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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씨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의 황후
시씨,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의 황후
Description
책소개
평생을 황실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떠돌았지만,
죽은 후에 만인의 사랑을 받게 된 황후의 삶

600년간 유럽을 제패한 제왕의 가문 합스부르크,
제왕의 몰락은 화려하면서 비참했다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위세를 상징한 황후 엘리자베트,
그녀의 애처로우면서 가련한 삶을 그려내다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엘리자베트는 1854년 4월 24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였다.
언니 대신 황제의 사랑을 받고 결혼하게 된 엘리자베트.
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한창 혁명과 전쟁으로 얼룩지던 19세기, 황후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고 빈민들을 돌보면서 ‘자비의 천사’로 칭송받았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고 심성이 고왔기에 국민들은 엘리자베트를 찬양했지만, 황실 사람들은 이러한 황후를 시기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어린 시절, 바이에른의 초원 지대에서 말을 타고 농민들과 주로 어울리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딱딱한 예법에 적응하지 못했다.
시어머니 조피는 황후가 낳은 자식들을, 교육을 명목으로 황후에게서 빼앗아 갔고, 남편은 아내가 처한 비극에 무관심했다.
화려한 위상 속에서 황후의 마음은 점점 닳아만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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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결혼 60주년 기념일 013
2.
바이에른 엘리자베트의 출생과 어린 시절 021
3.
엘리자베트 공주의 약혼 027
4.
결혼식 035
5.
처음으로 닥친 문제들 044
6.
여행과 슬픔 050
7.
루돌프 황태자의 탄생 058
8.
엘리자베트의 병과 마데이라에서의 체류 064
9.
빈에서 도피한 황후 069
10.
헝가리에서의 대관식 074
11.
여대공 마리 발레리 079
12.
괴뢸뢰 성 084
13.
빈의 황후 090
14.
황태자 루돌프의 결혼식 096
15.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국왕 105
16.
황후의 여행 110
17.
황후의 문학적 취향 120
18.
황후의 일상생활 124
19.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 130
20.
황후의 죽음 140

부록 153
가계도 154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책 속으로
이날 태어난 아이는 훗날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가 될 엘리자베트였다.
많은 나라에서 크리스마스이브의 출생은 불길한 징조로 여겼지만, 어린 공주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그녀가 훗날 겪게 될 경험을 암시하지 않았다.

--- p.24

바이에른의 알프스에서는 아직도 "포센호펜의 리제"가 험난한 산길을 헤치고 돌아와 에델바이스 꽃을 팔에 가득 안고 있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 p.27

1시간 후, 황제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을 때, 아무런 예고 없이 어린 소녀가 손에 들장미 다발을 들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짧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비단결 같고 풍성한 밤색 머리카락이 날씬한 몸매를 따라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 p.31

이튿날 빈으로의 공식 입성이 이루어졌다.
모든 집은 사랑의 손길로 장식되었고, 신부가 지나갈 거리는 꽃으로 가득하여 바다를 이뤘다.
빈과 비텐 외곽 또는 “안 데르 빈”을 연결하는 엘리자베트 다리가 그날 개방됐고, 황후의 이름이 붙어졌다.

--- p.41

짧은 기도 후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는 중앙 제단으로 나아가 답례를 했고, 반지를 교환하며 손을 맞잡았다.
의식이 끝날 무렵 대주교가 교회의 축복을 선언하자, 그 순간 대포의 포성이 울려 퍼지면서 오스트리아에 황후가, 헝가리에 왕비가 탄생했음을 선언했다.
--- p.45

이러한 천성은 궁정 생활의 규제와 단조로움에 반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 화려함과 의식은 처음부터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예법을 싫어하는 정도는 그 불행한 여왕보다 더 심했다.

--- p.48

엘리자베트의 아름다움과 매너에 모든 사람의 마음이 사로잡혔고, 황제는 아주 기뻐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내 모든 군대가 이룩한 것보다 그대의 미소로 정복한 사람들이 더 많구려!”
--- p.53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흘리며 헝가리를 떠났다.
그녀의 첫 번째 큰 슬픔이 마자르인 첫 방문 때 일어났다.
이 슬픔은 그녀를 이 민족에 더욱 가깝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후 엘리자베트는 이 민족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녀는 황후로서 존경받고, 수호천사처럼 숭배받았다.

