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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Description
책소개
『왕오천축국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 책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여기서 '천축'은 인도를 가리키는 중국식 옛 이름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천국을 다녀온 기록'으로 볼 수 있으며,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를 포함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보고들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원본은 한자로 6000자, 10쪽 분량의 단촐한 분량.
그러나 이 분야 권위자인 정수일씨의 노력으로 인해 400쪽에 달하는 상세한 주석과 해제가 실려 있어 일반인들로서도 책을 읽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특히 저자는 혜초가 언급한 나라들의 왕조사와 문명사 그리고 현재 그곳이 어떤 지역인지까지를 확인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천축국에서는 죄를 지어도 돈으로 벌금만 내면 해결이 가능했다는 이야기 등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세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 있다.
더불어 혜초가 지었다는 시 역시 실려 있어 이역에서 쓸쓸한 밤을 보내고 있는 혜초의 심정을 헤아리기도 한다.
『대당서역기』와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 필적할 만한 재미있는 책이다.

책 속으로
2.
주석에서




역주자는 기존에 나온 국내외 『왕오천축국전』 번역서와 연구서를 비교하고 그 중에서 해석이 판이하게 다른 부분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관련 서적과 그 시기 그 지역의 상황을 근거로 원문을 복원하여 가능한 한 정확한 번역을 시도한다.


이 문장 중 ‘석(石)’자 앞의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와 또 같은 글자인 ‘오일(五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서 논란거리이다.
‘석’자 앞의 글자를 ‘오(五)’자로 보는 견해(藤, 12a; F, 459; 羽, 613; 李, 96)와 ‘오일(五一)’자로 보는 견해(Y, 41, 83; 鄭, 105)가 있는가 하면, 특이하게도 ‘일(一)’자로만 보는 학자(張, 28)도 있다.
‘오’자로 보는 학자들은 예외 없이 ‘다섯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였다.
‘오일’자로 보는 경우에는 ‘다섯 섬 중 한 섬을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기도 한다(桑, 31).
이색적인 것은 ‘오일’로 써놓고도 ‘다섯 섬을’로 옮겨 놓은 경우다(鄭, 105, 116).
그러나 당시 인도의 지세가 수확의 6분의 1을 공납하는 세제임을 감안할 때, ‘오일’로 인정하고 ‘땅에서 나는 곡식의 다섯 섬은 거두어들이고 한 섬은 왕에게 바친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 (171∼172쪽에서)



혜초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식습관이나 근친혼, 일처다부제와 같이 서역의 풍습을 묘사한 부분에 대해 역주자는 주석에서 부연 설명을 해준다.

유목 생활 유습으로 인해 아랍인들은 자고로 맨손(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관행이다.
간혹 국 같은 것을 먹기 위해 숟가락은 사용하나, 한(漢) 문명권 사람들처럼 젓가락〔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짐작하건대 혜초는 꼬치구이를 즐기는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꼬챙이 같은 것을 젓가락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대식인들이 수저를 쓰는 것이 그에게 ‘퍽 흉하게 보였던’ 것이다.
---(366쪽에서)

혜초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는 ‘최근친혼(最近親婚)’을 ‘대단히 고약한 풍속(極惡風俗)’이라고 질타한다.
최근친혼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신봉자들을 비롯해 일부 민족들 속에서도 유행한 일종의 혼인 제도이다.
최근친혼을 비롯한 근친혼은 자고로 여러 민족들 속에서 혈통이나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혼인 비용에 의한 재화의 족외 유출을 방지하며 여자의 사향심을 달래기 위함과 같은 몇 가지 이유에서 존재해왔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발단이 된 이 혼인 제도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헤로도토스(Herodotos)인데, 그는 역작 『역사(Historia)』 제9권에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Cyrus)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에 관해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캄비세스 이전까지는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는 관습이 페르시아에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캄비세스는 자기의 여형제 중 한 명을 사모하여 구애하고 싶었으나, 이것이 관습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궁전 법관을 불러다가 여형제의 취처(娶妻)를 인정할 수 있는 법이 없는가 하고 물었다.
왕자의 속내를 알아차린 법관은 법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왕자의 미움도 받지 않을 만한 묘안을 찾아내야 했다.
생각 끝에 법관은 여형제와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법률은 없지만, 왕에게는 원하는 대로 모든 행동을 할 수 있는 타면법(他面法)도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자는 그 여형제를 아내로 취하고 얼마 안 있다가 또 다른 여형제도 아내로 맞이했다.
---(389쪽에서)

