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가와 젊은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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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책소개
새로운 조선을 꿈꾼 청춘들의 만남과 도전.
박제가와 이덕무, 홍대용, 백동수...
그리고 국왕 정조.
이들의 아름다운 사귐과 이상을 향한 공감, 도전과 좌절의 기록.
조선 후기의 인물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평전 형식의 역사서로, 박제가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 ‘백탑에 핀 꽃’에서는 박제가의 출생에서부터 젊은 시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백탑파 동지들과의 아름다운 사귐, 북학파를 있게 한 북학론의 정립 과정 및 그 상세한 내용이 제시된다.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에서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학론의 실천에 나서게 된 박제가의 개혁 활동, 수구세력의 반발과 개혁의 좌절을 다루고 있다.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단순히 그 일대기를 나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박제가와 그의 벗들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북학론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박제가라는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박제가와 이덕무, 홍대용, 백동수...
그리고 국왕 정조.
이들의 아름다운 사귐과 이상을 향한 공감, 도전과 좌절의 기록.
조선 후기의 인물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평전 형식의 역사서로, 박제가의 일대기를 통해 조선 후기 실학 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 ‘백탑에 핀 꽃’에서는 박제가의 출생에서부터 젊은 시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백탑파 동지들과의 아름다운 사귐, 북학파를 있게 한 북학론의 정립 과정 및 그 상세한 내용이 제시된다.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에서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학론의 실천에 나서게 된 박제가의 개혁 활동, 수구세력의 반발과 개혁의 좌절을 다루고 있다.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단순히 그 일대기를 나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박제가와 그의 벗들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북학론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박제가라는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책머리에
시작에앞서
1부 백탑에 핀 꽃
어린 수재 박제가
고독을 벗 삼아
백아와 종자기 같은 만남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사람을 사귀는 도리
협객 백동수
즐거운 시절
박지원 선생을 만나다
젊은 그들
국제적인 학자 홍대용
중국에 대한 재인식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림파 정권의 위선
박제가, 청나라에 가다
『북학의』의 탄생
학문의 목적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
규장각의 건립
서얼의 등용
바뀌지 않는 인습
규장각 관원에 준 특혜
초계문신제와 인재 양성
규장각 검서관
문(文)과 무(武)를 고루 갖추라
『무예도보통지』의 간행
「병오소회」와 닫힌 사회
가슴아픈 날들
농업 경세서를 올리다
문체반정
오회연교와 정조의 서거
꿈
부록_조선 후기 실학적 지식인들의 약전과 대표 저술
참고문헌
영문초록
찾아보기
시작에앞서
1부 백탑에 핀 꽃
어린 수재 박제가
고독을 벗 삼아
백아와 종자기 같은 만남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
사람을 사귀는 도리
협객 백동수
즐거운 시절
박지원 선생을 만나다
젊은 그들
국제적인 학자 홍대용
중국에 대한 재인식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
사림파 정권의 위선
박제가, 청나라에 가다
『북학의』의 탄생
학문의 목적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
규장각의 건립
서얼의 등용
바뀌지 않는 인습
규장각 관원에 준 특혜
초계문신제와 인재 양성
규장각 검서관
문(文)과 무(武)를 고루 갖추라
『무예도보통지』의 간행
「병오소회」와 닫힌 사회
가슴아픈 날들
농업 경세서를 올리다
문체반정
오회연교와 정조의 서거
꿈
부록_조선 후기 실학적 지식인들의 약전과 대표 저술
참고문헌
영문초록
찾아보기
책 속으로
다섯 살배기 박제가가 가지고 놀던 상자들에는 뭉툭하게 해진 붓, 쓰다 남은 먹과 함께 손바닥만 한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학』·『맹자』·『시경』같은 경서 이외에도『이소(離騷)』·『진한문선』·『두시』·『당시』·『공씨보』·『석주오율』같은 어려운 책들이여기에 섞여 있었다.
모두 흩어져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그가 직접 비점(批點)을 찍으면서 읽은 책들이었다.
박제가는 언제나 입에 붓을 물고 다닐 정도로 글씨 쓰기를 좋아하였다.
변소에 가서도 모래 위에 글씨를 썼고, 어디에고 주저앉으면 허공에 대고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어느 여름날 박제가는 분판(粉板) 위에 글씨를 쓰다가 벌거벗은 채 기어서 그 위로 올라갔다.
무릎과 배꼽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먹물이 만들어졌다.
그걸로 병풍과 족자의 글씨를 흉내 내어 글씨 연습을 하였다.
문자의 형태나 필법에 담긴 작가의 뜻을 배우기 위해 남의 글씨를 그대로 흉내 내어 쓰는 임모(臨摹)였다.
일곱 살 무렵인 1756년 청교동(을지로 5가)으로 집을 옮긴 뒤 그집 벽에는 박제가가 글씨 연습을 하는 바람에 하얗게 남아 있는 곳이 없었다.(22~24쪽)
박제가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이덕무는 여느 때처럼 백동수의 집을 찾아갔다.
