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타의 딸들
Description
책소개
처칠, 루스벨트, 해리먼의 딸들이 전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얄타회담 이야기
20세기 가장 중요한 회담으로 여겨지는 얄타회담에는 ‘3거두’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을 비롯해 수백 명의 외교·군사 자문단이 참석했다.
그리고 세 여인,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딸 애나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딸 사라 처칠,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 해리먼도 이 회담에 참석했다.
이 책은 세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얄타회담과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세 주인공은 회담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해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로 전하거나 개인 수기에 남겼다.
얄타회담이라는 세기적 사건이 세 여인의 생에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남긴 상흔을 세밀하게 담아낸 이 책은 얄타회담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며 입체적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얄타회담 이야기
20세기 가장 중요한 회담으로 여겨지는 얄타회담에는 ‘3거두’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을 비롯해 수백 명의 외교·군사 자문단이 참석했다.
그리고 세 여인,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딸 애나 루스벨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딸 사라 처칠,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 해리먼도 이 회담에 참석했다.
이 책은 세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얄타회담과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세 주인공은 회담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해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로 전하거나 개인 수기에 남겼다.
얄타회담이라는 세기적 사건이 세 여인의 생에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이 사람들의 삶에 남긴 상흔을 세밀하게 담아낸 이 책은 얄타회담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며 입체적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주요 등장인물
1부 “그녀는 그들을 다룰 수 있어요, 그래서 그녀를 데려가는 거예요”
1장 1945년 2월 1일
2장 1945년 2월 2일
3장 1945년 2월 2일
4장 1945년 2월 2일
5장 1945년 2월 2~3일
6장 1945년 2월 3일
7장 1945년 2월 3일
2부 “마치 … 회담은 다른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군요”
8장 1945년 2월 4일
9장 1945년 2월 4일
10장 1945년 2월 5일
11장 1945년 2월 5일
12장 1945년 2월 6일
13장 1945년 2월 6~7일
14장 1945년 2월 8일
15장 1945년 2월 8일
16장 1945년 2월 9~10일
17장 1945년 2월 10~11일
3부 “나는 이 모든 것, 그 이상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18장 1945년 4월 12일~7월 27일
얄타 이후
화보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1부 “그녀는 그들을 다룰 수 있어요, 그래서 그녀를 데려가는 거예요”
1장 1945년 2월 1일
2장 1945년 2월 2일
3장 1945년 2월 2일
4장 1945년 2월 2일
5장 1945년 2월 2~3일
6장 1945년 2월 3일
7장 1945년 2월 3일
2부 “마치 … 회담은 다른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군요”
8장 1945년 2월 4일
9장 1945년 2월 4일
10장 1945년 2월 5일
11장 1945년 2월 5일
12장 1945년 2월 6일
13장 1945년 2월 6~7일
14장 1945년 2월 8일
15장 1945년 2월 8일
16장 1945년 2월 9~10일
17장 1945년 2월 10~11일
3부 “나는 이 모든 것, 그 이상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18장 1945년 4월 12일~7월 27일
얄타 이후
화보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미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상세 이미지
책 속으로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지만, 1944년 말 영미 연합군은 로마, 파리, 브뤼셀, 아테네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몰아냈다.
그러는 사이 소련군은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독일군은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에서 강력한 반격을 펼쳐 아르덴 숲에서 서방 연합군의 방어선을 거의 무너뜨릴 뻔했지만,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것은 분명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미국 장군들은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아직 테스트되지 않은 비밀 무기를 제때 사용하지 않으면 전쟁이 18개월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당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럽 전황이 중요한 전환점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이들의 군대가 베를린을 향해 앞다퉈 돌진하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문제가 이들 앞에 떠올랐다.이 문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논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장 1945년 2월 1일」중에서
주거 환경을 살피고 손님을 맞기 위한 사전 준비가 캐슬린의 일이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시작되자 기자로서 런던에 왔고 아버지의 집사가 아님을 여러 번 강조했었다.