‘공취일처(共娶一妻)’, 즉 여럿이 한 여인을 아내로 삼는 이른바 ‘일처다부(一妻多夫, polyandry)’도 일종의 혼인 제도로, 자고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성행하였다.
『수서』 「서역전」에 의하면 토화라국에서는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데, 방사(房事)가 있을 때면 방 밖에 옷을 걸어 표지하며 자식은 형에게 속한다.
그런가 하면 대월지 종족에 속하는 염달은 그 풍속이 돌궐과 비슷하여 형제가 아내 한 명을 취한다.
만일 형제가 없으면 처는 각이 하나인 모자를 쓰고 형제가 여럿이면 그 숫자만큼 각이 달린 모자를 쓴다(『위서』 「서역전」).
---(389∼390쪽에서)
.
1.
번역문에서




여행이나 여행기를 읽는 일의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풍물과 풍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혜초도 자기가 살던 곳의 풍습과 다른 이국땅의 낯선 풍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나라를 비롯해 오천축국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오천축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술이 취해서 서로 치고받는 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설령 마셨다 하더라도 의기나 좀 양양하고 기운이나 좀 얻을 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벌이는 자는 보지 못하였다.
--- (229쪽 ‘신두고라국’절에서)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서캐와 이가 대단히 많은데, 이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 (263쪽 ‘토번국’절에서)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
--- (360쪽 ‘대식국’절에서)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토화라국을 비롯해 계빈국이나 범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373쪽 ‘호국’절에서 )



혜초는 가는 곳마다 불교 사원과 승려의 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우세 정도, 이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전파 정도를 기록하여,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탑은) 가비야라국(迦毗耶羅國)에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타가 태어난 성이다.
거기서 무우수(無憂樹)는 봤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백성도 없다.
--- (181쪽 ‘중천축국 4대탑’절에서)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더불어 행해진다.
--- (197쪽 ‘남천축국’절에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쁨이나 험난한 여로에서의 고단한 심정을 읊은 오언시 다섯 편을 포함하고 있어 서정적 여행기라 불린다.
남천축으로 가던 도중 읊은 다음의 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향수에 젖은 혜초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 (198쪽 남천축국절에서) 1.
번역문에서




여행이나 여행기를 읽는 일의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풍물과 풍습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혜초도 자기가 살던 곳의 풍습과 다른 이국땅의 낯선 풍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이 나라를 비롯해 오천축국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오천축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도 술이 취해서 서로 치고받는 자들은 별로 보지 못했다.
설령 마셨다 하더라도 의기나 좀 양양하고 기운이나 좀 얻을 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떠들썩하게 술자리를 벌이는 자는 보지 못하였다.
--- (229쪽 ‘신두고라국’절에서)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서캐와 이가 대단히 많은데, 이를 잡기만 하면 곧바로 입속에 넣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 (263쪽 ‘토번국’절에서)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
--- (360쪽 ‘대식국’절에서)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토화라국을 비롯해 계빈국이나 범인국, 사율국 등에서는 형제가 열 명이건 다섯 명이건, 세 명이건 두 명이건 간에 공동으로 한 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집안 살림이 파탄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373쪽 ‘호국’절에서 )



혜초는 가는 곳마다 불교 사원과 승려의 수,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우세 정도, 이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전파 정도를 기록하여,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 전파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째 탑은) 가비야라국(迦毗耶羅國)에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타가 태어난 성이다.
거기서 무우수(無憂樹)는 봤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
탑은 있으나 승려는 없고 백성도 없다.
--- (181쪽 ‘중천축국 4대탑’절에서)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더불어 행해진다.
--- (197쪽 ‘남천축국’절에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성지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쁨이나 험난한 여로에서의 고단한 심정을 읊은 오언시 다섯 편을 포함하고 있어 서정적 여행기라 불린다.
남천축으로 가던 도중 읊은 다음의 시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향수에 젖은 혜초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和答)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 (198쪽 남천축국절에서)
.