시냇물이 남산으로부터 나와 굽이굽이 돌면서 백동수의 집 쪽으로 흘러갔다.
이때 마침 문밖으로 동자 하나가 나오더니 영특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시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흰색 겹옷에 녹색 띠를 차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는 모양으로 여유 있게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이마는 높고 두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으며, 얼굴빛은 즐
거워 보이는 ‘기남자(奇男子, 재주나 슬기가 아주 뛰어난 사나이)’ 그대로였다.
이덕무는 그가 박씨 집안의 아들, 박제가임을 직감하였다.
이덕무가 동자에게 눈길을 보내자, 그도 알아차린 듯 이덕무를 바라보았다.
이덕무는 이 동자가 필시 자신을 찾기 위해 백동수의 집으로 오겠거니 생각했다.
과연 동자가 이덕무에게 다가와 5백 자쯤 되는 매화시를 지어 바쳤다.
옛 군자들이 교제를 맺던 풍취를 흉내낸 것이었다.
이덕무는 그에게 신기한 재주가 있음을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덕무는 시험 삼아 그에게 말을 던져 보았다.
동자의 지조와 절개를 시험해 보는 말이었다.
되돌아온 대답을 통해서, 이덕무는 동자의 성품과 영혼에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이덕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동자는 그해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자를 재선(在先)이라 한다 하였다.
이덕무가 늘 궁금하게 여기던 박제가였다.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하였다.
박제가는 다른 사람과 마주해서는 능히 말을 할 줄 모르는 듯하였으나, 이덕무를 만나면 말을 아주 잘했다.
이덕무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능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박제가의 말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박제가가 비록 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이덕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백아와 종자기 같은 사이였다.(33~34쪽)
박제가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고루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각막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떼어낼 도리가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각막이, 문장에는 문장의 각막이 단단하게 붙어 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고집스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편견으로 인해 사람들의 견문이 얼마나 실상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문제는 제쳐 두고 수레부터 말을 꺼내 보자.
수레를 사용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물이 가로막혀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또 산해관(요동의 관문)의 편액은 이사(李斯)의 필체로서 십 리 밖에서도 보인다는 말을 한다.
서양인은 인물을 그릴 때 사람의 검은 눈동자를 즙으로 내어 눈동자를 찍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보아도 눈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는 말을 한다.
되놈은 변발을 할 때 부모의 생존 여부에 따라서 하나를 땋기도 하고 두 개를 땋기도 하여 옛날의 모제(??制)와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한
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제가 백성의 성씨를 낙점한다는 설도 있고, 서책을 토판(土板)으로 찍는다는 설도 유포되어 있다.
이런 등속의 소문이 너무 난무하여 낱낱이 들어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95~96쪽)
박제가는 조선에서 ‘사ㆍ농ㆍ공ㆍ상(士農工商)’ 중에 가장 말업으로 천대받던 상업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상인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치레만 알고 고개를 저으며 꺼려하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는 놀고먹을 뿐, 하는 일이라곤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대부가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가 없다.
따라서 비록 집에 돈 한 푼 없어도 높다란 갓에 소매가 달린 옷으로 치장하고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의 장사치들도 그들이 먹던 나머지를 더럽다고 한다.
그래서 겉치레만 아는 우리보다 장삿질에 나서는 중국 사람이 훨씬 낫다.”
상인도 사민(四民) 가운데 하나에 속하므로, 사·농·공과 함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3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제가는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재물이란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게 마련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렇듯이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114~115쪽)
정조의 정치노선을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우익인 박제가에 대한 공격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박제가의 당돌한 행동은 그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다.
불쑥 튀어나온 박제가의 앞이마는 그의 총기와 고집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궁궐 내에서도 그는 규범과 형식 등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1797년(정조 21) 2월 25일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는 임금의 행차시에 품수의 구별을 무시하고 호상(胡床, 의자)에 앉은 박제가의 파직을 청하고 나섰다.
임금이 거둥할 때에는 동반(문관)과 서반(무관)에 설치할 의자에도 품수의 구별이 있었다.
문반은 정3품 당상관인 참의 이상, 무반은 아장(亞將) 이상이라야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돌한 박제가가 이런 궁중의 예법을 무시한 것이다.
1797년(정조 21) 1월 29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 행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박제가가 직품의 서차를 무시하고 당상관들의 반열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동지경연사 심환지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근래에 (상께서) 원(園, 현륭원, 즉 사도세자의 묘소)에 거둥하실 때 전 오위장 박제가가 반열 속 호상에 앉아 있기에 신이 각예(閣隷, 하인)를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벌컥 화를 내면서‘의자는 본래 우리 집 것으로 하인을 시켜 가져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처신이 불공하고 말이 매우 패려하니, 작은 일이라 하여 놔둘 수 없습니다.
박제가를 파직하소서.”
그러나 정조는 오히려 박제가를 두둔하였다.
“박제가의 대답한 말이 공손치 못한 것은 원래 사람이 경솔하여 격례를 모르는 소치다.
뭐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는 옛 법을거듭 밝혀서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라.”
