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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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책소개
박수호 (psh4039@yes24.com)
가야의 선주민은 진시황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바로 그 흉노족인가? 걸출한 인재였던 온달을 '바보'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불렸던 최치원이 '취업난'에 시달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임한 발해가 고구려 때문에 잊혀진 것이 과연 사실인가?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역사에 정말 궁금했던 59가지 질문을 골라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기존의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에 도전한다.
동시에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을 지양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물음들을 지속적으로 던져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해 낸다.
기존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발랄한 일러스트가 눈길을 끈다.
외교담판으로 유명한 고려의 서희를 '말빨 10단'으로 표현하는 등 곳곳에 숨어 있는 촌철살인의 비유와 패러디 등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중학생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역사에 정말 궁금했던 59가지 질문을 골라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기존의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에 도전한다.
동시에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을 지양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물음들을 지속적으로 던져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해 낸다.
기존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발랄한 일러스트가 눈길을 끈다.
외교담판으로 유명한 고려의 서희를 '말빨 10단'으로 표현하는 등 곳곳에 숨어 있는 촌철살인의 비유와 패러디 등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중학생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저자 서문 | 강요하는 역사가 아닌, 생각하고 탐구하고 새롭게 발견하는 역사
그림작가 서문 | “역사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
1_ 신화로 역사가 열리다 상고시대
▶고대인은 왜 청동거울을 목에 걸고 다녔을까? ▶단기 원년 BC 2333년이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산출된 것이라는데, 과연 사실일까? ▶기중기도 포클레인도 없던 시대에 300톤짜리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역사는 두부처럼 ‘자르는’ 사람 마음이라고? ▶본격적인 삼국이 시작되기 전, 한반도 중?남부에 78개의 나라가 있었다는데…? ▶기자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낙랑이 세계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까닭은? ▶부여에서는 심한 가뭄이 들면 왕의 목을 잘랐다는데, 정말 그랬을까?
2_ 누가 진짜 강한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첫 번째 왕은 과연 ‘동명성왕’이었을까? ▶애절한 사랑시 「황조가」를 지은 유리왕은 신하들을 생매장한 폭군이었다는데…? ▶태조왕은 93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한 뒤 죽게 만들었다? ▶가야의 선주민이 진시황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흉노족이라고?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는 과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음탕한 여자였는가? ▶고구려사는 왜 한국사인가? ▶백제의 풍납토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된 까닭은? ▶ 근초고왕은 백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는데…? ▶삼국시대 목간은 고대사의 신비한 비밀을 푸는 최고의 열쇠이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역사 기록은 왜 온통 영토 확정에 대한 것뿐일까? ▶고구려 벽화 전시회의 부작용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었다는데…?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은 과연 조작되었는가? ▶수백 년 뒤 고구려의 패망이 장수왕 탓이라고? ▶개로왕은 과연 바둑으로 나라를 망쳤을까? ▶이차돈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 ▶무령왕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까닭은? ▶걸출한 인재였던 온달을 기득권을 쥔 귀족과 역사가들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화랑 중에 동성연애자가 많았다는데, 과연 사살일까? ▶희대의 로맨스 주인공 서동이 사실은 원효대사였다고? ▶고구려는 사실 육군 못지않게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연개문은 과연 고구려를 대표하는 영웅인가, 멸망을 초래한 독재자인가?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3_ 무늬는 통일 실상은 분단 남북국시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주장한 발해가 고구려 때문에 잊혀졌다고? ▶원효는 실제로 해골 물을 마셨을까? ▶『화랑세기』 필사본은 진본인가, 가짜인가? ▶일본의 목조사유상과 우리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쌍둥이처럼 닮은 까닭은? ▶경순왕 김부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 사건을 도모했다?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신라인인 척한 까닭은?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도 한때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백수였다? ▶경문왕이 데리고 잤다는 뱀은 개혁세력인 ‘6두품’을 상징한다는데? ▶신라의 왕자라고 주장하던 궁예가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운 까닭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고?
