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Description
책소개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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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목차
머리말 : 소름 돋게 닮은 해방정국과 지금
“지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하다” · 4 “그날이 오면” · 6 과연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는가? · 8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 · 10 이데올로기라는 포장술 · 13 아직 진실의 값은 싸다· 15 진정한 ‘낙관과 긍정’을 위해 · 17
제1부 1945년: 36년 묵은 한의 분출
제1장 도둑같이 찾아온 8·15 해방
거짓말같이 오고 만 해방 · 31 해방의 감격과 환희 · 33 대폭발을 위해 걸린 4~5시간 · 35 ‘해방의 날’이 아닌 ‘분단의 날’이었는가? · 36 조선총독부와 여운형의 교섭 · 38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 41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 · 43 송진우의 건준 불참 이유 · 45
제2장 38선은 정말 30분 만에 그어졌는가?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 · 47 미·영·소 3국 정상의 얄타 회담 · 50 미국은 얄타에서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겼는가? · 52 루스벨트에서 트루먼으로 · 54 일본 분단의 대용품이 된 한국 · 57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 59 소련군에 대한 경계심과 경멸 · 62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 63
역사 산책 1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 67
제3장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미군의 서울 진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 69 안재홍이 떠난 건준의 좌경화 · 71 공산당의 좌경 헤게모니 의식 · 72 미군의 ‘친(親)일본, 반(反)조선’ 자세 · 74 내려진 일장기 자리엔 성조기 게양 · 76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 · 78 ‘준비 부족론’ 논쟁 · 80 미군의 한국인 모욕 · 82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 · 83 미군의 인종차별주의 · 85 DDT의 무차별 살포 · 87
제4장 한국민주당 창당과 ‘통역 정치’
“인공을 타도하라” · 90 “점화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 · 91 한국민주당의 창당 · 92 한민당=『동아일보』 · 94 한민당의 군정 행정고문 독식 · 95 ‘통역 정치’의 폐해 · 96 미군정의 인공 부인 · 98 미군정의 목표는 ‘인공 분쇄’ · 99 정치에 대한 굶주림 · 101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찰 장악 · 103 조병옥이 일제 경찰을 등용한 이유 · 104 ‘능률적인 폭정의 도구’ · 106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 · 107 ‘수사=고문’이라는 관행 · 108
역사 산책 2 ‘적산’과 90만 일본인의 귀환 · 110
제5장 가짜 김일성의 등장 논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 113 33세 청년 김일성의 등장 · 115 과연 김일성은 가짜였는가? · 117 하지의 이승만 환대 · 119 이승만의 인기와 정치자금 · 122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 · 124 이승만의 공산당 공격 · 125 자주관리운동과 전평의 결성 · 127 미군정의 자주관리운동 금지령 · 129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창당 · 130 임시정부 추대 논란 · 131
제6장 김구의 귀국, 임시정부의 분열
충칭 임시정부의 개인 자격 귀국 · 133 김구는 ‘스튜에 필요한 소금’ · 136 임정의 인공과 조공 거부 · 140 임정과 한민당의 관계 · 142 임정의 내분, 장준하의 ‘말 폭탄’ · 145 ‘임정=한독당=김구’ 전략 · 147 민생을 외면한 보상 욕구 · 149 ‘신의주 사건’과 김일성의 ‘민주 기지론’ · 150
제7장 ‘신탁통치’ 갈등과 투쟁
미군정의 공적이 된 인공 · 153 수면 위로 떠오른 신탁통치 논란 · 154 모스크바 결정의 왜곡 · 155 언론의 비분강개형 선동 · 157 “탁치 순종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 · 159 임시정부파와 한민당파의 방법론 격돌 · 161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 암살 · 162 실패한 임정 쿠데타 계획 · 164 75년간 지속된 ‘왜곡’ 보도 논란 · 166
역사 산책 3 영어는 최대의 생존 무기 · 168
제8장 “언론의 둑은 터졌다”
“뉴스에 굶주려 종이에 빨려들어가다” · 171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속간 · 173 노골적 정파성과 신문 테러 · 176 신문의 좌익 우세 · 177 방송과 미군정 홍보 · 179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 182 한글에 대한 갈증과 ‘38선의 밀수품’ · 184 6-3-3-4 학제의 도입 · 185 미군의 교육 시설 점유 · 186
