입된 회장 후베르트 마르클은 강한 개혁 드라이브로 내부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직 전체를 재편했다.
이 과정은 결국 막스플랑크협회 재창립으로 평가될 만큼 연구체제를 뒤집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긴장 위에서 얻어진 성과는 과학을 넘어 사회 통합으로 확장되었다.
드레스덴·라이프치히·포츠담 등 동독 도시는 연구소를 중심으로 경제·산업·대학이 재생되며 통일 독일의 새로운 혁신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연구소는 과학의 기반이면서 동시에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 인프라임을 입증한 셈이다.
그런데 이 구조는 독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에서도 이 풍경은 낯설지 않다.
재생에너지 발전 잠재력이 큰 전남과 광주는 AI 혁신 연구소와 에너지 거점 구축을 위해 적극적으로 경쟁 중이다.
나주는 켄텍을 배경으로 에너지 연구소와 핵융합 실증로 유치를 어젠다로 삼고 있다.
전남은 물론 전북 또한 경상권 대비 낙후된 경제적 조건을 뒤집을 전략 자원으로 ‘국가 연구소’를 바라보고 있다.
대전은 전통의 연구단지로서 기존 생태계와 연계된 신규 연구기관 유치를 추진하고, 고리·월성·경주 일대는 핵폐기물 문제의 정치적 보상으로 관련 연구소를 요구한다.
수도권 역시 연구 인프라 확대를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려 하고, 강원도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하나는 받아야 한다”는 지역 정치의 논리 속에서 연구소 유치를 개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처럼 한국 각 지역은 자신들의 산업 자원, 정치적 이해, 지역 정체성을 기반으로 연구소 유치를 해석한다.
전남의 재생에너지, 경북의 원자력, 포항의 연구 인프라, 대전의 연구단지, 서울의 수도권 프리미엄, 강원의 ‘빈 땅’ 논리가 서로 충돌하면서, 연구소는 과학 기관이기 전에 정치적 선택이자 국가 균형 발전의 수단이 된다.
독일 재통일기의 압력 ― 재정 부족, 지역의 요구, 국가 전략, 조직 자율성 ― 은 오늘날 한국에서도 연구소 유치 경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자원과 정치적 이해가 연구소의 의미를 바꾸는 순간, 연구소는 과학 기관을 넘어 ‘지역의 미래 설계도’가 될 수 있다.
연구소는 언제나 구조적 긴장을 품고 움직인다.
그 긴장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가 과학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팽팽한 긴장은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연구소가 만든 산업과 혁신의 토대
KIST가 보여준 ‘연구소형 산업화’의 작동 방식

한국 산업화의 방향은 1966년 KIST가 설립되면서 새롭게 그려졌다.
당시 한국은 소규모 경공업과 몇몇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인력·기술·자본 모두 부족했고, 수출 1·2위를 가발과 섬유가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만들겠다는 발상 자체가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KIST는 산업화를 위한 연구소라는 목표를 분명히 선언했다.
해외 원천기술을 들여와, 이를 국내 기업의 생산환경에 맞게 개량하여 산업에 곧바로 투입하는 구조였다.
벨연구소의 ‘자유로운 기초연구’ 대신, 정부·기업의 과제를 받아 수행하는 바텔기념연구소의 계약 연구 방식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연구 주제는 산업계 수요를 기준으로 선정되었고, 금속·화학·전자·기계·식품 등 당시로서는 산업의 기초 체력을 구성하는 분야가 핵심축이 되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인재와 자율성이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과학자들이 대거 돌아왔고, 정부는 KIST에 연구 자율권과 함께 과감한 재정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회계감사나 부처 승인에서 자유로운 운영체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이던 급여와 연구 환경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연구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 체제는 이후 수십 년간 한국 과학기술 정책의 기본 문법이 되었다.
결과는 빠르게 산업적 성과로 이어졌다. KIST는 자기 테이프, 프레온가스, 동복강선 등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기술의 국산화를 이끌었고, 수많은 기업이 이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더 크게 보면 포항종합제철, 조선·전자·자동차 산업의 초기 설계까지 KIST가 관여했다.
이들 금속공학자가 참여한 제철소 건설 계획은 포스코의 시발점이 되었고, 철강 연계 산업이 자리 잡으면서 동시에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연구소가 산업을 만들고, 산업이 다시 연구소를 확장시키는 순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 추격형 R&D 모델은 한국의 산업화 전략을 하나의 체계로 묶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적용하고 개선하는 사이클을 국가 단위에서 짧은 주기로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정부출연연구소와 대덕특구가 잇달아 등장한 것도 이 구조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KIST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국가가 연구소를 통해 산업 국가의 골격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독일이 연구소로 지역을 재편했다면, 한국은 연구소로 국가 전략의 기반을 설계한 것이다.

