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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평전 1
홍대용 평전 1
Description
책소개
지전설을 주창한 탁월한 과학자?
신분제 철폐를 내세운 사회사상가?
화이론을 부정한 내재적 민족주의자?
‘실학자 담헌’을 둘러싼 ‘신화’는 잊어라
‘담헌 신화’의 비판적 읽기 결정판


조선 후기에 활약한 홍대용은, ‘4천 년 동안 사상에 빛나는 학자’ 6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 대표적 실학자다.
지은이는 방대한 관련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이런 통설에 설득력 있는 이의를 제기한다.
홍대용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의산문답』, 「임하경륜」은 물론이고 그가 북경의 청나라 지식인들 주고받은 편지며, 『수리정온』 등 당대 서양 수학?과학 저술까지 섭렵해 홍대용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16년 전 원고 집필을 시작해, 편집에만 3년이 걸린 원고지 5,500여 매-그사이 새로운 사료가 드러나 원고지 1,000여 매 분량이 추가되기도 했다- 분량의 이 책은, 볼륨 자체만으로도 우리 출판사에서 보기 드문 대작大作 평전이다.

목차
1권

ㆍ책머리에

[01] 경화세족 담헌
충청도의 경화세족 | 아버지 홍역과 숙부 홍억 | 담헌 가문의 위상과 경제력
[02] 방황하던 10대의 한때
유소년기 | 거문고를 배우고 가희·무녀와 어울리다 | 갈등과 번민, 과거인가 학문인가
[03] 석실서원
스승 김원행 | 석실서원 | 스승에게 올린 편지 | 문경에서 벌인 당론 |
스승 김원행과 당론으로 논쟁하다 | 1753·1754년 《소학》 강의 | 소소한 일상
[04] 젊은 날의 공부, 경학·성리설·역사비평
성인에게도 의문을 품다 | 〈대학문의〉 | 〈논어문의〉 | 〈맹자문의〉 | 〈중용문의〉 |
〈서전문의〉 | 〈시경변의〉 | 〈주역변의〉 | 〈계몽기의〉 | 성리설을 공부하다 |
〈사론〉, 《자치통감》 비평
[05] 실천적 정주학자의 탄생
주필남에게 주는 글 | 실천적 정주학자의 탄생 | 화이론자 담헌
[06] 서양 천문학과 만나다
아버지 홍역을 따라 나주로 가다 | 나경적을 만나다 | 조선의 혼천의 |
담헌이 만든 혼천의 | 연행 전 담헌 천문학의 수준 | 홍역의 부정축재 사건
[07] 북경에서 본 청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국경을 초월한 우정
1765년 가을 북경으로 떠나다 | 북경행의 목적 | 압록강을 건너 한 달 만에 북경에 도착하다| 북경에서의 두 달, 1766년 1월과 2월 | 청을 바라보는 시각, 대명 의리 |
조선인의 의복과 중국인의 의복 | 청의 안정과 번영 | 청의 정치 | 중국 문명의 합리성 |
세계인을 만나는 곳, 북경 | 서양의 기기들, 일표·자명종 | 유구·몽골·회회·러시아 사람 |
천주당의 서양인 신부 | 엄성·반정균·육비 등 한인 지식인과 사귀다 | 마지막 만남과 이별 | 귀로에서 사귄 벗들 | 중국·북경 여행의 의미
[08] 편지로 이어진 우정과 북경 체험의 파란
편지로 이어진 우정 | 1766년 여름 첫 편지를 보내다 |
1767년 1월 반정균과 엄성의 편지를 받다 | 담헌의 북경 체험에 대한 두 가지 반응 | 1767년 김종후와 논쟁을 벌이다 | 홍역과 엄성의 죽음 | 엄성이 죽기 직전 쓴 1767년 가을의 편지 |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답신을 보내다 | 《의례》 연구와 관련해 김종후와 2차 논쟁을 벌이다| 1769년, 김종후와 논쟁이 이어지다 |
1769년 5월 동지사 회환 편에 육비와 반정균 등의 편지를 받다 |
김종후에게 다시 반박하는 편지를 보내다 | 1769년에 중국으로 보낸 편지

ㆍ주
ㆍ찾아보기

책 속으로
담헌의 가문은 17세기 이래 정통 노론의 당색을 띤 최상층의 경화세족이었다.
특히 담헌의 증조 홍숙 이하 그의 일계는…4대에 걸쳐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번성하였다.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담헌의 일계는 매우 부유하였다.
담헌이 노론계 유력 경화세족 가문의 일원이자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살았다는 사실은 기본적으로 담헌의 성격을 규정했을 것이다.
--- p.40