제9장 ‘문화의 둑’도 터졌다
미군의 댄스파티와 ‘춤바람’ 문화 · 188 “서울 거리를 더럽히는 국치랑”? · 191 “이 땅의 사나이 목메어 운다” · 193 인구 폭발과 물가 폭등 · 195 일본인의 화폐 남발 · 196 남한 경제의 기형적인 구조 · 198 경제를 외면한 정치의 과잉 · 199
역사 산책 4 해방정국의 여성운동 · 202
제2부 1946년 : 좌우 갈등의 폭발
제1장 ‘신탁통치’ 갈등은 전쟁이었다
‘민족을 배신한 완전 반역행위’ · 207 박헌영 발언 파동 · 210 한민당·국민당·공산당·조선인민당 4당 합의 · 212 좌우 학생 충돌 · 214 소련의 ‘언론 왜곡 보도’에 대한 반격 · 217 ‘찬탁=매국, 반탁=애국’ · 218
제2장 국방경비대 창설, 자유시장제의 파탄
조선국군준비대의 해산 · 221 군사영어학교의 개설 · 223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 · 224 미군정의 자유시장제의 파탄 · 225 소작농에 대한 가혹한 대응 · 227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229
제3장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출범
굿펠로와 이승만의 ‘재치 있는 공작’ · 232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 235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 · 236 좌우익 따로 치른 3·1절 기념행사 · 237
제4장 김일성 암살 미수, 미소공동위원회
임정의 김일성 암살 미수 · 239 토지개혁과 공산당 강화 · 241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반소반공 선전 · 243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 245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 · 247 “여러분도 나와 같이 싸움꾼이 됩시다” · 248
역사 산책 5 마지막 경평전 축구 · 251
제5장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좌익의 ‘지하화’
미군방첩대의 ‘인천 공작’ · 253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찍었는가? · 254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정치적 사건’인가? · 256 신문 발행 허가제로 좌익 언론 통제 · 258
제6장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이승만의 단정론
김규식의 ‘좌익 기피증’ · 259 김규식 설득에 나선 이승만 · 261 버치의 여운형 설득 공작 · 262 이승만의 정읍 발언 · 264 이승만과 미군정의 갈등 · 266 김구의 개인적 의리 때문인가? · 268
역사 산책 6 종이가 없어 신문이 휴간하다 · 271
제7장 우익 청년단체의 전성시대
대한민주청년동맹, 김두한, 염동진 · 273 일제가 뿌린 테러의 씨앗 · 275 전국학생총연맹과 이철승 · 276 서북청년회와 선우기성 · 277 선우휘의 서청 옹호론 · 279 조선민족청년단과 이범석 · 280 정치지도자들과 우익 청년단체의 유착 · 282 왜 경찰서엔 이승만 사진이 나붙었는가? · 284
제8장 ‘국립서울종합대학안’ 파동과 ‘교육출세론’ 확산
교육 영역의 정치화 · 286 국대안에 대한 반대 논리 · 288 김두한의 ‘국대안 살리기’ 조작 음모 · 290 서청 대원 3,600명의 학교 유입 · 292 ‘교육이 출세의 지름길’ · 294
역사 산책 7 재생 종이에 고춧가루가 박혀 있는 이유 · 297
제9장 좌우 합작, 전평의 총파업, 대구 항쟁
북조선노동당 창당 · 299 박헌영의 좌우 합작 반대 · 301 좌측 5원칙과 우측 8원칙 · 302 남조선노동당 창당 합의 · 304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 · 305 “파업 진압은 전쟁이었다” · 307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 · 308 ‘대한노총은 테러리스트 조직’ · 310 ‘해방의 선물은 기근’ · 311 대구에 분 피바람 · 313 ‘내쟁에만 용감한 백성’ · 316 농민의 보수화 시작 · 318
역사 산책 8 신불출의 ‘태극기 모독’과 ‘똘똘이의 모험’ · 320
제10장 과도입법의원, 여운형·김규식의 좌절, 이승만의 방미
좌우 합작 7원칙 · 323 경찰 개혁의 무산 · 32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 · 326 좌파와 중도좌파가 빠진 입법의원 · 328 남조선노동당 창당 · 329 ‘공산당’에서 ‘노동당’으로 간판 바꾸기 · 331 “좌우는 싸움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 332 이승만과 하지의 동상이몽 · 335 이승만의 여행 경비 징수 파동 · 337 ‘하지는 공산주의자의 도구’ · 338
역사 산책 9 악극의 인기와 흥행 모리배들의 횡포 · 340
주 · 343
“지금의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보다 더 위험하다” · 4 “그날이 오면” · 6 과연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는가? · 8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 · 10 이데올로기라는 포장술 · 13 아직 진실의 값은 싸다· 15 진정한 ‘낙관과 긍정’을 위해 · 17
제1부 1945년: 36년 묵은 한의 분출
제1장 도둑같이 찾아온 8·15 해방
거짓말같이 오고 만 해방 · 31 해방의 감격과 환희 · 33 대폭발을 위해 걸린 4~5시간 · 35 ‘해방의 날’이 아닌 ‘분단의 날’이었는가? · 36 조선총독부와 여운형의 교섭 · 38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 41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 · 43 송진우의 건준 불참 이유 · 45
