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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오다
건너오다
Description
책소개
EBS [다큐프라임] [지식채널e] 연출가이자
존 버거, 리베카 솔닛의 번역가 김현우,

17개국 38개 도시의 ‘경계’를 건너고 ‘틈’을 여행하며
그가 통과한 실감의 세계!


다큐 피디와 번역가, 뜯어보면 묘하게 닮은 직업이다.
전자는 시공간을 한껏 확장시켜볼 수 있는 데 반해 후자는 텍스트라는 응축된 공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비슷하다.
바로 ‘읽어내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전자는 세상사·인간사의 틈을 섬세하게 관찰해 영상으로 담고, 후자는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행간에 배어 있는 미묘한 차이까지 길어낸다.
지성과 감수성, 관찰력과 판단력을 고루 요하는 일이다.


여기 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직업으로 삼은 이가 있다.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 ‘화석’을 소재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생명체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되짚어본 [생명 40억 년의 비밀](방송통신심의위원회 2011년 11월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 '인간의 성장은 끝이 없다’라는 주제 아래 내레이션 없이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인터뷰만으로 채운 [성장통]과, 아픈 속살을 드러낸 학교를 찾아가 현장의 치열한 고민을 담아낸 [학교의 고백](제25회 한국PD대상 TV작품상 교양정보 부문 수상)은 모두 EBS [다큐프라임]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이다.
공통점은 연출가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존 버거의 『행운아』 『A가 X에게』 『사진의 이해』,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 니콜 크라우스의 『그레이트 하우스』 등 섬세하고 이지적인 작가들의 번역가 또한 같은 사람이다. EBS 피디이자 번역가 김현우.


『건너오다』는 김현우 피디가 다큐멘터리 기획 및 촬영을 위해, 그리고 그 사이사이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기록한 글을 모았다.
많은 출장지 가운데 17개국 38개 도시를 추렸으며, 프랑스 파리나 영국 런던처럼 익숙한 곳부터 미국의 로렌스, 앤아버, 미줄라와 호주 마운트아이자, 필리핀 아닐라오 등 다소 낯선 곳까지 포함되었다.
그가 십 년 넘게 꾸준히 번역해온 작가 ‘존 버거가 살고 있는 오트사부아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기억되는 프랑스 안시와, 가장 최근 연출작 [김연수의 열하일기]의 배경이 된 중국의 변문진과 진황도 등의 기록도 담겼다.
일반적인 여행 에세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이름들이다.
저자는 이 익숙하고도 낯선 곳들에서 삶과 사람, 세상의 다양한 ‘경계’를 건너고 ‘틈’을 여행하며, 그것에 대해 읽거나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실감’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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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풍경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프랑스 파리_그 밑에 계신 겁니까?
프랑스 안시_이것만 있으면 된다
러시아 모스크바_마음은 언제 현실을 따라잡는가
호주 마운트아이자_때론 현실이 아닌 것처럼
호주 태즈메이니아_세상의 끝, 혹은 다른 세상의 시작
프랑스 칸_위대하지 않은 자전거 여행

//계속 움직이는 순간
미국_비어 있는 시간들
미국 로렌스1_또래의 유학생 부부와 바비큐
미국 로렌스2_KU 잔디밭과 망가져버린 글라이더
미국 로렌스3_더스티 북셸프의 고양이와 캔자스 주에만 있는 햄버거
미국 앤아버_신호등은 잘못이 없다
미국 왈츠_열두 시간 동안 똑같은 풍경일 거예요
미국 볼티모어_짜기만 했는데 어쩌다보니 다 먹고야 말았던 게 요리
미국 뉴욕_메이저리그를 직관하다
미국 뉴헤이븐_You should be!
미국 미줄라_펄리시티라는 이름
미국 로스앤젤레스_비어 있는 시간
영국 런던_그때는 그랬다
이탈리아 피렌체_선물 같은 밤
필리핀 아닐라오_상상하기 때문에 두렵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_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
일본 오카야마_자주 먼 곳을 보는 침팬지
발칸반도_세 창문 모두 닫혀 있었다
태국 치앙마이_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
일본 오키나와_'고쿠바 난코'라는 이름
중국 마카오_그 바람들은 다 이루어졌을까?
미국 샌프란시스코_나는 내가 한 선택들의 합이다

//기억은 일부러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
일본 규슈_버려졌던 공간과 시간
독일 라이프치히_사람의 몸은 접촉을 필요로 한다
일본 도쿄_뿔 난 삼엽충이 될 것인가, 몸집을 줄인 삼엽충이 될 것인가
일본 오사카_어떤 직선은 슬프다
중국 단동_경계를 사는 사람들
중국 변문진_장백산 담배 한 개비로 건너는 경계
중국 진황도_경계를 건널 때 지니는 것
네덜란드 암스테르담_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에필로그