4_ 호족이 세운 나라를 천민이 지키다 고려시대
▶왕건의 유언을 기록한 훈요십조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다? ▶허약하다고 알려진 고려 혜종은 어떻게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잡을 수 있었을까? ▶고려시대 사람들도 공무원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는데? ▶서희는 어떻게 세 치 혀만으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고려 문인들 사이에 팬클럽을 몰고 다니던 소동파가 사실은 반고려주의자였다? ▶거란의 2차 침입은 패배한 전쟁이었나? ▶반란을 일으킨 이자겸의 집안이 고려 말까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김부식이 정지상의 유령에게 살해당했다는 데 사실일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후유증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는데…? ▶무신정권에 의해 축출된 의종의 정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어용지식인이었다는데…? ▶정권을 틀어쥔 무신들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을까?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꺾었다는데… ? ▶고려의 왕들은 왜 그토록 몽골의 공주와 혼인하지 못해 안달했을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와 퍼뜨렸다는 것은 사살이 아니다? ▶기황후는 과연 악녀였을까?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게 사실일까?
인물인덱스
한국사 연표
그림작가 서문 | “역사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어?”
1_ 신화로 역사가 열리다 상고시대
▶고대인은 왜 청동거울을 목에 걸고 다녔을까? ▶단기 원년 BC 2333년이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산출된 것이라는데, 과연 사실일까? ▶기중기도 포클레인도 없던 시대에 300톤짜리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 ▶역사는 두부처럼 ‘자르는’ 사람 마음이라고? ▶본격적인 삼국이 시작되기 전, 한반도 중?남부에 78개의 나라가 있었다는데…? ▶기자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낙랑이 세계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까닭은? ▶부여에서는 심한 가뭄이 들면 왕의 목을 잘랐다는데, 정말 그랬을까?
2_ 누가 진짜 강한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첫 번째 왕은 과연 ‘동명성왕’이었을까? ▶애절한 사랑시 「황조가」를 지은 유리왕은 신하들을 생매장한 폭군이었다는데…? ▶태조왕은 93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한 뒤 죽게 만들었다? ▶가야의 선주민이 진시황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흉노족이라고?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는 과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음탕한 여자였는가? ▶고구려사는 왜 한국사인가? ▶백제의 풍납토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된 까닭은? ▶ 근초고왕은 백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는데…? ▶삼국시대 목간은 고대사의 신비한 비밀을 푸는 최고의 열쇠이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역사 기록은 왜 온통 영토 확정에 대한 것뿐일까? ▶고구려 벽화 전시회의 부작용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 시작되었다는데…?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은 과연 조작되었는가? ▶수백 년 뒤 고구려의 패망이 장수왕 탓이라고? ▶개로왕은 과연 바둑으로 나라를 망쳤을까? ▶이차돈은 법흥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 ▶무령왕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까닭은? ▶걸출한 인재였던 온달을 기득권을 쥔 귀족과 역사가들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화랑 중에 동성연애자가 많았다는데, 과연 사살일까? ▶희대의 로맨스 주인공 서동이 사실은 원효대사였다고? ▶고구려는 사실 육군 못지않게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연개문은 과연 고구려를 대표하는 영웅인가, 멸망을 초래한 독재자인가?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3_ 무늬는 통일 실상은 분단 남북국시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주장한 발해가 고구려 때문에 잊혀졌다고? ▶원효는 실제로 해골 물을 마셨을까? ▶『화랑세기』 필사본은 진본인가, 가짜인가? ▶일본의 목조사유상과 우리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쌍둥이처럼 닮은 까닭은? ▶경순왕 김부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의 포석정 습격 사건을 도모했다?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신라인인 척한 까닭은?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도 한때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백수였다? ▶경문왕이 데리고 잤다는 뱀은 개혁세력인 ‘6두품’을 상징한다는데? ▶신라의 왕자라고 주장하던 궁예가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운 까닭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고?