제2장 38선은 정말 30분 만에 그어졌는가?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 · 47 미·영·소 3국 정상의 얄타 회담 · 50 미국은 얄타에서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겼는가? · 52 루스벨트에서 트루먼으로 · 54 일본 분단의 대용품이 된 한국 · 57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 59 소련군에 대한 경계심과 경멸 · 62 소련군의 강간과 약탈 · 63
역사 산책 1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 67
제3장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미군의 서울 진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 69 안재홍이 떠난 건준의 좌경화 · 71 공산당의 좌경 헤게모니 의식 · 72 미군의 ‘친(親)일본, 반(反)조선’ 자세 · 74 내려진 일장기 자리엔 성조기 게양 · 76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 · 78 ‘준비 부족론’ 논쟁 · 80 미군의 한국인 모욕 · 82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 · 83 미군의 인종차별주의 · 85 DDT의 무차별 살포 · 87
제4장 한국민주당 창당과 ‘통역 정치’
“인공을 타도하라” · 90 “점화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 · 91 한국민주당의 창당 · 92 한민당=『동아일보』 · 94 한민당의 군정 행정고문 독식 · 95 ‘통역 정치’의 폐해 · 96 미군정의 인공 부인 · 98 미군정의 목표는 ‘인공 분쇄’ · 99 정치에 대한 굶주림 · 101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찰 장악 · 103 조병옥이 일제 경찰을 등용한 이유 · 104 ‘능률적인 폭정의 도구’ · 106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 · 107 ‘수사=고문’이라는 관행 · 108
역사 산책 2 ‘적산’과 90만 일본인의 귀환 · 110
제5장 가짜 김일성의 등장 논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 113 33세 청년 김일성의 등장 · 115 과연 김일성은 가짜였는가? · 117 하지의 이승만 환대 · 119 이승만의 인기와 정치자금 · 122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조직 · 124 이승만의 공산당 공격 · 125 자주관리운동과 전평의 결성 · 127 미군정의 자주관리운동 금지령 · 129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창당 · 130 임시정부 추대 논란 · 131
제6장 김구의 귀국, 임시정부의 분열
충칭 임시정부의 개인 자격 귀국 · 133 김구는 ‘스튜에 필요한 소금’ · 136 임정의 인공과 조공 거부 · 140 임정과 한민당의 관계 · 142 임정의 내분, 장준하의 ‘말 폭탄’ · 145 ‘임정=한독당=김구’ 전략 · 147 민생을 외면한 보상 욕구 · 149 ‘신의주 사건’과 김일성의 ‘민주 기지론’ · 150
제7장 ‘신탁통치’ 갈등과 투쟁
미군정의 공적이 된 인공 · 153 수면 위로 떠오른 신탁통치 논란 · 154 모스크바 결정의 왜곡 · 155 언론의 비분강개형 선동 · 157 “탁치 순종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 · 159 임시정부파와 한민당파의 방법론 격돌 · 161 한민당 수석 총무 송진우 암살 · 162 실패한 임정 쿠데타 계획 · 164 75년간 지속된 ‘왜곡’ 보도 논란 · 166
역사 산책 3 영어는 최대의 생존 무기 · 168
제8장 “언론의 둑은 터졌다”
“뉴스에 굶주려 종이에 빨려들어가다” · 171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속간 · 173 노골적 정파성과 신문 테러 · 176 신문의 좌익 우세 · 177 방송과 미군정 홍보 · 179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 182 한글에 대한 갈증과 ‘38선의 밀수품’ · 184 6-3-3-4 학제의 도입 · 185 미군의 교육 시설 점유 · 186
제9장 ‘문화의 둑’도 터졌다
미군의 댄스파티와 ‘춤바람’ 문화 · 188 “서울 거리를 더럽히는 국치랑”? · 191 “이 땅의 사나이 목메어 운다” · 193 인구 폭발과 물가 폭등 · 195 일본인의 화폐 남발 · 196 남한 경제의 기형적인 구조 · 198 경제를 외면한 정치의 과잉 · 199
역사 산책 4 해방정국의 여성운동 · 202
제2부 1946년 : 좌우 갈등의 폭발
제1장 ‘신탁통치’ 갈등은 전쟁이었다
‘민족을 배신한 완전 반역행위’ · 207 박헌영 발언 파동 · 210 한민당·국민당·공산당·조선인민당 4당 합의 · 212 좌우 학생 충돌 · 214 소련의 ‘언론 왜곡 보도’에 대한 반격 · 217 ‘찬탁=매국, 반탁=애국’ · 218
제2장 국방경비대 창설, 자유시장제의 파탄
조선국군준비대의 해산 · 221 군사영어학교의 개설 · 223 국방경비대는 경찰예비대? · 224 미군정의 자유시장제의 파탄 · 225 소작농에 대한 가혹한 대응 · 227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229
제3장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출범
굿펠로와 이승만의 ‘재치 있는 공작’ · 232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마라” · 235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 · 236 좌우익 따로 치른 3·1절 기념행사 · 237