출판사 리뷰
5.
역주자 정수일의 역정(歷程)



혜초는 젊어서 서역으로 목숨을 건 도보 여행을 떠났다.
귀로 길에 파미르 고원을 앞에 두고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 아스라한데… 평생 눈물을 훔쳐본 적 없는 나건만/ 오늘만은 하염없는 눈물 뿌리는구나(406쪽)”라고 시를 읊은 대목에서 그 노정의 험난함을 짐작할 수 있다.
장안으로 돌아온 후 그는 밀교 연구에 여생을 헌신했다.
정수일 선생의 이력은 어딘가 혜초의 그것과 닮은 데가 있다.
중국에서 태어난 정수일 선생은 카이로 유학을 비롯해 모로코, 튀니지, 말레이시아 등을 전전하며 세계 수십 개국에서 수학하거나 그곳을 여행했다.
다소 쉰 듯한 그의 목소리도 아프리카 여행 도중 풍토병을 앓은 후 변성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 전문 학자라는 경력으로 인해 그는 한때 민족사의 비극 한가운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곳 서울에서 세계 여러 곳에서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문명교류학이라는 낯선 학문을 정립해 나가는 데 몰두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3개국 언어의 책을 역주해내다
지금까지 동서양을 통틀어 한 역주자가 한두 개의 언어로 된 고전을 역주하는 일은 있었으나, 세 개의 언어, 그것도 동서양과 그 중간을 아우르는 언어로 된 고전을 역주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책의 역주자인 정수일 선생은 영어로 된 고전인 『중국으로 가는 길』(사계절)과 아랍어로 된 고전인 『이븐 바투타 여행기』(창비)를 역주한 데 이어 이번에 세 번째로 한문으로 된 고전인 『왕오천축국전』을 역주함으로써, 3개 국어 책의 역주자가 되었다.


6.
기타



이 책에는 처음으로 제작된 3차원 디지털 혜초 복원도가 실려 있다.
스물세 살 무렵의 혜초가 중천축 마하보디에 있는 득도처 대탑을 지나는 모습을 복원했다.
유희경 복식문화원구원 원장(전 이화여대 교수)과 서울여대 김미자 교수의 복식 고증을 거쳤고 역주자 정수일, 디지털 복원전문가 박진호, 문화원형 디지털 복원업체인 (주)드림한스가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부록 『왕오천축국전』 원문(영인본) 제공
별책 부록으로 『왕오천축국전』 원문(영인본)을 제공한다.
1987년 문화공보부가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원본을 영인한 것을 다시 촬영한 것으로, 세로 길이 28.5cm인 원본을 20cm 길이로 축소 제작하였다.
두루마리의 연결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고 이 두루마리를 위해 별도로 제작한 봉투에 담았다.



『왕오천축국전』이 우리의 명작 고전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도록 책의 디자인에도 많은 정성을 들였다.
고급 천으로 싸서 제본했고 그 위에 복원한 혜초의 이미지가 들어간 겉표지를 다시 입혔다.
원문에 대한 주석은 그 중요성이 분량이나 내용면에서 원문이나 번역문과 다름없다는 점을 고려해 다소 큰 글씨에 미주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찾아보기는 지명, 인명, 사항으로 구분하여 상세하게 달아주었고 물론 주석의 어휘도 포함시켰다.




