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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사회
고통 없는 사회
Description
책소개
재독 철학자 한병철 신작! 팬데믹 시대에 읽는 고통의 철학

“오늘날 어디서나 고통에 대한 전반적인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고통에 대한 내성도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다.
고통공포는 만성 마취를 초래한다.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가 회피된다.
사랑의 고통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고통공포는 사회적인 것에도 적용되어 고통스러운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갈등이나 논쟁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간다.
고통공포는 정치까지 장악한다.
일치 강제와 동의 압박이 심해진다.
정치는 일종의 진통지대에 자리를 잡고 활력을 모조리 상실한다.
탈민주주의가 확산된다.
탈민주주의는 진통적인 민주주의다.”

고통을 밀어낼수록 고통에 더 예민해지고, 죽음을 몰아내려 할수록 좋은 삶에 관한 감각을 상실하는 역설, 생존이 절대화된 생존사회, 고통공포에 포획되어 만성 마취에 빠진 진통사회에 대한 비타협적인 분석.
“예리한 산문으로 현대인의 몸에 사유의 칼날을 찔러 넣는” 비수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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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고통공포
행복 강요
생존
고통의 무의미함
고통의 간지
진실로서의 고통
고통의 시학
고통의 변증법
고통의 존재론
고통의 윤리학
마지막 인간


역자 후기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책 속으로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Like)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어떤 것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p.12

만족의 문화에는 카타르시스의 가능성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 문화의 표면 아래쪽에 쌓이는 긍정성의 찌꺼기에 에워싸여 질식한다.
---p.13

무조건 고통을 퇴치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고통이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고통은 사회경제적 불화를 반영하며, 이런 불화는 사람의 심리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각인된다.
대량으로 처방되는 진통제는 고통을 낳는 사회적 상황을 덮어 감춘다.
고통을 오로지 의학과 약학으로만 처리하는 것은 고통이 언어가, 나아가 비판이 되는 것을 막는다.
고통의 대상성이, 더욱이 사회성이 제거되는 것이다.
---p.22

행복은 최적화 논리를 거부한다.
행복의 특징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부정성이 내재한다.
진정한 행복은 균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통이야말로 행복이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고통은 행복에 지속성을 부여해준다.
고통이 행복을 지탱한다.
고통스러운 행복이란 말은 형용 모순이 아니다.
모든 강렬함은 고통스럽다.
격정은 고통과 행복을 결합한다.
깊은 행복은 괴로움의 계기를 지니고 있다.
---p.25

오늘날 우리는 죽는 것이 아주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삶을 의미 있게 종결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삶은 때 이르게 끝난다.
제때에 죽을 수 없는 사람은 때 이르게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
우리는 늙지도 않은 채 나이를 먹는다.
---p.30

오늘날 고통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고통 앞에서 우리를 지탱해주고 방향을 제시해줄 의미연관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는 기술을 완전히 상실했다.
---p.34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바로 이 현대에 우리의 고통 신경은 점점 더 민감해지는 듯하다.
과민성이 자라나고 있다.
다름 아닌 고통공포가 우리를 지극히 민감하게 만든다.
고통공포는 심지어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pp.40-41

오늘날 사람들은 “공주와 완두콩 신드롬”을 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고통 신드롬의 역설은 우리가 더 적은 것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
고통을 주는 완두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바로 삶의 지속적인 무의미함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pp.41-42

만성적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회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성적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
이런 사회와 시대 안에서 삶은 벌거벗은 생존이 되었다.
진통제나 마음 연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들은 그저 고통의 사회문화적인 원인을 가릴 뿐이다.
---p.49

고통이 없다면 구별에 근거하는 가치평가가 불가능해진다.
고통 없는 세상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차별성이다.
---p.53

이야기와 상상보다 진통제가 먼저 작용하여 이야기와 상상을 잠재운다.
처방된 만성 마취는 정신적인 둔감함을 낳는다.
고통은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중단된다.
진통사회에서 고통은 더 이상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이야기의 강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인간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
---p.59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만날 때, 소통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좋아요가 소통을 가속화한다.
고통의 작용은 이와 반대다.
고통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향이야말로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해준다.
---p.60

정신은 더 높은 형식으로 발전함으로써 고통스러운 모순을 극복한다.
고통은 정신의 변증법적 형성의 동력이다.
고통은 정신을 변환시킨다.
변환(Verwandlung)은 고통과 결합되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정신은 동일한 상태에 머무른다.
형성의 길은 고통의 길(via dolorosa)이다.
---p.61

