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시마 유키오
Description
책소개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 미시마 유키오
“아름다운 작품을 짓는 것과 나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되는 일이
동일한 윤리 기준에 선 것임을 발견했다”
데뷔작부터 마지막 대표작까지 미시마 유키오의 직접 선별과
10여 년에 걸친 정밀한 번역으로 완성한 미시마 단편의 정수
☆국내 최초 번역 22편을 포함한 최다 중단편 수록!☆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으로서 수년간 노벨문학상 후보에 들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미시마 유키오.
말년의 우익 행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외면되어왔던 그의 작품세계가 탄생 100주년을 즈음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대표작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 ‘풍요의 바다’ 시리즈 등 주요 순문학 장편들이 번역 소개되었지만, 그는 흥미로운 사건 전개에 초점을 맞춘 엔터테인먼트 소설에서도 필력을 발휘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당대 문단의 스타였다.
현대문학에서는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든 이 작가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압축된 단편집 『미시마 유키오』를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마흔한 번째 권으로 선보인다.
16세에 동인지에 발표하며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을 알린 「꽃이 한창인 숲」과 21세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한 작품 「담배」를 비롯해, 도입부부터 비극적인 사건이 휘몰아치며 몰입을 유발하는 「한여름의 죽음」, 할복자살을 묘사해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 「우국」 등 미시마 유키오는 20대와 30대 초중반 내내 왕성하게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970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남긴 단편이 무려 144편에 이르는데, 그 수많은 작품 중에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정답이 되어줄 책이 바로 이 단편선이다.
1968년과 1970년에 출간된 자선 단편집 두 권, 총 24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미시마 유키오 스스로 완성도가 높다고 흡족하게 생각한 작품들을 선별해 엮은 것으로, 권말에는 출간 당시 스스로 쓴 해설이 붙어 있어 작품에 대한 자평과 창작의 단초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 만큼, 일본문학 번역의 대가 양윤옥 번역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정밀하고 미려한 문체를 복원해냈다.
“아름다운 작품을 짓는 것과 나 스스로 아름다운 것이 되는 일이
동일한 윤리 기준에 선 것임을 발견했다”
데뷔작부터 마지막 대표작까지 미시마 유키오의 직접 선별과
10여 년에 걸친 정밀한 번역으로 완성한 미시마 단편의 정수
☆국내 최초 번역 22편을 포함한 최다 중단편 수록!☆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으로서 수년간 노벨문학상 후보에 들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미시마 유키오.
말년의 우익 행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외면되어왔던 그의 작품세계가 탄생 100주년을 즈음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대표작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 ‘풍요의 바다’ 시리즈 등 주요 순문학 장편들이 번역 소개되었지만, 그는 흥미로운 사건 전개에 초점을 맞춘 엔터테인먼트 소설에서도 필력을 발휘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당대 문단의 스타였다.
현대문학에서는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든 이 작가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압축된 단편집 『미시마 유키오』를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마흔한 번째 권으로 선보인다.
16세에 동인지에 발표하며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을 알린 「꽃이 한창인 숲」과 21세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한 작품 「담배」를 비롯해, 도입부부터 비극적인 사건이 휘몰아치며 몰입을 유발하는 「한여름의 죽음」, 할복자살을 묘사해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 「우국」 등 미시마 유키오는 20대와 30대 초중반 내내 왕성하게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970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남긴 단편이 무려 144편에 이르는데, 그 수많은 작품 중에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정답이 되어줄 책이 바로 이 단편선이다.
1968년과 1970년에 출간된 자선 단편집 두 권, 총 24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미시마 유키오 스스로 완성도가 높다고 흡족하게 생각한 작품들을 선별해 엮은 것으로, 권말에는 출간 당시 스스로 쓴 해설이 붙어 있어 작품에 대한 자평과 창작의 단초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 만큼, 일본문학 번역의 대가 양윤옥 번역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정밀하고 미려한 문체를 복원해냈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꽃이 한창인 숲 · 7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 · 50
담배 · 63
하루코 · 82
서커스 · 133
원승회 · 144
날개 - 고티에풍의 이야기 · 165
리큐의 소나무 · 181
크로스워드 퍼즐 · 201
한여름의 죽음 · 228
불꽃놀이 · 288
달걀 · 306
시 쓰는 소년 · 324
바다와 저녁노을 · 341
신문지 · 355
모란 · 365
다리밟기 · 372
귀현 · 396
온나가타 · 430
백만 엔 전병 · 463
우국 · 484
달 · 515
포도빵 · 538
빗속의 분수 · 560
작가 해설1 · 572
작가 해설2 · 579
옮긴이의 말 · 586
미시마 유키오 연보 · 598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 · 50
담배 · 63
하루코 · 82
서커스 · 133
원승회 · 144
날개 - 고티에풍의 이야기 · 165
리큐의 소나무 · 181
크로스워드 퍼즐 · 201
한여름의 죽음 · 228
불꽃놀이 · 288
달걀 · 306
시 쓰는 소년 · 324
바다와 저녁노을 · 341
신문지 · 355
모란 · 365
다리밟기 · 372
귀현 · 396
온나가타 · 430
백만 엔 전병 · 463
우국 · 484
달 · 515
포도빵 · 538
빗속의 분수 · 560
작가 해설1 · 572
작가 해설2 · 579
옮긴이의 말 · 586
미시마 유키오 연보 · 598
상세 이미지
책 속으로
그는 어떤 때는 어른으로, 때로는 어린애로 받아들여진다.
그건 그에게 확실한 뭔가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 생각건대 소년시절에는 다른 어느 시기에서도 찾기 힘든 확실한 뭔가가 존재하고,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어 끙끙거린다.
그것이 성장이다.
그는 마침내 이름을 부여한다.
성공이 그를 안심시키고 자긍심을 높여준다.
하지만 이름이 주어졌을 때, 한순간에 그 확실한 뭔가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다.
게다가 그는 그렇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즉 그는 성인이 된 것이다.
- 유년은 단단히 봉인된 상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소년은 그것을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한다.
뚜껑은 열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그는 깨닫는다.
‘보물 상자란 이런 식으로 항상 텅 빈 것이구나.’ 그는 그로부터 자신이 세운 정리定理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즉 그는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상자는 과연 텅 비었던 것일까.
뚜껑을 열자마자 뭔가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이 달아나버린 건 아닐까.
--- 「담배」 중에서
S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잠시 후에 교외 전차 승차장 쪽에서 환한 살구색 우산이 다가왔다.
둘이 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지만(그들은 길가 한쪽에 서 있는 나를 아직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 대단한 비도 아닌데 거의 뺨이 맞닿을 만큼 바짝 붙어 있었다.
머리채가 둘 중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질투는커녕 그 정경은 오히려 내가 미치코와의 첫 밀회를 기다리는 처지라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나를 매혹했다.
그것은 뭔가 단적으로 쾌락의 인상에 가까웠다.
