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 어디로 가나?
Description
책소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다시 복음과 십자가의 길을 물어야 한다!”
2024년 12월 3일, 이른바 ‘12.3 불법 계엄 사태’ 이후 한국사회는 큰 충격과 분열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복음의 언어로 혐오와 배제를 외쳤던 한국교회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당혹하게 했다.
물론 그것은 한국교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부에게 대부분의 교회가 침묵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한국교회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묻고, 이 물음에 여섯 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마중물로 내놓은 응답이다.
우리는 다시 복음과 십자가의 길을 물어야 한다!”
2024년 12월 3일, 이른바 ‘12.3 불법 계엄 사태’ 이후 한국사회는 큰 충격과 분열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복음의 언어로 혐오와 배제를 외쳤던 한국교회의 모습은 우리 모두를 당혹하게 했다.
물론 그것은 한국교회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부에게 대부분의 교회가 침묵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한국교회를 돌아보며,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묻고, 이 물음에 여섯 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마중물로 내놓은 응답이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서문: 인격과 일상의 변화에서
세계와 존재의 변화로 _지형은 7
한국교회의 우상숭배
: 권력, 재물, 이념 _권수경 13
트럼프, 근본주의, 그리고 한국교회 _배덕만 55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 _옥성득 93
한국교회와 기독교 극우의 문제
: 탈권위와 새로운 연대를 향하여 _박성철 139
한국교회 ‘여자 사용 설명서’ 비판 _백소영 179
한국교회 공적 영성의 재구성 _장동민 229
주(註) 278
세계와 존재의 변화로 _지형은 7
한국교회의 우상숭배
: 권력, 재물, 이념 _권수경 13
트럼프, 근본주의, 그리고 한국교회 _배덕만 55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 _옥성득 93
한국교회와 기독교 극우의 문제
: 탈권위와 새로운 연대를 향하여 _박성철 139
한국교회 ‘여자 사용 설명서’ 비판 _백소영 179
한국교회 공적 영성의 재구성 _장동민 229
주(註) 278
상세 이미지
책 속으로
오늘날 우리가 ‘교회 개혁이나 갱신’을 이야기할 때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말세의 비밀인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는 세계 및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관된다.
기독교 신앙의 현상적인 중심이 사회적 집단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언제나 ‘땅 끝’, ‘하늘과 땅의 모든 것’, ‘모든 민족’과 연관된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말하면, 정치, 경제, 법조, 교육, 문화 등 인간의 삶은 물론, 지구 환경의 모든 것과 연관된다.
신학과 신앙이 연관되지 않는 존재의 상황이란 없다.
--- p.8-9
아브라함이 나그네가 되었지만 돌아갈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늘이었던 것처럼(히11:15-16), 우리 교회사 역시 떨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초창기 역사를 뒤져 거기서 우리가 회복할 이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 교회에 그런 곳이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첫사랑에도, 인간의 탐욕과 여러 우상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사랑은 우리의 일그러진 역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보게 해주는 성경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참된 회복이겠다.
--- p.20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마음에 품고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교회가 먼저 서로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의 본을 보이면서, 세상에서도 독점하지 말고 서로 나누는 제도를 만들도록 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애초에 없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교회가 세상보다 더한 빈부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 크기, 사업 규모, 목사들 월급 차이, 전별금…,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교회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힘을 쓴다.
그래서 세상 정부가 균등하게 하는 정책을 만들면, 교회가 그걸 빨갱이 정책이라고 욕한다.
교회와 세상이 뒤집힌 것 같다.
우리가 믿는 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잘 모르겠다.
--- p.39
이것이 애초부터 우상을 섬겨 온 교회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권력을 섬겼고,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도 섬겼다.
그 이후에는 권력과 돈과 이데올로기를 종합적으로 섬겼다.
그런 우상숭배를 깨닫고, 시인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종교적 색채만 선명한 훈련 프로그램을 다양하고도 심오하게 개발, 활용해 왔으니, 그런 제한된 자리에서 무슨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겠으며,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인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겠는가?
--- p.50-51
데이비드 거쉬(David P.
