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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역 이인행 평전
삼역 이인행 평전
Description
책소개
애국지사 이인행(1898.7.27-1975.3.31, 李仁行)선생은 함평 나산면에서 태어났다.
일제 식민시기 한국의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운동을 위해 몸 바친 인물이다.
함평ㆍ문장ㆍ영암지역의 삼일운동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조직원으로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전남 3부(경무부) 경찰과 장성 삼거리헌병에 체포 되어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주형무소에서 만난 면우 곽종석선생은 3ㆍ1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수인생활 중인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에게 ‘삼역(三亦)’이라는 호(號)와 호기(號記)를 지어 주셨다.
이인행 선생은 일제에 저항하며, 국내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임시정부 요인이다.
이 책은 그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재조명하고 그가 걸어 간 사상과 활동의 궤적을 추적하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면한 역사 발굴의 과제이며 동시에 지역사회 임시정부요인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목차
머리글
차 례

Autobiographical history of the patriots Lee-inhaeng

조선의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다
3ㆍ1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되다
문장 3ㆍ1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국민대회 13도 함평대표로 선임되다
임시정부 감부서(監部署) 특파원을 맡다
가(假)정부 요인으로 광주ㆍ대구ㆍ광주형무소에 수감되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나서고 창씨를 거부하다
함평 평릉농조(平陵農組) 창립과 농민운동에 힘쓰다
신간회 함평지부 상무집행위원으로 우뚝 서다
조선민족의 씨앗으로 애국애민 정신을 남기다

판결문 원본 자료
참고문헌 / 연보 / 색인

책 속으로
조선의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다

이인행(1898.7.27-1975.3.31, 李仁行)선생은 평생을 민족독립운동에 몸 바친 애국지사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두루(咸) 화평한(平) 땅’ 전라도 함평 천지이다.
함평 군민들은 산과 강의 지세가 “중국 하남성 기산영수(箕山潁水)와 견줄 만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인행선생의 출생과 가계를 살펴보면 함평 사림의 후예로 번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인행선생은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에서 이재관(李載琯)공과 나주인 임언규(林彦圭)의 따님 임향동(林鄕洞)여사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인행선생은 이조정랑공 삼회재 이돈현(李敦賢)의 5대손이다.
이돈현은 행의(行誼)가 독실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인행선생은 가문의 문성(文性)을 그대로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뛰어난 재량을 갖추고 있었다.
항시 책 읽기를 즐거워하고 인자한 성품에 패기가 넘쳤다.
유년시설 중국의 사서를 탐독하고, 청년기에는 조선의 역사ㆍ지리ㆍ병법ㆍ농서를 두루 읽었다.
이인행선생의 논설은 옳고 그름이 분명하였다.
서당 훈장께서는 “나라를 짊어지고 갈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될 것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인행선생이 태어나던 전ㆍ후 조선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자들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였다.

일제는 1894년 한반도 침략에 걸림돌이 되고 있던, 청나라 세력을 조선에서 축출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04년 2월 8일 일제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조선에 일본군 2개 사단을 인천항으로 들어 보내 불법 주둔시켰다.

이 불법 주둔 일본군을 기반으로 군사 계엄통치까지 자행하면서 우리나라를 완전한 식민지 상태로 몰아갔다.

일제는 같은 해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1905년 11월 18일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일본군이 맨 처음 조선에 군대를 주둔한 것은 1896년 1월 110명의 헌병대가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주차헌병대(韓國駐箚憲兵隊)로 명칭을 바꾸었고 의병 탄압에 본분을 두었다.

초대 헌병대장 아까시(明石元二郞)소장은 헌병 인원을 늘리는 한편 사법경찰과 행정경찰까지 장악하며 헌병정치를 자행하였다.

1908년에는 4,065명의 조선인 헌병 보조원까지 만들어, 일제의 앞잡이나 밀정으로 썼다.

일본 헌병대 중 대구 헌병대가 전라도를 관할했으나 곧 광주에 본부를 두게 되었다.

이어 함평ㆍ벌교ㆍ담양에 헌병 분견소를 설치하고, 영산포ㆍ장흥ㆍ순천ㆍ동복(화순)ㆍ장성에 헌병 분대를, 남평ㆍ나주ㆍ화순ㆍ능주 지역에 헌병 파견소, 또는 헌병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함평지역 헌병 파견소는 나산면ㆍ학교면ㆍ신광면 사천(沙川)ㆍ해보면 구밀(求密, 현 문장리)에 설치하였다.
함평읍 기각리에는 순검청(巡檢廳)이 설치되었다.

일제는 함평 지역을 요시찰 지역으로 지정하고 집중 관리하였다.

1910년 8월 22일, 일제는 조선의 매국노 등을 앞세워 한ㆍ일늑약을 만들어 조선을 강탈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며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다.
15세의 청년 이인행과 마을 사람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이제 조선은 그 누구도 일제의 발 아래서 몸부림치지 않는 백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인행선생은 청년기에 일제의 침략을 몸소 겪으면서, 운
명적으로 민족의 자주 독립투쟁의 책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인행선생은 더욱 노골화된 일제의 침략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인행의 부친 이백여(李佰汝)는 탁지부(度支部稅務主事)에서 세무를 총괄하다가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탁지부는 1895년(고종 32) 8아문(衙門)을 7부(部)로 개편할 때 탁지아문(度支衙門)을 개칭한 것이다.

정부의 재무를 총괄하고 회계ㆍ출납ㆍ조세ㆍ국채ㆍ화폐ㆍ은행 등에 관한 일체 사무를 관장하며 각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던 중앙관청이었다.
이백여는 항시 자녀들에게 “세독충정(世篤忠貞)으로 국가가 어려울수록 학문을 연구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1909년 1월 14일 부친은 나라 걱정에 매일 뜬 눈으로 지새우다가 이인행에게 후사를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인행선생은 약관의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모친인 숙부인(淑夫人) 임향동 여사는 나주 다시면 회진(會津) 나주 임씨 규수였다.