4_ 호족이 세운 나라를 천민이 지키다 고려시대
▶왕건의 유언을 기록한 훈요십조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다? ▶허약하다고 알려진 고려 혜종은 어떻게 맨손으로 자객을 때려잡을 수 있었을까? ▶고려시대 사람들도 공무원이 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는데? ▶서희는 어떻게 세 치 혀만으로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고려 문인들 사이에 팬클럽을 몰고 다니던 소동파가 사실은 반고려주의자였다? ▶거란의 2차 침입은 패배한 전쟁이었나? ▶반란을 일으킨 이자겸의 집안이 고려 말까지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김부식이 정지상의 유령에게 살해당했다는 데 사실일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후유증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났다는데…? ▶무신정권에 의해 축출된 의종의 정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어용지식인이었다는데…? ▶정권을 틀어쥔 무신들은 왜 스스로 왕이 되지 않았을까? ▶세계 최강의 몽골군을 천민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꺾었다는데… ? ▶고려의 왕들은 왜 그토록 몽골의 공주와 혼인하지 못해 안달했을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와 퍼뜨렸다는 것은 사살이 아니다? ▶기황후는 과연 악녀였을까?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게 사실일까?
인물인덱스
한국사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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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그렇다면 과연 온달이라는 인물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인물 자체의 유무를 떠나 온달이 활동했던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온달이 신라에게 잃은 고구려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는 아차산성은 한반도에서 지리적, 경제적으로 가장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한강 유역이다.
고구려가 내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온달의 이야기가 모두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에서는 온달이 하급 귀족이었고 뛰어난 전공을 세워 왕의 사위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벼락출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귀족들이 온달을 바보라고 폄하했다는 것이다.
결국 온달은 정말 바보가 아니라 바보로 놀림을 당한 인재였다는 얘기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영양왕(?陽王) 14년에 신라를 공격한 고승(高勝)이라는 인물이 온달의 모델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아무리 온달의 이야기가 허구이고 평강공주가 세상에 없던 인물이라고 해도 그중에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온달 이야기는 고구려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의 역사에서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나타나고 있다.
온달과 평강공주는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신분을 뛰어넘은 혁명전사가 되기도 하고(북한에서),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 싸운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힘만으로 사회의 차별과 벽을 넘어선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 본문 중에서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肩逸)은 열두 살 된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면서 10년 내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는 비정한 말이지만 골품제도의 한계에 부딪혔던 6두품의 피맺힌 원한이기도 했다.
최치원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남이 백을 하면 자신은 천을 해 결국 874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빈공과, 賓貢科)에 합격했다.
그 후 2년 만에 얻은 관직이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水縣尉)였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굉장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지금의 안휘성 일대 율수현이라는 동네의 위라는 벼슬이니,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동사무소 직원쯤 되는 자리였다.
최치원이 왜 그 정도의 벼슬밖에 못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빈공과 출신에게는 벼슬에 상한선이 존재했다.
지금도 외국인 출신을 나라의 중요한 관직에 앉히려고 하지 않는데,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최치원은 1년 만에 벼슬자리를 차버리고 더 높은 과거인 굉사과(宏詞科)를 준비했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이후 최치원은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며 남의 글을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다가 회남군 절도사(淮南軍節度使) 고변(高騈)이 그를 고용하면서 겨우 기회를 잡았다.
고변은 그 선조가 발해인으로 당나라 절도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최치원이 고변에게 보냈던 이력서 내지 자기소개서가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처절한지 취업으로 고생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절절히 동감할 것이다.
주요 내용은 자신을 써달라는 것이며 몸이 비쩍 마르고 아직 어리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변은 최치원을 자신의 종사관, 즉 비서로 고용했다.
최치원 하면 곧장 나오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때 쓰인 것이다.
온달이 신라에게 잃은 고구려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는 아차산성은 한반도에서 지리적, 경제적으로 가장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한강 유역이다.
고구려가 내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온달의 이야기가 모두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에서는 온달이 하급 귀족이었고 뛰어난 전공을 세워 왕의 사위가 되었을 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벼락출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귀족들이 온달을 바보라고 폄하했다는 것이다.
결국 온달은 정말 바보가 아니라 바보로 놀림을 당한 인재였다는 얘기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영양왕(?陽王) 14년에 신라를 공격한 고승(高勝)이라는 인물이 온달의 모델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아무리 온달의 이야기가 허구이고 평강공주가 세상에 없던 인물이라고 해도 그중에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무엇보다 온달 이야기는 고구려의 역사가 아니라 현대의 역사에서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나타나고 있다.
