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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논어
두 개의 논어
Description
책소개
동양고전과 현대를 잇는 사유의 거장, 한형조 교수의 유작
《논어》를 두고 펼쳐지는 주자와 다산의 경학적 대결


3년간의 치열하고 치밀한 연구 끝에 원고 집필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안타깝게도 작고한 한형조 교수(1958-2024)의 유작 《두 개의 논어》가 1년간의 편집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책은 주자와 다산의 《논어》 해석 차이에서 진정한 공자의 가르침을 가늠해보는 인문교양서이자, 한형조 교수가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동양적 사유의 본질’을 집약한 평생 연구의 결실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의 학구적 열정과 사유의 깊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논어》는 조선조 500년을 주도한 주자의 해석이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이 주자의 해석을 정통 《논어》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다산이 해석한 《논어》는 주자의 풀이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심지어 다산은 주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다양한 문헌을 바탕으로 고증해 나갔다.
철학자?명상가로서의 주자와 정치가?역사가로서의 다산, 이 둘의 해석 차이는 그들이 처한 환경과 문제, 그리고 개성의 산물이다.
이 흥미로운 주제를 저자는 모던하고 과감한 언어와 감성으로,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논어》를 경쾌하고 신선하게 풀어냈으며,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기 위해 간결하면서도 함축을 살리는 문장으로 다듬어냈다.
또한 논어 속에 흩어져 있는 당시의 사건과 정황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마천의 〈공자세가〉 번역과 다산을 ‘숨은 가톨릭 신자’라고 바라본 정민 교수의 2023년 발제를 논평한 글도 부록으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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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설
치마를 걷고 이 강을 | 남쪽 끝에 내던져진 유배객 | 왜 경학인가? | 명상에서 정치로 | 어떻게 읽을 것인가?

1부.
사건과 인물들


1장.
노 소공의 망명

2장.
제 경공과의 대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군주 | 네 번의 만남 | 군주의 德, 정치의 책임

3장.
양호와 반란자들
양호와의 질긴 인연

4장.
위 영공과 부인 남자
아리따운 부인 남자와의 대화

5장.
초 섭공과 은둔자들, 진채의 고난
초 섭공과의 대화 | 은둔자들 | 진채의 고난

2부.
공자의 제자들


1장.
자로, 포호빙하
까투리 한 마리 | 뗏목을 타고 바다로 | 성격과 공부 | 자로의 정치적 포부 | 자로의 기도 | 자로의 죽음

2장.
자공, 박시제중
화려한 그릇 | 부자 자공 | 자공의 비평적 감식안 | 자공, 정치를 논하다 | 忠恕, 공자의 일이관지 | 공자의 내면과 종교적 심층 | 자공, 당신이 공자보다 뛰어나오

3장.
안회, 극기복례
안회의 학습 | 안회의 풍모 | 안회의 죽음 | 학문의 경지 | 유교의 최고 이념

3부.
공자의 사상


1장.

어떡해야 하나? | 나는 알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 學, 삶의 기술을 익히다 | 섬김의 가르침 | 제자 3명의 터득한 學의 경지 | 전통과 고전, 책을 통한 학습 | 공자, 학습의 사람 | 《논어》 첫 구절 | 學이란 무엇인가? | 태어나면서 아는 자 | 배우기만 하거나 생각만 하거나 | 공자, 학습의 길 회고 | 下學과 上達

2장.

부귀 | 天理를 말하는 주자 | 天命을 듣는 다산 |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 나는 오십에 天命을 알았다 | 제사와 신들의 세계 | 하늘의 징벌 | 하늘은 속일 수 없다 | 일이관지는 하늘에 닿아 있다

3장.

仁을 너희 집으로 삼아라 | 왜 仁을 말하지 않았을까? | 짐은 무겁고, 길은 멀다 | 仁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 | 배려와 전체성 | 상호성의 원리 | 克己의 훈련, 爲己의 기쁨 | 仁의 지속성 | 은나라의 세 현자 | 백이와 숙제 | 德의 배반자들 | 배반 혹은 위선 | 仁은 안인가, 밖인가? | 仁에서 聖으로, 정치의 문명화 | 나는 다만 학습의 사람일 뿐 | 공자의 일이관지

4장.