생동감 있는 사실의 전달을 특징으로 하는 여행기는 타자관(他者觀)을 비롯한 문명관을 올바로 세울 수 있게 하고, 흥취 넘치는 문학 장르로서 읽는 이에게 색다른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학고재 〈문명 기행〉 시리즈는 미답의 험로로 걸어 들어간 선인들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그들이 찾아낸 문명의 지혜를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우리 주위에는 시공을 초월해 짙은 세계성을 띠고 있는 여행기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저작물을 우선적으로 선별하고, 중역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 한 원전어를 토대로 한 엄정한 번역에 주력하면서 치밀한 주석도 붙일 예정이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다른 문명권을 탐사한 동서양의 유수한 여행기를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시선으로 한데 묶는 작업이 될 것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어떤 책인가
1.
개요

이 책은 21세기에 새롭게 되살아난 1200년 전의 인도·중앙아시아 여행기
문명교류학과 이슬람학의 세계적 학자인 정수일 선생이 각고의 연구 끝에 펴낸 『왕오천축국전』 역주서이다.
학고재에서 새로이 출간하는 〈문명기행〉 시리즈의 한 권으로서, 기왕이면 한국인이 쓴 세계적 여행기를 그 첫 권으로 내고자 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돈황석굴에서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에 의해 발견된 이래 백 년 가까이 여러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쓴 저자의 고향인 한국에서는 연구가 한참 뒤져, 지금까지 출간된 예닐곱 종의 번역서 외에는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역주자(정수일)를 위대한 우리 선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불초감에 시달리게 한 원인이자 마침내 역주 작업을 시작하게 한 계기다.
『왕오천축국전』은 720년 무렵 신라 고승 혜초가 인도와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를 돌아보고 남긴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한자로 쓴 글을, 그것도 우리 이야기가 아닌 먼 나라에 관한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번역서가 아닌 역주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역주자는 기존의 연구서들을 비교·분석하고 『대당서역기』 『불국기』 등과 같은 관련 서적과 대조했다.
또 그가 지닌 중국어와 문명교류, 이슬람, 중앙아시아의 역사, 문화, 지리 등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원문 번역 및 해설과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펴냈다.
여행기를 읽는 목적 중 하나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정수일 선생의 이번 역주는 1200년간 잠들어 있던 고문서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업이자 먼 옛날의 먼 곳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2.
구성

책의 맨 앞에는 혜초의 기행 노정을 표시한 지도와 최초로 시도된 혜초 복원도, 돈황석굴, 인도, 중국 서안 등 『왕오천축국전』과 관련된 컬러 도판이 들어 있다.
이어지는 『왕오천축국전』 해설에는 혜초의 생애, 여행기의 발견과정과 내용, 성격,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과 그 기행이 갖는 문명사적 의미, 기존 연구성과와 향후 연구과제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에는 두루마리에 필사된 그대로 227행으로 나눈 『왕오천축국전』 원문이 온다.
본문은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내용에 따라 지역 단위로 40개로 구분하여 번역문, 원문, 주석의 순서로 배치하였다.
중인도에 해당하는 폐사리국(바이샬리)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에 있는 언기국(카라샤르)에서 끝이 난다.
뒤 부분에는 혜초 연표와 찾아보기를 넣었고 『왕오천축국전』의 정체를 파악하는 전거가 된 책인 혜림의 『일체경음의』 중 「혜초왕오천축국전」 부분을 영인하여 실었다.
찾아보기는 지명, 인명, 사항으로 구분하여 상세하게 달았다.
또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영인본으로 제작해 별책부록으로 제공한다.

3.
의의



지금까지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국내 연구는 몇 편의 논문과 번역본이 전부다.
그러니 이 여행기는 문장을 풀이한 번역서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은 먼 옛날 먼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육천 자 남짓한 적은 분량에 40여 개 지역에서 보고 들을 것은 개괄하다 보니 내용이 간략한 데다가, 발견 당시 앞뒤가 잘려나간 상태였고 지워져 희미한 글자나 지금은 쓰지 않는 글자도 많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해 정확한 해설을 붙이고 의미나 형태가 모호한 한자 등에 대해 꼼꼼히 주석을 단 역주서가 절실하다.
역주자인 정수일 선생은 아직까지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는 현실을 오래전부터 개탄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확한 번역을 토대로 원문 분량의 약 열 배에 해당하는 503개의 자세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를 국내 최초로 펴낸 것이다.