임금 앞에서의 예법이 지엄한데도 불구하고, 정조는 오히려 종5품의 미미한 관직에 지나지 않는 영평현령 박제가를 감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조판서 이병정도 심환지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정3품 이하는 호상에 앉지 못하도록 정식을 만들 것을 주청하였고, 정조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태를 수습하였다.(204~205쪽)
『대학』·『맹자』·『시경』같은 경서 이외에도『이소(離騷)』·『진한문선』·『두시』·『당시』·『공씨보』·『석주오율』같은 어려운 책들이여기에 섞여 있었다.
모두 흩어져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그가 직접 비점(批點)을 찍으면서 읽은 책들이었다.
박제가는 언제나 입에 붓을 물고 다닐 정도로 글씨 쓰기를 좋아하였다.
변소에 가서도 모래 위에 글씨를 썼고, 어디에고 주저앉으면 허공에 대고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어느 여름날 박제가는 분판(粉板) 위에 글씨를 쓰다가 벌거벗은 채 기어서 그 위로 올라갔다.
무릎과 배꼽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먹물이 만들어졌다.
그걸로 병풍과 족자의 글씨를 흉내 내어 글씨 연습을 하였다.
문자의 형태나 필법에 담긴 작가의 뜻을 배우기 위해 남의 글씨를 그대로 흉내 내어 쓰는 임모(臨摹)였다.
일곱 살 무렵인 1756년 청교동(을지로 5가)으로 집을 옮긴 뒤 그집 벽에는 박제가가 글씨 연습을 하는 바람에 하얗게 남아 있는 곳이 없었다.(22~24쪽)
박제가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이덕무는 여느 때처럼 백동수의 집을 찾아갔다.
시냇물이 남산으로부터 나와 굽이굽이 돌면서 백동수의 집 쪽으로 흘러갔다.
이때 마침 문밖으로 동자 하나가 나오더니 영특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시냇물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흰색 겹옷에 녹색 띠를 차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하는 모양으로 여유 있게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이마는 높고 두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으며, 얼굴빛은 즐
거워 보이는 ‘기남자(奇男子, 재주나 슬기가 아주 뛰어난 사나이)’ 그대로였다.
이덕무는 그가 박씨 집안의 아들, 박제가임을 직감하였다.
이덕무가 동자에게 눈길을 보내자, 그도 알아차린 듯 이덕무를 바라보았다.
이덕무는 이 동자가 필시 자신을 찾기 위해 백동수의 집으로 오겠거니 생각했다.
과연 동자가 이덕무에게 다가와 5백 자쯤 되는 매화시를 지어 바쳤다.
옛 군자들이 교제를 맺던 풍취를 흉내낸 것이었다.
이덕무는 그에게 신기한 재주가 있음을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덕무는 시험 삼아 그에게 말을 던져 보았다.
동자의 지조와 절개를 시험해 보는 말이었다.
되돌아온 대답을 통해서, 이덕무는 동자의 성품과 영혼에서 빛이 난다고 느꼈다.
이덕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 동자는 그해에 관례(冠禮)를 치르고 자를 재선(在先)이라 한다 하였다.
이덕무가 늘 궁금하게 여기던 박제가였다.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하였다.
박제가는 다른 사람과 마주해서는 능히 말을 할 줄 모르는 듯하였으나, 이덕무를 만나면 말을 아주 잘했다.
이덕무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능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박제가의 말은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박제가가 비록 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이덕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백아와 종자기 같은 사이였다.(33~34쪽)
박제가는 당시 조선 사람들이 고루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각막을 가지고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떼어낼 도리가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각막이, 문장에는 문장의 각막이 단단하게 붙어 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고집스런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편견으로 인해 사람들의 견문이 얼마나 실상과 동떨어져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문제는 제쳐 두고 수레부터 말을 꺼내 보자.
수레를 사용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물이 가로막혀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또 산해관(요동의 관문)의 편액은 이사(李斯)의 필체로서 십 리 밖에서도 보인다는 말을 한다.
서양인은 인물을 그릴 때 사람의 검은 눈동자를 즙으로 내어 눈동자를 찍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보아도 눈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는 말을 한다.
되놈은 변발을 할 때 부모의 생존 여부에 따라서 하나를 땋기도 하고 두 개를 땋기도 하여 옛날의 모제(??制)와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한
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제가 백성의 성씨를 낙점한다는 설도 있고, 서책을 토판(土板)으로 찍는다는 설도 유포되어 있다.
이런 등속의 소문이 너무 난무하여 낱낱이 들어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95~96쪽)
박제가는 조선에서 ‘사ㆍ농ㆍ공ㆍ상(士農工商)’ 중에 가장 말업으로 천대받던 상업 행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가난하면 상인이 되는데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겉치레만 알고 고개를 저으며 꺼려하는 일이 너무 많다.
사대부는 놀고먹을 뿐, 하는 일이라곤 없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대부가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알아주는 자가 없다.
따라서 비록 집에 돈 한 푼 없어도 높다란 갓에 소매가 달린 옷으로 치장하고 어슬렁거리며 큰소리만 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의 장사치들도 그들이 먹던 나머지를 더럽다고 한다.