우리는 온갖 곳들을 돌아다니면서도 경험은 전혀 하지 못한다.
우리는 온갖 것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서도 인식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정보는 경험도 인식도 낳지 못한다.
정보에는 변환의 부정성이 빠져 있다.
---pp.62-63

팬데믹의 시대에는 타자의 고통이 더욱더 멀어진다.
타자의 고통은 ‘사건의 수’로 해체된다.
사람들은 중환자실에서 사람의 온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외롭게 죽는다.
가까움은 전염을 의미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심화되어 공감의 상실을 낳는다.
그것은 정신적인 거리두기로 바뀐다.
이제 타자는 거리를 두어야 할 잠재적인 바이러스 감염자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구별 행위로 이어진다.
---pp.80-81

행복이 영구히 지속되는 고통 없는 삶은 더 이상 인간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의 부정성을 억압하고 내쫓는 삶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죽음과 고통은 서로 뗄 수 없다.
고통 속에서 죽음이 선취된다.
모든 고통을 제거하려는 자는 죽음 또한 없애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이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좀비의 삶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철폐한다.
인간은 불멸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p.93

출판사 리뷰
고통공포에 포획되어 만성 마취에 빠진 진통사회
생존이 절대화된 생존사회에 대한 비타협적인 분석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독일 철학자’ 한병철 신작
‘되살아난 그리고 전례 없이 읽기 좋은 독일 철학의 귀재’(〈가디언〉),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독일 철학자’(〈엘파이스〉)로 불리는 사회비평가 한병철.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착취에 대해(《피로사회》), 전체주의로 기울기 쉬운 투명성의 위험에 대해(《투명사회》),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 착취에 대해(《심리정치》), 그리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세계에 대해(《타자의 추방》) 날카로운 비판을 선보이며 출간하는 책마다 열띤 논쟁을 불러온 그가 신작 《고통 없는 사회》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사회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그가 바라본 세계의 현실은 고통을 회피하며 진통제를 움켜쥐는 ‘진통사회’,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들을 상실하면서까지 생존에 진력하는 ‘생존사회’다. COVID19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던 2020년 7월 독일에서 출간되고, 뒤이어 이탈리아에서 출간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생존사회는 좋은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고통을 ”암호“이자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아 고통의 해석 작업을 통해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저자에게 오늘의 세계는 고통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모든 고통을, 심지어는 사랑의 고통조차 회피한다.
”아픔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데이트 포털의 문구로 사용되는 세상(51쪽)에서, 고통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고통을 삶에서 지워버리려 할수록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민감해진다.
마약성 진통제의 오남용으로 인한 약물중독으로 한 해에만 수만 명을 사망으로 몰고 간 미국의 오피오이드 사태에서 보듯 진통제가 남용되며, ‘좋아요’ 일색인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예술조차 진통제로 작용한다.
정치에서도 고통스러운 토론은 사라진다.
논쟁하고 더 나은 논거를 찾기 위해 싸우는 대신, 막연한 ‘중도’의 진통지대에서 몸을 사린다.
원제 그대로 ‘진통사회(Palliativgesellschaft)’요, 생존이 제일가는 가치로 여겨지는 ‘생존사회’다.
진통사회에서는 삶의 진실, 좋은 삶에 대한 전망, 새로운 예술, 타자와의 관계, 참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기실 이 모든 것의 계기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 대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멸하는 신인류의 세상,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상이 올 수도 있겠지만, 인류는 진짜 삶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탈정치화한다“
위와 같은 성격을 지닌 ‘진통사회’는 ”모든 부정성의 형식을 떨쳐내고자 하는 긍정성의 사회“(10쪽)의 당연한 귀결이다.
저자가 그간 일관되게 지적해온, 성과주체가 끊임없이 자기착취를 통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는 이제 진통사회라는 형식을 띤다.
성과사회는 ‘행복하라’를 새로운 지배공식으로 삼으며, 유행하는 긍정심리학이나 행복 담론들은 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 복무한다.
“행복의 긍정성이 고통의 부정성을 밀어낸다.
행복은 긍정적인 감정 자본으로서 성과 능력이 약화되지 않고 계속 발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동기부여와 자기 최적화는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가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해주는데, 큰 비용을 전혀 치르지 않고도 지배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21쪽)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의 문제점은 우리의 시선을 내면으로만 향하게 하여 현존하는 지배관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며,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을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21쪽) 아울러 고통을 무조건 퇴치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통이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며, 고통이 언어화되고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23쪽)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24쪽) 작금의 팬데믹 상황이 사회 시스템의 혁명적 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과 사뭇 다른 인식인데, 이는 그가 고통을 사적인 문제, 의학적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하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에 읽는 고통의 철학
책에는 팬데믹 상황에 대한 저자의 날카롭고 흥미로운 진단이 곳곳에 등장한다.
바이러스 유행은 적의 부정성, 면역학적 방벽이 사라진 성과사회에 다시금 부정적인 것이 침투한 것, 이른바 “적의 귀환”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32쪽) 이런 국면에서는 공항의 검색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잠재적인 바이러스 운반자로 의심받으며 잠재적 테러리스트처럼 취급된다.
“격리 사회가 생겨나며, 생명정치적 감시 체제가 수립된다.
팬데믹은 어떤 다른 삶의 형태를 낳지 않는다.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삶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생존이 된다.
생존의 히스테리는 바이러스를 통해 첨예화된다.”(33쪽)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것들이 생존을 위해 보류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인 부활절 예배조차 중단되고, 신학은 바이러스학에 현실에 대한 해석주권을 넘겨준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 대한 거리두기의 모습을 취한다.(29쪽) “홈오피스는 팬데믹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강제노동수용소를 부르는 이름”(28쪽)이다.
“팬데믹은 자본주의에 맞서는 반서사를 낳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감속되지 않고 강제적으로 정지될 뿐이다.
초조한 정지가 지배한다.
격리는 여가가 아니라 강제된 활동 정지만 낳는다.”(31쪽) 팬데믹에 직면한 세상은 “생명정치적 감시권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88쪽) 과거 인구조사 시기엔 데이터 수집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이 시대엔 내밀한 개인 정보까지 내놓으며 방역을 위한 당국의 지침에 저항 없이 순응한다.