Gushee)는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진 순간, 복음주의 정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이 모습에 실망한 수많은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면서 탈-복음주의(Post-evangelicalism)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공화당 행정부에 눈길을 보내는 경향이 있고, 공화당은 거대한 백인 복음주의자 그룹에게 연대를 위한 도움을 청한다.
그 결과 이제는 (백인) 복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곧 공화당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 이런 복음주의의 변질과 타락이 거쉬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신앙을 포기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 p.78-79
신학은 복음(그리스도)과 상황(문화)의 만남의 산물이다.
한국 상황에서 복음이 토착화하고 문화를 변혁하는 역사를 새롭게 해석, 실천하는 신학 작업과 그것을 역사적 관점에서 정리하는 신학사의 작업은 함께 간다.
역사는 우리가 현재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돕는다.
극우와 극좌 사이에 다양한 신학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양극단이 교회를 장악할 때 위기가 증폭된다.
신학은 변하며, 보수나 자유나 진보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 p.95-96
결론적으로 근본주의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분명했다.
근본주의가 교리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 못지않게 시대적 상황과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변질되거나 왜곡된 측면도 많았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소위 진보파의 정치 참여나 보수파의 정치 참여는 교회의 성장 동력을 잃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교리적 순수성뿐만 아니라, 정치에 매몰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인 사랑, 포용,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 p.137
물론 정치적 극단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반사회적 행동을 표출하는 이들은 분명 소수다.
하지만 소수의 반사회적 행동이 가능한 이유는 이를 침묵으로 인정하는 다수의 소극적 동조가 있기 때문이다.
이대남 현상의 핵심은 ‘20대 남성이 전부 극우적이다’가 아니라 극우적 주장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많고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소수가 이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데 있다.
--- p.151
“압사당하고 질식당하기 전에 그냥 나오세요!” 그렇게 외치는 젊은 교회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맞다.
죽을 거 같다면 일단 도망쳐라.
숨을 쉬고 자기부터 살려라.
목숨이 붙어 있어야 바꿀 힘도, 다시 시작할 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수술용 거즈가 폐에 잘못 붙어 반백 년을 넘게 가쁜 호흡을 하며 버틴 사람처럼, 한국교회가 나에게 그렇게나 오래된 애증의 존재라서, 나는 도저히 탈출은 못 하겠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성긴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외친다.
‘12.3 이후’라는 말이 새로움을 가져오길 희망한다면, 그래서 한국교회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못했던) 목소리를 먼저 들리게 하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 p.227
영성을 상실한 보수는 가치를 지키기보다 기득권을 지키고, 자기반성의 영성을 잃은 진보는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타인을 가르치려 하다가 대중의 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이 민주공화국에 영성의 자양분을 공급하려면, 우리의 영성이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야 가능하다.
영성과 체제가 밀착하면 맹목적 에너지로 전락하여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보수, 심지어 극우와 결탁함으로써, 참된 영성을 잃고 기독교 종족주의(tribalism)로 퇴화했다.
‘십자군’의 방식으로 ‘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교회 밖에 가짜 적을 설정하고 권력과 폭력을 동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말세의 비밀인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는 세계 및 존재하는 모든 것과 연관된다.
기독교 신앙의 현상적인 중심이 사회적 집단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언제나 ‘땅 끝’, ‘하늘과 땅의 모든 것’, ‘모든 민족’과 연관된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말하면, 정치, 경제, 법조, 교육, 문화 등 인간의 삶은 물론, 지구 환경의 모든 것과 연관된다.
신학과 신앙이 연관되지 않는 존재의 상황이란 없다.
--- p.8-9
아브라함이 나그네가 되었지만 돌아갈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늘이었던 것처럼(히11:15-16), 우리 교회사 역시 떨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초창기 역사를 뒤져 거기서 우리가 회복할 이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 교회에 그런 곳이 어디 있겠는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첫사랑에도, 인간의 탐욕과 여러 우상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사랑은 우리의 일그러진 역사의 출발점이 아니라, 그 역사를 바로 보게 해주는 성경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참된 회복이겠다.
--- p.20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마음에 품고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교회가 먼저 서로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의 본을 보이면서, 세상에서도 독점하지 말고 서로 나누는 제도를 만들도록 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애초에 없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교회가 세상보다 더한 빈부격차를 보이기 때문이다.