제4장 김일성 암살 미수, 미소공동위원회
임정의 김일성 암살 미수 · 239 토지개혁과 공산당 강화 · 241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반소반공 선전 · 243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 · 245 소련군의 약탈과 강간? · 247 “여러분도 나와 같이 싸움꾼이 됩시다” · 248
역사 산책 5 마지막 경평전 축구 · 251
제5장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좌익의 ‘지하화’
미군방첩대의 ‘인천 공작’ · 253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찍었는가? · 254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정치적 사건’인가? · 256 신문 발행 허가제로 좌익 언론 통제 · 258
제6장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이승만의 단정론
김규식의 ‘좌익 기피증’ · 259 김규식 설득에 나선 이승만 · 261 버치의 여운형 설득 공작 · 262 이승만의 정읍 발언 · 264 이승만과 미군정의 갈등 · 266 김구의 개인적 의리 때문인가? · 268
역사 산책 6 종이가 없어 신문이 휴간하다 · 271
제7장 우익 청년단체의 전성시대
대한민주청년동맹, 김두한, 염동진 · 273 일제가 뿌린 테러의 씨앗 · 275 전국학생총연맹과 이철승 · 276 서북청년회와 선우기성 · 277 선우휘의 서청 옹호론 · 279 조선민족청년단과 이범석 · 280 정치지도자들과 우익 청년단체의 유착 · 282 왜 경찰서엔 이승만 사진이 나붙었는가? · 284
제8장 ‘국립서울종합대학안’ 파동과 ‘교육출세론’ 확산
교육 영역의 정치화 · 286 국대안에 대한 반대 논리 · 288 김두한의 ‘국대안 살리기’ 조작 음모 · 290 서청 대원 3,600명의 학교 유입 · 292 ‘교육이 출세의 지름길’ · 294
역사 산책 7 재생 종이에 고춧가루가 박혀 있는 이유 · 297
제9장 좌우 합작, 전평의 총파업, 대구 항쟁
북조선노동당 창당 · 299 박헌영의 좌우 합작 반대 · 301 좌측 5원칙과 우측 8원칙 · 302 남조선노동당 창당 합의 · 304 “쌀이 없으면 고기를 먹어라” · 305 “파업 진압은 전쟁이었다” · 307 “김두한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 · 308 ‘대한노총은 테러리스트 조직’ · 310 ‘해방의 선물은 기근’ · 311 대구에 분 피바람 · 313 ‘내쟁에만 용감한 백성’ · 316 농민의 보수화 시작 · 318
역사 산책 8 신불출의 ‘태극기 모독’과 ‘똘똘이의 모험’ · 320
제10장 과도입법의원, 여운형·김규식의 좌절, 이승만의 방미
좌우 합작 7원칙 · 323 경찰 개혁의 무산 · 32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 · 326 좌파와 중도좌파가 빠진 입법의원 · 328 남조선노동당 창당 · 329 ‘공산당’에서 ‘노동당’으로 간판 바꾸기 · 331 “좌우는 싸움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 332 이승만과 하지의 동상이몽 · 335 이승만의 여행 경비 징수 파동 · 337 ‘하지는 공산주의자의 도구’ · 338
역사 산책 9 악극의 인기와 흥행 모리배들의 횡포 · 340
주 · 343
책 속으로
1945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 각처에는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必聽)’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고하는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떨리는 목소리는 경성중앙방송국의 중계로 라디오를 통해 4분 10초 간 국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복’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했다”는 말이 곧 항복 선언이었다.
일본에서는 전날부터 항복 선언이 담긴 일왕의 녹음판을 빼앗으려고 난동을 부렸던 결사항전파와 극우파들의 할복 자살이 잇따랐다.
육군대장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1887~1945)는 이미 새벽에 배를 가르고 죽어 있었으며, 대장 5명이 할복하고 장교 100명 이상, 민간인 30여 명이 패전(敗戰) 자살의 길로 뛰어들었다.
--- 「제1부 제1장 도둑같이 찾아온 8·15 해방」 중에서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대회를 열었다.
창당 대회가 열리던 대회장 밖에서는 농민들이 곡괭이와 삽을 든 채 “땅마지기나 가진 것들이 대대로 착취하더니 오늘 또 당을 만든다고 하니 말도 안 된다”고 분개했다고 한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재명은 “뾰족이 내세울 만한 항일 경력의 인물이 없는 한민당으로서는 좌익이 기세를 올리고 ‘친일파 숙청’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와 임시정부를 연결시킬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런 요구였다”고 말한다.
한민당도 인공처럼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임시정부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했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 「제1부 제4장 한국민주당 창당과 ‘통역 정치’」 중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속간을 전후로 여러 신문이 창간되었다.