책 속으로
말로만 듣던 영국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말로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건, 그것에 대해 읽거나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의외로 자주 무시된다.
---「프랑스 파리 | 그 밑에 계신 겁니까?」중에서

나는 이제 나의 ‘자리’가 궁금하지 않다.
‘되고 싶은’ 어떤 자리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런 자리라는 것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목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나를 인정하며 지내는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결과’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전에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는 비법 같은 건 없다는 걸 먼저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 나면 나와 화해할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있는 동안 즐거운 것들을 지키고, 할 수 없는 것과 그 일을 해버리면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닐 것 같은 일들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프랑스 파리 | 그 밑에 계신 겁니까?」중에서

‘이것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할 무언가를 지닌, 무엇보다 그렇게 말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럽다.
---「프랑스 안시 | 이것만 있으면 된다」중에서

어떤 장소에서 안심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 걸까? 시간 말곤 또 어떤 것들이 필요한 걸까?
---「러시아 모스크바 | 마음은 언제 현실을 따라잡는가」중에서

강이나 바다를 보며 있었던 어떤 일들이 지나갔음을 확인하고 위로를 받는 경우는 많다.
그 물이 나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여행지의 물이라면, 일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까지 더해져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풍경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한층 더 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물가에서 여행을 실감하는 것, 또한 여행지가 자주 ‘물’을 강조하는 건 그런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늘 타고 있는 불은 어떤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음을 상징한다.
어떤 일들은 잊으면 안 된다는 것, 그것을 잃어버리는 건 나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임을 상징하는 불.
삶이 그렇게 물과 불의 뒤섞임이라면,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러시아 모스크바 | 마음은 언제 현실을 따라잡는가’

이십대 후반의 나는 십대 때의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될 수 없음은 분명히 밝혀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속하고 싶었던 어떤 세계에 속할 수 없었다.
그 좌절이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무심함’에 대한 혐오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그렇게 날이 서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심한 사람들에 의해 박살난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힘이 아니라, 무언가를 싫어하는 에너지를 빌려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이 ‘그따위’였으므로, 나는 그 세상에서 해보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프랑스 칸 | 위대하지 않은 자전거 여행」중에서

모든 시간들, 아니 순간들에 이유를 붙이고 싶은 것은 내가 어떤 ‘의미’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야 나의 과거와 미래가 ‘일관되게’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란 그래야 한다고, 적어도 삼십대까지의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비어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시간들에 이유를 붙이려 했다.
그렇게 피곤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 비어 있는 시간」중에서

그냥 뭐든 해보는 게 안 해보는 것보다 좋다는 생각으로, 다이빙하우스에 왔으니 다이빙을 한번 해보자는 마음뿐이었다.
마침 우리 말고 다른 손님들도 둘이 있어서 함께 간략한 스킨스쿠버 입문 강의를 듣고 물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호흡법, 손과 발의 움직임, 물속에서의 간단한 의사소통법 등등을 설명하던 한국인 강사가 마지막에 덧붙인 말, 물속은 무섭지 않다는 말이었다.
들어가보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짐작하면 무서울 수밖에 없지만, 정작 들어가보면 무서울 것은 없다고, 위에서 보면 그저 어둡기만 한 물속에 들어가야 할 우리를 그렇게 안심시켰다.
상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필리핀 아닐라오 | 상상하기 때문에 두렵다」중에서

변하지 않고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무언가는 위로를 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대부분 변화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아쉬워한다.
‘길들여진 상태’가 편안한 만큼 의지와 달리 거기서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은 서운하고, 때론 아프다.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서 아프고, 흰머리가 늘어서 서운하고, 내일 해야 할 새로운 일은 어쩔 수 없이 두렵다.
코타키나발루의 숲속 도로에서 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두려웠던 것도 나는 아직 그것들에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로 위의 하늘에는 쏟아질 듯한 별이 있었다.
변하지 않고 늘 자리를 지키고 있어 든든한 친구 같은 별들이 주는 위로.
‘괜찮아.
네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든, 앞으로 또 얼마나 변화를 겪든, 우리는 이대로 여기 있을 거야’라고, 정말 ‘보란듯이’ 말하는 별들의 위로.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 하늘엔 원래 별이 많다」중에서