실제로 그녀가 모스크바로 오기 전 언니 메리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는 “더 이상 파티와 여흥이 없길 바라고 있어”라고 썼다.
그러나 캐슬린은 엄청나게 실망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캐비아와 보드카가 넘치는 파티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그녀는 궁전에서 일하는 거대한 집단을 관리하고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얄타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일부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안주인이자 이인자로서 자신이 할 일은 단순히 파티를 준비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슬린은 공식 직함을 부여받은 적은 없지만 미국인들을 위한 중요한 의전 담당관으로 활동했다.
---「1장 1945년 2월 1일」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사라는 ‘외톨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사라는 예민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또래 소녀들과 활발히 어울리며 우정을 쌓지 못했다.
10대 소녀일 때도 그녀는 또래 여자아이들과 수다 떨기보다는 목욕탕에 틀어박혀 사촌인 미트퍼드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소심해지고 어색하다고 느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할 때에도 사라는 마음을 “정리”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중요한 메시지는 메모에 적어서 전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훨씬 말을 잘하고 센스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잘 이해하고, 자신이 침묵을 지킬 때조차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었다.
다른 가족들이 그녀의 과묵함을 놀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바로 나서서 이들의 말을 가로막고, “사라는 조개처럼 자기 비밀을 내면에 간직하려는 거야”라고 했다.
---「2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그러나 역사의 다음 페이지가 쓰이기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선 여행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가 얄타에 도착하기 전에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1일 동안 루스벨트는 퀸시호에 승선한 사람들의 세심한 관찰 대상이 되었다.
이 중에는 오랫동안 루스벨트에게 헌신해온 왓슨 같은 친구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정치적 야망이 뚜렷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 일행이 항해에 나선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건강 상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이고 연방 대법관 Supreme Court associate justice이자 전쟁동원부 장관으로 얄타회담에 참석한 제임스 번스는 애나에게 루스벨트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은밀히 말했다.
그는 루스벨트의 해쓱한 얼굴과 늘 벌어진 입을 보면 만성적인 부비강염 이상의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애나는 루스벨트가 계속 부비강염을 앓고 있을 뿐이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루스벨트가 입을 벌리고 앉아있는 것은 숨을 더 편하게 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번스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3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해리먼은 소련군이 비스와강변에 가만히 앉아 독일군이 폴란드 저항군을 분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다시 장악하는 것을 소련이 방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 군용기들이 폴란드 저항군에게 보급품을 공수할 수 있도록 소련 공군기지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소련 정부에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다.19 아무리 개인적으로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해리먼은 서방 측이 소련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방은 자신들이농담조로 ‘엉클 조Uncle Joe’라고 부르는 스탈린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칠은 스탈린에 맞서 영국 공군에게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보급품을 전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해리먼은 당시 4선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루스벨트를 설득해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기 전에 미국이 스탈린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국무부는 다른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4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그러나 스탈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런던에 있는 폴란드인들에게 한 가지 더 유감이 있었다.
“군인으로서 나는 소련 적군에 의해 해방된 나라에 요구합니다.
후방에서 내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발언을 계속했다.
“적군 병사들은 새 정부가 질서를 유지하고 자신들을 등 뒤에서 쏘지 않는 한 정부의 형태에는 무관심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루블린 정부는 비교적 질서를 잘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말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는 적용될 수 없었다.
“런던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내 지하저항군의 지휘부를 자처하고 있지만 (…) 이 저항군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 이들은 우리 병사 212명을 죽였습니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우리 보급기지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일부를 체포했는데, 만일 그들이 우리의 후방을 계속 교란하면 우리는 군법대로 이들 모두를 사살할 것입니다.” (…)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고 작정한 처칠은 회의가 끝나기 전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나는 영국과 소련이 폴란드 내에 각각 다른 출처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실을 취득하고 있다는 점을 회의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동안 영국 측은 폴란드 내에 정보요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보고한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술을 마시고, 약탈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강간을 저질렀다.