1945년 11월 25일엔 이종형(李鍾滎)을 중심으로 한 『대동신문』이 창간되었고, 1946년 2월 26일엔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한성일보』, 3월 25일엔 『현대일보』, 4월 19일엔 『중외신보』, 5월 1일엔 『독립신보』가 창간되었다.
‘찬·반탁’을 둘러싸고 극도로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신문들이 노골적인 정파성을 드러냄에 따라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이 당시엔 무슨 시위만 했다 하면 주로 신문사들이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12월 31일 우익 청년들은 『조선인민보』 사옥을 습격해 공무국원 20여 명을 구타했으며, 1946년 1월 2일엔 『조선인민보』 사옥에 수류탄을 던져 시설 일부를 파괴했다.
『조선인민보』는 1월 20일자로 신문을 다시 내면서 --- 「무지한 백색 테로에 너털우슴: 한야폐허(寒夜廢墟) 속에 윤전기는 돈다」는 제목으로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다.
--- 「제1부 제8장 “언론의 둑은 터졌다”」 중에서
민주의원과 민전 사이의 갈등은 3·1절에 표출되었다.
우익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는 서울운동장, 좌익의 3·1기념전국위원회는 남산공원에서 열렸다.
3월 1일 아침 남대문과 을지로 입구에서는 좌우 세력 사이에 군중 유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좌익 예술단체는 창경원에서 시민위안회를 열었는데, 만담가 신불출, 무용가 최승희, 배우 황출과 문예봉 등이 출연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반탁 전국학생연맹 학생들은 남산 입구와 창경원 주위에서 트럭에 올라탄 채 마이크로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은 속고 있다.
이것은 찬탁을 주장하는 민족반역자 공산당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서 발을 돌리시어 서울운동장에 갑시다.
그곳에서는 우리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말씀을 들읍시다.
거기서 3·1 정신을 기립시다.”
--- 「제2부 제3장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출범」 중에서
실제로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한 뒤, 얼마 되지 않은 6월 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게 된다.
이승만은 왜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도록 부탁했던 것일까? 이승만이 정치적 경쟁자 하나를 매장시키려는 노회(老獪)한 정치적 술수를 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이 해보라는 것을 여하간 한 번 해봐야 안 된다는 것이 증명이 될 것 아니겠느냐”는 말까지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에, 꼭 그렇게만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이승만은 사실상 김규식에게 그런 용도로 수고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며, 또 김규식은 그걸 알고서도 이승만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김규식에게 그런 소모적 용도로 수고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승만의 발상이 놀랍긴 하지만 말이다.
--- 「제2부 제6장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이승만의 단정론」 중에서
9월 총파업의 결과, 서울에서만도 295개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 3만여 명의 노동자와 1만 6,000명의 학생이 가담했다.
남한 전역에 걸쳐 참여한 노동자 총수는 25만여 명에 이르렀다.
9월 총파업으로 총 1만 1,624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가운데 150여 명의 파업 간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9월 파업의 결과 전평은 간부들의 대량 검거로 인해 쇠락해갔고 대신 대한노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노총은 대한독립촉성건국청년총연맹이 1946년 3월 10일에 결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결성 대회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대한노총은 출발부터 단순한 노동자 조직이 아니었다.
대한노총은 어용 노조도 아니었으며, ‘우익 정치 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고하는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떨리는 목소리는 경성중앙방송국의 중계로 라디오를 통해 4분 10초 간 국내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복’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했다”는 말이 곧 항복 선언이었다.
일본에서는 전날부터 항복 선언이 담긴 일왕의 녹음판을 빼앗으려고 난동을 부렸던 결사항전파와 극우파들의 할복 자살이 잇따랐다.
육군대장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1887~1945)는 이미 새벽에 배를 가르고 죽어 있었으며, 대장 5명이 할복하고 장교 100명 이상, 민간인 30여 명이 패전(敗戰) 자살의 길로 뛰어들었다.
--- 「제1부 제1장 도둑같이 찾아온 8·15 해방」 중에서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대회를 열었다.
창당 대회가 열리던 대회장 밖에서는 농민들이 곡괭이와 삽을 든 채 “땅마지기나 가진 것들이 대대로 착취하더니 오늘 또 당을 만든다고 하니 말도 안 된다”고 분개했다고 한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재명은 “뾰족이 내세울 만한 항일 경력의 인물이 없는 한민당으로서는 좌익이 기세를 올리고 ‘친일파 숙청’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와 임시정부를 연결시킬 필요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런 요구였다”고 말한다.
한민당도 인공처럼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임시정부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했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 「제1부 제4장 한국민주당 창당과 ‘통역 정치’」 중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속간을 전후로 여러 신문이 창간되었다.
1945년 11월 25일엔 이종형(李鍾滎)을 중심으로 한 『대동신문』이 창간되었고, 1946년 2월 26일엔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한성일보』, 3월 25일엔 『현대일보』, 4월 19일엔 『중외신보』, 5월 1일엔 『독립신보』가 창간되었다.