담헌은 정주학이 말하는 모든 인간의 생득적 도덕 원칙인 성性을, 언설의 차원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학문하는 행위라고 말했다.…〈자경설〉에서 정주학적 도덕 관념에 따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엄격히 통제하는, 곧 정주학적 원칙을 자신의 신체로 실천하는 담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p.257

1775년 담헌이 세손익위사 시직으로 입시했을 때 정조(이때는 즉위 전이었다)가 송시열의 북벌을 빈말이라고 하자, 담헌은 “그것은 빈말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을 이적시하는 시각과 북벌의 당위성은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는 비판 대상이 아니었다.
담헌이…즉각 받아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기도 했지만 또 북벌을 공공연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 p.272

담헌 혼천의가 갖는 의의는 송이영의 혼천의가 그랬던 것처럼 자명종의 추동식 작동 원리를 이용하여 해와 달과 별, 지구 등 천체 등이 시간적으로 정확하게 운동한다는 사실을, 정교한 입체적 형태로 구현한 데 있었다.
--- p.302

담헌이 나경적을 만나 혼천의를 제작한 것은, 서양 천문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1759년 나경적을 만나고 1762년 혼천의를 제작해 농수각에 두기까지 약 4, 5년 동안 담헌은 천문학과 자명종에 몰두하였다.
--- p.303

경전과 사서 공부에 열중하던 담헌에게 서양 천문학과 자명종, 그리고 혼천의의 제작은 그의 학문과 사상에 있어 사뭇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결국 1765년 겨울 그를 북경으로 떠나게 하였다.
--- p.315

담헌은 중국으로 떠나기 전…미리 중국어를 익혔다…담헌이 북경행을 결심한 것은, 화이론자로서 중국의 지식인을 만나 천하사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오랑캐 청의 번영을 확인하고그 이유를 탐색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서양인을 만나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지적 토론을 하려는 호기심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 p.328

2월 1일 비장 이기성이 안경을 사러 유리창에 갔다가 엄성과 반정균을 만나 안경을 거저 얻은 뒤 그들의 인품에 반해 담헌에게 두 사람을 만나 볼 것을 권했던 것이다.
안경이 계기가 되어 담헌은 이틀 뒤인 3일 간정동으로 찾아갔고, 이후 7차례의 만남을 가졌다.
--- p.350

‘더러운 오랑캐’인 청의 중국 지배가 중화 문명의 오염을 초래했다는 것이 담헌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랑캐의 지배하에서 중국은 유례없는 번영, 곧 백성에게 세금은 낮게 징수했고 부역으로 괴롭히지 않았다.
아울러 청의 통치 아래 중국과 주변부는 모두 평화를 누리고 있다.
중국 역사를 공부한 담헌으로서도 이렇게까지 안정된 중국은 본 적이 없었다.
--- p.375

담헌은 중국인 생활의 모든 국면을 치밀하게 관찰했다.…11월 30일 봉황성에서 태평거를 타는 순간부터 그것의 제도와 편리함을 꼼꼼히 살핀다.
12월 6일 낭자산을 떠나 신요동으로 가는 길에 나귀가 맷돌을 돌려 밀을 가는 것을,…12월 9일 심양 시내를 구경하다가…종이 만드는 법을 유심히 보는가 하면, 소흑산 숙소에서는 곡식을 까부는 풍곡차의 제작 원리를 살펴서 글로 옮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12월 24일 고려보를 지날 때 용두레 우물을, 12월 26일 조림장에서는 말을 먹이는 방법을 관찰한다.
--- p.379

담헌이 힘주어 말한 수레와 선박의 편리성은 뒷날 박제가에 이르러 수레와 선박을 이용한 물자의 운송·유통, 국제무역론 등으로 발전한다.
수레와 선박은 박제가와 박지원 등의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생각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담헌의 경우 《연기》 외에는 중국 문명의 합리성을 언급하는 글은 없다.
그의 개혁론을 확인할 수 있는 만년의 글인 〈임하경륜〉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물자의 유통이 아니라, 도리어 백성의 거주 이전을 금하고, 필요 이상의 소비를 엄격하게 금하는 사회를 구상한다.
--- p.385

담헌은 서양을 수학과 천문학, 천문 관측기기로 인지한다.
이것을 제외한 서양, 예컨대 종교, 기독교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서양의 역사와 사회 등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담헌은 중국의 천문학을 ‘망상과 억측’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양의 천문학은 의기儀器에 의한 관측과 수학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서양의 수학과 천문학은 담헌의 세계관에 충격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인다.
--- p.402