---「13장 1945년 2월 6~7일」중에서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의 여인을 대표해 답사를 합니다.” 캐슬린은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크림반도에서 보낼우리의 편안한 일정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을 위해” 건배를 제안했다.
그녀는 이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정치는 잠시 제쳐두고, 얄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 측이 기울인 노력은 대단했다.
“독일군이 이곳에 저지른 파괴 현장을 보면서 대단한 일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캐슬린은 짧고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긴장 때문에 길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우아하고 친밀하며, 너무 정치적이지도 않아서 그녀가 회담에서 맡은 역할에 잘 부합했다.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을 지적함으로써 그녀는 동맹국들의 연대를 다시 강조했다.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연성 외교soft diplomacy였다.
---「15장 1945년 2월 8일」중에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사라는 처칠의 연설에 대한 인상을 여전히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전쟁 중 그녀는 자신감이 커져서 이제는 솔직한 의견을 아버지에게 털어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연설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물으셨죠?” 사라는 편지에 자신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노동당을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연설을 듣고 보수당을 찍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사라는 처칠이 특히 얄타회담 후 사회주의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잘 알고 있었다.
처칠의 연설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추상은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아는 노동당 지지자들은 이상이나 신념 때문에 노동당에 투표하지 않아요.
단지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그 당에 투표하는 거예요”라고 사라는 설명했다.
“노동당에 투표해야 자신들이 매일 치르는 투쟁이 쉬워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전쟁 중에 나타난 사회주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어요.
(…) 우유는 공평하게 배분되었고, 부자들은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보다 많이 배급받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요.
분명 이런 희생의 공유와 느낌이 우리를 단합시킨 가장 강력한 유대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누구나 갖는 희생의 감정이 평화 시에도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요.”
그러는 사이 소련군은 폴란드와 루마니아를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독일군은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에서 강력한 반격을 펼쳐 아르덴 숲에서 서방 연합군의 방어선을 거의 무너뜨릴 뻔했지만, 연합군이 승기를 잡은 것은 분명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전쟁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미국 장군들은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아직 테스트되지 않은 비밀 무기를 제때 사용하지 않으면 전쟁이 18개월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 당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럽 전황이 중요한 전환점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이들의 군대가 베를린을 향해 앞다퉈 돌진하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문제가 이들 앞에 떠올랐다.이 문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논의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1장 1945년 2월 1일」중에서
주거 환경을 살피고 손님을 맞기 위한 사전 준비가 캐슬린의 일이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시작되자 기자로서 런던에 왔고 아버지의 집사가 아님을 여러 번 강조했었다.
실제로 그녀가 모스크바로 오기 전 언니 메리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는 “더 이상 파티와 여흥이 없길 바라고 있어”라고 썼다.
그러나 캐슬린은 엄청나게 실망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캐비아와 보드카가 넘치는 파티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제 그녀는 궁전에서 일하는 거대한 집단을 관리하고 손님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얄타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일부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안주인이자 이인자로서 자신이 할 일은 단순히 파티를 준비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캐슬린은 공식 직함을 부여받은 적은 없지만 미국인들을 위한 중요한 의전 담당관으로 활동했다.
---「1장 1945년 2월 1일」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사라는 ‘외톨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사라는 예민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또래 소녀들과 활발히 어울리며 우정을 쌓지 못했다.
10대 소녀일 때도 그녀는 또래 여자아이들과 수다 떨기보다는 목욕탕에 틀어박혀 사촌인 미트퍼드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소심해지고 어색하다고 느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말하려고 할 때에도 사라는 마음을 “정리”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중요한 메시지는 메모에 적어서 전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훨씬 말을 잘하고 센스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잘 이해하고, 자신이 침묵을 지킬 때조차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었다.
다른 가족들이 그녀의 과묵함을 놀리려고 하면 아버지는 바로 나서서 이들의 말을 가로막고, “사라는 조개처럼 자기 비밀을 내면에 간직하려는 거야”라고 했다.