고향을 떠나다 | 스승의 道는 너무 높습니다 | 공자의 정치 혁명 | 심정윤리와 책임윤리 | 不欲이란? | 덕치의 이상, 유가와 법가 | 無爲냐, 有爲냐? | 요순의 정치, 그 실상에 대하여 | 敬, 자각적 주시냐, 직무적 책임이냐? | 정치의 목표 | 신뢰, 정치의 기반 | 군사와 군대 | 감옥과 형벌 | 재정을 다루는 기술 | 다산의 정치적 현실주의

결어
사건과 정황 | 공자의 제자들 | 공자의 사상 | 의미와 전망

참고 문헌

부록
1.
〈공자세가〉 번역
조상,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기(기원전 551-523년) | 제나라에서 돌아온 후(기원전 522-503년) | 노나라 정치의 한가운데에서(기원전 502-497년) | 첫 방랑 5년(기원전 496-492년) |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의 곤경(기원전 491-489년) | 계속되는 유랑(기원전 488-484년) | 학자로서의 활동, 그리고 개인적 습관(기원전 484-481년) | 공자의 죽음 그리고 평가

2.
다산을 위한 변명(정민 교수 발제 논평)
강이원의 누설 | 이가환은 邪學의 교주인가? | 성호 이익의 서학관 | 다산의 4종 저작, 면피 혹은 반성? | 유학의 별파 혹은 유교적 유신론자 | 허황되고 괴이하며 하늘을 거스르고 신을 모독하다 | 이성의 법정 | 마무리 | 후기

3.
내가 좋아하는 고전 구절

추모사.
한형조의 바다와 삶, 학문과 철학
바다 사람 한형조 | 한국학대학원 시절의 몇 가지 추억 |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 | 주자학과 다산학의 차이 | 《두 개의 논어》 혹은 ‘세상만사’라는 바다 | 불교와 광자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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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주자와 다산의 《논어》 해석은 ‘전혀’ 다르다.
같은 책을 두고 이렇게 서로 다른, 많이는 상반된 해석을 내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논어》는 하나가 아니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고”,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여러 《논어》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

--- p.34

공자는 정공에게 말한다.
정치의 흥망은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군주가 그 지위를 ‘권력’으로 감각할 때 하고 싶은 대로 폭정을 휘두르고, 거기 아무도 토를 달거나 반발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확실히 망조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군주의 지위를 ‘책임’으로 이해할 때, 즉 백성들의 안정과 복지 걱정에 밤잠을 설칠 때, 그 나라는 틀림없이 흥륭의 트랙으로 올라선다.
이를 위해 군주와 신하의 관계 또한 일방적 지배와 종속이 아닌 상호 존중과 협력으로 맺어져야 한다.

--- p.95

다산은 유교의 ‘원리’를 우주론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되찾고 싶어 한다.
그것이 비조 공자를 축으로 내려온 유교의 유구한 전통이다.
그런데 주자를 위시한 송대 유학이 이 프레임을 왜곡해버렸다고 주먹을 쥔다.
“하나의 이치가 인간과 우주를 섞음으로써 형이상학의 늪에 빠졌고, 인간은 일상에서 무엇을 성취해 나가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 p.273

주자는 ‘자연’을 중시한다.
그것을 삶의 이념으로 설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를 도덕적 규범으로 알고들 있지만, 그것은 과정 혹은 초보로 이해된다.
목공의 솜씨나 자동차 운전처럼, 처음에는 의도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익숙해지면 모든 유위(有爲)가 떨어져 나가고 손과 몸의 자연스러운 동작이 절로 표현된다.
그것처럼 도덕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다’로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되지만, 그것이 완전해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다.
주자는 노력의 단계를 서(恕), 자연스러운 탈각의 상태를 인(仁)으로 구분했다.