그렇게 바짝 붙었어도 역시 우산 하나로는 무리였는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노색 우산 자루를 잡은 하루코의 손이 하얗고 촉촉하게 빗물에 젖어 차가운 요염함을 풍기는 게 보였다.
우산 속에서 밝은 살구색 천의 빛을 받은 아름다운 두 여자의 얼굴이 삐져나올 듯 밀치락달치락하는 모습은 마치 풍성한 과일 바구니 같은 느낌이었다.
--- 「하루코」 중에서
떼쟁이 무쓰오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쓰오는 여주인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깜빡 잊은 게 생각난 듯 떨궈놓은 생후 일 년 남짓한 외둥이였다.
‘만키네’는 새로 개업한 가게다.
부부가 따로 주거지도 없이 고용인과 함께 가게에 입주한 결과, 오늘처럼 바쁜 날에는 아기 울음소리를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여주인은 아이 보는 미요를 불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놀다 오라고 말했다.
용돈도 조금 집어주었다.
미요는 열여섯 살이다.
몸집이 작아서 열네 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시에서 태어나 도쿄 숙부 내외의 양녀가 되었으나 숙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침 집안 살림도 힘들어진 시기였기 때문에 ‘만키네’의 아이 돌보미로 일하러 나온 것이다.
(…) 미요는 날마다 이 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멘 띠가 하루하루 더 세게 조여오 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거워질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무릎 위에 올려두고 바라볼 때는 귀여운 아기지만, 등에 업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미요는 등짝의 아이를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대신, 무슨 생각을 하든 그 ‘무게’가 생각 속에 섞여드는 것만 같았다.
--- 「리큐의 소나무」 중에서
세 아이는 모래성을 쌓는 데 싫증이 났다.
모래 위의 흔적을 발로 지워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야스에는 여태껏 빠져 있던 혼자만의 안일한 세계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들을 쫓아갔다.
하지만 아이들은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다.
파도의 명동鳴動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파도가 무너지며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곳에 항상 얕고 완만한 소용돌이가 반대로 휘감고 돌았다.
기요오와 게이코는 손을 맞잡고 가슴쯤까지 오는 물에 서서 몸 주위로 들어왔다가 빠지는 물의 힘에 저항하고 발바닥 주위로 새어 나가는 모래의 힘에 저항하는 재미에 눈을 반짝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거 봐, 누가 잡아당기는 거 같아.”
그렇게 자그마한 오빠가 말했다.
야스에는 그 곁에까지 다가가 더 이상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물가에 혼자 남은 가쓰오를 가리키며 동생을 따돌리지 말고 어서 나와서 같이 놀자고 말했다.
기요오와 게이코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흐른 모래가 발바닥 부분을 남기고 빠져나가는 것을 물밑에서 느끼는 뭔가 비밀스러운 즐거움 때문에 손을 맞잡은 채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야스에는 햇볕이 영 두려웠다.
자신의 어깨를 보고 수영복 위로 드러난 가슴을 보았다.
그 하얀 살빛에 고향의 눈이 생각났다.
수영복 가슴팍을 살짝 손끝으로 잡아보고 그 따스함에 미소를 지었다.
손톱이 약간 길어서 검은 모래가 낀 것을 보고 야스에는 오늘 돌아가면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요오와 게이코의 모습이 없었다.
벌써 나가버렸나 생각했다.
육지 쪽을 돌아보니 가쓰오 혼자 서 있었다.
가쓰오는 이쪽을 가리키며 이상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야스에는 문득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발치의 물을 보았다.
물이 다시 밀려가고 2미터쯤 앞의 물거품 속에 작은 회백색 몸이 떠밀려 가는 게 보였다.
기요오의 진남색 자그마한 팬츠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야스에의 심장은 한층 심하게 뛰었다.
말없이 추격자 같은 표정으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의외로 가까운 곳까지 부서지지 않은 채 다가온 파도가 앞을 가로막고 그녀의 눈앞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그 가슴을 정면으로 때렸다.
야스에는 파도 속으로 쓰러졌다.
--- 「한여름의 죽음」 중에서
주키치, 자타로, 모스케, 사쓰오, 노고로로 말할 것 같으면 특출하게 쾌활한 학생들이다.
다섯 명 모두 키도 크고 몸집도 크고 아주 걸걸한 목소리에 대단한 게으름뱅이들로, 학교라고는 출석한 적이 없다.
다섯 명 모두 조정부漕艇部 부원인데 합숙 때의 분위기가 평소 생활에까지 이어졌다.
20조 다다미방이 있는 일반가정 하숙집을 구해, 그 방 하나에 각자 비용을 분담해 함께 지내는 것이다.
하숙집의 이 방은, 죽은 남편이 상피병에 걸리는 바람에 몸이 자꾸만 커져서 보통의 방은 맞지 않을 것을 염려해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다섯 학생은 경쟁적으로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규율 바르게 밤낮으로 이부자리는 펴놓은 채로 뭉개며 지냈다.
--- 「달걀」 중에서
사노가와 만기쿠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온나가타 전담 배우다.
즉 재주껏 다치야쿠를 겸해서 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화사하지만 음습하고, 다양한 연기의 선이 지극히 섬세하다.
힘도 권세도 인내도 담력도 지용智勇도 강한 저항도 여성적 표현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여성적 표현으로 여과해낼 줄 아는 재능이다.
그게 바로 진짜 온나가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현대에는 이런 배우를 보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건 어떤 특수한 섬세하고도 교묘한 악기의 음색이지 평범한 악기에 약음기弱音器를 씌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마구잡이로 여자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 「온나가타」 중에서
“지금 경비교대 명령을 받고 오늘 하룻밤 귀가를 허락받았어.
내일 아침에는 분명 그 친구들을 토벌하러 나가게 될 거야.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레이코.”
레이코는 단정하게 앉은 채 시선을 떨구었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남편은 벌써 단 한 가지,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이다.
중위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죽음을 뒷받침하며 그 어둡고 견고한 논증을 위해 언어는 흔들림 없는 힘을 드러냈다.
중위는 고민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침묵의 시간에는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 같은 청렬淸冽함이 있었다.
중위는 이틀에 걸친 기나긴 오뇌 끝에 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내가 언외의 각오를 짐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어.” 중위는 거듭된 불면에도 맑고 다부진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 밤 할복하기로 했어.”
레이코의 눈빛에는 전혀 멈칫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 동그란 눈은 강한 방울 소리 같은 생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각오하고 있었어요.
나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중위는 그 눈의 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말이 마치 농담처럼 술술 나오다니, 어떻게 이런 중대한 허락을 그리도 가볍게 표현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래, 함께하자.
다만 당신이 나의 할복을 지켜봐줬으면 해.
알겠지?”
말을 해놓고 나니 두 사람의 마음에는 갑작스럽게 해방된 듯한 기쁨이 샘솟았다.
레이코는 남편의 그 크나큰 신뢰에 가슴이 뭉클했다.