- 연구소라는 ‘세계적 장치’의 부상
초거대 과학을 떠받치는 국제 협력의 시대

오늘의 연구소는 더 이상 국가 단위의 실험실이 아니다.
세계적 위험과 과제를 다루는 거대한 운영 장치다.
팬데믹 직후 백신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유럽·아시아의 연구소와 기업이 데이터를 공유하고 기술을 교차 검증하며 임상과 생산을 국제적으로 분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주 탐사와 소행성 충돌 대비도 마찬가지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유럽 우주청(ESA), 일본 항공우주탐사청(JAXA) 등 각국 연구소는 관측 능력과 탐사선을 별도의 체계로 묶어 공동 운영해 단일 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우주 위험을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입자가속기와 중력파 관측기 같은 초거대 장치도 이미 수십 개국의 자금·기술·인력이 결합해야 유지된다. CERN의 LHC는 그 대표적 사례다.
기후변화 연구에서는 이 흐름이 더욱 뚜렷하다.
위성 관측, 해양·대기 모니터링, 장기 모델링은 세계 각지 연구소의 데이터가 네트워크에서 통합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연구소는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을 넘어, 지구 규모 문제를 다루는 운영 플랫폼이 되었다.
이 변화가 알려주는 건 분명하다.
연구소는 이제 국가 단위의 실험실이 아니라 세계 전략의 핵심 플랫폼이라는 점이다.
국제 과학 협력은 장비와 돈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문화, 리더십과 전문가의 이동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사람의 네트워크’가 본질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연구소의 성격이 뚜렷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 오늘 우리가 다시 연구소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불확실한 투자, 정치적 논란을 넘어, 미래는 연구소에서 먼저 드러난다

연구소는 언제나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돈은 많이 들고, 결과는 불확실하며, 정치적 논란은 피할 수 없다.
1970년대 미국에서 국립과학재단(NSF)이 ‘사람은 왜 사랑에 빠지는가’ 같은 기초연구로 조롱받았던 것처럼, 연구소는 지금도 “당장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맥락이 뒤집힌다.
우스꽝스럽다던 연구들은 심리학과 뇌과학의 핵심 지식이 되었고, NSF가 연구자용 전용망으로 깔았던 NSFNET은 오늘의 인터넷으로 이어졌다.
효용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이루어진 느린 투자가 결국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문제는 첨예하다.
지역 간 경쟁, 정치적 이해, 산업적 유불리가 얽혀 연구소 유치는 늘 갈등의 한가운데 선다.
“과연 이 투자로 무엇을 얻을 수 있나?”라는 의심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건 다른 사실이다.
연구소는 한번 제대로 세워지면 기술의 뿌리, 산업의 원천, 미래 인프라의 출발점이 된다.
연구소가 만든 지식은 10년 뒤를 바꾸고, 연구소가 구축한 인프라는 30년 뒤의 산업을 만든다.
지금 논쟁을 불러오는 선택이 결국 한 국가의 혁신 속도를 가르는 것이다.
《연구소의 승리》는 바로 그 장면을 정면으로 다룬다.
연구소는 왜 탄생했는지, 왜 늘 반대와 의심 속에서 움직이는지, 하지만 그럼에도 왜 미래는 연구소에서 먼저 시작되는지를 세계사와 한국의 현실을 오가며 추적한다.
이 책은 연구소를 찬양하거나 영웅 서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대신 불확실한 투자를 감행한 국가의 용기, 미래를 걸고 각 지방이 벌이는 경쟁, 정치와 과학이 맞부딪치는 실제의 장면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연구소를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미래는 과학기술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산업적 환경, 제도적 선택, 정치적 상상력이 더해질 때 전혀 다른 경로가 열린다.
그리고 그 선택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 ― 그곳이 바로 연구소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17일
- 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520g | 143*215*23mm
- ISBN13 : 9788998243449
- ISBN10 : 89982434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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