나주 임씨는 호남 사림 중 명문가로 명성을 날린 가문이다.
이 나주 임씨가 명문 사족으로 자리를 지킨 것은, 국난에 주저하지 않고 창의한 가문이기 때문이다.
나주 임씨의 관향인 회진리에서 자란 숙부인 임향동 여사는 성격이 강직하시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는 더욱 엄격하였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애국지사 이인행(1898.7.27-1975.3.31, 李仁行)선생은 함평 나산면에서 태어났다.
일제 식민시기 한국의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민족운동을 위해 몸 바친 인물이다.
함평ㆍ문장ㆍ영암지역의 삼일운동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조직원으로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전남 3부(경무부) 경찰과 장성 삼거리헌병에 체포 되었다.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은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고, 또 다시 광주형무소로 보내져, 2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주형무소에서 만난 면우 곽종석선생은 3ㆍ1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수인생활 중인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에게 ‘삼역(三亦)’이라는 호(號)와 호기(號記)를 지어 주셨다.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의 독립운동은 조선에서 일제 식민지 정책이 가중되던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장성의 애국지사 기산도를 찾아 가정부(假政府) 요원에 가입하였다.
나아가서 임시정부 애국금영수위원으로 군자금모집과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본고에서 살핀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은 일제에 저항하며, 국내에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임시정부 요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국민대회감부서(大韓民國臨時政府國民大會監部署)특파원을 시작으로, 함평삼일운동책임자ㆍ함평신간회위원ㆍ함평농민운동ㆍ함평민립(民立)학교설립지부장ㆍ함평나산학교설립ㆍ일제의 창씨반대 등의 다채로운 투쟁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인행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되지 않았다.

그것은 첫째, 애국지사 이인행선생 스스로가 철저하게 비밀리에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밤이면 뒷산을 통해 이동하였으며, 동지들에게 받은 문서는 즉시 불에 태우고, 모든 독립운동 활동에 가명을 사용하였기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가 난해하였다.
이인행선생은 1919년 3월 4일 서대문경찰서에서 풀려난 이후부터 일제 첩보원에게 철저하게 미행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 후 1919년 11월 5일 일본 육군성(陸軍省) 비밀 문서인 102호(其566, 高警 제31411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4)’에 나타난 ‘독립운동자금 모집자 검거의 건’에서, 이인행선생의 활동 전모가 드러났다.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국민대회감부서 요원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육군성이 긴급으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원경(原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이 비밀 전문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국민대회감부서 의무금요구특파원(義務金要求特派員) 이인행(李仁行)ㆍ기산도(奇山度, 奇寔)ㆍ김종탁(金鍾鐸;金鐸)ㆍ김철(金澈;金演相)ㆍ박은용(朴殷容)ㆍ황병학(黃炳學)ㆍ민치환(閔致煥)ㆍ김영탁(金永鐸)ㆍ이문복(李文復)ㆍ홍종욱(洪鍾郁)ㆍ김요선(金堯璿)ㆍ김영식(金永植)ㆍ황용주(黃龍周)ㆍ윤용섭(尹龍燮)ㆍ이공삼(李工三)ㆍ안재우(安在宇)ㆍ김창규(金昌奎)ㆍ조원규(趙元奎)ㆍ조덕중(趙德仲)을 검거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독립군 일망타진 3대 미제사건 중의 하나를 해결하였으니, 천장일 경축행사에 체포자를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이인행선생과 독립운동 동지들의 활동이 그만큼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음을 나타낸다.
둘째,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은 비밀 활동을 위해 거주지를 함평, 나주, 군산, 상해(上海), 인천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 결과 연구 내용에 필요한 1차 자료의 확보에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자들로서도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의 활동 상황을 밝히는데 한계가 있었다.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은 민족의 시대적 과제인 자주독립을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였다.
애국지사 이인행 선생의 민족운동 제 1차 목표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에 있었다.
따라서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재조명하고 그가 걸어 간 사상과 활동의 궤적을 추적하는 작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면한 역사 발굴의 과제이며 지역사회 임시정부요인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990년 광복 45주년을 맞아 정부에서는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해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2030호)을 추서하였다.
이에 힘입어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의 평전을 발행하게 되었다.

이 책의 자료 인용은 『황성신문』, 『독립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시대일보』, 『신한민보』, 『전남일보』, 『함평군지』, 『전남도지』, 『대한제국고종황제국장화첩』,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서문당)』, 『히로시마 슈도대학 히구마교수 기증자료』, 「독립기념관자료」,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역사자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자료」, 「애국지사 이인행선생 유물」을 인용하였다.
이 중에서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자료의 경우 독립기념관으로 표기하였다.
본고의 용례 중 ‘조선’은 시대적으로 1910년 국권이 피탈되기 직전 까지를 의미한다.
일본제국주의는 ‘일제’로 표현하였다.
‘애국지사 이인행’은 ‘애국지사 이인행선생’으로 기록하였다.
문서에 따라 다르게 쓰인 감부서는 감부소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김종탁과 김종택은 문서에 따라 달리 쓰였으나 동일인이다.
끝으로 본서가 완성되도록 성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았던, 김병인ㆍ반윤홍ㆍ박창규 교수님과, 광주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 주인택 실장님, 전남대학교출판부 양채열 부장님을 비롯한 임직원 여러분, 현손 이철성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13년 04월 10일
- 쪽수, 무게, 크기 : 286쪽 | 153*224*20mm
- ISBN13 : 9788968490163
- ISBN10 : 8968490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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