중위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에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 첫 번째 신뢰였다.
함께 죽기를 약속했으면서도 아내를 먼저 죽게 하지 않고 아내의 죽음을 이미 스스로는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두었다는 것이 두 번째의 더욱더 큰 신뢰였다.
만일 중위가 의심 많은 남편이었다면 흔한 동반자살처럼 아내를 먼저 죽이는 것을 선택했으리라.
--- 「우국」 중에서
하이미날의 지시에 따라 세 사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하이미날이 책상에 올려둔 종이봉투에서 맥주 캔과 코카콜라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그와 키코는 맥주를 마시고 피터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그들은 신속하게 취했고 피터까지 콜라 한 캔에 취해버렸다.
취하자고 생각하면 그 즉시 취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불쑥 발을 내딛는 것이 낙하산부대 대원에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좋든 싫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런 게임을 하자.
네가 나를 뭔가 물건으로 지정해.
그러면 나는 즉각 네가 이름을 댄 그 물건이 되는 거야.
그다음에는 내가 다시 물건 이름을 대고.”
하이미날이 술에 취해 더욱더 느릿느릿해진 어조로 말했다.
피터는 타고난 즉결 과단으로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을 그에게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냉장고!”
“좋아, 햄!”
하이미날은 키코를 가리켰다.
“피터는…… 믹서.”
- 하이미날이 털썩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자신의 가슴 앞에서 문을 활짝 여는 몸짓을 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냉기가 새어 나오고 하이미날의 가슴팍에 꽁꽁 언 알전구 불이 켜지면서 텅 빈 갈비뼈 선반을 펼쳤다.
키코는 농염한 햄이 되었다.
그녀는 나체보다 더 벌거벗은 듯한 복숭앗빛 고기가 되어 유연하게 하이미날의 무릎에서 가슴팍으로 기어올라 달라붙었다.
“탁!”
하이미날이 두 팔의 문을 닫았다.
피터는 고심하며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자신의 머릿속에 넣고 온몸을 흔들며 몇 번이나 스핀을 하면서 아름답고 환상적인 색채의 주스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달걀도 넣는 게 좋겠지? 영양분이 되니까.”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솜씨 좋게, 보이지 않는 달걀을 깨뜨렸다.
하나.
또 하나.
-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 어깨를 쳐가며 웃었다.
하지만 너무도 두드러진 벽의 메아리가 그 웃음을 도중에 멈추게 했다.
--- 「달」 중에서
문고판 형식으로 자선 단편집을 낼 만큼 나는 단편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이미 소원해져버린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단편소설의 쇠망기라고 불리는 현대의 저널리즘 추세에 따라 마치 제사공장製工場의 조업 단축처럼 단편 제작을 조절하기 시작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단편 제작에서 마음이 멀어져간 것이다.
그리고 소년시절에 시와 단편소설에 전념하며 그곳에 담았던 나의 애환은 해가 지나면서 전자는 희곡으로, 후자는 장편소설로 흘러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좀 더 구조적이고 좀 더 다변多辯적이고 좀 더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나 자신을 밀고 나간 증거이고, 좀 더 큰 작업의 자극과 긴장이 내게 필요해졌다는 점도 보여준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포리즘 스타일에서 체계적인 사고 스타일로 서서히 이행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생각을 작품 속에 서술하는 데 있어서 천천히 천천히 공들여 납득시키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촌철의 말투를 피하게 되었다.
사상의 원숙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겠으나, 성급하지만 신속 경첩輕捷하던 연상 작용이 나이와 함께 시들어간 것과 조응하고 있다.
말하자면 경기병輕騎兵에서 중기병重騎兵으로 장비를 새롭게 바꾼 것이다.
이 책에 수록한 것은 따라서 나의 경기병 시절의 작품들이다.
하긴 일률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 자체가 순수하게 경기병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중기병으로의 이행을 묵직하게 안에 숨겨두고 오로지 그 조련調練을 위해 썼던 작품도 있다.
그건 그에게 확실한 뭔가가 부족한 탓일까.
아니, 생각건대 소년시절에는 다른 어느 시기에서도 찾기 힘든 확실한 뭔가가 존재하고,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부여하고 싶어 끙끙거린다.
그것이 성장이다.
그는 마침내 이름을 부여한다.
성공이 그를 안심시키고 자긍심을 높여준다.
하지만 이름이 주어졌을 때, 한순간에 그 확실한 뭔가는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다.
게다가 그는 그렇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즉 그는 성인이 된 것이다.
- 유년은 단단히 봉인된 상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소년은 그것을 어떻게든 열어보려고 한다.
뚜껑은 열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그는 깨닫는다.
‘보물 상자란 이런 식으로 항상 텅 빈 것이구나.’ 그는 그로부터 자신이 세운 정리定理를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즉 그는 ‘어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상자는 과연 텅 비었던 것일까.
뚜껑을 열자마자 뭔가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이 달아나버린 건 아닐까.
--- 「담배」 중에서
S역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잠시 후에 교외 전차 승차장 쪽에서 환한 살구색 우산이 다가왔다.
둘이 한 우산을 쓰고 있었다지만(그들은 길가 한쪽에 서 있는 나를 아직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 대단한 비도 아닌데 거의 뺨이 맞닿을 만큼 바짝 붙어 있었다.
머리채가 둘 중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질투는커녕 그 정경은 오히려 내가 미치코와의 첫 밀회를 기다리는 처지라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나를 매혹했다.
그것은 뭔가 단적으로 쾌락의 인상에 가까웠다.
그렇게 바짝 붙었어도 역시 우산 하나로는 무리였는지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노색 우산 자루를 잡은 하루코의 손이 하얗고 촉촉하게 빗물에 젖어 차가운 요염함을 풍기는 게 보였다.
우산 속에서 밝은 살구색 천의 빛을 받은 아름다운 두 여자의 얼굴이 삐져나올 듯 밀치락달치락하는 모습은 마치 풍성한 과일 바구니 같은 느낌이었다.
--- 「하루코」 중에서
떼쟁이 무쓰오가 울음을 터뜨렸다.
무쓰오는 여주인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깜빡 잊은 게 생각난 듯 떨궈놓은 생후 일 년 남짓한 외둥이였다.
‘만키네’는 새로 개업한 가게다.
부부가 따로 주거지도 없이 고용인과 함께 가게에 입주한 결과, 오늘처럼 바쁜 날에는 아기 울음소리를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여주인은 아이 보는 미요를 불러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놀다 오라고 말했다.
용돈도 조금 집어주었다.
미요는 열여섯 살이다.
몸집이 작아서 열네 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조시에서 태어나 도쿄 숙부 내외의 양녀가 되었으나 숙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침 집안 살림도 힘들어진 시기였기 때문에 ‘만키네’의 아이 돌보미로 일하러 나온 것이다.