그래서 겉치레만 아는 우리보다 장삿질에 나서는 중국 사람이 훨씬 낫다.”
상인도 사민(四民) 가운데 하나에 속하므로, 사·농·공과 함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전체 인구의 10분의 3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제가는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우리나라는 검소한데도 쇠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재물이란 우물과 같다.
퍼내면 차게 마련이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렇듯이 비단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114~115쪽)
정조의 정치노선을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우익인 박제가에 대한 공격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박제가의 당돌한 행동은 그들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였다.
불쑥 튀어나온 박제가의 앞이마는 그의 총기와 고집을 암시하기에 충분했다.
궁궐 내에서도 그는 규범과 형식 등에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1797년(정조 21) 2월 25일 노론 벽파 영수 심환지는 임금의 행차시에 품수의 구별을 무시하고 호상(胡床, 의자)에 앉은 박제가의 파직을 청하고 나섰다.
임금이 거둥할 때에는 동반(문관)과 서반(무관)에 설치할 의자에도 품수의 구별이 있었다.
문반은 정3품 당상관인 참의 이상, 무반은 아장(亞將) 이상이라야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당돌한 박제가가 이런 궁중의 예법을 무시한 것이다.
1797년(정조 21) 1월 29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 행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박제가가 직품의 서차를 무시하고 당상관들의 반열 속에서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이 발단이었다.
동지경연사 심환지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근래에 (상께서) 원(園, 현륭원, 즉 사도세자의 묘소)에 거둥하실 때 전 오위장 박제가가 반열 속 호상에 앉아 있기에 신이 각예(閣隷, 하인)를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벌컥 화를 내면서‘의자는 본래 우리 집 것으로 하인을 시켜 가져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처신이 불공하고 말이 매우 패려하니, 작은 일이라 하여 놔둘 수 없습니다.
박제가를 파직하소서.”
그러나 정조는 오히려 박제가를 두둔하였다.
“박제가의 대답한 말이 공손치 못한 것은 원래 사람이 경솔하여 격례를 모르는 소치다.
뭐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는 옛 법을거듭 밝혀서 이러한 폐단이 없게 하라.”
임금 앞에서의 예법이 지엄한데도 불구하고, 정조는 오히려 종5품의 미미한 관직에 지나지 않는 영평현령 박제가를 감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조판서 이병정도 심환지의 편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정3품 이하는 호상에 앉지 못하도록 정식을 만들 것을 주청하였고, 정조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사태를 수습하였다.(204~205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조선 후기 북학파로 잘 알려진 박제가와 스승 박지원, 절친한 벗 이덕무, 백동수, 홍대용….
백탑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밤을 밝혀 토론하고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글을 읽고 책을 썼다.
이들이 추구한 바는 무엇일까.
뜻을 이루기 위해 이들은 어떤 노력을 하였고 어떤 결실을 맺었는가.
* 새로운 조선을 꿈꾼 靑春들의 아름다운 사귐과 이상에 대한 공감, 도전과 좌절의 기록.
박초정(朴楚亭)은 동국의 뛰어난 문장가이다.
그 생김새는 단소(短小)하나 굳세고 존엄한 위세가 있고, 재주와 인정은 넘쳐흘렀다.
위로는 뛰어난 시들을 모아 공부하고, 옆으로는 백가의 문장을 채집하였기 때문에 그가 구사하는 문사(文詞)는 아름답고, 별빛 같고, 조개껍데기처럼 단단한 기운이 있으며, 교룡(蛟龍)이 사는 수궁의 물처럼 상서로움이 있었다.
어찌 천하의 신기한 문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떨쳐 일어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으므로 끝내 그를 알아주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21쪽)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청나라 이조원(李調元)은 이와 같이 박제가를 평했다.
18세기 대표적인 북학론자 박제가.
그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는 논문만 해도 50여 편에 이르고, 대표 저서인 『북학의(北學議)』의 번역서는 10여 권에 육박한다.
박제가에 대해 언급한 서적과 논문도 1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니, 그 위상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의 일생을 조망해 볼 때, 그 한 몸에는 조선 후기 실학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인물, 조선의 ‘기남자’(33쪽)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최초의 책이다.
1부 ‘백탑에 핀 꽃’에서는 박제가의 출생에서부터 젊은 시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백탑파 동지들과의 아름다운 사귐, 북학파를 있게 한 북학론의 정립 과정 및 그 상세한 내용이 제시된다.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에서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학론의 실천에 나서게 된 박제가의 개혁 활동, 수구세력의 반발과 개혁의 좌절을 다루어진다.
박제가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와 뜻을 같이한 북학파의 박지원, 이덕무, 홍대용, 백동수 등의 인물이며, 그들을 인정하고 등용하여 개혁의 길에 나섰던 국왕 정조의 얘기다.
또한 박제가와 그 벗들이 주장한 북학론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도 빠질 수 없다.