우리는 왜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가
다각도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에 대한 분석은 ‘고통의 윤리’에 관한 성찰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폭력과 고통의 영상을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왜 점점 더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질까? 소비사회의 개인들은 넘쳐나는 폭력 이미지들에 대해 포르노그래피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폭력의 포르노는 살인조차 고통 없는 사건으로 만든다.
포르노그래피적인 폭력 영상은 진통제처럼 작용한다.
이런 영상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도록 한다.”(79쪽) 갈수록 공감 능력이 줄어드는 현상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진통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 않는다.”(80쪽)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 내게 고통을 주는 타자에 대해 내가 무방비적으로 고통스럽게 노출되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
특히 팬데믹 시대에 타자의 고통은 사건의 수로 해체될 뿐이다.
“우리의 영혼은 타자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고 둔감하게 만드는 굳은살로 온통 뒤덮인 듯하다.
디지털 거품 또한 우리를 타자로부터 점점 더 격리한다.
타인으로 인한 분명한 두려움이 자신으로 인한 산만한 두려움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타자로 인한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도 전혀 접근할 수 없다.”(84쪽)

예리한 산문으로 사유의 칼날을 찔러 넣는 비수 같은 책
책은 고통에 관한 에른스트 융어의 텍스트를 비롯해 하이데거, 니체, 벤야민, 아도르노, 푸코, 헤겔, 아감벤, 바디우, 폴 발레리, 프루스트, 엘리아스 카네티, 샹탈 무페, 에바 일루즈, 프랜시스 후쿠야마,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데이비드 피어스 등을 두루 호명,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오늘의 세계를 분석해간다.
인용문들도 흥미롭지만, 저자 특유의 짧고 단정적인 문장에 담긴 통찰이 통렬하기 그지없다.
“예리한 산문으로 현대인의 몸에 사유의 칼날을 찔러 넣는다”(〈라 레푸블리카〉)라는 평 그대로, 지속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젖은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하는 문장들의 힘이 대단하다.
100페이지 남짓되는 많지 않은 분량에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에 담긴 메시지는 묵직하다.
개인과 사회가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저자의 분석은 한국 사회에도 대단히 적실하게 읽힌다.
고통을 몰아내려 하지만 고통의 총량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은 이 시절, 생존도 막막하고 의미 있는 삶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보이는 시기에, 출구 없어 보이는 현실에 균열을 내는 비수처럼 이 책이 읽히길 기대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1년 04월 15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112쪽 | 228g | 124*190*20mm
- ISBN13 : 9788934988359
- ISBN10 : 8934988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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