(…) 미요는 날마다 이 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멘 띠가 하루하루 더 세게 조여오 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거워질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무릎 위에 올려두고 바라볼 때는 귀여운 아기지만, 등에 업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미요는 등짝의 아이를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대신, 무슨 생각을 하든 그 ‘무게’가 생각 속에 섞여드는 것만 같았다.
--- 「리큐의 소나무」 중에서
세 아이는 모래성을 쌓는 데 싫증이 났다.
모래 위의 흔적을 발로 지워버리고 뛰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야스에는 여태껏 빠져 있던 혼자만의 안일한 세계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들을 쫓아갔다.
하지만 아이들은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다.
파도의 명동鳴動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파도가 무너지며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는 곳에 항상 얕고 완만한 소용돌이가 반대로 휘감고 돌았다.
기요오와 게이코는 손을 맞잡고 가슴쯤까지 오는 물에 서서 몸 주위로 들어왔다가 빠지는 물의 힘에 저항하고 발바닥 주위로 새어 나가는 모래의 힘에 저항하는 재미에 눈을 반짝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거 봐, 누가 잡아당기는 거 같아.”
그렇게 자그마한 오빠가 말했다.
야스에는 그 곁에까지 다가가 더 이상 깊은 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물가에 혼자 남은 가쓰오를 가리키며 동생을 따돌리지 말고 어서 나와서 같이 놀자고 말했다.
기요오와 게이코는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흐른 모래가 발바닥 부분을 남기고 빠져나가는 것을 물밑에서 느끼는 뭔가 비밀스러운 즐거움 때문에 손을 맞잡은 채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야스에는 햇볕이 영 두려웠다.
자신의 어깨를 보고 수영복 위로 드러난 가슴을 보았다.
그 하얀 살빛에 고향의 눈이 생각났다.
수영복 가슴팍을 살짝 손끝으로 잡아보고 그 따스함에 미소를 지었다.
손톱이 약간 길어서 검은 모래가 낀 것을 보고 야스에는 오늘 돌아가면 손톱을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요오와 게이코의 모습이 없었다.
벌써 나가버렸나 생각했다.
육지 쪽을 돌아보니 가쓰오 혼자 서 있었다.
가쓰오는 이쪽을 가리키며 이상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야스에는 문득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발치의 물을 보았다.
물이 다시 밀려가고 2미터쯤 앞의 물거품 속에 작은 회백색 몸이 떠밀려 가는 게 보였다.
기요오의 진남색 자그마한 팬츠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야스에의 심장은 한층 심하게 뛰었다.
말없이 추격자 같은 표정으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의외로 가까운 곳까지 부서지지 않은 채 다가온 파도가 앞을 가로막고 그녀의 눈앞에서 무너졌다.
그리고 그 가슴을 정면으로 때렸다.
야스에는 파도 속으로 쓰러졌다.
--- 「한여름의 죽음」 중에서
주키치, 자타로, 모스케, 사쓰오, 노고로로 말할 것 같으면 특출하게 쾌활한 학생들이다.
다섯 명 모두 키도 크고 몸집도 크고 아주 걸걸한 목소리에 대단한 게으름뱅이들로, 학교라고는 출석한 적이 없다.
다섯 명 모두 조정부漕艇部 부원인데 합숙 때의 분위기가 평소 생활에까지 이어졌다.
20조 다다미방이 있는 일반가정 하숙집을 구해, 그 방 하나에 각자 비용을 분담해 함께 지내는 것이다.
하숙집의 이 방은, 죽은 남편이 상피병에 걸리는 바람에 몸이 자꾸만 커져서 보통의 방은 맞지 않을 것을 염려해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다섯 학생은 경쟁적으로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규율 바르게 밤낮으로 이부자리는 펴놓은 채로 뭉개며 지냈다.
--- 「달걀」 중에서
사노가와 만기쿠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온나가타 전담 배우다.
즉 재주껏 다치야쿠를 겸해서 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다.
화사하지만 음습하고, 다양한 연기의 선이 지극히 섬세하다.
힘도 권세도 인내도 담력도 지용智勇도 강한 저항도 여성적 표현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여성적 표현으로 여과해낼 줄 아는 재능이다.
그게 바로 진짜 온나가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현대에는 이런 배우를 보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건 어떤 특수한 섬세하고도 교묘한 악기의 음색이지 평범한 악기에 약음기弱音器를 씌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마구잡이로 여자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 「온나가타」 중에서
“지금 경비교대 명령을 받고 오늘 하룻밤 귀가를 허락받았어.
내일 아침에는 분명 그 친구들을 토벌하러 나가게 될 거야.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레이코.”
레이코는 단정하게 앉은 채 시선을 떨구었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남편은 벌써 단 한 가지,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이다.
중위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죽음을 뒷받침하며 그 어둡고 견고한 논증을 위해 언어는 흔들림 없는 힘을 드러냈다.
중위는 고민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침묵의 시간에는 눈이 녹아 흐르는 계곡물 같은 청렬淸冽함이 있었다.
중위는 이틀에 걸친 기나긴 오뇌 끝에 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의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내가 언외의 각오를 짐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어.” 중위는 거듭된 불면에도 맑고 다부진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 밤 할복하기로 했어.”
레이코의 눈빛에는 전혀 멈칫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 동그란 눈은 강한 방울 소리 같은 생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각오하고 있었어요.
나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중위는 그 눈의 힘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말이 마치 농담처럼 술술 나오다니, 어떻게 이런 중대한 허락을 그리도 가볍게 표현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래, 함께하자.
다만 당신이 나의 할복을 지켜봐줬으면 해.
알겠지?”
말을 해놓고 나니 두 사람의 마음에는 갑작스럽게 해방된 듯한 기쁨이 샘솟았다.
레이코는 남편의 그 크나큰 신뢰에 가슴이 뭉클했다.
중위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음에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봐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 첫 번째 신뢰였다.
함께 죽기를 약속했으면서도 아내를 먼저 죽게 하지 않고 아내의 죽음을 이미 스스로는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두었다는 것이 두 번째의 더욱더 큰 신뢰였다.
만일 중위가 의심 많은 남편이었다면 흔한 동반자살처럼 아내를 먼저 죽이는 것을 선택했으리라.
--- 「우국」 중에서
하이미날의 지시에 따라 세 사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하이미날이 책상에 올려둔 종이봉투에서 맥주 캔과 코카콜라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그와 키코는 맥주를 마시고 피터는 코카콜라를 마셨다.
그들은 신속하게 취했고 피터까지 콜라 한 캔에 취해버렸다.
취하자고 생각하면 그 즉시 취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불쑥 발을 내딛는 것이 낙하산부대 대원에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좋든 싫든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이런 게임을 하자.
네가 나를 뭔가 물건으로 지정해.
그러면 나는 즉각 네가 이름을 댄 그 물건이 되는 거야.
그다음에는 내가 다시 물건 이름을 대고.”
하이미날이 술에 취해 더욱더 느릿느릿해진 어조로 말했다.