이 책은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단순히 그 일대기를 나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박제가와 그의 벗들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북학론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박제가라는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 박제가의 일생
“불뚝 솟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 검은 눈동자에 하얀 귀.” 박제가가 20대에 묘사한 자화상이다.
박제가는 스물일곱 살 때(1776) 스스로를 묘사하여 쓴 「소전(小傳)」에서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
어려서는 문장가의 글을 배웠고, 장성해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經濟之術]을 좋아하였다.
수개월을 귀가하지 않고 노력하지만, 지금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한참 고명한 자와 마음을 나누고, 세상에서 힘써야 할 것은 버리고 하지 않는다.
명리(名理)를 따져 종합하고, 심오한 것에 침잠하여 사유한다.
백 세대 이전 인물에게나 흉금을 터놓고, 만 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27쪽)
1750년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난 박제가는 어린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며 이름을 떨쳤고, 청년이 되어서는 권세와 부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경세론을 정립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 가난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였다.
1778년 청나라 연경에 다녀온 그는 『북학의』를 저술하여 이용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일하지 않는 양반들은 도태시켜 버려야 한다고 극언하였다.
그에게 있어 선비의 일생이란 가난한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데 바쳐야 하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1779년 박제가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서얼 출신임에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었고, 정조의 개혁정치와 연관되면서 사회 개혁을 위한 많은 시무책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고루하고 폐쇄적인 조선 사회를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신명을 바쳤으며,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청의 발달한 문물을 본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으로 ‘당괴(唐魁)’, 즉 중국병에 걸린 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괘념치 않았다.
추사 김정희가 박제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 스승의 영향으로 북학에 뜻을 두게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제가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권력층인 보수세력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놓았고, 결국 이 벽을 넘지 못한 박제가는 정조의 서거와 함께 그 뜻을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되었다.
* 젊은 그들
박제가는 백탑파 문인들과 교류하며 혈연을 뛰어넘는 끈끈한 우정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연암일파, 북학파로도 불리는 백탑파는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집단을 말하며, 백탑은 지금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박제가는 이 벗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기질 다른 형제요/ 한 방에 살지 않는 부부라/ 사람이 하루라도 벗 없으면/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리”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71쪽)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인사는 비새는 집, 눈 뿌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했고, 또 술 데우고 등잔 불똥을 따면서 손바닥을 치며 토론하였다.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절차탁마였다.
그 결과가 바로 ‘북학론’이었다.
* 북학론의 제창
백탑파의 인물들은 당시 팽배해 있던 소중화사상을 부정하고, 조선이 진정한 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내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쪽을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장구」의 “나는 중화(中華)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중화가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진량(陳亮)은 초(楚)나라 출신이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였다.
그 결과 북방의 학자들로서 진량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
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1778년 박제가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 한 이후, 북학은 백탑파를 대표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생각은 당시 북벌론에서 이어져 내려온 소중화사상, 대명의리론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경전의 해석도 주자(朱子)의 주대로 하지 않고 독창적인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붙였다.
백탑파의 지식인들도 대명의리론과 어긋나는 주장을 폈을 때 그들에게 쏟아질 비난이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북학론의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였다.
그러한 논리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隨筆)」에서 체계가 잘 갖추어지게 되었다.
북학의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 출처를 따질 것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였다.
둘째, 지금 청나라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전해 내려온 중화문명의 진수라고 하는 발상을 보였다.
셋째, 조선이 북학을 통해서 이루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적을 물리치기 위한 실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고, 이는 결국 북벌론이나 대명의리론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북학론의 명분을 앞세워 백탑파의 북학파 인사들은 청나라의 번화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용후생지물과 그들의 공리적 생활 태도를 당장에라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아주 다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는데, 상업과 유통의 중시, 수레와 배의 이용, 도로망의 확충, 기술과 기계의 도입, 도량형의 표준화, 사회의 개방화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수레를 이용한 적극적인 물화의 유통과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한 것은 바로 건국 초부터 계승되어 오던 조선정부의 재정운영 방식(‘절용’ 정책, 121쪽 참조)에 대한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북학파 학자들은 조선 사회의 대다수 성리학자들이 주장해 온,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착한 마음씨를 지키자는 수양론만으로는 민생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한 연후에야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덕행의 달성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공자도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필요한 것이 식(食)과 색(色), 즉 기본적인 경제적 안정과 남녀 간의 화합으로 인한 자손의 번식이라 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경세학은 성리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공자가 설파한 원초유학의 입장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덕우선주의를 강조하는 성리학적 입장을 뒤집고 기초적인 경제적 바탕 위에서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유학의 현세주의적 입장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123쪽)
* 정조와 규장각 4검서
정조는 영조대 탕평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 연구에 입각하여 정치를 한다는 청론(淸論)적 지향을 정치 원칙으로 표방하면서 그 정책적 수단으로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의 역할은 역대 제왕들의 어제ㆍ어필을 봉안하고 고금의 서적을 수집ㆍ편찬하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조의 정치를 보좌할 인재 양성과 정보의 생성과 정책 연구에 주목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규장각은 세종 때의 집현전에 비견되는 정조 개혁 정치의 본산이었다.