‘찬·반탁’을 둘러싸고 극도로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신문들이 노골적인 정파성을 드러냄에 따라 폭력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이 당시엔 무슨 시위만 했다 하면 주로 신문사들이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12월 31일 우익 청년들은 『조선인민보』 사옥을 습격해 공무국원 20여 명을 구타했으며, 1946년 1월 2일엔 『조선인민보』 사옥에 수류탄을 던져 시설 일부를 파괴했다.
『조선인민보』는 1월 20일자로 신문을 다시 내면서 --- 「무지한 백색 테로에 너털우슴: 한야폐허(寒夜廢墟) 속에 윤전기는 돈다」는 제목으로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다.
--- 「제1부 제8장 “언론의 둑은 터졌다”」 중에서
민주의원과 민전 사이의 갈등은 3·1절에 표출되었다.
우익의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는 서울운동장, 좌익의 3·1기념전국위원회는 남산공원에서 열렸다.
3월 1일 아침 남대문과 을지로 입구에서는 좌우 세력 사이에 군중 유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좌익 예술단체는 창경원에서 시민위안회를 열었는데, 만담가 신불출, 무용가 최승희, 배우 황출과 문예봉 등이 출연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반탁 전국학생연맹 학생들은 남산 입구와 창경원 주위에서 트럭에 올라탄 채 마이크로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은 속고 있다.
이것은 찬탁을 주장하는 민족반역자 공산당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서 발을 돌리시어 서울운동장에 갑시다.
그곳에서는 우리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의 고귀한 말씀을 들읍시다.
거기서 3·1 정신을 기립시다.”
--- 「제2부 제3장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출범」 중에서
실제로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라고 종용한 뒤, 얼마 되지 않은 6월 3일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게 된다.
이승만은 왜 김규식에게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도록 부탁했던 것일까? 이승만이 정치적 경쟁자 하나를 매장시키려는 노회(老獪)한 정치적 술수를 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독립을 위해 미국 사람이 해보라는 것을 여하간 한 번 해봐야 안 된다는 것이 증명이 될 것 아니겠느냐”는 말까지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에, 꼭 그렇게만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이승만은 사실상 김규식에게 그런 용도로 수고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며, 또 김규식은 그걸 알고서도 이승만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김규식에게 그런 소모적 용도로 수고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승만의 발상이 놀랍긴 하지만 말이다.
--- 「제2부 제6장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이승만의 단정론」 중에서
9월 총파업의 결과, 서울에서만도 295개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 3만여 명의 노동자와 1만 6,000명의 학생이 가담했다.
남한 전역에 걸쳐 참여한 노동자 총수는 25만여 명에 이르렀다.
9월 총파업으로 총 1만 1,624명이 검거되었는데, 이 가운데 150여 명의 파업 간부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9월 파업의 결과 전평은 간부들의 대량 검거로 인해 쇠락해갔고 대신 대한노총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한노총은 대한독립촉성건국청년총연맹이 1946년 3월 10일에 결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었다.
결성 대회엔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 우익계 정치인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대한노총은 출발부터 단순한 노동자 조직이 아니었다.
대한노총은 어용 노조도 아니었으며, ‘우익 정치 집단으로서 일종의 테러리스트 조직’이었다.
--- 「제2부 제9장 좌우 합작, 전평의 총파업, 대구 항쟁」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4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1945년 해방 이후의 정국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타협과 화합은 정상적인 시절을 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전투성만 돋보였고, 중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저질러진 학살의 예비 연습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충분히 이루어졌다.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그 잔인성에서 다를 건 없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폭력국가의 유산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별로 극복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양극의 충돌이 해방정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펼쳐졌다.
물론 1945년 해방 이후의 극단적인 정국은 타협을 거부한 좌우(左右) 양쪽의 책임이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욕망’에 더 치우쳤던 우익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우익은 일제와는 타협했어도 좌익과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온건 우익은 소수였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강경 우익에게 일제와의 타협은 자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좌익과의 타협은 권력과 금력을 차지하는 데에 위협이 되거나 그걸 나눠먹어야 하는 타협이었다.
바로 이런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에 우선했거나 이데올로기와 혼재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은 쌀밥 한 숟가락을 위해, 어떤 이들은 더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45년과 1946년, 제2권은 1947년과 1948년과 194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38선은 정말 30분 만에 그어졌는가?
1945년 7월 22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 정상회담은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와 소련의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다음 날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한국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되어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종전 후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혼란을 초래했다.
미국이 한반도 정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였다.
소련의 한반도 점령은 향후 군사적으로 일본과 동아시아 전체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미국에 통고했다.
그날 오후 늦게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일반명령 제1호’의 문안 작성 임무를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에 긴급 명령했다.
