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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독립운동유적 120곳 답사여행 3
대구 독립운동유적 120곳 답사여행 3
Description
책소개
2019년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의 전면 증보판이다.
군위군이 대구시에 편입되고, 대구 시내에서도 새로 발굴된 유적과 멸실된 유적이 발생하면서 기존 원고를 보태고 가다듬을 필요성이 생긴 김에 전면적으로 증보하였는데, 책이 너무 두꺼워져서 불가피하게 세 권으로 분권하였다.
제1권이 달서구와 남구 편, 제2권이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성군 편, 제3권이 중구와 군위군 편이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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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 굿판 : 최영 * 11
01.
대구 형무소 터 * 11
02.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투쟁지 * 20
03.
대구고보 동맹휴학 투쟁지 * 27
04.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투쟁지 * 29
05.
태극단 이상호 지사 생가터 * 31
06.
태극단 김상길 지사 생가터 * 31
07.
태극단 서상교 지사 생가터 * 31
08.
의열단 이종암 지사 관련 집 * 33
09.
이육사 기념관 * 41
10.
남산교회 * 46
11.
동화사 학승 의거 보현사 * 52
12.
덕산정 시장 * 52
13.
1919년 3월 10일 염매시장 * 54
14.
김진만 김진우 형제 지사 집터 * 55
15.
최제우 처형지 * 57
16.
대구권총사건 유적지 * 58
17.
진골목의 국채보상운동 부인들 * 60
18.
교남YMCA * 61
19.
서상한 지사 집터 * 65
20.
허무당 선언 작성지 * 66
21.
상화 고택 * 69
22.
최해청 집터 * 71
23.
서상돈 고택 * 72
24.
이상정 고택 * 74 - 현진건 안내판 * 76
[시] 나는 현진건이다 : 최영 * 80
25.
90계단 * 82
26.
신명학교 기념탑 ? 블레어 선교사 주택 * 82
27.
계성학교 * 84
28.
1919년 대구 만세운동 시발지 * 87
29.
이종암 지사 독립운동자금 모금지 * 89
30.
이일우 고택 * 102
31.
이상화 생가터 * 104
32.
우현서루 터 * 104
33.
달성토성을 방문한 순종 * 116
34.
최제우 동상 * 118
35.
서동균 예술비 * 120
36.
상화 시비 * 120
37.
이상룡 구국비 * 121
38.
허위 순국비 * 123
39.
ㄱ당 결성 * 125
40.
광복회 창립 * 126
41.
순종 동상 터 * 151 ? 조양회관 터 * 155
42.
광문사 터 * 157
43.
북성로 * 158
44.
1919년 만세운동길 * 163
45.
대구경찰서 터 * 165
46.
종로초등학교, 최제우 나무 * 167
47.
희움 ‘위안부’ 역사관 * 168
48.
김석형 집터 * 171
49.
북후정 터 * 172
50.
장진홍 의사 유적지 * 173
51.
동양척식주식회사 터 * 178
52.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공원 * 179
53.
1919년 3월 8일의 마지막 현장 * 166
이상의 순서에 따라 답사를 하면 효율적입니다.
54.
허석 의사 순국 기적비 * 183
55.
군위 성결교회 * 185
56.
이용문 지사 집터 * 186
57.
박무조 지사 표충비 * 187
58.
만세운동 현장 우보 장터 * 188
59.
김하락 의병군 주둔지 * 189
60.
자정 순국 이현섭 지사 집터 * 190
61.
신간회 유쾌동 지사와 가창 학살 * 191
62.
의열단원 류시태 지사 묘소 * 210

책 속으로
일제 강점기 때 “사진 하면 대구의 최계복이고 회령의 정도선”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만큼 유명했던 사진작가 최계복을 기린 《최계복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집》이 2009년 10월 28일 발간되었다.
사진집 표지는 그의 최초 작품 ‘영선못의 봄’이 장식했다.
1933년 작품인 〈영선못의 봄〉에는 잘 차려입은 여인네들과 중절모에 양복으로 성장을 한 신사들이 유람선에 올라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만큼 영선못이 컸다는 말이다.

1970년대만 대구에는 큰 호수들이 많았다.
최계복 사진집에나오는 영선못이 대구교대 앞 자리에 있었고, 배자못이 경북대학교 북문 너머에 있었다.
배자못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는 감삼동에도 큰 호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짓는다고 다들 메워버렸다.


그보다 더 옛날에는 현재의 서문시장 일원도 커다란 호수였다.
본래 늪이었던 곳을 일제가 매립해서 시장으로 만들었다.
이는 1919년 3월 8일 대구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일제는 서문시장이 만세운동의 현장이기 때문에 대구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두고두고 독립운동을 되뇌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1923년 4월 1일 현재 위치로 강제 이동시켰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명성을 떨치던 서문시장은 (중략)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대구부에 의해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이전이) 추진되었다.
1919년 대구 지방의 3 ? 1운동은 흰옷을 입은 서문시장 장꾼들이 주도하였고, 식민주의자들은 흰옷 입은 군중이 시내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현재의 서문시장 터전은 당초에는 “성황당(천황당)못”이라고 불리던 늪지대였다.
저지대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객토客土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 내당동 · 비산동 고지대에 있던 고분군의 봉토를 실어다가 메웠다.’라고 소개한다.

그렇게 일제는 대구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인 서문밖시장을 없애버렸다.
지금의 서문시장 부지를 만드느라 내당동 · 비산동 일대 고분들도 모두 뭉개버렸다.
그 흙을 옮겨와 늪을 메웠던 것이다.
(대구시는 2023년 그것을 기념하여 ‘서문시장 100년 대잔치’를 벌였다.
제정신인가?)

1919년 당시의 서문시장은, 대구읍성의 서문(달서문, 중구 서성로1가 52-5) 앞에 위치한다 하여 서문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국채보상로99길 12(동산동 15-30) 일원의 세칭 ‘오토바이 골목’ 일대였다.
골목 입구에 ‘대구 3 · 1독립운동 발원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서문밖시장은 흔히 ‘큰장’이라 불렸는데, 평양 장 및 강경 장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큰장이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8일은 ‘대구 큰장’ 장날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운집했으므로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아주 적격인 때와 장소였던 것이다.
--- 본문 중에서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4년 09월 02일
- 쪽수, 무게, 크기 : 216쪽 | 500g | 148*216*10mm
- ISBN13 : 9791188701582
- ISBN10 : 1188701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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