또한 정조는 개혁 논리에 입각해 청수한 인재들을 규합하고 이들을 친왕적 인물로 키워내고자 하였는데, 여기에는 서얼 출신의 문사들도 망라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리수 네 명의 서얼 출신 학자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었다.
검서관은 비록 7품 이하의 하급 관직이었지만, 표전(임금께 올리는 글)을 짓고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과 어제(御製)ㆍ일력(日曆)ㆍ『일성록(日省錄)』 및 명령하는 문자로서 내각(內閣, 규장각)에서 나오는 것 모두를 손질하고 정서하며 교정하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사실상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까지 띠고 있었다.
정조의 검서관들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박제가를 아끼고 알아주었다.
정조는 박제가를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無雙士)라 불렀으며,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에 비한 일도 있었다.
* 박제가가 임금에 올린 시무책
박제가는 정조의 지우(知遇)를 입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경세관을 피력하고자 하였다.
병오년 정월 22일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시무책에 관해서 소회를 올렸는데(「병오소회」, 183쪽 참조), 여기에서 박제가는 중국과의 통상, 서사초빙론(西士招聘論), 중국 유학을 통한 인재 양성론 등을 주장하였고,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는 사족이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라 하며 이 사족층을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종사시켜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이들의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98년에 박제가는 『북학의』 내·외편에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몇 항목을 뽑아내고 여기에 새로이 농사에 관련된 몇 항목을 추가하여 왕에게 바쳤다.
총 27개 항목에 47개 조목의 진소본 『북학의』였다.
이와 함께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疏)」를 지어 농업 진흥의 핵심을 따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박제가는 유생을 도태시킬 것, 수레를 통용시킬 것, 농기?농구의 제작을 중국에서 배워 농사 시험장을 설치할 것, 30만 섬의 쌀을 비축해둘 것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국왕인 정조조차 박제가를 송나라의 급진개혁파 왕안석과 같다고 평할 정도였으니, 고루한 문벌의식과 화이관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런 주장을 용납할 리 만무했다.
정조는 당시 권력층이던 노론 벽파의 정치명분을 부정하고 새로운 국정노선을 천명한 오회연교가 있은 뒤 28일 만에 급사하였다.
박제가는 이제 자신의 이상을 접어야만 했다.
* 현재적 의미
저자는 전작 『선비의 배반』에서 조선 후기 사림세력의 본질을 밝히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진단한 바 있다.
그 사림세력에 맞서 ‘이용후생의 학문’을 주창한 박제가와 실학자들의 삶을 이 책 『박제가와 젊은 그들』을 통해 저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견지한 학문관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학문이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하는 양반들은 도태시켜 버려야 한다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문의 현재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이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숭고한 삶을 통해서, 얄팍한 지식을 밑천삼아 일신의 출세를 위해 줄서기나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젊은 학자의 기백을 누그러뜨린 채 세상의 눈치나 보며 잇속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은지, 학문을 방편삼아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곡학아세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박제가의 실학적 태도는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학문적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21세기, 새로운 실학의 발흥을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아질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그려 본다.(8쪽)
백탑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밤을 밝혀 토론하고 시력을 잃으면서까지 글을 읽고 책을 썼다.
이들이 추구한 바는 무엇일까.
뜻을 이루기 위해 이들은 어떤 노력을 하였고 어떤 결실을 맺었는가.
* 새로운 조선을 꿈꾼 靑春들의 아름다운 사귐과 이상에 대한 공감, 도전과 좌절의 기록.
박초정(朴楚亭)은 동국의 뛰어난 문장가이다.
그 생김새는 단소(短小)하나 굳세고 존엄한 위세가 있고, 재주와 인정은 넘쳐흘렀다.
위로는 뛰어난 시들을 모아 공부하고, 옆으로는 백가의 문장을 채집하였기 때문에 그가 구사하는 문사(文詞)는 아름답고, 별빛 같고, 조개껍데기처럼 단단한 기운이 있으며, 교룡(蛟龍)이 사는 수궁의 물처럼 상서로움이 있었다.
어찌 천하의 신기한 문장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떨쳐 일어나기에는 힘이 부족하였으므로 끝내 그를 알아주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21쪽)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청나라 이조원(李調元)은 이와 같이 박제가를 평했다.
18세기 대표적인 북학론자 박제가.
그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는 논문만 해도 50여 편에 이르고, 대표 저서인 『북학의(北學議)』의 번역서는 10여 권에 육박한다.
박제가에 대해 언급한 서적과 논문도 100여 편에 이르고 있으니, 그 위상이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박제가의 일생을 조망해 볼 때, 그 한 몸에는 조선 후기 실학사조의 발흥과 전개, 몰락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이처럼 의미심장한 인물, 조선의 ‘기남자’(33쪽) 박제가의 일대기를 전체적으로 조감한 최초의 책이다.
1부 ‘백탑에 핀 꽃’에서는 박제가의 출생에서부터 젊은 시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백탑파 동지들과의 아름다운 사귐, 북학파를 있게 한 북학론의 정립 과정 및 그 상세한 내용이 제시된다.