피터는 타고난 즉결 과단으로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을 그에게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냉장고!”
“좋아, 햄!”
하이미날은 키코를 가리켰다.
“피터는…… 믹서.”
- 하이미날이 털썩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자신의 가슴 앞에서 문을 활짝 여는 몸짓을 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냉기가 새어 나오고 하이미날의 가슴팍에 꽁꽁 언 알전구 불이 켜지면서 텅 빈 갈비뼈 선반을 펼쳤다.
키코는 농염한 햄이 되었다.
그녀는 나체보다 더 벌거벗은 듯한 복숭앗빛 고기가 되어 유연하게 하이미날의 무릎에서 가슴팍으로 기어올라 달라붙었다.
“탁!”
하이미날이 두 팔의 문을 닫았다.
피터는 고심하며 다양한 과일과 채소를 자신의 머릿속에 넣고 온몸을 흔들며 몇 번이나 스핀을 하면서 아름답고 환상적인 색채의 주스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달걀도 넣는 게 좋겠지? 영양분이 되니까.”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솜씨 좋게, 보이지 않는 달걀을 깨뜨렸다.
하나.
또 하나.
-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 어깨를 쳐가며 웃었다.
하지만 너무도 두드러진 벽의 메아리가 그 웃음을 도중에 멈추게 했다.
--- 「달」 중에서
문고판 형식으로 자선 단편집을 낼 만큼 나는 단편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해 이미 소원해져버린 것을 느낀다.
그렇다고 단편소설의 쇠망기라고 불리는 현대의 저널리즘 추세에 따라 마치 제사공장製工場의 조업 단축처럼 단편 제작을 조절하기 시작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단편 제작에서 마음이 멀어져간 것이다.
그리고 소년시절에 시와 단편소설에 전념하며 그곳에 담았던 나의 애환은 해가 지나면서 전자는 희곡으로, 후자는 장편소설로 흘러간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좀 더 구조적이고 좀 더 다변多辯적이고 좀 더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나 자신을 밀고 나간 증거이고, 좀 더 큰 작업의 자극과 긴장이 내게 필요해졌다는 점도 보여준다.
이건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포리즘 스타일에서 체계적인 사고 스타일로 서서히 이행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의 생각을 작품 속에 서술하는 데 있어서 천천히 천천히 공들여 납득시키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촌철의 말투를 피하게 되었다.
사상의 원숙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겠으나, 성급하지만 신속 경첩輕捷하던 연상 작용이 나이와 함께 시들어간 것과 조응하고 있다.
말하자면 경기병輕騎兵에서 중기병重騎兵으로 장비를 새롭게 바꾼 것이다.
이 책에 수록한 것은 따라서 나의 경기병 시절의 작품들이다.
하긴 일률적으로 이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 자체가 순수하게 경기병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중기병으로의 이행을 묵직하게 안에 숨겨두고 오로지 그 조련調練을 위해 썼던 작품도 있다.
--- 「작가 해설1」 중에서
출판사 리뷰
미의식과 예술관, 육체와 죽음에 대한 인식
: 미시마 유키오 작품세계의 맹아가 담긴 조각들
일본에서 이 두 권의 단편집이 출간된 것은 1968년과 1970년으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미 단편 창작에서 멀어져 희곡과 장편소설에 주력하던 시기다.
40대에 이미 거장이 된 작가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이전에 쓴 작품들을 돌아보며 뛰어난 것만 가려 뽑은 만큼 주제의식의 발전이나 작풍의 변화, 작품에 투영된 시대상과 개인적 변모까지 작품세계 전반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
작품은 등단작부터 발표 순서에 따라 게재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데, 창작 초기의 단편들에는 스스로 언급하듯 소년시절 추억의 감각적인 진실, 소소한 에피소드의 기억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담배」 「시 쓰는 소년」 「꽃이 한창인 숲」의 문학청년인 화자는 문학의 출발점, 언어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유년기에 대한 회고나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에도 미시마 본인이 투영된 모습으로, 그가 작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평생 탐구하게 되는 주제 또한 일찌감치 마련되어, 18세 때 쓴 산문시풍의 작품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에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고정한다는 의미에서 살인에 비유된 예술, 예술가와 행동가의 대비 등 후년에 집필한 수많은 장편소설의 맹아가 들어 있다.
또한 그는 당시 금기시되던 동성애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도 유명한데, 스스로도 관능주의로 일관했다고 자평하는 「하루코」나 가부키극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를 그려낸 「온나가타」에서도 퀴어 코드가 암시되고 있다.
한편으로 전시에 패망을 예감하고 느낀 불안, 근로동원으로 비행기 제작소에서 일한 경험이 「바다와 저녁노을」「날개」 등의 단편에 우의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병약했던 그는 1945년 신체검사 오진으로 징집을 면한 일로 “행동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생각에 콤플렉스를 갖게 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한 육체와 죽음 양쪽을 모두 동경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그런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문제작 「우국」이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36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사랑과 죽음의 융합, 관능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작품을 각색한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으며, 결국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택해 자기실현적 예언을 완성했다.
지적인 사유와 집요한 관찰, 기술적 실험…
다양한 방법론으로 완성한 단편의 미학
권말에 수록된 작가의 해설은 수록 단편들을 스스로 평가하면서 창작의 비밀을 터놓기도 한다.
장차 장편소설로 확장하게 될 주제나 소재에 천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신속한 연상과 비유를 통해 거침없이 써나간 작품이 있다.
쥘 피에르 테오필 고티에, 월터 페이터나 에드거 앨런 포 등 특정 작가의 작풍을 반영하기도 하고, 특정한 기교에 초점을 맞춰 설계하거나 참신한 구성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시마는 「원승회」를 평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승마클럽의 원승 경험, 실제로는 “아무런 극적인 것도 없었던 경험의 세밀한 스케치에 뭔가 이야기를 짜 넣는” 방식이 단편소설 창작의 상투적 수단이라고 언급한다.
게이샤의 세계를 묘사한 「다리밟기」나 가부키극 뒤편의 광경을 그린 「온나가타」, 새롭게 등장한 비트족의 난해한 어법을 빌린 「포도빵」과 「달」 등도 다양한 세계를 놀이하듯 느긋하게 관찰한 후 연마를 더한 문체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귀현」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는데, 추상화해서 섬세하게 묘사한 인물의 성격 자체가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에 비하면 콩트 계열의 작품들은 지적인 운용과 재치에 의존한다.
공포소설의 장치를 빌려 긴장감을 조성한 「불꽃놀이」나 난센스로 무장한 익살극 「달걀」이 장르 자체가 요구하는 기교에 의해 전개된다고 한다면, 「모란」이나 「백만 엔 전병」은 마지막 서술에 의해 작품 전체의 인상이 반전되며 새로운 함의를 품게 되는 것이 흥미롭다.
구성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으로는 「한여름의 죽음」이 있다.
실화에서 착안한 이 소설은 수록된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량으로 중편에 해당하는데, 일반적 의미에서의 파국이 첫머리에 나온다.