버림받은 것이 아쉽다면, 그건 인간이 무심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가사키 원폭기념공원에는 폭격을 받은 성당에서 떼온 기둥이 하나 서 있다.
폭격을 받기 전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는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건 무심하지 않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지켜주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앞으로는 그런 무심함에 희생되는 사람들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을 담아 세운 기념물처럼 보였다.
물론 기억이나 약속 같은 것들은 때론 너무 무력하다.
다시 무심해질 수밖에 없는 경우는 또 생길 것이고, 그때 그 약속이나 기억의 무력함은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아무리 느린 속도라고 하더라도, ‘기억’과 ‘약속’의 힘을 조금씩 더 믿어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규슈 | 버려졌던 공간과 시간」중에서

오사카에 이민 온 한인들이 개간했다는 히라노가와의 직선이 그 안에 수많은 곡선을 숨기고 있듯이, 어떤 침묵은 그 안에 많은 말을 담고 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보여주는 직선에서 곡선을 읽어내고 그의 침묵 안에서 차마 말해지지 않는 말들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건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 노력을 기꺼이 기울이는 마음이 사랑이다.
---「일본 오사카 | 어떤 직선은 슬프다」중에서

출판사 리뷰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_김연수(소설가)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여행자라면 이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길을 떠나도 좋을 것이다”
_조해진(소설가)

김현우 피디가 기록해내는 세계는 하나의 질문으로 대변할 수 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가 그것이다.
여기서 ‘당신’에는 ‘나 자신’도 포함될 것이다.


같은 단어라도 서로 다른 상황에 있는 이들에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떤 이에겐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단어가 다른 이에겐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픈 단어일 수도 있다.
‘바늘’ ‘손가락’ ‘불’ ‘바람’, 이런 평범한 단어들에 세상의 사람 수만큼 많은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교육이란, 그렇게 서로 다른 개인의 언어들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일 것이다.
한 단어가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가지는 의미와 그 이유를 이해하는 상상력을 훈련하는 과정.
하지만 어떤 의미는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벽 너머에 있어, 도저히 함께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벽이 있음을 인식하면, 상대를 이해해보려 정성을 다해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성격에 따라 냉소적이 되거나 겸손해진다.
그 아이와 인터뷰하기 전까지 나는 겸손하지 않았다.
청주맹학교 아이들이 태국에서 보여준 모습은 모두 나의 상상 밖이었고, 출발 전의 걱정은 오만이었다.
두 눈 멀쩡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세상도 있다.
그 사실을, 앞을 볼 수 없는 아이들이 ‘보여’주었다.
-158쪽, ‘태국 치앙마이 |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것’

몇 해 전 그는 청주맹학교 학생들과 함께 치앙마이에 갔다.
태국 엘리펀트 네이처 파크에서 맹인 아이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밥도 주고, 씻겨도 본 뒤 자기가 경험한 코끼리를 찰흙으로 빚는 모습을 촬영했다.
눈도 안 보이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특별한 수업의 풍경을 담으며 저자는 촬영을 떠나기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되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이 마주하고 있는 단동은 ‘경계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그에게 실제적으로 보여주었다.
소설가 김연수와 『열하일기』의 여정을 되짚어가는 와중이었다.

경계는 서로를 배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경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리는 결정에 따라 그어진다.
하지만 그 경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선은, 그 배타성은 삶의 조건, 혹은 또다른 기회일 뿐이다.
경계만큼 또렷하지 않기 마련인 삶은, 그렇게 먼 곳에서 그어놓은 선처럼 매끈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런 삶은 강사장의 사업 물품이 바뀌듯이 그렇게 쉬지 않고 움직인다.
늘.
단동을 떠나는 날 일출 장면을 찍기 위해 새벽 네시에 호텔을 나섰다.
압록강을 따라 달리는 강변도로에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일 뿐,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깨어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사람이 빠져서일까, 강 건너로 보이는 북한은 전날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가깝게 보였다.
역시 사람이 없어서일까? 조용한 도로와 정박해 있는 배들, 아직 사람들의 시간이 시작되기 전의 그 풍경은 공평하게 어두웠다.
그 시간엔 경계 이쪽과 저쪽이 나누어져 있다고 할 수 없었다.
-232쪽, ‘중국 단동 | 경계를 사는 사람들’