2부 ‘알아주는 이 있으니 무에 두려우랴’에서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학론의 실천에 나서게 된 박제가의 개혁 활동, 수구세력의 반발과 개혁의 좌절을 다루어진다.
박제가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와 뜻을 같이한 북학파의 박지원, 이덕무, 홍대용, 백동수 등의 인물이며, 그들을 인정하고 등용하여 개혁의 길에 나섰던 국왕 정조의 얘기다.
또한 박제가와 그 벗들이 주장한 북학론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도 빠질 수 없다.
이 책은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단순히 그 일대기를 나열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박제가와 그의 벗들이 일생을 바쳐 주장한 북학론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고찰하고 그것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결과를 맺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기술함으로써 박제가라는 인물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역사적 의미를 한 권으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 박제가의 일생
“불뚝 솟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 검은 눈동자에 하얀 귀.” 박제가가 20대에 묘사한 자화상이다.
박제가는 스물일곱 살 때(1776) 스스로를 묘사하여 쓴 「소전(小傳)」에서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
어려서는 문장가의 글을 배웠고, 장성해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학문[經濟之術]을 좋아하였다.
수개월을 귀가하지 않고 노력하지만, 지금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는 이제 한참 고명한 자와 마음을 나누고, 세상에서 힘써야 할 것은 버리고 하지 않는다.
명리(名理)를 따져 종합하고, 심오한 것에 침잠하여 사유한다.
백 세대 이전 인물에게나 흉금을 터놓고, 만 리 밖 먼 땅에나 가서 활개치고 다닌다.(27쪽)
1750년 승지 박평의 서자로 태어난 박제가는 어린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며 이름을 떨쳤고, 청년이 되어서는 권세와 부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경세론을 정립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 가난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였다.
1778년 청나라 연경에 다녀온 그는 『북학의』를 저술하여 이용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일하지 않는 양반들은 도태시켜 버려야 한다고 극언하였다.
그에게 있어 선비의 일생이란 가난한 백성과 나라를 구하는 데 바쳐야 하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1779년 박제가는 국왕 정조의 인정을 받아 서얼 출신임에도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었고, 정조의 개혁정치와 연관되면서 사회 개혁을 위한 많은 시무책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고루하고 폐쇄적인 조선 사회를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신명을 바쳤으며, 자신의 의지를 내보이는 데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청의 발달한 문물을 본받아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으로 ‘당괴(唐魁)’, 즉 중국병에 걸린 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으나 괘념치 않았다.
추사 김정희가 박제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 스승의 영향으로 북학에 뜻을 두게 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제가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권력층인 보수세력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놓았고, 결국 이 벽을 넘지 못한 박제가는 정조의 서거와 함께 그 뜻을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되었다.
* 젊은 그들
박제가는 백탑파 문인들과 교류하며 혈연을 뛰어넘는 끈끈한 우정과 학문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연암일파, 북학파로도 불리는 백탑파는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집단을 말하며, 백탑은 지금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박제가는 이 벗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기질 다른 형제요/ 한 방에 살지 않는 부부라/ 사람이 하루라도 벗 없으면/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리”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71쪽)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인사는 비새는 집, 눈 뿌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했고, 또 술 데우고 등잔 불똥을 따면서 손바닥을 치며 토론하였다.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절차탁마였다.
그 결과가 바로 ‘북학론’이었다.
* 북학론의 제창
백탑파의 인물들은 당시 팽배해 있던 소중화사상을 부정하고, 조선이 진정한 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내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청나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쪽을 배우자는 북학론(北學論)이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孟子)』 「등문공장구」의 “나는 중화(中華)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중화가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진량(陳亮)은 초(楚)나라 출신이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였다.
그 결과 북방의 학자들로서 진량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
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1778년 박제가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 한 이후, 북학은 백탑파를 대표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이들의 생각은 당시 북벌론에서 이어져 내려온 소중화사상, 대명의리론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사상계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경전의 해석도 주자(朱子)의 주대로 하지 않고 독창적인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붙였다.
백탑파의 지식인들도 대명의리론과 어긋나는 주장을 폈을 때 그들에게 쏟아질 비난이 솔직히 두려웠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북학론의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였다.
그러한 논리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隨筆)」에서 체계가 잘 갖추어지게 되었다.
북학의 논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백성들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 출처를 따질 것 없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였다.
둘째, 지금 청나라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전해 내려온 중화문명의 진수라고 하는 발상을 보였다.
셋째, 조선이 북학을 통해서 이루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적을 물리치기 위한 실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고, 이는 결국 북벌론이나 대명의리론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북학론의 명분을 앞세워 백탑파의 북학파 인사들은 청나라의 번화함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용후생지물과 그들의 공리적 생활 태도를 당장에라도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아주 다양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는데, 상업과 유통의 중시, 수레와 배의 이용, 도로망의 확충, 기술과 기계의 도입, 도량형의 표준화, 사회의 개방화 등이 그것이었다.