담헌은 이덕성과 통역관 홍명복을 대동해 천주당을 찾는다.…천주당에 도착하여 유송령·포우관 두 사람이 나오기 전 객당에서 기다렸다.
객당에서 담헌은 ‘하늘의 성상星狀’을 그린 천문도, 세계지도를 보았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벽에 그려진 서양화를 보았다.
--- p.405

《간정동필담》에는 “양명의 학문은 진실로 유감이 있지만, 후세의 기송記誦의 학문에 견주면 어찌 천양지차가 아니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실천, 실행 없이 단지 텍스트를 외우기만 하는 학문 행태인 ‘기송’에 대한 담헌의 비판은 실천적 정주학자 담헌의 기본 신조에서 나온 것이다.
담헌은 정주학의 진리성에 바탕하여 왕양명의 학문에 비판적 태도를 고수하는 한편, 실천 없는 정주학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실천을 앞세우는 양명학의 문제의식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 p.428

담헌의 생각과 언어, 행동, 폭넓은 학문은 이미 엄성과 반정균을 압도하고 있었다.
반정균은 자신은 담헌의 종 노릇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 했고, 엄성은 “거유鉅儒지 순유醇儒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따라가서 학생이 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한탄했다.
--- p.465

담헌이 정주학자임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그는 정주학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다만 그가 비판한 것은 주자에 대한 맹신적 숭봉이었다.
주자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의문 제기조차 엄호하고 봉쇄하는 조선 지식인 사회에 담헌은 염증을 느꼈던 것이다.
엄성·반정균·육비가 담헌에게 설파했던 주자 학설 비판을 담헌으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그 활발한 반론의 제기야말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 p.510

김종후와의 이 논쟁은 담헌이 화이론을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데 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비판적 사고는 북경에서의 체험과 서양 천문학·자연학에 대한 연구와 결합하여 《의산문답》에서 화이론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한편 정조는 보수파의 주장에 동조해 1786년(정조 10) 조선 사신단이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고, 서적 수입도 막는다.
--- p.517

담헌은 천하의 영재가 적지 않지만, 과환科宦과 물욕, 안일이 질곡이 되고 해를 끼친 나머지 고학古學에 몰두하는 사람이 드물고, 사장詞章과 기송, 훈고가 장애가 되어 실학實學에 몰두하는 사람이 더욱 적으며, 공리功利가 그 학술을 잡스럽게 하고, 노장과 불교가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고, 육상산과 왕양명이 그 참됨을 어지럽혀 정학正學에 우뚝 설 사람이 드물다고 말한다.
--- p.534

김종후에게 가장 불편했던 것은, “강희제 이후 백성과 함께 휴식하면서 한 시대를 진압하고 복종시켰다”라는 말이었다.
이는 담헌이 오랑캐인 청의 중국 통치를 긍정한다는 의미였다.…청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을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삼고 있던 골수 노론 김종후의 생각을 뿌리부터 뒤흔들었을 것이다.
--- p.573

담헌은 먼저 조선이 동이인 것은, 지계地界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적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인 지역성을 든 것이다.
조선은 중국이란 ‘문명의 중심’의 주변부에 위치하는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이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이적의 지역에서 태어나 이적의 공간에 산다 하더라도 성인이 될 수도, 현인이 될 수도 있다.
이적과 중화를 구분하는 결정적 근거는 문명성에 있기 때문이다.
--- p.579

담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례》란 텍스트를 아무리 오랫동안 치밀하게 분석해도 도덕적 실천과 가정·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없으며, 비생산적 논쟁만 불러올 것이라고 말한다.
--- p.630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의례》 연구가 율력·산수·전곡·갑병만 못하다면서 동원한 “익지 않은 오곡은 잘 익은 돌벼만 못한 것”이라고 한 비유다.…‘인’은 유학의 최고 가치다.
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내면화하여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떨어지는 가치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 p.632

김종후는 자신의 단정을 근거로 “예를 잃어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망친 경우는 들어본 적은 있어도 율력·산수·전곡·갑병을 다스리지 않아 그 나라를 잃은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김종후에게 국가가 성립, 유지되는 데 필수조건은 예였고, 율력·산수·전곡·갑병일 수 없었다.
김종후는 그것을 기능적·말단적인 것으로 보았다.
--- p.639