---「2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그러나 역사의 다음 페이지가 쓰이기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선 여행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가 얄타에 도착하기 전에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11일 동안 루스벨트는 퀸시호에 승선한 사람들의 세심한 관찰 대상이 되었다.
이 중에는 오랫동안 루스벨트에게 헌신해온 왓슨 같은 친구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정치적 야망이 뚜렷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통령 일행이 항해에 나선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건강 상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이고 연방 대법관 Supreme Court associate justice이자 전쟁동원부 장관으로 얄타회담에 참석한 제임스 번스는 애나에게 루스벨트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은밀히 말했다.
그는 루스벨트의 해쓱한 얼굴과 늘 벌어진 입을 보면 만성적인 부비강염 이상의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애나는 루스벨트가 계속 부비강염을 앓고 있을 뿐이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루스벨트가 입을 벌리고 앉아있는 것은 숨을 더 편하게 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번스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3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해리먼은 소련군이 비스와강변에 가만히 앉아 독일군이 폴란드 저항군을 분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독일군이 바르샤바를 다시 장악하는 것을 소련이 방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 군용기들이 폴란드 저항군에게 보급품을 공수할 수 있도록 소련 공군기지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소련 정부에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다.19 아무리 개인적으로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해리먼은 서방 측이 소련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방은 자신들이농담조로 ‘엉클 조Uncle Joe’라고 부르는 스탈린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칠은 스탈린에 맞서 영국 공군에게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보급품을 전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해리먼은 당시 4선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루스벨트를 설득해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하기 전에 미국이 스탈린에게 강경한 자세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와 국무부는 다른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4장 1945년 2월 2일」중에서
그러나 스탈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런던에 있는 폴란드인들에게 한 가지 더 유감이 있었다.
“군인으로서 나는 소련 적군에 의해 해방된 나라에 요구합니다.
후방에서 내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발언을 계속했다.
“적군 병사들은 새 정부가 질서를 유지하고 자신들을 등 뒤에서 쏘지 않는 한 정부의 형태에는 무관심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루블린 정부는 비교적 질서를 잘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 말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는 적용될 수 없었다.
“런던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 내 지하저항군의 지휘부를 자처하고 있지만 (…) 이 저항군은 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 이들은 우리 병사 212명을 죽였습니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우리 보급기지를 공격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일부를 체포했는데, 만일 그들이 우리의 후방을 계속 교란하면 우리는 군법대로 이들 모두를 사살할 것입니다.” (…)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고 작정한 처칠은 회의가 끝나기 전 한 가지를 더 강조했다.
“나는 영국과 소련이 폴란드 내에 각각 다른 출처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실을 취득하고 있다는 점을 회의 기록에 남기고 싶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한동안 영국 측은 폴란드 내에 정보요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보고한 정보에 따르면 소련군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술을 마시고, 약탈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강간을 저질렀다.
---「13장 1945년 2월 6~7일」중에서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의 여인을 대표해 답사를 합니다.” 캐슬린은 러시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크림반도에서 보낼우리의 편안한 일정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을 위해” 건배를 제안했다.
그녀는 이 작업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정치는 잠시 제쳐두고, 얄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 측이 기울인 노력은 대단했다.
“독일군이 이곳에 저지른 파괴 현장을 보면서 대단한 일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캐슬린은 짧고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긴장 때문에 길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우아하고 친밀하며, 너무 정치적이지도 않아서 그녀가 회담에서 맡은 역할에 잘 부합했다.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을 지적함으로써 그녀는 동맹국들의 연대를 다시 강조했다.
이것은 아주 효과적인 연성 외교soft diplomacy였다.
---「15장 1945년 2월 8일」중에서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사라는 처칠의 연설에 대한 인상을 여전히 그와 공유하고 싶었다.
전쟁 중 그녀는 자신감이 커져서 이제는 솔직한 의견을 아버지에게 털어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연설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물으셨죠?” 사라는 편지에 자신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만일 내가 노동당을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 연설을 듣고 보수당을 찍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사라는 처칠이 특히 얄타회담 후 사회주의에 대해 느끼는 공포를 잘 알고 있었다.