--- p.350~351

주자학과 다산은 오로지 대립적으로만 볼 수 없다.
두 체계 모두 거시적 전망에서 이학(理學)에 속한다.
이학은 삶의 의미를 세속적 관행 너머에서 찾는다.
개인의 감각과 욕망을 제어해서 타자를 배려하고, 전체의 질서에 협력하는 것을 권고한다.
덕성의 내재와 축적을 두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사회적 도덕’의 기획인 점에서 둘은 서로 다르지 않다.

--- p.492

부모의 뜻을 그대로 따르고 언제나 복종하는 것이 효(孝)가 아니다.
부모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고, 전혀 의롭지 않은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다.
자식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아니다 싶으면 저항하고 거부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 대놓고 삿대질하고 전쟁을 벌이지는 말라고 충고한다.
가정 안에서는 효를 다하고, 집을 나서면 사람들을 존중하고 모실 것.
그것이 인간이 학(學)을 해야 할 기초적 훈련이다.

--- p.515

다산의 윤리학은 주자보다 더 험준하다.
나날의 전쟁터 앞에 서 있는 듯할 것이다.
주자는 천도(天道)의 자연성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훨씬 평탄하다.
다만 기질과 물욕으로 인한 일탈에 유의하고, 자신을 잘 보존해 나가면 될 것이다.
다산은 그렇지 않다.
인간 속에 상반되는 욕구들이 주도권을 갖고 다툰다.
흡사 천사와 악마가 인간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으로 윤리적 정황을 소묘했다.
주자가 천리(天理)를 말하고, 다산이 천명(天命)의 본연을 강조할 때, 이 서로 다른 윤리학의 방향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 p.600

다산은 주자의 합리적 설명이 공자가 말한 ‘하늘’의 리얼한 의미를 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신은 자연이 아닌 것을….
그분은 자연을 만드신 분이고, 그리하여 그보다 높이 계신 분이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모습, 들리지 않는 그분의 목소리를 두렵고 조심스럽게 받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태만한 삶을 영위한다면, 그분의 분노가 머리에 떨어질 것이다.
그때는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

--- p.676

공자는 자주색을 싫어했다.
빨간색이라면 새빨간 핏빛이어야 하는데, 어정쩡하고 애매한 자주색이 웬 말이냐는 것.
이 구절이 앞의 교언영색(巧言令色) 장에 바로 붙어 있는 것도 내 눈에는 예사롭지 않다.
공자는 이 비유를 통해, 진정한 군자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 사이에, 큰 심연이 파여 있음을 일러주는 듯하다.
이를 일러 ‘사이비(似而非)’라고 한다.
겉으로 보면 유덕한 사람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德과 가장 먼 사람들.
다산은 이들 ‘덕(德)의 도둑들’, 즉 위선자들을 뭉뚱그려 ‘향원(鄕原)’이라고 부른다.

--- p.744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벽을 허물면 너와 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 기맥은 온 나라를 넘어 세계로 그리고 우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주자는 말한다.
그때 나는 자연이 되고, 더 이상의 인위적 노력은 필요 없다.
바람직한 정치적 행동, 리더십 또한 그 안에 있을 것이었다.
내가 나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벽이 허물어졌으므로, 그때의 행동은 나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것이 되고 우주의 것으로 피어난다.
그것을 주자는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한다”라고 적었다.

--- p.769

충서(忠恕)란 무엇일까? 주자는 명상의 철학자답게, 충(忠)을 내향적 자기 본질의 확보로, 서(恕)를 외적 사물과 일에의 연장으로 읽었다.
그러나 다산은 이 체용적 발상에 브레이크를 건다.
그렇다면 원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되지 않는가? 그는 충(忠)은 ‘충심으로, 진실하게’라는 부사이고, 핵심 키워드는 서(恕) 한 글자라고 단언했다.
자공과 나눈 다음의 대화가 저간의 안개를 한 번에 걷어주고, 공자의 생각과 유교의 정신을 천둥처럼 일깨운다
--- p.773

다시 말하지만, 유교의 원론은 ‘세습’이 아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자질도 묻지 않고, 단순히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군주가 되고 귀족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는 유교의 공적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선양에서 세습으로의 분수령은 우임금이었다.
자신은 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아 놓고, 정작 후계는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 p.800

