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를 미학하다
Description
책소개
이 책은 초월성의 사유와 대응하는 서구 미학과 대비하여 내재성의 사유와 짝을 이루는 불교미학을 시도한다.
이로써 불교미술에서 찾아낸 미학은 초월성의 미학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향한 하나의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했지만 내재성의 사유와 이어진 미감이라면 어느 영역에서든, 심지어 서양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미감을 추적하여 새로운 미학적 개념과 짝지어 주려는 미학적 시도들이 이로써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아직 부재하는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다.
또한 불교미술을 불교적 미감에 따라 보고 비평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들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티베트의 사원이나 태국의 불탑, 한국의 마애불처럼 아주 다른 유형의 작품들 모두에 다가갈 수 있는 미학적 개념들을 제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 조형물들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안한다.
이로써 불교미술에서 찾아낸 미학은 초월성의 미학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향한 하나의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했지만 내재성의 사유와 이어진 미감이라면 어느 영역에서든, 심지어 서양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미감을 추적하여 새로운 미학적 개념과 짝지어 주려는 미학적 시도들이 이로써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아직 부재하는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다.
또한 불교미술을 불교적 미감에 따라 보고 비평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들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티베트의 사원이나 태국의 불탑, 한국의 마애불처럼 아주 다른 유형의 작품들 모두에 다가갈 수 있는 미학적 개념들을 제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 조형물들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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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목차
여는 글_ 불교미학, 내재성의 미학
01 초월성의 미학과 미학적 식민주의 : 미학의 내재론적 전회를 위하여
사건과 예술
보편성의 환영과 미학적 식민주의 : 서양 예술의 미학적 삼위일체
초월성과 내재성
감각과 미감, 개념의 연속체로서의 미학
불교미학 : 침묵하는 미감들이 말하게 하기
02 미학적 여래와 현묘의 미학 : 숭고의 미학을 넘어서
고딕 성당에서 초월성의 미학
보로부두르 사원, 혹은 해탈로 이끄는 길-기계
바이욘 사원 : 비의적 모호성과 끌어당김의 거리감
초월자와 숭고의 두 형상
세속적 숭고와 숭고의 미학
미학적 여래
현묘의 미학
03 형상의 독재에서 공-작의 미학으로 : 재료는 형상의 노예가 아니다!
주름에의 매혹
형식의 미학, 형상의 전제주의
재료의 봉기와 질료적 흐름
공동-주어로서의 형상과 재료
재료의 범람과 형상의 교란
재료의 존중, 혹은 재료와의 타협
형상과 재료의 이인무
04 대충의 미학과 불완전성의 힘 : 세 가지 미감이 창안하는 ‘대충’의 세계
배흘림기둥과 엔타시스 양식 : ‘착시교정’ 이론의 착각
완전성의 기하학주의와 강박증적 엄격주의
이념적 정확성과 적절성의 감각
기겁할 기둥들과 파격의 미감
미완의 미감, 혹은 ‘완결 없는 완성’에 대하여
춤추는 기둥과 삐딱한 보살 : 삐딱함의 미감
대충의 미학과 세 가지 미감 : 미완·파격·삐딱함
05 매달림의 미학과 상승의 미학 : 기하학적 미학에서 미학적 기하학으로
티베트 고원의 낯선 ‘모더니즘’
매달림의 미감