출판사 리뷰
평전의 전범-종합적ㄱ 입체적 인물상 복원

‘대작’인 것만이 이 책의 미덕이 아니다.
여태 경학經學, 역사비평, 천문학과 자연학, 수학, 음악학, 실학 등 분절적으로 이해됐던 홍대용의 성취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 그가 종래 알려졌던 ‘실학자’가 아니라, 진시황의 ‘분서’가 정당한 것이라 평했을 정도로 철저한 정주학자였음을 밝혀냈다.
여기 더해 그의 집안이 넉넉한 경화세족이었다든가, 십대 시절의 방황, 스승 김원행에 대한 비판적 의문 제기, 부친 홍역이 연루된 부패 사건, 북경행 전까지 홍대용의 수학 수준 등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 홍대용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
홍대용이 쓴 수학책 『주해수용』을 이해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수학책까지 들춰봤다니 더 말할 게 없다.
깊게 파고들고 넓게 살피는 지은이의 저술 방식에는 어지간한 동료 연구자들이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해서 홍대용이 정주학의 진리성을 부정한 적이 없고, 단지 실천을 도외시 하는 주자朱子 맹신을 비판한 ‘실천적 정주학자’였음을 논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계 뚜렷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흔히 홍대용은 전근대적 우주관을 무너뜨린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 평가된다.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제시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은이는 홍대용의 자연학은 관측과 수학에 의거한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의 기론氣論에 입각한 선언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계를 지적한다.
물류상감설과 같은 재래의 동기감응설을 끌어오는가 하면 도가의 수련을 통해 천체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태연히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담헌이 제작했던 혼천의가 관측기구가 아니라 천체 모형이었으며, 자신의 서재 천장에 별자리 그림을 붙여 놓고 천문학 연구에 열중했다든가 하는 사례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전설은 지구 자전만 이야기했지 공전에 대해서는 침묵했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구중심설을 깨뜨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궤를 달리한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홍대용의 지구 자전설이 담긴 『의산문답』이 인쇄되어 읽히지 않았기에 그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민과 동떨어진 신분제 해체론

지은이는 홍대용이 신분제 타파 등 평등을 강조한 사회사상가라는 주장 역시 ‘신화’라고 논증한다.
우선 그가 남긴 모든 글에서 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평가는, 그가 「임하경륜」에서 ‘놀고 먹는’ 유식遊食 사족을 비판한 대목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는 오독誤讀이라는 것이다.
담헌 자신이 노비를 거느린 지주였으며, 음직으로 벼슬을 살았다.
그러니 재능과 학문이 있는 농부나 장사꾼의 자식이 조정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 공경의 자제가 관청의 하인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진실성 혹은 실천성이 결여된 수사로 보았다.
민이 수탈당하는 사회 모순에 대해 말하기는커녕 영천 군수로 있을 때 진휼곡을 착복하고 그것을 군민에게 빌려주어 갑절로 받아내려 했다고 꼬집는다.
또한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농민은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농민은 거주를 이전할 수 있고, 농토를 분배받을 수 있는 통제사회였다.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과 달리 토지 소유제 등 「임하경륜」에 담긴 그의 ‘개혁책’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단편적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화이론 부정의 진짜 이유와 그 실체

조선에서의 ‘화이론’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에 대한 충절의식을 내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홍대용이 북경행 이후 평생 소중하게 여겼던 엄성ㄱ 반정균 등 중국인 벗들은 이미 청 체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담헌이 귀국길에 만나 희원외도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간단한 논리로 복색을 들먹이며 화와 이를 구분하려는 담헌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니 담헌이 이후 저술한 『의산문답』에서 화ㄱ 이의 구분은 그저 허구라고 역설한 데는 개인적 동기가 있었다고 지은이는 해석한다.
귀국 후 벌어진 논쟁에서 김종후가 엄성 등을 명에 대한 충절 의식도 없이 오랑캐 조정에 벼슬하고자 하는 비루한 자로 몰아붙이자 그들과의 사귐을 중히 여겼던 담헌이 이를 논파하기 위해 화ㄱ 이의 구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는 설명이다.
이는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중국도 당연히 중심이 아니라는 지원설地圓說에 근거한 것이기도 해도 이를 그저 ‘민족의 주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지은이가 그려낸 홍대용은, 우리가 ‘교과서’로 익힌 홍대용상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홍대용의 성취와 의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20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있기를 바랐던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1,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담헌학’-만약 있다면-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책이다.
덧붙이자면 역사 바로 보기를 원한다면 무의미한 여정은 아닐 것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0월 29일
- 쪽수, 무게, 크기 : 784쪽 | 152*224*40mm
- ISBN13 : 9791156123064
- ISBN10 : 1156123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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