오키나와에서는 히메유리의 탑에 들렀다.
전투에 동원되었다가 죽은 열세 살에서 열아홉 살 사이의 여학생 백삼십여 명을 기리는 곳.
김현우 피디는 그곳에서 ‘주변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한다.
“주변인은 늘 희생당한다는, 주변의 개인들은 개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개념, 혹은 숫자로만 파악된다는 생각”에 오키나와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여학생 개개인의 이름이라고.
저자는 이런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오키나와의 역할일 것이라 본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닌 그 현상을 만들어낸 환경의 역사, 개인의 역사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의식’하는 그의 차분하고 사색적인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은물론, 평범한 일상의 순간순간들이 사실은 모두 나 자신을 깨우고 내 세계를 확장시키는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소박하면서도 잊기 쉬운 진실에 가까워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풍경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어떤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것,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이 늘 인생에 새로움만을 더하는 건 아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 흥분시키는 것뿐 아니라 내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비우고 비웠을 때 내 안에 남는 것을 대면하곤 한다.
낯선 언어와 기후와 사람들, 그 ‘낯섦’이 주는 대답은 외려 후자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김현우 피디처럼 사십대 초반이라는 본인의 나이가 삶의 마디 가운데 어디쯤인지 예민하게 짚어본다면 더욱더 그 대답에 귀를 기울이리라.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시기가 청춘이라면, 나의 청춘은 아마 지나간 것이리라.
언제부턴가 나의 모습에 어떤 새로운 면모를 더하려는 노력을 멈춘 것 같다.
대신 내게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더 많이 한다.
나를 지키는 노력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다는 뜻은 아니다.
거기에도 결단은 필요하다.
환경이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환경에서 계속 나로 남을 수 없다면 그 환경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런 결단을 고민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 역시 나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나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도,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시기임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감이란 ‘몸으로 느낀다’라는 의미이다.
_211쪽, ‘일본 도쿄 | 뿔 난 삼엽충이 될 것인가, 몸집을 줄인 삼엽충이 될 것인가’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젠 나도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그림 앞에서 ‘나의 몸이 떠올린 내적 기억’들이 그 말로 이어졌다.
구구절절 그 사연들을 말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환한 빛’만 생각하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고, 그 빛이 꺼진 후 어둠 속에서 지내던 시절도 있었으며, 이제는 그렇게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상태를 인정하고, 그림자에 가린, 그 어두운 부분까지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 있는 것임을,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없음을 알고 그 둘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을 수 있게 되고 나면, 렘브란트의 자화상속 표정이 그저 체념의 표정만은 아님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는 온통 과거만을 향한 문장은 아닌 것이다.
그 마음도 여전히, 늘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미래를 향하고 있다.
사람은 ‘기대’가 없이도 다가올 날들을, 혹은 남은 날들을 그려볼 수밖에 없다.
그건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음을, 그렇게 환하기도 했고 어둡기도 했던 자신과 비로소 화해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마음일 것이다.
-249~250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김현우 피디는 나를 나로 마주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나를 인정하지 못하면 “삶은 영원히 뒤틀리고 말 것”이라고 한다.
내 안의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잘 보듬고 그 외의 것들은 비울 수 있어야 또 타인의 이야기를 위한 자리가 생기리라.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점차 내 안의 경계가 넓어지리라.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매우 자주 지치기도 하지만, 경계를 넘어가는 동안의 현기증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고맙게도 함께 건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의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추천사

김현우 피디가 바라보는 세계는 온전하다.
그 세계는 광활하고 아름다우며 사람들은 평화롭고 행복하다.
설령 화를 낸다고 해도 이윽고 풀리고 마는, 그런 곳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변해가더라도 이 온전한 세계가 우리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코타키나발루의 밤에 그가 올려다본 별의 전언처럼.
‘괜찮아.
네가 그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든, 앞으로 또 얼마나 변화를 겪든, 우리는 이대로 여기 있을 거야.’ 대부분 방송사 피디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만난 평온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흥겨움과 상실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를 닮은 묘한 느낌의 문장은 덤이다.
_김연수(소설가)

여행은 쓸쓸하다.
포부를 안고 일상을 벗어나 도착한 곳에서 타인의 또다른 일상을 목격한 여행자는, 그제야 자신의 삶이 특별하지도 않고 대단하지도 않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여행은 쓸쓸하지만 대신 흔적을 남긴다.
김현우에게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그 흔적이 된다.
존경하는 작가에서 촬영을 돕는 현지 스태프까지, 김현우의 시선은 늘 구체적인 사람에게 닿아 있다.
그러니 김현우의 『건너오다』는 여행서이자 산문집인 동시에, 저마다 고유한 역사와 문장과 간절한 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셈이다.
비록 세계의 조그마한 일부일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빛을 내는, 경계를 넘어 빛과 빛으로 이어졌을 때 하나의 별자리를 이룰 만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를 찾는 여행자라면 이 별자리를 올려다보며 길을 떠나도 좋을 것이다.
_조해진(소설가)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16년 11월 30일
- 쪽수, 무게, 크기 : 256쪽 | 275g | 128*188*14mm
- ISBN13 : 9788954643146
- ISBN10 : 895464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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