소설 구성의 원뿔을 일부러 거꾸로 세웠는데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전개가 탁월하다.
이처럼 이 책에 수록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들은 작가의 삶과 시대상 변화에 따라, 기법이나 장르에 따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도 단편소설의 응축된 밀도를 유지한다.
정교하게 구축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세계를 일괄하기에 가장 완벽한 단 한 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록 작품에 대한 작가의 평
「꽃이 한창인 숲」(1941)
“1941년에 쓴 이 릴케풍의 소설은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낭만파의 악영향과 애늙은이처럼 잘난 척하는 점만 자꾸 눈에 띈다.
열여섯 살 소년은 독창성에 손을 뻗으려고 하다가 어떻게 해도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척하는 듯한 면이 있다.”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1944)
“이 짧은 산문시풍 작품에 드러난 살인 철학, 살인자(예술가)와 항해자(행동가)의 대비 등의 주제에는 후년의 수많은 장편소설의 주제가 될 맹아가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1943년이라는, 한창 전시를 살면서 급격히 기울어진 일본의 붕괴를 예감한 한 소년의 암담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신세계의 우의적 비유가 촘촘히 담겨 있다.”
「담배」(1946)
“전쟁 직후 미증유의 혼란기에 이런 유장하고 정적인 소설을 쓴 것은 반시대적 열정이라기보다 단순히 내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기교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예전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놀란 것은 소년시절과 유년시절의 추억, 그 추억의 감각적인 진실, 수많은 소소한 에피소드의 기억 등이 적어도 이십대 종반 가까이까지는 실로 잘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하루코」(1947)
“요즘 대유행하는 레즈비어니즘 소설의, 아마도 전후 선구작일 것이다.
(…) 거의 관념적 조작 없이 철저히 관능주의로 일관한 작품이다.
「하루코」에서 내가 노린 것은 문학상의 퇴폐 취향을 건전한 리얼리즘으로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이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의 소설 작법의 기본이 되고 있다.”
「서커스」(1948)
“그 무렵에는 높은 수준의 평론, 난해한 소설을 만재한 새로운 잡지가 숱하게 나왔다.
(…) 이런 현상을 작가 입장에서 말하자면, 곳곳에 순문학 연습용 초지草紙가 있었던 셈이라서 상업주의와의 타협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서커스」는 그 틈에 생겨난, 마음 내키는 대로 써본 소품이다.”
「원승회」(1950)
“단편을 쓰는 기술이 드디어 성숙하기 시작한 시기에 패럴렐리즘 기법을 활용해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인데, 원승회에 대한 묘사 자체는 나 자신도 참가했던 팰리스 승마클럽의 원승 스케치였고, 그러한 실제로는 아무런 극적인 것도 없었던 경험의 미세한 스케치에 뭔가 이야기를 짜 넣는다는 방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의 단편소설 창작의 상투적 수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되고 있다.”
「날개」(1951)
“「날개」에는 ‘고티에풍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리얼리즘과는 확실하게 결별한 고티에의 단편소설을 모방하면서 실은 전시와 전후의 시대를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청년의 비통한 체험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리큐의 소나무」(1951) , 「크로스워드 퍼즐」(1952)
“단편소설의 풍미라고 생각했던 것을 수리적으로 빚어내려고 한 기술적 실험이며, 나는 정취보다 언제나 방법론에 관심이 가는 성격이었다.”
「한여름의 죽음」(1952)
“원뿔을 일부러 거꾸로 세운 듯한, 일반적인 소설과는 반대의 구성을 생각했다.
즉 일반적 의미에서의 파국이 첫머리에 나오고, 게다가 그 파국에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다.
그 필연성으로서의 숙명이 암시되는 것은 마지막 한 행이며, 이게 그리스극이라면 마지막 한 행부터 시작해 첫머리의 파국을 결말로 했어야 할 것이다.
그걸 일부러 거꾸로 세워본 것이다.”
「불꽃놀이」(1953)
“극히 간단한 공포소설의 기교를 사용해 ‘붕어빵처럼 닮은 타인’이라는, 근대 소설가가 가장 피할 듯한 케케묵은 우연의 설정을 일부러 도입하고 그 속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의 이면에서 창백해지는 권력자의 얼굴이라는, 한순간의 정치적 크로키를 그려내려고 한 단편이다.”
「달걀」(1953)
“에드거 앨런 포의 파르스를 모방한 이 진품珍品은 나의 편애 대상이다.
학생운동을 재판하는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읽는 것은 각자 자유겠지만, 내가 노린 것은 풍자를 뛰어넘는 난센스이고, 나의 펜은 웬만해서는 이런 ‘순수한 바보스러움’ 의 높이에까지 도달한 적이 없다.”
「시 쓰는 소년」(1954)
“소년시절의 나와 언어(관념)의 관계를 이야기했고, 문학의 출발점, 자의적이지만 숙명적인 성립에 대해 말했다.
여기에는 한 명의 비평가적 시선을 가진 차가운 성격의 소년이 등장하는데 이 소년의 자신감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생겨났고, 게다가 거기에는 그 스스로는 아직 뚜껑을 연 적이 없는 지옥이 얼핏 엿보이는 것이다.”
「바다와 저녁노을」(1955)
“기적의 도래를 믿었으나 그것이 찾아오지 않는 기이함, 아니, 기적 자체보다 더욱더 이상한 불가사의라는 주제를 응축해서 보여주려 했던 작품이다.”
「신문지」(1955) , 「모란」(1955) , 「백만 엔 전병」(1960)
“주제다운 주제 없이 일정한 효과를 향해 팽팽히 당겨진 활처럼 구석구석까지 긴장한 형태가 유지되고, 그것이 독자의 뇌리에 날려가 적중한다면 뭐 그걸로 좋다, 라는 식의 작품이다.
그것은 또한 체스 선수가 맛볼 만한 지적인 긴장의 한 판 게임,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 판 게임이 구성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다리밟기」(1956) , 「온나가타」(1957)
「다리밟기」에서 다룬 게이샤의 세계에 존재하는 스노비즘과 인정과 냉혹한 일면, 「온나가타」에서 다룬 배우의 세계에 존재하는 장대과 비속함과 자기본위 (…) 어쩌다 재미있어서 그쪽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이에 그 독특한 색조, 언어 동작, 생활 예법 등이 수조 속의 기이한 열대어처럼 문조文藻의 해초 사이를 어른거리게 되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각각의 세계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식이었기 때문에 (…) 어떤 농후함과 리치한 맛을 부여했을 것이다.
「귀현」(1957)
“분명한 모델이 있고, 작중에서도 명시했듯이 소년시절의 추억의 모델을 가능한 한 추상화해서 월터 페이터의 ‘상상적 초상’ 기법을 충실히 모방해 그려낸 단편이다.