출판사 리뷰
개인과 내면에 집중한 주자
사회와 관계를 중시한 다산
공자의 가르침을 읽는 두 사상가의 서로 다른 시선


《논어》는 짧고 간결한 경구로 되어 있다.
글자 하나하나가 의문이고, 구절과 문장의 의미는 더욱 난감하고 불분명하다.
사건의 배경과 맥락은 묻혀 있고, 어투는 직설인지 반어인지 감탄인지도 논란이다.
주자는 500년 조선의 사상과 교양의 중심이었고, 다산은 실학의 대표자로 선왕의 도(道)를 재정립하는 데 필생의 정력을 기울였다.
주자와 다산의 《논어》 해석은 ‘전혀’ 다르다.
주자와 다산의 경학적 대결은 불꽃을 튀길 정도로 격렬하고, 차이는 근본적이다.
저자는 두 거장의 해석 정신의 차이를, 서양의 고전적 어법으로 “명상(vita contemplativa) vs.
활동(vita activa)”으로 읽는다.

주자에게 자기 존재의 핵심은 불교의 불성처럼 우주적 동력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선하다.
즉 인간의 악은 무지와 잘못된 습관에서 오며,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잘못된 습관을 교정해 나간다면 본래의 ‘본성’을 회복하고 건전한 사회인으로 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각성한 현자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온 천하를 일깨워 자신의 본성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처럼 주자학의 기획은 소외된 인간을 본래의 자신으로, 병든 심신을 고쳐 건강한 인간으로 살게 하려는 치유의 기술로 집약된다.

다산은 이 순진한 기획은 철학자의 이상향이지, 현실 정치를 고려한 해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산의 시대는 근본적인 변혁의 ‘인위적’ 설계가 필요한 때였다.
그는 유교가 사회 윤리를 다루는 학문임을 잊지 않았다.
다산은 덕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활동을 통해서 ‘축적’되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내부로 향하는 시선은 공허하고, 자칫 인간의 일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이렇게 썩어 문드러진 것은 바로 이 같은 주자의 내면적 경향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공자가 만난 일생일대의 사건과 인물

1부에서는 공자의 일생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과 인물들을 탐사한다.
기원전 517년, 노나라 소공의 망명이 최초의 큰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공자의 문명관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공자는 제나라 경공과 만나 정치적 참여를 타진하게 된다.
그와의 만남은 또한 공자의 정치사상을 읽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 일생 공자와 얽힌 인물 양호가 있다.
공자가 젊은 시절, 귀족이 연 잔치에 참석했다가 매몰차게 쫓겨난 이래, 양호와의 악연이 계속되었다.
양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외국으로 망명한 후, 공자는 노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대사구의 벼슬을 지내며 자신의 뜻을 펴는 듯했으나, 그 실험은 실패하여 결국 망명길에 오른다.


그 후, 처음 간 곳이 위나라이고, 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도 위나라다.
당시의 제후인 위나라 영공, 그리고 그의 아름답고 유력한 부인 남자와의 대화들이 있다.
이어 공자의 유랑은 저 멀리 남쪽 끝까지 이어졌다.
거기서 만난 은자들, 그리고 진채의 고난이 있다.
이 고난을 통해 공자의 양보할 수 없었던, 道의 실제와 만날 수 있다.
주자는 《논어》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펼쳐나가는 데 총력을 기울인 데 비해, 연도와 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와 달리 다산은 자신의 역사학적 성향과 정치적 관심으로 《논어》의 정황을 가능한 한 치밀하게 파고든다.
이 작업으로 그동안 묻혀 있던 시간을 찾아주고 맥락을 부여함으로써, 때로 발언의 의미가 완전히 새로운 빛 속에 드러나도록 했다.