--- p.57

1881년 5월 10일에 결혼식이 거행됐다.
중요한 행사를 앞에 두고 진행된 축제 동안 엘리자베트는 신랑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냈지만, 그녀가 미래의 며느리와 벨기에의 국왕과 왕비를 대할 때 보인 차갑고 거리감 있는 태도는 숨길 수가 없었다.
--- p.98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은 신경쇠약으로 알려진 비텔스바 가문의 유전병이 여러 세대를 거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지만, 황후 엘리자베트에게 점점 더 뚜렷이 나타났다.
그녀의 고독에 관한 열망,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향, 끊임없는 변화에 관한 갈망은 분명 유전적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녀의 병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 p.124

1889년 1월 31일, 황제와 황후는 외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끔찍한 고통에 잠겼다.
마이어링 비극의 주요 내용 이 잘 알려져 있어, 이와 관련된 수백 개의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p.130

“난 두렵지 않아요.
나의 친구여.
우리는 머잖아 우리의 운명을 마주할 거예요.
일어날 운명은 무엇이든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노력도 운명을 바꿀 수 없어요.
내가 운명론자라는 걸 그대도 알잖아요.” 엘리자베트가 대답했다.
--- p.144

출판사 리뷰
600년간 유럽을 제패한 제왕의 가문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위세를 상징한 황후 엘리자베트

19세기 유럽은 혁명의 물결로 뒤덮이면서 제왕들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600년간 유럽을 제패한 합스부르크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1848년 혁명의 여파로 백부인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한 뒤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왕학을 공부하며 절대주의 왕정을 고수한다.
그래서 프란츠 요제프는 이러한 전제주의에 반발한 헝가리 독립운동가에게 암살당할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 대공비 조피는 후계자 생산을 위해 재빨리 아들의 신붓감을 물색한다.
그 대상은 바이에른에서의 공작의 장녀 헬레네였다.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는 들장미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바이에른 공작의 차녀에게 반해, 그녀에게 청혼하니, 그녀가 바로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불린 엘리자베트였다.


화려한 드레스 속에 감추어진 시씨의 슬픔
합스부르크 가문의 비극적인 가족사의 한가운데에 서다

엘리자베트는 군중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려, 황후가 되었다.
아름다운 황후의 모습에 국민들은 많은 사랑을 보냈지만, 이때부터 엘리자베트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바이에른의 초원 지대에서 말을 타고 등산하며 농민들과 주로 어울리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엄격한 예법에 적응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궁정 사람들은 왕족 출신이 아닌 그녀를 업신여겼고, 시어머니 조피는 황후가 낳은 자식들을, 교육을 명목으로 황후에게서 빼앗아 간다.
남편은 아내가 처한 비극을 방관할 뿐이었다.
화려한 위상 속에서 황후의 마음은 점점 닳아만 갔고, 자식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막내 마리 발레리만큼은 그녀가 손수 키우며 애정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자식들에게 신경을 못쓴 사이, 아들 루돌프가 아버지와 갈등을 맺다가 연인과 동반자살을 하자, 그녀는 아들에게 애정을 주지 못한 점을 후회하며 평생 상복을 입고 다녔다.


평생을 황실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떠돌았지만,
죽은 후에 오스트리아의 상징이 되다

대중은 아름다운 황후를 우러러봤지만, 대중의 눈길을 받는 것을 싫어하던 시씨는 생전에 오스트리아에 거의 머무르지 않았다.
궁정 생활에서 적응하지 못한 시씨는 주로 외국 여행으로 공무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가명을 쓰며 스위스, 이집트, 헝가리 등을 여행하던 중,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성립하면서 그녀는 헝가리의 왕비가 되었다.
시씨는 복속 당한 신세였던 헝가리 국민에게 연민을 느꼈고, 헝가리를 유독 사랑하였다.
헝가리 국민 역시 자애로우면서 아름다운 시씨를 사랑했다.
그리고 한창 전쟁 중에 부상 당한 병사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자, 시씨는 그들을 직접 보살폈고 오스트리아 국민 역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씨가 비극적으로 암살을 당했을 때 황제를 비롯해 많은 국민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이로써 시씨는 사후에 오스트리아를 가면 꼭 만나볼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이 되었다.

이 책만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

1.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

사륙판(128*188mm) 기준 150쪽 안팎으로 분량이 짧고 책의 내용이 어렵지 않아, 19세기 유럽 역사에 지식이 없는 독자들도 언제, 어디서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핵심을 짚어내기에, 시씨 황후의 가련하면서 애처로운 삶을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고증을 지키고,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작품

독일에서 문학 학위를 취득하고 편집자로 일한 저자가 시씨 황후의 삶에 영감을 얻고 집필한 만큼, 고증에 충실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유럽 역사서 번역과 집필에 집중해 온 히스토리퀸과 총신대 출신 박사 학위를 취득한 교정교열가가 감수하는 만큼, 이번에도 양질의 역사서를 출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 출판되면서,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을 줄 시씨 황후의 삶을 다룬 일대기가 최초로 공개됩니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3월 01일
- 쪽수, 무게, 크기 : 158쪽 | 176g | 128*188*9mm
- ISBN13 : 9791197958717
- ISBN10 : 1197958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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