처칠의 연설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그의 관점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유권자들에게 추상은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아는 노동당 지지자들은 이상이나 신념 때문에 노동당에 투표하지 않아요.
단지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그 당에 투표하는 거예요”라고 사라는 설명했다.
“노동당에 투표해야 자신들이 매일 치르는 투쟁이 쉬워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전쟁 중에 나타난 사회주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어요.
(…) 우유는 공평하게 배분되었고, 부자들은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보다 많이 배급받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요.
분명 이런 희생의 공유와 느낌이 우리를 단합시킨 가장 강력한 유대였어요.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누구나 갖는 희생의 감정이 평화 시에도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해요.”
---「18장 1945년 4월 12일~7월 27일」중에서
출판사 리뷰
처칠, 루스벨트, 해리먼의 딸들이 전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얄타회담 이야기
1945년 2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자 ‘3거두’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은 전쟁 종식에 합의하고 전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얄타회담을 열었다.
8일간 진행된 얄타회담이 20세기 전후 세계질서를 만들고 냉전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제각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와 같은 내밀한 이야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젊은 여성 역사가이자 작가인 캐서린 그레이스 카츠는 세 거물 정치인이 회담장에 데려온 세 딸들에 주목했다.
맨해튼의 차트웰 책방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처칠 가족의 자료를 접한 저자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딸 사라 처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딸 애나 루스벨트,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 해리먼의 기록을 모으는 여정에 나섰다.
그 여정의 결과물인 『얄타의 딸들』은 지금껏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작은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자, 새로운 관점으로 얄타회담과 전후 세계를 바라본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조력했던 세 딸들의 헌신과
회담 과정에 대한 그들의 내밀하고 생생한 묘사
얄타회담의 주요 의제는 독일의 패배 후 점령 문제, 폴란드의 정부 수립, 유럽의 국경선 문제, 소련의 대對일본전 참전, 세계평화기구 UN의 설립 등이었다.
나치독일을 무너뜨린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3국의 협상은 치열한 신경전과 외교술, 전략의 경쟁장이었다.
세 딸들은 3국 사이에 벌어진 협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회담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편지로 전하거나 개인 수기에 남겼다.
저자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숨 가쁘게 전개되는 8일간의 회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세 딸들은 각자의 성격과 역할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아버지를 조력했다.
애버럴의 딸 캐슬린 해리먼은 종군 기자이자 스키 챔피언이었고, 독립적이고 당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 러시아어를 공부한 캐슬린은 얄타회담장을 꾸미고 참석자의 자리 배치와 의전 등을 진두지휘하고,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세부사항을 결정해나갔다.
연극 배우로 활동하다가 영국 공군에 입대해 항공사진 판독 소대장으로 지내던 사라 처칠은 기민한 기질로 아버지를 보좌하며 정치적 결정에 영감을 주는 딸이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위상과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던 윈스턴 처칠은 회담 기간 동안 사라에게 심정적으로 상당히 의존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신문 편집자이기도 했던 애나 루스벨트는 당시 급성 울혈성 심부전 진단을 받았던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회담에 참석했다.
얄타회담의 성패는 대통령의 외교와 사교술에 달린 만큼 아버지의 건강 문제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회담이 이루어졌던 리바디아 궁전의 열악한 위생상태, 회담을 둘러싼 소문들, 3거두를 비롯한 정치인들 사이의 외교적 역학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한다.
거대한 정치적 사건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전쟁이 인간의 삶에 남긴 상처에 대한 기록이자
강인한 여성들의 생존과 성장 이야기
세 딸들은 아버지들이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쟁이 휩쓸고 간 얄타 마을을 방문했다.
“도시 전체에 여섯 채의 건물”만 남겨진 유령 도시 세바스토폴을 보며 애나는 충격을 받았고,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서 있는 루마니아 전쟁포로의 줄을 보며 사라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처참”하다고 가슴 아파했다.