이 ‘일반명령 제1호’의 한반도와 극동 지역에 관계된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를 정책과 과장인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에게 맡겼다.
당시 소련군은 중국의 서북부, 만주, 남사할린, 쿠릴 열도 등으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고, 일부 병력은 한반도 최북단 동북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반면 미군 병력은 한반도에서 1,000킬로미터 남쪽인 오키나와에 진주해 있었다.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이었으며, 이들은 30분 만에 지도를 보고 위도 38선을 분할선으로 잡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이 분할안을 조지 링컨 소장에게 올렸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최종적 ‘일반명령 제1호’로 확정되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전달되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이 지도는 미국 국립기록보존소에 남아 있다.
‘신탁통치’ 갈등과 투쟁
1945년 12월 16일부터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의 외상들이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격렬한 ‘찬·반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존 하지는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독립을, 그것도 지금 당장 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만일 신탁통치 계획이 발표된다면 이들은 실제로 물리적 저항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신탁’이라는 말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식민지 통치를 변명하면서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강한 심리적 반발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신탁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주한미군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관측 보도였다.
이 기사는 미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최악의 오보였다.
『동아일보』 보도 이후 남한 사회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썩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좌익과 우익 공동으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구성되어 12월 28일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28일 밤 경교장에서 주석 김구를 중심으로 철야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을 결정했다.
12월 29일 밤 경교장에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자는 ‘임시정부파’와 국민대회를 열어 반대 여론을 미국에 알리자는 ‘한민당파’가 격돌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좌익의 ‘지하화’
미군정은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이 당 자금과 선전운동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정판사에 지폐 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원인 박낙종을 내세워 조선정판사를 접수한 이후 6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찍어냈다고 발표했다.
조선정판사는 원래 일제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이 접수해 당 본부 간판을 걸고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그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7월 29일 첫 재판이 열렸을 때 법정은 범인으로 체포된 공산당원 16명에게 최고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
미군정기의 최대 의혹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는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더는 진위가 가려지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선출된 과도입법의원을 계획함으로써 극우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우파의 문제를 좌파의 영향 탓으로 돌려 “남한 좌파의 뿌리를 뽑는 것을 목표로 한 정책 결정의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했다는 미군정의 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는 단순한 위조지폐 사건을 좌익 세력의 탄압을 위해 조작·확대한 것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좌익 계열의 새로운 정기간행물 신청은 허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신문 발행 허가제를 통해 좌익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배후 거점으로 판단한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을 폐쇄시키기로 결정했다.
우익 청년단체의 전성시대
우익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21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으로 정리되었다가, 1946년 봄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으로 통합되었다.
1946년 7월 31일에는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이 결성되었다.
전국학련은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해방정국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해 결성되었다.
서청은 종교적 수준의 반공 의식으로 무장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제주 4·3 항쟁 진압시 서청의 활동은 잔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반공주의자들은 서청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간주했다.
미군정도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해서 1946년 10월 9일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하게 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비정치, 비군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우면서 폭력적인 반공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김구를 지지했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 한민당 계열의 대한독립청년단, 한독당 계열의 광복청년회, 조선건국청년회, 조선청년당 계열의 한국청년회, 서북청년회, 대한민주청년동맹, 조선민주당 계열의 평양청년회, 월남인 그룹으로 구성된 서북학생연맹 등이었다.
우익 청년단체가 엄청나게 많았던 건 당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정치단체나 정치지도자들도 청년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많은 청년단체가 정치인들에게서 자금을 일부 제공받는 동시에 경찰의 비호하에 폭력을 일삼으면서 사회 각계에서 기부금을 뜯어내는 것으로 연명했다.
폭력성이 강한 테러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지만, 그 실상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강했다.
1945년 해방 이후의 정국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타협과 화합은 정상적인 시절을 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전투성만 돋보였고, 중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저질러진 학살의 예비 연습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충분히 이루어졌다.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그 잔인성에서 다를 건 없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폭력국가의 유산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별로 극복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양극의 충돌이 해방정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펼쳐졌다.
물론 1945년 해방 이후의 극단적인 정국은 타협을 거부한 좌우(左右) 양쪽의 책임이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욕망’에 더 치우쳤던 우익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우익은 일제와는 타협했어도 좌익과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온건 우익은 소수였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강경 우익에게 일제와의 타협은 자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좌익과의 타협은 권력과 금력을 차지하는 데에 위협이 되거나 그걸 나눠먹어야 하는 타협이었다.
바로 이런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에 우선했거나 이데올로기와 혼재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은 쌀밥 한 숟가락을 위해, 어떤 이들은 더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45년과 1946년, 제2권은 1947년과 1948년과 194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38선은 정말 30분 만에 그어졌는가?
1945년 7월 22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 정상회담은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와 소련의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다음 날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한국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되어야 한다”는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종전 후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혼란을 초래했다.
미국이 한반도 정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였다.