4.
연구성과―기존 연구에서 논란이 되어온 부분에 해답을 제시하다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한 권의 두루마리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 안의 내용도 문단의 나뉨 없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이라고 규정하는 데 근거가 된 혜림의 『일체경음의』에는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휘의 주석이 상권, 중권, 하권으로 분류되어 실려 있다.
이것이 현존 『왕오천축국전』이 초고본인가, 원본의 축약본인가, 아니면 원본을 그대로 베낀 사록본(寫錄本)인가 하는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역주자는 『일체경음의』에 주석된 어휘와 현존 『왕오천축국전』에 포함된 어휘 중 서로 일치하는 어휘의 수와 나오는 순서 등을 세밀히 비교했다.
그리고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세 권이었던 원본의 축약본이라고 결론 내린다.
또한 『일체경음의』가 고른 주석 어휘의 빈도를 근거로 현존 『왕오천축국전』에서 앞뒤로 잘려나간 분량도 최초로 추산했다.




혜초가 여행한 경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많다.
직접 다녀온 답사지와 전해 듣고 쓴 전문지(傳聞地)가 여행기 안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역주자는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구체성 여부, 지리적 위치, 여행의 목적, 직접 다녀온 답사지에 대해서는 혜초가 시작하는 문구를 일정한 형식으로 쓴 점 등을 감안해 답사지와 전문지를 구분해냈다.
그리고 혜초가 페르시아(파사)와 아랍(대식)까지는 가지 않았고 이곳에 대해서는 전해 듣고 썼다는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깨고 동양인 최초로 아랍 제국까지 다녀왔다는 근거를 타당성 있게 제시했다.
단, 그 때의 아랍 제국(대식국)은 오늘날의 아랍 세계와 그 지역적 포괄 범위와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서이다.
역주자에 따르면 혜초는 당시 아랍 제국의 중앙아시아 관할지이자 동방으로 가는 통로였던 니샤푸르(NDshApEr, 현 이란 동북부의 마슈하드 Mashhad)까지 다녀왔다.



역주자에 의해 새롭게 추정된 혜초의 여행 경로는 다음과 같다.
중국 광주에서 출발 ⇒ 남중국해 ⇒ 불서국(수마트라) ⇒ 사자국(실론, 스리랑카) ⇒ 동천축 ⇒ 폐사리국(바이샬리) ⇒ 구시나국(쿠시나가라) ⇒ 피라날사국(바라나시) ⇒ 마게타국(왕사성, 마하보리 등 4대 성지) ⇒ 중천축구 수도 갈나급자(카냐쿱자) ⇒ 남천축국(나시크) ⇒ 서천축국(알로르) ⇒ 사란달라(잘란다라) ⇒ 탁사국(탁샤르) ⇒ 신두고라국(신드구르자라) ⇒ 사란달라 ⇒ 가섭미라국(카슈미르) ⇒ 건타라국(간다라) ⇒ 오장국(우디아나) ⇒ 구위국(치트랄) ⇒ 건타라국 ⇒ 람파국(람파카) ⇒ 계빈국(카피시) ⇒ 사율국(자불리스탄) ⇒ 범인국(바미얀) ⇒ 토화라(토카리스탄) ⇒ 파사(페르시아) ⇒ 대식(니샤푸르) ⇒ 토화라(토카리스탄) ⇒ 호밀국(와칸) ⇒ 파미르 고원(총령진) ⇒ 소륵국(카슈가르) ⇒ 구자국(쿠차) ⇒ 언기국(카라샤르) ⇒ 돈황 ⇒ 난주 ⇒ 장안 도착
기존 연구가들은 혜초가 니코바르 제도를 거쳐 인도로 갔고, 돌아오는 길에 양동국(부탄 북부)과 우기(호탄)도 들른 것으로 봤다.
역주자는 여행기 첫 부분에 나오는 ‘나형(裸形)’이 원시 인간이 나체로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종교 수행자들의 모습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부분은 인도양의 니코바르 제도나 말레이 반도 북부 서안이 아니라 폐사리국(바이샬리)에 대해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히말라야가 가로 놓인 양동국이나 타클라마칸 사막 너머의 우기는 직접 다녀오지 않고 전해 듣고 쓴 것으로 보았다.
1.
개요