온달과 평강공주는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신분을 뛰어넘은 혁명전사가 되기도 하고(북한에서), 가부장적 권위에 맞서 싸운 페미니스트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힘만으로 사회의 차별과 벽을 넘어선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 본문 중에서
최치원의 아버지 견일(肩逸)은 열두 살 된 최치원을 당나라에 유학 보내면서 10년 내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는 비정한 말이지만 골품제도의 한계에 부딪혔던 6두품의 피맺힌 원한이기도 했다.
최치원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남이 백을 하면 자신은 천을 해 결국 874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빈공과, 賓貢科)에 합격했다.
그 후 2년 만에 얻은 관직이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水縣尉)였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굉장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지금의 안휘성 일대 율수현이라는 동네의 위라는 벼슬이니,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동사무소 직원쯤 되는 자리였다.
최치원이 왜 그 정도의 벼슬밖에 못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빈공과 출신에게는 벼슬에 상한선이 존재했다.
지금도 외국인 출신을 나라의 중요한 관직에 앉히려고 하지 않는데, 그때는 오죽했겠는가? 최치원은 1년 만에 벼슬자리를 차버리고 더 높은 과거인 굉사과(宏詞科)를 준비했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이후 최치원은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며 남의 글을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다가 회남군 절도사(淮南軍節度使) 고변(高騈)이 그를 고용하면서 겨우 기회를 잡았다.
고변은 그 선조가 발해인으로 당나라 절도사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최치원이 고변에게 보냈던 이력서 내지 자기소개서가 『동문선(東文選)』에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처절한지 취업으로 고생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절절히 동감할 것이다.
주요 내용은 자신을 써달라는 것이며 몸이 비쩍 마르고 아직 어리다는 말까지 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변은 최치원을 자신의 종사관, 즉 비서로 고용했다.
최치원 하면 곧장 나오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바로 이때 쓰인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사의 숲을 보는 날카로운 눈과 통찰력을 키워주는 독특한 역사 교과서!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대왕세종」이나 「이산」 같은 역사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챙겨 본다.
하지만 픽션이 많이 가미된 사극만으로는 왠지 허전한 느낌이 있어 「역사스페셜」, 「한국사전」류의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도 가급적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한데 그러고도 확실한 역사의 흐름과 맥이 잡히지 않아 답답하다.
불현듯, 무엇이든 맥을 잡고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 주말에 맘먹고 서점엘 나간다.
두 시간 넘게 역사 코너를 빙빙 돌며 내게 꼭 맞는 한국사 책을 눈에 불을 켜고 찾지만 딱이다 싶은 책이 보이질 않는다.
즉 독특한 형식에 충실한 내용을 갖추고 있고, 아주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기존의 한국사 책들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주장과 관점으로 무장한 그런 책 말이다.
왜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은 이렇듯 하나같이 지루하고 딱딱하고 천편일률적일까?
이런 생각을 해본 독자라면,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저자 이한은 『조선기담』, 『나는 조선이다』와 같은 책을 통해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왔다.
또한 그는 다른 책들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흥미진진한 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여 한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애써왔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서 독자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한국사에 숨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하고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출간되었다.
저자는 단군신화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1』: 단군신화부터 고려시대까지 /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2』: 조선시대에서 근현대까지) 거의 4,000년에 가까운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한국사의 흐름과 맥을 짚어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59가지 테마를 골라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는 우리 역사의 큰 숲을 보는 날카로운 눈과 통찰력을 갖고 싶어 하는 성인뿐 아니라 달달 외는 한국사 공부에 싫증난 중고생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십대들도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 책에는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우리의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을 뒤집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배워 그 이름을 알고 있고, 얼마 전 MBC 사극 「주몽」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고대국가 부여에 대한 내용을 보자.
부여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 더 잘 알려진 나라이다.
부여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서보다 중국의 부록 역사서인 『열전』에 더욱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여는 열전의 순서에서 고구려나 백제보다 앞서 있고 평가도 후한 편이다.
이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하얀 옷을 즐겨 입었고 예절을 알며 온순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고구려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스럽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중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탓일 것이다.
