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출판계 최초로 에세이 형식으로 빚은 테니스 개론서가 출간됐다.
대학 테니스 동아리 주장 출신이자 공영방송 스포츠 기자이면서, 유튜버와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는 ‘키키홀릭’ 김기범이 테니스와 맺은 30년의 인연을 해박한 정보와 정제된 문장으로 엮은 『테니스를 읽는 시간』이다.

포핸드가 쉽고도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주된 원인으로 포핸드라는 기술의 특질 가운데 하나인 ‘자유도’에 주목한다.
자율성이 부여되는 정도.
즉 포핸드는 백핸드나 서브와 달리 정형화된 자세에 구속되기보다 폼의 자율적 변형이 상대적으로 더 용이하다는 뜻이다.
포핸드의 자유도를 표현해 주는 두 가지 기술적 요소가 있다.
하나는 라켓 손잡이를 잡는 방식인 그립이고, 또 하나는 공을 칠 때 두 발의 위치를 결정하는 스탠스다.
이 두 요소는 포핸드에서 특히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 p.15

동호인 수준에서 백핸드가 포핸드에 비해 실력이 더디게 느는 이유는 또 있다.
‘용불용설’.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이다.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동호인은 십중팔구 복식을 선호한다.
아니, 선호한다기보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 측면이 더 강할 것이다.
테니스를 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코트가 부족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4명이 코트를 사용할 수 있는 복식이 자연스럽게 대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복식은 한 명이 코트의 절반만 커버하면 된다.
이러다 보니 백핸드 쪽으로 오는 공도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돌아서 포핸드로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 가운데로 오는 공은 거의 언제나 왼쪽에 선 사람이 포핸드로 처리하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한다.
이렇게 백핸드를 거의 쓰지 않게 되면, 당연히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도 줄 수밖에 없다.

--- p.33

테니스가 고도의 심리전이 되는 또 하나의 핵심 이유는 플레이의 정지 순간이 잦아서다.
실제 경기에서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며 스트로크를 교환하는 시간은 놀랍도록 적다.
이를테면, 조코비치와 나달이 맞붙은 2012년 호주오픈 결승전의 경기 시간은 무려 5시간 57분이었지만, 두 선수가 실제로 코트 위를 뛰어다니며 치열한 랠리를 주고받은 시간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2017년 호주오픈 나달과 페더러의 마지막 5세트 8번째 게임에서 펼쳐진, 역사상 가장 격렬하면서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은 26구 환상 랠리.
강인한 체력과 섬세한 기교가 응축된 이 명품 랠리에 소요된 시간은 고작 32초였다.
페더러의 득점으로 인정된 그 샷 대결 뒤 다음 플레이가 진행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그보다 15초가 더 긴 47초였다.
47초 동안 나달과 페더러는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숨을 고르고, 볼키즈에게 수건을 전달받아 땀을 닦고, 다음 서브를 넣고 받기 위한 육체적 정신적 준비를 했다.

--- p.89

그러면 활동하지 않는 시간 동안 선수들의 머릿속은 어떨까.
바로 여기가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지는 전장이다.
경기를 직접 뛰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가장 긴장되고 초조하며 심리적 압박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은 격렬한 플레이 도중이 아니라, 그 앞뒤의 고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멘털을 부여잡기 위해 서브를 준비할 때 자기만의 루틴 동작을 취한다.
라파엘 나달은 서브를 넣기 전에 반바지 뒷부분을 잡아당기고 콧기름을 닦고 옆머리를 한번 쓰다듬는다.
노박 조코비치는 공을 스무 번 넘게 바닥에 튀긴 다음에야 서브를 넣기도 한다.
이 모든 루틴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잡념을 지우며, 오직 지금 이 포인트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다.
--- p.90~91

테니스에서 집중력이란 ‘현재에 머무는 능력’을 뜻한다.
바로 직전 포인트에서 아쉽게 포핸드 공격이 라인 1cm 밖으로 벗어나 점수를 잃었다고 가정하자.
그래서 게임 스코어가 15-30로 불리해졌다.
다음 서브를 준비하면서 10초 전 포핸드의 아쉬움을 떠올리는 건 이미 집중력을 잃은 상태다.
그리고 15-30에서 한 포인트를 더 잃으면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테니스에서의 집중력이란 오직 단 하나의 포인트, 지금 당장 마주하게 될 그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테니스 집중력의 요체다.

--- p.92

중급자 기준으로 볼 때 경합 상황에서 가장 선호되는 샷의 선택지는 가운데로 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가 2명 모두 베이스라인에 물러서 있을 때나, 아니면 네트 앞을 장악하고 있을 때나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기본 원칙이다.
두 명이 서 있는 가운데 공간을 공략하면 크게 두 가지 효과를 볼 수 있다.
가운데로 보내면 두 선수가 누가 칠지 순간적으로 고민하면서 혼선을 빚게 되고, 강한 반격이 돌아올 가능성도 낮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효과는 상대 샷 각도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좌우로 빠지는 공을 치면 그만큼 깊은 각도로 역공을 당할 가능성이 있지만, 코트 가운데로 공을 주면 상대가 각을 내기 어려워 다음 랠리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 p.112

테니스는 다른 종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전통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준우승자의 시상식 연설이다.
그랜드슬램을 포함한 모든 토너먼트 대회에서 늘 결승전에 오른 두 명의 주인공 모두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관중 앞에서 소감을 말할 기회를 준다.
다른 종목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2014년 브라질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에 패한 아르헨티나의 메시가 스타디움에서 준우승 소감을 밝힌다면, 그는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패배의 아픔에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선수에게 소감을 요구하는 건, 어쩌면 너무 가혹한 예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테니스는 이 ‘가혹한 전통’을 꿋꿋이 지켜왔다.

--- p.188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형택의 마음가짐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정말로 강호 독일을 꺾고 8강에 오를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간절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다.
첫날 단식에서 마이어와 풀세트 접전을 벌인 탓에 발바닥에 심한 물집이 잡혔지만, 그는 셋째 날 마지막 에이스 단식 대결에서 콜슈라이버를 상대로 한 세트를 따내는 투혼을 보였다.
당시 콜슈라이버는 일주일 전 열린 호주오픈에서 광속 서버 앤디 로딕을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던 독일의 젊은 에이스였다.
반면 30대 중반으로 향해가고 있던 백전노장 이형택은, 물집만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속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며 한국의 데이비스컵 여정을 마무리했다.
그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현장에 동행해 취재하며, 나는 국가를 대표해 뛰는 이 데이비스컵이 일반 투어 대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기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