소련의 한반도 점령은 향후 군사적으로 일본과 동아시아 전체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미국에 통고했다.
그날 오후 늦게 일본군의 항복 조건들이 담긴 ‘일반명령 제1호’의 문안 작성 임무를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에 긴급 명령했다.
이 ‘일반명령 제1호’의 한반도와 극동 지역에 관계된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를 정책과 과장인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에게 맡겼다.
당시 소련군은 중국의 서북부, 만주, 남사할린, 쿠릴 열도 등으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고, 일부 병력은 한반도 최북단 동북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반면 미군 병력은 한반도에서 1,000킬로미터 남쪽인 오키나와에 진주해 있었다.
찰스 본스틸과 딘 러스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이었으며, 이들은 30분 만에 지도를 보고 위도 38선을 분할선으로 잡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이 분할안을 조지 링컨 소장에게 올렸고,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최종적 ‘일반명령 제1호’로 확정되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전달되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이 지도는 미국 국립기록보존소에 남아 있다.
‘신탁통치’ 갈등과 투쟁
1945년 12월 16일부터 미국, 영국, 소련 등 3국의 외상들이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삼상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이 논의되었다.
이는 국내에서 격렬한 ‘찬·반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존 하지는 “한국인들은 무엇보다도 독립을, 그것도 지금 당장 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만일 신탁통치 계획이 발표된다면 이들은 실제로 물리적 저항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신탁’이라는 말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식민지 통치를 변명하면서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강한 심리적 반발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신탁이라는 말은 합리적인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 주한미군 사령부가 결정서를 입수하기 이틀 전에 나온 관측 보도였다.
이 기사는 미소 양측 입장과 주장을 정반대로 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서 내용과 전혀 다른 최악의 오보였다.
『동아일보』 보도 이후 남한 사회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썩였고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좌익과 우익 공동으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구성되어 12월 28일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28일 밤 경교장에서 주석 김구를 중심으로 철야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을 결정했다.
12월 29일 밤 경교장에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는 미군정을 임시정부가 접수하자는 ‘임시정부파’와 국민대회를 열어 반대 여론을 미국에 알리자는 ‘한민당파’가 격돌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좌익의 ‘지하화’
미군정은 1945년 8·15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이 당 자금과 선전운동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정판사에 지폐 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산당원인 박낙종을 내세워 조선정판사를 접수한 이후 6차례에 걸쳐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찍어냈다고 발표했다.
조선정판사는 원래 일제시대에 근택인쇄소라는 이름으로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이 접수해 당 본부 간판을 걸고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그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무기 정간시켰다.
7월 29일 첫 재판이 열렸을 때 법정은 범인으로 체포된 공산당원 16명에게 최고 무기징역에서 최저 10년형을 선고했다.
미군정기의 최대 의혹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는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더는 진위가 가려지지 못하고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당시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선출된 과도입법의원을 계획함으로써 극우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우파의 문제를 좌파의 영향 탓으로 돌려 “남한 좌파의 뿌리를 뽑는 것을 목표로 한 정책 결정의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조선공산당이 개입했다는 미군정의 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는 단순한 위조지폐 사건을 좌익 세력의 탄압을 위해 조작·확대한 것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좌익 계열의 새로운 정기간행물 신청은 허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신문 발행 허가제를 통해 좌익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배후 거점으로 판단한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을 폐쇄시키기로 결정했다.
우익 청년단체의 전성시대
우익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21일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으로 정리되었다가, 1946년 봄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으로 통합되었다.
1946년 7월 31일에는 전국학생총연맹(전국학련)이 결성되었다.
전국학련은 김두한의 대한민청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해방정국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서북청년회(서청)는 19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해 결성되었다.
서청은 종교적 수준의 반공 의식으로 무장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제주 4·3 항쟁 진압시 서청의 활동은 잔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반공주의자들은 서청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간주했다.
미군정도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해서 1946년 10월 9일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결성하게 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비정치, 비군사,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우면서 폭력적인 반공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부분 이승만과 김구를 지지했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 한민당 계열의 대한독립청년단, 한독당 계열의 광복청년회, 조선건국청년회, 조선청년당 계열의 한국청년회, 서북청년회, 대한민주청년동맹, 조선민주당 계열의 평양청년회, 월남인 그룹으로 구성된 서북학생연맹 등이었다.
우익 청년단체가 엄청나게 많았던 건 당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정치단체나 정치지도자들도 청년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많은 청년단체가 정치인들에게서 자금을 일부 제공받는 동시에 경찰의 비호하에 폭력을 일삼으면서 사회 각계에서 기부금을 뜯어내는 것으로 연명했다.
폭력성이 강한 테러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지만, 그 실상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강했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8월 18일
- 쪽수, 무게, 크기 : 388쪽 | 152*225*30mm
- ISBN13 : 9788959068067
- ISBN10 : 8959068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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