덕행의 안회, 언어의 자공, 정사의 자로

2부에서는 공자의 대표 제자들을 다룬다.
《논어》에서 다룬 ‘네 분야’의 대표적 제자는 10명이다.
저자는 여기서 세 명을 골랐다.
덕행의 안회, 언어의 자공, 그리고 정사의 자로가 그들이다.
이 셋은 공문의 가장 뛰어난 개성들이고, 공자와 오랜 유랑을 함께했으며, 《논어》에도 가장 많이 등장한다.
공자와의 유대와 끈끈함은 말할 것도 없다.
공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주제도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그가 생각한 정치적 이념과 덕성의 훈련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수제자 안회의 안빈낙도, 자공의 실무 능력, 자로의 용기 등을 인정하고, 그들의 결점과 부족을 보완해주려는 공자의 교사로서의 지도 능력도 잘 읽을 수 있다.

주자는 이 셋 가운데 단연 ‘안회’를 대표격으로 내세우는 동시에, 자공과 자로를 공문의 이류급으로 폄하한다.
하지만 다산은 새로운 해석을 통해, 공자가 자공이 유능한 정치적 기술을 높이 인정하고, 생산과 부에 대한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자로 역시 한 국가의 재정과 군사의 전문가였을 뿐만 아니라 공정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을 통해 부와 가난을 바라보는 주자와 다산의 엇갈리는 시각도 엿볼 수 있다.

주자와 다산의 바라보는 공자의 핵심 사상 네 가지

3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공자의 핵심 사상 네 가지, 즉 학문(學), 기원(天), 덕성(仁), 정치(政)의 연관을 읽는 주자와 다산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교는 仁을 최고의 목표로 한다.
대체 그 仁이란 무엇인가? 주자는 仁이 우주의 내적인 힘이자 인간의 본성이며 자기 내부에서 ‘명상’을 통해 발견하라고 권하는 데 반해, 다산은 仁이 내부에 있지 않으며 사회적 공간에서 행동의 선택을 통해 힘겹게 축적되는 외재적 덕성임을 역설한다.
이 서로 다른 시각은 당연히 學, 즉 仁에 이르는 길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주자는 仁에 이르는 길은 오래된 자기 망각, 그 오염을 걷어내고 본래의 빛과 힘을 회복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산은 모든 學의 중추에 ‘관계’를 내세운다.
그에게 學은 仁에 이르기 위한 제반 노력을 총칭하며, 그 仁은 오직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장 속에서 적절한 행동으로 벽돌 쌓듯 축성되는 덕성일 뿐이다.


또한 주자는 《시경》 《서경》 《논어》에 등장하는 天과 天命을 天理라는 자연 개념으로 치환했다.
그로 인해 天에 담겨 있던 초자연적·종교적 지평이 탈각되었다.
다산은 공자의 天은 ‘자연’으로 환원할 수 없다며 오래된 종교적 관념, 초월적 존재를 다시금 복권시키고자 한다.
다산은 天이 만물을 만들고 인간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신 분이며,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희미한 양심의 소리로 울린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질서(政)의 이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다.
주자는 자연의 본성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나라를 올바로 경영할 수 있다고 말하며, 정치를 도덕에 귀속시킨다.
하지만 다산은 “명분보다 실리가 더 중요하다”고 외친다.
즉 남에게 어떤 이득을 주고, 사회에 무슨 기여를 하느냐가 관건이다.

《논어》 읽기의 새로운 시도

《논어》는 하나가 아니다.
불교는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 하고, 《성경》에는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고 했다.
유교에도 주석가만큼의 《논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특히 조선의 오랜 해석의 권위는 주자가 독점해왔다.
따라서 다산의 《논어》는 주자와의 비교 혹은 대결 없이는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저자는 3년 동안 연구를 진행했다.
저자는 주자와 다산의 해석을 통해 《논어》의 의미를 뚜렷이 함으로써, 공자의 사상과 그 체계에 접근하는 길을 제공한다.
이는 《논어》 읽기의 새 시도다.
두 사상가의 뜻이 때로 극단적으로 갈리더라도, 독자들은 이 두 뿔을 잡고 사색하다 보면,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공자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고전에 익숙하고 독창적으로 사유하는 두 사상가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공자의 목소리를 듣는 귀를 열어 그의 사상과 포부를 가늠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24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1,096쪽 | 150*225*60mm
- ISBN13 : 9791173323935
- ISBN10 : 1173323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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