나는 월터 페이터 유파에 더해 가능한 한 차갑고 고아한 얼음 같은 관능성을 표출하고자 주의를 기울여, 그 기법이 주인공의 귀족적 성격을 자연히 작품 자체의 성격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국」(1961)
“이 작품에 묘사된 사랑과 죽음의 광경, 에로스와 대의의 완전한 융합과 상승 작용은 내가 이 인생에서 기대하는 유일의 지복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예전에 나는 ‘만일 몹시 바쁜 사람이 미시마의 소설 중에서 한 편만, 미시마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응축한 엑기스 같은 소설을 한 편만 읽기를 원한다면 「우국」을 읽어주시면 된다’라고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달」(1962) , 「포도빵」(1963)
“당시 도쿄에서는 트위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해 비트 바 몇 군데가 문을 열었다.
그중 한곳에 드나드는 사이에 바에서 알게 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특수한 어법에 익숙해지고 은어를 배우고 점차 그들의 생활의 근저에 깔린 우수를 접하면서 두 편의 단편이 만들어졌다.”
「빗속의 분수」(1963)
“나에게는 이런 귀엽게 보이는 콩트에 대한 기호가 있고, 그 귀여움에는 잔혹함과 속악함과 시詩가 뒤섞일 필요가 있었다.”
: 미시마 유키오 작품세계의 맹아가 담긴 조각들
일본에서 이 두 권의 단편집이 출간된 것은 1968년과 1970년으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미 단편 창작에서 멀어져 희곡과 장편소설에 주력하던 시기다.
40대에 이미 거장이 된 작가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이전에 쓴 작품들을 돌아보며 뛰어난 것만 가려 뽑은 만큼 주제의식의 발전이나 작풍의 변화, 작품에 투영된 시대상과 개인적 변모까지 작품세계 전반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
작품은 등단작부터 발표 순서에 따라 게재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데, 창작 초기의 단편들에는 스스로 언급하듯 소년시절 추억의 감각적인 진실, 소소한 에피소드의 기억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담배」 「시 쓰는 소년」 「꽃이 한창인 숲」의 문학청년인 화자는 문학의 출발점, 언어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유년기에 대한 회고나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에도 미시마 본인이 투영된 모습으로, 그가 작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평생 탐구하게 되는 주제 또한 일찌감치 마련되어, 18세 때 쓴 산문시풍의 작품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에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고정한다는 의미에서 살인에 비유된 예술, 예술가와 행동가의 대비 등 후년에 집필한 수많은 장편소설의 맹아가 들어 있다.
또한 그는 당시 금기시되던 동성애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도 유명한데, 스스로도 관능주의로 일관했다고 자평하는 「하루코」나 가부키극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 배우를 그려낸 「온나가타」에서도 퀴어 코드가 암시되고 있다.
한편으로 전시에 패망을 예감하고 느낀 불안, 근로동원으로 비행기 제작소에서 일한 경험이 「바다와 저녁노을」「날개」 등의 단편에 우의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병약했던 그는 1945년 신체검사 오진으로 징집을 면한 일로 “행동으로부터 거부당했다”는 생각에 콤플렉스를 갖게 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강인한 육체와 죽음 양쪽을 모두 동경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그런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문제작 「우국」이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36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사랑과 죽음의 융합, 관능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작품을 각색한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으며, 결국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택해 자기실현적 예언을 완성했다.
지적인 사유와 집요한 관찰, 기술적 실험…
다양한 방법론으로 완성한 단편의 미학
권말에 수록된 작가의 해설은 수록 단편들을 스스로 평가하면서 창작의 비밀을 터놓기도 한다.
장차 장편소설로 확장하게 될 주제나 소재에 천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신속한 연상과 비유를 통해 거침없이 써나간 작품이 있다.
쥘 피에르 테오필 고티에, 월터 페이터나 에드거 앨런 포 등 특정 작가의 작풍을 반영하기도 하고, 특정한 기교에 초점을 맞춰 설계하거나 참신한 구성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미시마는 「원승회」를 평하면서 자신이 참가한 승마클럽의 원승 경험, 실제로는 “아무런 극적인 것도 없었던 경험의 세밀한 스케치에 뭔가 이야기를 짜 넣는” 방식이 단편소설 창작의 상투적 수단이라고 언급한다.
게이샤의 세계를 묘사한 「다리밟기」나 가부키극 뒤편의 광경을 그린 「온나가타」, 새롭게 등장한 비트족의 난해한 어법을 빌린 「포도빵」과 「달」 등도 다양한 세계를 놀이하듯 느긋하게 관찰한 후 연마를 더한 문체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귀현」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는데, 추상화해서 섬세하게 묘사한 인물의 성격 자체가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에 비하면 콩트 계열의 작품들은 지적인 운용과 재치에 의존한다.
공포소설의 장치를 빌려 긴장감을 조성한 「불꽃놀이」나 난센스로 무장한 익살극 「달걀」이 장르 자체가 요구하는 기교에 의해 전개된다고 한다면, 「모란」이나 「백만 엔 전병」은 마지막 서술에 의해 작품 전체의 인상이 반전되며 새로운 함의를 품게 되는 것이 흥미롭다.
구성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으로는 「한여름의 죽음」이 있다.
실화에서 착안한 이 소설은 수록된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량으로 중편에 해당하는데, 일반적 의미에서의 파국이 첫머리에 나온다.
소설 구성의 원뿔을 일부러 거꾸로 세웠는데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전개가 탁월하다.
이처럼 이 책에 수록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들은 작가의 삶과 시대상 변화에 따라, 기법이나 장르에 따라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도 단편소설의 응축된 밀도를 유지한다.
정교하게 구축한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세계를 일괄하기에 가장 완벽한 단 한 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록 작품에 대한 작가의 평
「꽃이 한창인 숲」(1941)
“1941년에 쓴 이 릴케풍의 소설은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낭만파의 악영향과 애늙은이처럼 잘난 척하는 점만 자꾸 눈에 띈다.
열여섯 살 소년은 독창성에 손을 뻗으려고 하다가 어떻게 해도 닿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척하는 듯한 면이 있다.”
「중세에 한 살인상습자가 남긴 철학적 일기의 발췌」(1944)
“이 짧은 산문시풍 작품에 드러난 살인 철학, 살인자(예술가)와 항해자(행동가)의 대비 등의 주제에는 후년의 수많은 장편소설의 주제가 될 맹아가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거기에는 1943년이라는, 한창 전시를 살면서 급격히 기울어진 일본의 붕괴를 예감한 한 소년의 암담하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정신세계의 우의적 비유가 촘촘히 담겨 있다.”
「담배」(1946)
“전쟁 직후 미증유의 혼란기에 이런 유장하고 정적인 소설을 쓴 것은 반시대적 열정이라기보다 단순히 내가 그때까지 갖고 있던 기교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예전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놀란 것은 소년시절과 유년시절의 추억, 그 추억의 감각적인 진실, 수많은 소소한 에피소드의 기억 등이 적어도 이십대 종반 가까이까지는 실로 잘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하루코」(1947)
“요즘 대유행하는 레즈비어니즘 소설의, 아마도 전후 선구작일 것이다.