‘하얀 옷을 즐기는 온순한 나라’ 하면 언뜻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부여는 굉장히 살벌한 나라였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에게 12배로 갚게 하고, 여자가 질투를 하면 죽여서 그 시체를 남산에 버렸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한 가뭄이 들면 부여는 왕이 정치를 잘못한 탓이라고 왕의 목을 베거나 쫓아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이 가진 생명력이 다했다고 보고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해에 대한 내용도 자못 흥미롭다.
저자는 발해의 역사가 차츰 소외되고 더 나아가 거의 잊혀지게 된 주요한 원인을 역설적이게도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지’에 있다고 주장한다.
발해와 고려는 모두 고구려 계승 의지를 천명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발해가 망하고 왕족을 비롯한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에 귀순한 뒤 고려조정은 고의적으로 발해의 역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보자.
왕건이 개국 당시 받아들인 수많은 발해의 유민을 통해 발해 역사를 정리해 책으로 남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삼국사기』조차 발해 역사를 외면해 버렸다.
이로 인해 발해 역사 대부분이 사멸되었는데, 훗날 조선시대 역사가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渤海考)』를 정리하면서 바로 이 점을 성토했다.
그리고 자신이 수집한 발해 역사를 책으로 정리하면서 이것은 정사(正史)가 아닌 초고에 불과하다며 ‘발해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려가 건국되던 무렵에는 발해가 갓 망했을 즈음이니 발해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서류나 책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고려가 이러한 사료들을 모아 발해사(渤海史)를 정리했다면 발해에 대해 좀더 풍부하고 정확한 내용이 알려졌을 것이다.
기록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해 후세에 전해주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2장.
삼국시대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한 뒤 죽게 만들었다?」 꼭지에서도 재미있는 관점이 발견된다.
저자는 이 글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자명고와 자명각, 즉 적군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어 위기를 알렸다는 낙랑의 신비한 북과 나팔을 ‘고도로 발달한 명령체계와 정보 전달 시스템’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면 자명고와 자명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에 자동기계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북과 나팔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북은 전진을, 나팔은 후퇴를 의미하는 신호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낙랑국을 정벌하기 위한 고구려의 노력은 연거푸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낙랑국이 이들 악기 덕분에 미리 알고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군이 몇 번이나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그때마다 상대방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낙랑의 정보 전달이 신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낙랑군의 일부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인 낙랑국이 파발이나 봉화제도 등을 갖추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영문을 모르는 고구려인이 낙랑국에 신비한 북과 나팔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밖에도 이 책은 「걸출한 인재였던 온달을 기득권을 쥔 귀족과 역사가들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희대의 로맨스 주인공 서동이 사실은 원효대사였다고?」,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도 한때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백수였다?」,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어용지식인이었다는데…?」 등의 꼭지를 통해 우리의 통념과 낡은 상식을 통쾌하게 깨뜨릴 뿐 아니라 새롭게 역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대왕세종」이나 「이산」 같은 역사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챙겨 본다.
하지만 픽션이 많이 가미된 사극만으로는 왠지 허전한 느낌이 있어 「역사스페셜」, 「한국사전」류의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도 가급적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한데 그러고도 확실한 역사의 흐름과 맥이 잡히지 않아 답답하다.
불현듯, 무엇이든 맥을 잡고 흐름을 파악하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지, 하는 생각이 들어 주말에 맘먹고 서점엘 나간다.
두 시간 넘게 역사 코너를 빙빙 돌며 내게 꼭 맞는 한국사 책을 눈에 불을 켜고 찾지만 딱이다 싶은 책이 보이질 않는다.
즉 독특한 형식에 충실한 내용을 갖추고 있고, 아주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기존의 한국사 책들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주장과 관점으로 무장한 그런 책 말이다.
왜 시중에 나와 있는 역사책들은 이렇듯 하나같이 지루하고 딱딱하고 천편일률적일까?
이런 생각을 해본 독자라면,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저자 이한은 『조선기담』, 『나는 조선이다』와 같은 책을 통해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왔다.
또한 그는 다른 책들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흥미진진한 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여 한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애써왔다.
이 책은 그 연장선상에서 독자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한국사에 숨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하고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출간되었다.