교회 크기, 사업 규모, 목사들 월급 차이, 전별금…,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다.
자본주의 교회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힘을 쓴다.
그래서 세상 정부가 균등하게 하는 정책을 만들면, 교회가 그걸 빨갱이 정책이라고 욕한다.
교회와 세상이 뒤집힌 것 같다.
우리가 믿는 게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잘 모르겠다.
--- p.39
이것이 애초부터 우상을 섬겨 온 교회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권력을 섬겼고,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도 섬겼다.
그 이후에는 권력과 돈과 이데올로기를 종합적으로 섬겼다.
그런 우상숭배를 깨닫고, 시인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종교적 색채만 선명한 훈련 프로그램을 다양하고도 심오하게 개발, 활용해 왔으니, 그런 제한된 자리에서 무슨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겠으며,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인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겠는가?
--- p.50-51
데이비드 거쉬(David P.
Gushee)는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진 순간, 복음주의 정치가 바닥으로 추락했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이 모습에 실망한 수많은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버리면서 탈-복음주의(Post-evangelicalism)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공화당 행정부에 눈길을 보내는 경향이 있고, 공화당은 거대한 백인 복음주의자 그룹에게 연대를 위한 도움을 청한다.
그 결과 이제는 (백인) 복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곧 공화당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 이런 복음주의의 변질과 타락이 거쉬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신앙을 포기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 p.78-79
신학은 복음(그리스도)과 상황(문화)의 만남의 산물이다.
한국 상황에서 복음이 토착화하고 문화를 변혁하는 역사를 새롭게 해석, 실천하는 신학 작업과 그것을 역사적 관점에서 정리하는 신학사의 작업은 함께 간다.
역사는 우리가 현재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돕는다.
극우와 극좌 사이에 다양한 신학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양극단이 교회를 장악할 때 위기가 증폭된다.
신학은 변하며, 보수나 자유나 진보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 p.95-96
결론적으로 근본주의는 한국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분명했다.
근본주의가 교리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 못지않게 시대적 상황과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변질되거나 왜곡된 측면도 많았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소위 진보파의 정치 참여나 보수파의 정치 참여는 교회의 성장 동력을 잃게 하고,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교리적 순수성뿐만 아니라, 정치에 매몰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인 사랑, 포용, 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
--- p.137
물론 정치적 극단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반사회적 행동을 표출하는 이들은 분명 소수다.
하지만 소수의 반사회적 행동이 가능한 이유는 이를 침묵으로 인정하는 다수의 소극적 동조가 있기 때문이다.
이대남 현상의 핵심은 ‘20대 남성이 전부 극우적이다’가 아니라 극우적 주장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많고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소수가 이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데 있다.
--- p.151
“압사당하고 질식당하기 전에 그냥 나오세요!” 그렇게 외치는 젊은 교회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맞다.
죽을 거 같다면 일단 도망쳐라.
숨을 쉬고 자기부터 살려라.
목숨이 붙어 있어야 바꿀 힘도, 다시 시작할 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수술용 거즈가 폐에 잘못 붙어 반백 년을 넘게 가쁜 호흡을 하며 버틴 사람처럼, 한국교회가 나에게 그렇게나 오래된 애증의 존재라서, 나는 도저히 탈출은 못 하겠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성긴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외친다.
‘12.3 이후’라는 말이 새로움을 가져오길 희망한다면, 그래서 한국교회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들리지 않았던(못했던) 목소리를 먼저 들리게 하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라.
--- p.227
영성을 상실한 보수는 가치를 지키기보다 기득권을 지키고, 자기반성의 영성을 잃은 진보는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타인을 가르치려 하다가 대중의 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이 민주공화국에 영성의 자양분을 공급하려면, 우리의 영성이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야 가능하다.
영성과 체제가 밀착하면 맹목적 에너지로 전락하여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보수, 심지어 극우와 결탁함으로써, 참된 영성을 잃고 기독교 종족주의(tribalism)로 퇴화했다.
‘십자군’의 방식으로 ‘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교회 밖에 가짜 적을 설정하고 권력과 폭력을 동원한다.