종군기자였던 캐슬린은 동상들마저 포격 연습 대상이 되어 파괴된 현장을 담담하게 편지로 전했다.
저자는 세 여성의 시선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크림반도 주민들의 생활을 한 장면 한 장면 섬세하게 보여준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자신의 도시, 공동체, 집과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얄타의 석조 궁전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루스벨트, 스탈린과 무엇을 결정했든, 또 이들이 적으로 갈라섰든 친구로 헤어졌든 간에, 그 사람들은 전에 그렇게 했듯이 도시와 생활을 재건할 것이었다." (386쪽)
얄타회담이 끝난 후 전쟁은 종식되었고, 세계는 냉전에 빠져들었다.
유럽의 절반을 전체주의 정권에 내어주고, 독일과 한반도에 장벽을 세운 얄타회담은 이념 간 충돌의 초석처럼 여겨졌다.
그 사이 처칠, 루스벨트, 해리먼의 가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얄타회담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루스벨트는 1945년 4월에 사망했고, 처칠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애버럴은 트루먼 정부에서 점점 고립되어 이름만 남은 대사직을 수행해야 했다.
전쟁은 이들의 삶에 깊고 오래된 상처의 흔적을 남겼다.
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살과 중병으로 연달아 잃었고, 애나와 캐슬린의 남편들 역시 자살을 시도했다.
모두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조울증에 의한 것이었다.
정치 거물들의 딸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숱한 스캔들에 시달리고 전쟁 후유증을 겪었던 세 딸들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1946년 뉴욕으로 돌아온 캐슬린 해리먼은 외교 일이 “지겹도록 많은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는 일”이라며 기자 일을 다시 시작했고, 애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산을 기리는 일에 헌신했다.
사라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상심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슬픔을 이겨내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큰 사건에는 주연과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카메라는 보통 주연에 초점을 맞추지만, 조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전개되면 사건의 새로운 면이 드러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세 여성은 얄타회담의 조연이라 할 수 있지만, 당대 언론의 큰 관심을 받던 명사였고, ‘퍼스트 도터’이자 때로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도 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얄타회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일 뿐 아니라, 혹독한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던 강한 여성들의 생존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얄타회담 이야기
1945년 2월,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자 ‘3거두’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은 전쟁 종식에 합의하고 전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얄타회담을 열었다.
8일간 진행된 얄타회담이 20세기 전후 세계질서를 만들고 냉전의 포문을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낸 당사자들과 주변인들이 제각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와 같은 내밀한 이야기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젊은 여성 역사가이자 작가인 캐서린 그레이스 카츠는 세 거물 정치인이 회담장에 데려온 세 딸들에 주목했다.
맨해튼의 차트웰 책방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처칠 가족의 자료를 접한 저자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딸 사라 처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딸 애나 루스벨트, 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 해리먼의 기록을 모으는 여정에 나섰다.
그 여정의 결과물인 『얄타의 딸들』은 지금껏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작은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자, 새로운 관점으로 얄타회담과 전후 세계를 바라본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조력했던 세 딸들의 헌신과
회담 과정에 대한 그들의 내밀하고 생생한 묘사
얄타회담의 주요 의제는 독일의 패배 후 점령 문제, 폴란드의 정부 수립, 유럽의 국경선 문제, 소련의 대對일본전 참전, 세계평화기구 UN의 설립 등이었다.
나치독일을 무너뜨린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3국의 협상은 치열한 신경전과 외교술, 전략의 경쟁장이었다.
세 딸들은 3국 사이에 벌어진 협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회담을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편지로 전하거나 개인 수기에 남겼다.
저자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숨 가쁘게 전개되는 8일간의 회담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세 딸들은 각자의 성격과 역할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아버지를 조력했다.
애버럴의 딸 캐슬린 해리먼은 종군 기자이자 스키 챔피언이었고, 독립적이고 당찬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 러시아어를 공부한 캐슬린은 얄타회담장을 꾸미고 참석자의 자리 배치와 의전 등을 진두지휘하고, 회담장에서 일어나는 세부사항을 결정해나갔다.