(…) 거의 관념적 조작 없이 철저히 관능주의로 일관한 작품이다.
「하루코」에서 내가 노린 것은 문학상의 퇴폐 취향을 건전한 리얼리즘으로 처리하는 것이었는데, 이건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의 소설 작법의 기본이 되고 있다.”
「서커스」(1948)
“그 무렵에는 높은 수준의 평론, 난해한 소설을 만재한 새로운 잡지가 숱하게 나왔다.
(…) 이런 현상을 작가 입장에서 말하자면, 곳곳에 순문학 연습용 초지草紙가 있었던 셈이라서 상업주의와의 타협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서커스」는 그 틈에 생겨난, 마음 내키는 대로 써본 소품이다.”
「원승회」(1950)
“단편을 쓰는 기술이 드디어 성숙하기 시작한 시기에 패럴렐리즘 기법을 활용해 그려낸 한 폭의 수채화인데, 원승회에 대한 묘사 자체는 나 자신도 참가했던 팰리스 승마클럽의 원승 스케치였고, 그러한 실제로는 아무런 극적인 것도 없었던 경험의 미세한 스케치에 뭔가 이야기를 짜 넣는다는 방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의 단편소설 창작의 상투적 수단이라고 할 만한 것이 되고 있다.”
「날개」(1951)
“「날개」에는 ‘고티에풍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리얼리즘과는 확실하게 결별한 고티에의 단편소설을 모방하면서 실은 전시와 전후의 시대를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청년의 비통한 체험을 우화적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리큐의 소나무」(1951) , 「크로스워드 퍼즐」(1952)
“단편소설의 풍미라고 생각했던 것을 수리적으로 빚어내려고 한 기술적 실험이며, 나는 정취보다 언제나 방법론에 관심이 가는 성격이었다.”
「한여름의 죽음」(1952)
“원뿔을 일부러 거꾸로 세운 듯한, 일반적인 소설과는 반대의 구성을 생각했다.
즉 일반적 의미에서의 파국이 첫머리에 나오고, 게다가 그 파국에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다.
그 필연성으로서의 숙명이 암시되는 것은 마지막 한 행이며, 이게 그리스극이라면 마지막 한 행부터 시작해 첫머리의 파국을 결말로 했어야 할 것이다.
그걸 일부러 거꾸로 세워본 것이다.”
「불꽃놀이」(1953)
“극히 간단한 공포소설의 기교를 사용해 ‘붕어빵처럼 닮은 타인’이라는, 근대 소설가가 가장 피할 듯한 케케묵은 우연의 설정을 일부러 도입하고 그 속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의 이면에서 창백해지는 권력자의 얼굴이라는, 한순간의 정치적 크로키를 그려내려고 한 단편이다.”
「달걀」(1953)
“에드거 앨런 포의 파르스를 모방한 이 진품珍品은 나의 편애 대상이다.
학생운동을 재판하는 권력에 대한 풍자라고 읽는 것은 각자 자유겠지만, 내가 노린 것은 풍자를 뛰어넘는 난센스이고, 나의 펜은 웬만해서는 이런 ‘순수한 바보스러움’ 의 높이에까지 도달한 적이 없다.”
「시 쓰는 소년」(1954)
“소년시절의 나와 언어(관념)의 관계를 이야기했고, 문학의 출발점, 자의적이지만 숙명적인 성립에 대해 말했다.
여기에는 한 명의 비평가적 시선을 가진 차가운 성격의 소년이 등장하는데 이 소년의 자신감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생겨났고, 게다가 거기에는 그 스스로는 아직 뚜껑을 연 적이 없는 지옥이 얼핏 엿보이는 것이다.”
「바다와 저녁노을」(1955)
“기적의 도래를 믿었으나 그것이 찾아오지 않는 기이함, 아니, 기적 자체보다 더욱더 이상한 불가사의라는 주제를 응축해서 보여주려 했던 작품이다.”
「신문지」(1955) , 「모란」(1955) , 「백만 엔 전병」(1960)
“주제다운 주제 없이 일정한 효과를 향해 팽팽히 당겨진 활처럼 구석구석까지 긴장한 형태가 유지되고, 그것이 독자의 뇌리에 날려가 적중한다면 뭐 그걸로 좋다, 라는 식의 작품이다.
그것은 또한 체스 선수가 맛볼 만한 지적인 긴장의 한 판 게임,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한 판 게임이 구성된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다리밟기」(1956) , 「온나가타」(1957)
「다리밟기」에서 다룬 게이샤의 세계에 존재하는 스노비즘과 인정과 냉혹한 일면, 「온나가타」에서 다룬 배우의 세계에 존재하는 장대과 비속함과 자기본위 (…) 어쩌다 재미있어서 그쪽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이에 그 독특한 색조, 언어 동작, 생활 예법 등이 수조 속의 기이한 열대어처럼 문조文藻의 해초 사이를 어른거리게 되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각각의 세계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식이었기 때문에 (…) 어떤 농후함과 리치한 맛을 부여했을 것이다.
「귀현」(1957)
“분명한 모델이 있고, 작중에서도 명시했듯이 소년시절의 추억의 모델을 가능한 한 추상화해서 월터 페이터의 ‘상상적 초상’ 기법을 충실히 모방해 그려낸 단편이다.
나는 월터 페이터 유파에 더해 가능한 한 차갑고 고아한 얼음 같은 관능성을 표출하고자 주의를 기울여, 그 기법이 주인공의 귀족적 성격을 자연히 작품 자체의 성격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국」(1961)
“이 작품에 묘사된 사랑과 죽음의 광경, 에로스와 대의의 완전한 융합과 상승 작용은 내가 이 인생에서 기대하는 유일의 지복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예전에 나는 ‘만일 몹시 바쁜 사람이 미시마의 소설 중에서 한 편만, 미시마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응축한 엑기스 같은 소설을 한 편만 읽기를 원한다면 「우국」을 읽어주시면 된다’라고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달」(1962) , 「포도빵」(1963)
“당시 도쿄에서는 트위스트가 유행하기 시작해 비트 바 몇 군데가 문을 열었다.
그중 한곳에 드나드는 사이에 바에서 알게 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특수한 어법에 익숙해지고 은어를 배우고 점차 그들의 생활의 근저에 깔린 우수를 접하면서 두 편의 단편이 만들어졌다.”
「빗속의 분수」(1963)
“나에게는 이런 귀엽게 보이는 콩트에 대한 기호가 있고, 그 귀여움에는 잔혹함과 속악함과 시詩가 뒤섞일 필요가 있었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15일
- 쪽수, 무게, 크기 : 612쪽 | 684g | 145*207*30mm
- ISBN13 : 9791167903310
- ISBN10 : 1167903315
You may also like
카테고리
한국어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