특히 수레를 이용한 적극적인 물화의 유통과 외국과의 통상을 강조한 것은 바로 건국 초부터 계승되어 오던 조선정부의 재정운영 방식(‘절용’ 정책, 121쪽 참조)에 대한 문제점을 정면으로 지적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북학파 학자들은 조선 사회의 대다수 성리학자들이 주장해 온,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착한 마음씨를 지키자는 수양론만으로는 민생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한 연후에야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덕행의 달성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공자도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필요한 것이 식(食)과 색(色), 즉 기본적인 경제적 안정과 남녀 간의 화합으로 인한 자손의 번식이라 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경세학은 성리학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공자가 설파한 원초유학의 입장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덕우선주의를 강조하는 성리학적 입장을 뒤집고 기초적인 경제적 바탕 위에서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유학의 현세주의적 입장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123쪽)
* 정조와 규장각 4검서
정조는 영조대 탕평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 연구에 입각하여 정치를 한다는 청론(淸論)적 지향을 정치 원칙으로 표방하면서 그 정책적 수단으로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의 역할은 역대 제왕들의 어제ㆍ어필을 봉안하고 고금의 서적을 수집ㆍ편찬하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조의 정치를 보좌할 인재 양성과 정보의 생성과 정책 연구에 주목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규장각은 세종 때의 집현전에 비견되는 정조 개혁 정치의 본산이었다.
또한 정조는 개혁 논리에 입각해 청수한 인재들을 규합하고 이들을 친왕적 인물로 키워내고자 하였는데, 여기에는 서얼 출신의 문사들도 망라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리수 네 명의 서얼 출신 학자가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었다.
검서관은 비록 7품 이하의 하급 관직이었지만, 표전(임금께 올리는 글)을 짓고 서적을 햇볕에 말리는 일과 어제(御製)ㆍ일력(日曆)ㆍ『일성록(日省錄)』 및 명령하는 문자로서 내각(內閣, 규장각)에서 나오는 것 모두를 손질하고 정서하며 교정하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사실상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의 임무까지 띠고 있었다.
정조의 검서관들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으며, 누구보다도 박제가를 아끼고 알아주었다.
정조는 박제가를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無雙士)라 불렀으며,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인 왕안석(王安石)에 비한 일도 있었다.
* 박제가가 임금에 올린 시무책
박제가는 정조의 지우(知遇)를 입고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경세관을 피력하고자 하였다.
병오년 정월 22일에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시무책에 관해서 소회를 올렸는데(「병오소회」, 183쪽 참조), 여기에서 박제가는 중국과의 통상, 서사초빙론(西士招聘論), 중국 유학을 통한 인재 양성론 등을 주장하였고,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큰 좀벌레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갈수록 불어나는 이유는 사족이 날로 번성하는 데 있습니다.”라 하며 이 사족층을 장사하고 무역하는 일에 종사시켜 생업을 즐기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며, 이들의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98년에 박제가는 『북학의』 내·외편에서 농사와 관련이 있는 몇 항목을 뽑아내고 여기에 새로이 농사에 관련된 몇 항목을 추가하여 왕에게 바쳤다.
총 27개 항목에 47개 조목의 진소본 『북학의』였다.
이와 함께 「응지진북학의소(應旨進北學議疏)」를 지어 농업 진흥의 핵심을 따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박제가는 유생을 도태시킬 것, 수레를 통용시킬 것, 농기?농구의 제작을 중국에서 배워 농사 시험장을 설치할 것, 30만 섬의 쌀을 비축해둘 것 등의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국왕인 정조조차 박제가를 송나라의 급진개혁파 왕안석과 같다고 평할 정도였으니, 고루한 문벌의식과 화이관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런 주장을 용납할 리 만무했다.
정조는 당시 권력층이던 노론 벽파의 정치명분을 부정하고 새로운 국정노선을 천명한 오회연교가 있은 뒤 28일 만에 급사하였다.
박제가는 이제 자신의 이상을 접어야만 했다.
* 현재적 의미
저자는 전작 『선비의 배반』에서 조선 후기 사림세력의 본질을 밝히고 그들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진단한 바 있다.
그 사림세력에 맞서 ‘이용후생의 학문’을 주창한 박제가와 실학자들의 삶을 이 책 『박제가와 젊은 그들』을 통해 저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제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견지한 학문관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학문이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을 하는 양반들은 도태시켜 버려야 한다는 극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문의 현재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이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숭고한 삶을 통해서, 얄팍한 지식을 밑천삼아 일신의 출세를 위해 줄서기나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젊은 학자의 기백을 누그러뜨린 채 세상의 눈치나 보며 잇속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은지, 학문을 방편삼아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곡학아세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 학문하는 자세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박제가의 실학적 태도는 비록 당대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학문적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21세기, 새로운 실학의 발흥을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아질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그려 본다.(8쪽)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06년 04월 20일
- 쪽수, 무게, 크기 : 247쪽 | 453g | 153*224*20mm
- ISBN13 : 9788991319622
- ISBN10 : 8991319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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