연극 배우로 활동하다가 영국 공군에 입대해 항공사진 판독 소대장으로 지내던 사라 처칠은 기민한 기질로 아버지를 보좌하며 정치적 결정에 영감을 주는 딸이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위상과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책임감으로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던 윈스턴 처칠은 회담 기간 동안 사라에게 심정적으로 상당히 의존했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신문 편집자이기도 했던 애나 루스벨트는 당시 급성 울혈성 심부전 진단을 받았던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회담에 참석했다.
얄타회담의 성패는 대통령의 외교와 사교술에 달린 만큼 아버지의 건강 문제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자는 회담이 이루어졌던 리바디아 궁전의 열악한 위생상태, 회담을 둘러싼 소문들, 3거두를 비롯한 정치인들 사이의 외교적 역학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서술한다.
거대한 정치적 사건 사이로 흘러나오는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전쟁이 인간의 삶에 남긴 상처에 대한 기록이자
강인한 여성들의 생존과 성장 이야기
세 딸들은 아버지들이 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전쟁이 휩쓸고 간 얄타 마을을 방문했다.
“도시 전체에 여섯 채의 건물”만 남겨진 유령 도시 세바스토폴을 보며 애나는 충격을 받았고,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서 있는 루마니아 전쟁포로의 줄을 보며 사라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처참”하다고 가슴 아파했다.
종군기자였던 캐슬린은 동상들마저 포격 연습 대상이 되어 파괴된 현장을 담담하게 편지로 전했다.
저자는 세 여성의 시선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참상과 크림반도 주민들의 생활을 한 장면 한 장면 섬세하게 보여준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여전히 주민들은 자신의 도시, 공동체, 집과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얄타의 석조 궁전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루스벨트, 스탈린과 무엇을 결정했든, 또 이들이 적으로 갈라섰든 친구로 헤어졌든 간에, 그 사람들은 전에 그렇게 했듯이 도시와 생활을 재건할 것이었다." (386쪽)
얄타회담이 끝난 후 전쟁은 종식되었고, 세계는 냉전에 빠져들었다.
유럽의 절반을 전체주의 정권에 내어주고, 독일과 한반도에 장벽을 세운 얄타회담은 이념 간 충돌의 초석처럼 여겨졌다.
그 사이 처칠, 루스벨트, 해리먼의 가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얄타회담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루스벨트는 1945년 4월에 사망했고, 처칠은 총선에서 패배했다.
애버럴은 트루먼 정부에서 점점 고립되어 이름만 남은 대사직을 수행해야 했다.
전쟁은 이들의 삶에 깊고 오래된 상처의 흔적을 남겼다.
사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살과 중병으로 연달아 잃었고, 애나와 캐슬린의 남편들 역시 자살을 시도했다.
모두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조울증에 의한 것이었다.
정치 거물들의 딸로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숱한 스캔들에 시달리고 전쟁 후유증을 겪었던 세 딸들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1946년 뉴욕으로 돌아온 캐슬린 해리먼은 외교 일이 “지겹도록 많은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는 일”이라며 기자 일을 다시 시작했고, 애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산을 기리는 일에 헌신했다.
사라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상심해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슬픔을 이겨내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큰 사건에는 주연과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카메라는 보통 주연에 초점을 맞추지만, 조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가 전개되면 사건의 새로운 면이 드러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세 여성은 얄타회담의 조연이라 할 수 있지만, 당대 언론의 큰 관심을 받던 명사였고, ‘퍼스트 도터’이자 때로는 ‘퍼스트 레이디’ 역할도 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얄타회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일 뿐 아니라, 혹독한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던 강한 여성들의 생존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2년 02월 14일
- 쪽수, 무게, 크기 : 536쪽 | 772g | 152*225*35mm
- ISBN13 : 9791191432343
- ISBN10 : 1191432343
You may also like
카테고리
한국어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