저자는 단군신화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1』: 단군신화부터 고려시대까지 /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 2』: 조선시대에서 근현대까지) 거의 4,000년에 가까운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한국사의 흐름과 맥을 짚어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59가지 테마를 골라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시 발견하는 한국사』는 우리 역사의 큰 숲을 보는 날카로운 눈과 통찰력을 갖고 싶어 하는 성인뿐 아니라 달달 외는 한국사 공부에 싫증난 중고생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십대들도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 책에는 매우 흥미진진하면서도 우리의 낡은 상식과 틀에 박힌 생각을 뒤집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예컨대, 학창 시절 국사시간에 배워 그 이름을 알고 있고, 얼마 전 MBC 사극 「주몽」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고대국가 부여에 대한 내용을 보자.
부여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 더 잘 알려진 나라이다.
부여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서보다 중국의 부록 역사서인 『열전』에 더욱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부여는 열전의 순서에서 고구려나 백제보다 앞서 있고 평가도 후한 편이다.
이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하얀 옷을 즐겨 입었고 예절을 알며 온순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고구려 사람들은 사납고 야만스럽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중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탓일 것이다.
‘하얀 옷을 즐기는 온순한 나라’ 하면 언뜻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부여는 굉장히 살벌한 나라였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에게 12배로 갚게 하고, 여자가 질투를 하면 죽여서 그 시체를 남산에 버렸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심한 가뭄이 들면 부여는 왕이 정치를 잘못한 탓이라고 왕의 목을 베거나 쫓아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왕이 가진 생명력이 다했다고 보고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발해에 대한 내용도 자못 흥미롭다.
저자는 발해의 역사가 차츰 소외되고 더 나아가 거의 잊혀지게 된 주요한 원인을 역설적이게도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지’에 있다고 주장한다.
발해와 고려는 모두 고구려 계승 의지를 천명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발해가 망하고 왕족을 비롯한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에 귀순한 뒤 고려조정은 고의적으로 발해의 역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다음의 내용을 보자.
왕건이 개국 당시 받아들인 수많은 발해의 유민을 통해 발해 역사를 정리해 책으로 남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삼국사기』조차 발해 역사를 외면해 버렸다.
이로 인해 발해 역사 대부분이 사멸되었는데, 훗날 조선시대 역사가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渤海考)』를 정리하면서 바로 이 점을 성토했다.
그리고 자신이 수집한 발해 역사를 책으로 정리하면서 이것은 정사(正史)가 아닌 초고에 불과하다며 ‘발해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려가 건국되던 무렵에는 발해가 갓 망했을 즈음이니 발해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서류나 책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고려가 이러한 사료들을 모아 발해사(渤海史)를 정리했다면 발해에 대해 좀더 풍부하고 정확한 내용이 알려졌을 것이다.
기록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해 후세에 전해주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2장.
삼국시대의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정치적으로 철저히 이용한 뒤 죽게 만들었다?」 꼭지에서도 재미있는 관점이 발견된다.
저자는 이 글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자명고와 자명각, 즉 적군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어 위기를 알렸다는 낙랑의 신비한 북과 나팔을 ‘고도로 발달한 명령체계와 정보 전달 시스템’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면 자명고와 자명각은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에 자동기계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북과 나팔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다.
북은 전진을, 나팔은 후퇴를 의미하는 신호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낙랑국을 정벌하기 위한 고구려의 노력은 연거푸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낙랑국이 이들 악기 덕분에 미리 알고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구려군이 몇 번이나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그때마다 상대방은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낙랑의 정보 전달이 신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낙랑군의 일부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인 낙랑국이 파발이나 봉화제도 등을 갖추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영문을 모르는 고구려인이 낙랑국에 신비한 북과 나팔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밖에도 이 책은 「걸출한 인재였던 온달을 기득권을 쥔 귀족과 역사가들이 바보로 만들었다는데…?」, 「희대의 로맨스 주인공 서동이 사실은 원효대사였다고?」,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도 한때는 취업난에 시달리는 백수였다?」, 「『동국이상국집』의 저자 이규보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어용지식인이었다는데…?」 등의 꼭지를 통해 우리의 통념과 낡은 상식을 통쾌하게 깨뜨릴 뿐 아니라 새롭게 역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08년 06월 25일
- 쪽수, 무게, 크기 : 384쪽 | 585g | 148*210*30mm
- ISBN13 : 9788958072317
- ISBN10 : 895807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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