이 책은 21세기에 새롭게 되살아난 1200년 전의 인도·중앙아시아 여행기
문명교류학과 이슬람학의 세계적 학자인 정수일 선생이 각고의 연구 끝에 펴낸 『왕오천축국전』 역주서이다.
학고재에서 새로이 출간하는 〈문명기행〉 시리즈의 한 권으로서, 기왕이면 한국인이 쓴 세계적 여행기를 그 첫 권으로 내고자 하였다.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돈황석굴에서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에 의해 발견된 이래 백 년 가까이 여러 나라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을 쓴 저자의 고향인 한국에서는 연구가 한참 뒤져, 지금까지 출간된 예닐곱 종의 번역서 외에는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역주자(정수일)를 위대한 우리 선현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불초감에 시달리게 한 원인이자 마침내 역주 작업을 시작하게 한 계기다.
『왕오천축국전』은 720년 무렵 신라 고승 혜초가 인도와 아랍,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지를 돌아보고 남긴 기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한자로 쓴 글을, 그것도 우리 이야기가 아닌 먼 나라에 관한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번역서가 아닌 역주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역주자는 기존의 연구서들을 비교·분석하고 『대당서역기』 『불국기』 등과 같은 관련 서적과 대조했다.
또 그가 지닌 중국어와 문명교류, 이슬람, 중앙아시아의 역사, 문화, 지리 등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원문 번역 및 해설과 자세하고 풍부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펴냈다.
여행기를 읽는 목적 중 하나는 타인을 통해 나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정수일 선생의 이번 역주는 1200년간 잠들어 있던 고문서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업이자 먼 옛날의 먼 곳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2.
구성

책의 맨 앞에는 혜초의 기행 노정을 표시한 지도와 최초로 시도된 혜초 복원도, 돈황석굴, 인도, 중국 서안 등 『왕오천축국전』과 관련된 컬러 도판이 들어 있다.
이어지는 『왕오천축국전』 해설에는 혜초의 생애, 여행기의 발견과정과 내용, 성격,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과 그 기행이 갖는 문명사적 의미, 기존 연구성과와 향후 연구과제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에는 두루마리에 필사된 그대로 227행으로 나눈 『왕오천축국전』 원문이 온다.
본문은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내용에 따라 지역 단위로 40개로 구분하여 번역문, 원문, 주석의 순서로 배치하였다.
중인도에 해당하는 폐사리국(바이샬리)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에 있는 언기국(카라샤르)에서 끝이 난다.
뒤 부분에는 혜초 연표와 찾아보기를 넣었고 『왕오천축국전』의 정체를 파악하는 전거가 된 책인 혜림의 『일체경음의』 중 「혜초왕오천축국전」 부분을 영인하여 실었다.
찾아보기는 지명, 인명, 사항으로 구분하여 상세하게 달았다.
또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영인본으로 제작해 별책부록으로 제공한다.

3.
의의



지금까지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국내 연구는 몇 편의 논문과 번역본이 전부다.
그러니 이 여행기는 문장을 풀이한 번역서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은 먼 옛날 먼 곳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육천 자 남짓한 적은 분량에 40여 개 지역에서 보고 들을 것은 개괄하다 보니 내용이 간략한 데다가, 발견 당시 앞뒤가 잘려나간 상태였고 지워져 희미한 글자나 지금은 쓰지 않는 글자도 많다.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그 지역의 역사와 지리, 문화에 대해 정확한 해설을 붙이고 의미나 형태가 모호한 한자 등에 대해 꼼꼼히 주석을 단 역주서가 절실하다.
역주자인 정수일 선생은 아직까지 변변한 역주서 하나 없는 현실을 오래전부터 개탄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확한 번역을 토대로 원문 분량의 약 열 배에 해당하는 503개의 자세한 주석을 붙인 역주서를 국내 최초로 펴낸 것이다.