--- p.271
출판사 리뷰
‘극우’의 수렁에 빠진 한국교회, 어디서 다시 시작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12.3 계엄 이후 드러난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민낯, 진리와 복음의 이름으로 독선과 배제를 말하며, 폭력으로 극우화를 추동하다!
한국교회여, 이제 공적 영성을 회복하고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
권수경은 한국교회의 세 가지 우상, 곧 권력과 재물, 이념에 사로잡힌 신앙의 왜곡과 복음의 상실을,
배덕만은 한국교회 극우화의 배경이자 동력으로 작용한 미국 트럼프주의 및 극우 복음주의와의 결탁을,
박성철은 탈근대 파시즘의 맥락에서 드러난 극우 기독교의 문제와 새로운 횡단적 연대와 저항의 필요성을,
백소영은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내린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여성 배제 구조의 해체와 극복을,
옥성득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속에서 드러난 근본주의 신학과 정치 참여의 한계를,
장동민은 사적 영성을 넘어 공적 영성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은 단순한 한국교회 비판서가 아니다.
그보다 ‘12.3 계엄 이후’라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사건적’ 변화 앞에서 한국교회 또한 새로운 ‘사건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성찰과 실천을 촉구하는 사랑의 외침이다.
교회는 세상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소금과 빛으로서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외침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멈춤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문’ 중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바닥이다.
혹자는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 신뢰도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참으로 기특하고 건강한데, 사회가 교회를 오해하고 곡해하며 비난한다는 것인가?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극우 근본주의의 사회적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이다.
신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연관성, 이 둘은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다.
동전의 양면이다.
「중략」
2024년 12.3내란부터 2025년 6.3대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교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훨씬 이전부터, 아니 한국교회 백수십 년 역사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그냥저냥 내려온 불편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겉으로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광훈-손현보 현상’이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이처럼 심하게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아이가 봐도 반기독교적인데 어떻게 이런 현상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확신하며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현상들에 관해서 어쩌면 그렇게 침묵하거나 방조할 수 있단 말인가?
12.3 계엄 이후 드러난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민낯, 진리와 복음의 이름으로 독선과 배제를 말하며, 폭력으로 극우화를 추동하다!
한국교회여, 이제 공적 영성을 회복하고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자!
권수경은 한국교회의 세 가지 우상, 곧 권력과 재물, 이념에 사로잡힌 신앙의 왜곡과 복음의 상실을,
배덕만은 한국교회 극우화의 배경이자 동력으로 작용한 미국 트럼프주의 및 극우 복음주의와의 결탁을,
박성철은 탈근대 파시즘의 맥락에서 드러난 극우 기독교의 문제와 새로운 횡단적 연대와 저항의 필요성을,
백소영은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내린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여성 배제 구조의 해체와 극복을,
옥성득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속에서 드러난 근본주의 신학과 정치 참여의 한계를,
장동민은 사적 영성을 넘어 공적 영성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변화를 다룬다.
이 책은 단순한 한국교회 비판서가 아니다.
그보다 ‘12.3 계엄 이후’라는 한국사회의 중요한 ‘사건적’ 변화 앞에서 한국교회 또한 새로운 ‘사건적’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성찰과 실천을 촉구하는 사랑의 외침이다.
교회는 세상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소금과 빛으로서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외침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멈춤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문’ 중에서」
현재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바닥이다.
혹자는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회적 신뢰도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교회의 상황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참으로 기특하고 건강한데, 사회가 교회를 오해하고 곡해하며 비난한다는 것인가?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극우 근본주의의 사회적 확증편향에 빠진 사람이다.
신앙적 정체성과 사회적 연관성, 이 둘은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다.
동전의 양면이다.
「중략」
2024년 12.3내란부터 2025년 6.3대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교회의 민낯이 드러났다.
코로나19 훨씬 이전부터, 아니 한국교회 백수십 년 역사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그냥저냥 내려온 불편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겉으로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광훈-손현보 현상’이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이처럼 심하게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린아이가 봐도 반기독교적인데 어떻게 이런 현상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확신하며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현상들에 관해서 어쩌면 그렇게 침묵하거나 방조할 수 있단 말인가?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20일
- 쪽수, 무게, 크기 : 288쪽 | 145*215*20mm
- ISBN13 : 9791199536104
- ISBN10 : 119953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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