4.
연구성과―기존 연구에서 논란이 되어온 부분에 해답을 제시하다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한 권의 두루마리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 안의 내용도 문단의 나뉨 없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루마리가 『왕오천축국전』이라고 규정하는 데 근거가 된 혜림의 『일체경음의』에는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어휘의 주석이 상권, 중권, 하권으로 분류되어 실려 있다.
이것이 현존 『왕오천축국전』이 초고본인가, 원본의 축약본인가, 아니면 원본을 그대로 베낀 사록본(寫錄本)인가 하는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역주자는 『일체경음의』에 주석된 어휘와 현존 『왕오천축국전』에 포함된 어휘 중 서로 일치하는 어휘의 수와 나오는 순서 등을 세밀히 비교했다.
그리고 현존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세 권이었던 원본의 축약본이라고 결론 내린다.
또한 『일체경음의』가 고른 주석 어휘의 빈도를 근거로 현존 『왕오천축국전』에서 앞뒤로 잘려나간 분량도 최초로 추산했다.




혜초가 여행한 경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많다.
직접 다녀온 답사지와 전해 듣고 쓴 전문지(傳聞地)가 여행기 안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역주자는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구체성 여부, 지리적 위치, 여행의 목적, 직접 다녀온 답사지에 대해서는 혜초가 시작하는 문구를 일정한 형식으로 쓴 점 등을 감안해 답사지와 전문지를 구분해냈다.
그리고 혜초가 페르시아(파사)와 아랍(대식)까지는 가지 않았고 이곳에 대해서는 전해 듣고 썼다는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을 깨고 동양인 최초로 아랍 제국까지 다녀왔다는 근거를 타당성 있게 제시했다.
단, 그 때의 아랍 제국(대식국)은 오늘날의 아랍 세계와 그 지역적 포괄 범위와 개념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서이다.
역주자에 따르면 혜초는 당시 아랍 제국의 중앙아시아 관할지이자 동방으로 가는 통로였던 니샤푸르(NDshApEr, 현 이란 동북부의 마슈하드 Mashhad)까지 다녀왔다.



역주자에 의해 새롭게 추정된 혜초의 여행 경로는 다음과 같다.
중국 광주에서 출발 ⇒ 남중국해 ⇒ 불서국(수마트라) ⇒ 사자국(실론, 스리랑카) ⇒ 동천축 ⇒ 폐사리국(바이샬리) ⇒ 구시나국(쿠시나가라) ⇒ 피라날사국(바라나시) ⇒ 마게타국(왕사성, 마하보리 등 4대 성지) ⇒ 중천축구 수도 갈나급자(카냐쿱자) ⇒ 남천축국(나시크) ⇒ 서천축국(알로르) ⇒ 사란달라(잘란다라) ⇒ 탁사국(탁샤르) ⇒ 신두고라국(신드구르자라) ⇒ 사란달라 ⇒ 가섭미라국(카슈미르) ⇒ 건타라국(간다라) ⇒ 오장국(우디아나) ⇒ 구위국(치트랄) ⇒ 건타라국 ⇒ 람파국(람파카) ⇒ 계빈국(카피시) ⇒ 사율국(자불리스탄) ⇒ 범인국(바미얀) ⇒ 토화라(토카리스탄) ⇒ 파사(페르시아) ⇒ 대식(니샤푸르) ⇒ 토화라(토카리스탄) ⇒ 호밀국(와칸) ⇒ 파미르 고원(총령진) ⇒ 소륵국(카슈가르) ⇒ 구자국(쿠차) ⇒ 언기국(카라샤르) ⇒ 돈황 ⇒ 난주 ⇒ 장안 도착
기존 연구가들은 혜초가 니코바르 제도를 거쳐 인도로 갔고, 돌아오는 길에 양동국(부탄 북부)과 우기(호탄)도 들른 것으로 봤다.
역주자는 여행기 첫 부분에 나오는 ‘나형(裸形)’이 원시 인간이 나체로 있는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종교 수행자들의 모습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부분은 인도양의 니코바르 제도나 말레이 반도 북부 서안이 아니라 폐사리국(바이샬리)에 대해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고, 히말라야가 가로 놓인 양동국이나 타클라마칸 사막 너머의 우기는 직접 다녀오지 않고 전해 듣고 쓴 것으로 보았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04년 04월 20일
- 쪽수, 무게, 크기 : 514쪽 | 872g | 152*223*35mm
- ISBN13 : 9788956250250
- ISBN10 : 8956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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