매달림의 기하학
날아오름의 감응과 상승의 미학 : 미얀마의 사원과 불탑
솟구침의 감응과 상승의 미학 : 태국의 사원과 불탑
다른 감각, 다른 기하학들
06 무한을 품은 유한과 외부성의 미학 : 중심 없는 중심과 호옹의 미감
담 아닌 담, 문 없는 문
마당, 내부화된 외부
서원, 위계적 중심화와 대칭적 통합
중심 없는 중심성과 비대칭성의 미감
주체적 중심화 : 주인의 눈과 외부자의 눈
건물과 마당의 포응, 혹은 호옹의 미감
무한을 품은 유한, 혹은 유한과 무한의 연속체
07 은근의 미학, 혹은 피아니시모의 힘 : 은미함의 강도와 평면화의 미감
무심한 얼굴의 수많은 표정들
포르티시모의 미감과 피아니시모의 미감
피아니시모의 미학, 혹은 은미와 은연의 기술
평면화와 입체화
평면화의 수학과 탈초점화
깊이 없는 깊이와 감각적 원만
08 친원의 시선과 내맡김의 미학 : 도래할 사건을 기다리는 비인칭적 불상들
얼굴과 시선
반개한 눈과 내맡김의 시선
친근한 불상과 친원한 불상
‘내맡김’의 중간 지대
‘개성 없는’ 형상, ‘그게 그거’인 불상
기다림의 시간과 내맡김의 미학
09 웃음의 철학과 유머의 미학 : 비극과 희극 사이, 두 가지 웃음 사이
극한의 웃음, 웃음의 극한
비극적 사유와 충실성
철학적 웃음과 웃음의 철학
웃음의 물리학
유머의 정치학
익살, 혹은 내용으로서의 유머
해학, 혹은 표현으로서의 유머
사유의 웃음과 웃음의 사유
10 검은 여래와 어둠의 미학 : 석굴의 어둠과 어둠 속의 산사
석굴과 어둠
빛과 어둠
존재론적 여래와 미학적 여래
어둠의 미학
어둠의 미학과 어둠 속의 산사
11 존재론적 여래와 ‘나름’의 미학 : 세 가지 미학적 여래와 탈속의 함정
불교미학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미학
여래의 미학
여래의 미학과 내재적 비평
‘불이의 미학’과 ‘와비의 종교’
‘다선일여’와 차의 미학
나름의 미학과 파격의 스타일
미학적 여래의 세 극 : 금빛 여래, 검은 여래, 하얀 여래
12 형상들의 합종연횡과 횡단의 미학 : 혼종의 감각과 불교 트랜스내셔널리즘
여성화된 신체, 혹은 혼성의 미감
지배자의 형상과 불보살의 형상
동물과 괴물, 혼종의 형상들
‘연횡’, 미시적 성분들의 횡단적 연대
연횡적 건축술의 조형 능력
역설의 철학, 역감의 미학
횡단의 미학과 불교의 트랜스내셔널리즘
닫는 글_ 불교미학의 얼굴들
참고문헌
01 초월성의 미학과 미학적 식민주의 : 미학의 내재론적 전회를 위하여
사건과 예술
보편성의 환영과 미학적 식민주의 : 서양 예술의 미학적 삼위일체
초월성과 내재성
감각과 미감, 개념의 연속체로서의 미학
불교미학 : 침묵하는 미감들이 말하게 하기
02 미학적 여래와 현묘의 미학 : 숭고의 미학을 넘어서
고딕 성당에서 초월성의 미학
보로부두르 사원, 혹은 해탈로 이끄는 길-기계
바이욘 사원 : 비의적 모호성과 끌어당김의 거리감
초월자와 숭고의 두 형상
세속적 숭고와 숭고의 미학
미학적 여래
현묘의 미학
03 형상의 독재에서 공-작의 미학으로 : 재료는 형상의 노예가 아니다!
주름에의 매혹
형식의 미학, 형상의 전제주의
재료의 봉기와 질료적 흐름
공동-주어로서의 형상과 재료
재료의 범람과 형상의 교란
재료의 존중, 혹은 재료와의 타협
형상과 재료의 이인무
04 대충의 미학과 불완전성의 힘 : 세 가지 미감이 창안하는 ‘대충’의 세계
배흘림기둥과 엔타시스 양식 : ‘착시교정’ 이론의 착각
완전성의 기하학주의와 강박증적 엄격주의
이념적 정확성과 적절성의 감각
기겁할 기둥들과 파격의 미감
미완의 미감, 혹은 ‘완결 없는 완성’에 대하여
춤추는 기둥과 삐딱한 보살 : 삐딱함의 미감
대충의 미학과 세 가지 미감 : 미완·파격·삐딱함
05 매달림의 미학과 상승의 미학 : 기하학적 미학에서 미학적 기하학으로
티베트 고원의 낯선 ‘모더니즘’
매달림의 미감
매달림의 기하학
날아오름의 감응과 상승의 미학 : 미얀마의 사원과 불탑
솟구침의 감응과 상승의 미학 : 태국의 사원과 불탑
다른 감각, 다른 기하학들
06 무한을 품은 유한과 외부성의 미학 : 중심 없는 중심과 호옹의 미감
담 아닌 담, 문 없는 문
마당, 내부화된 외부
서원, 위계적 중심화와 대칭적 통합
중심 없는 중심성과 비대칭성의 미감
주체적 중심화 : 주인의 눈과 외부자의 눈
건물과 마당의 포응, 혹은 호옹의 미감
무한을 품은 유한, 혹은 유한과 무한의 연속체
07 은근의 미학, 혹은 피아니시모의 힘 : 은미함의 강도와 평면화의 미감
무심한 얼굴의 수많은 표정들
포르티시모의 미감과 피아니시모의 미감
피아니시모의 미학, 혹은 은미와 은연의 기술
평면화와 입체화
평면화의 수학과 탈초점화
깊이 없는 깊이와 감각적 원만
08 친원의 시선과 내맡김의 미학 : 도래할 사건을 기다리는 비인칭적 불상들
얼굴과 시선
반개한 눈과 내맡김의 시선
친근한 불상과 친원한 불상
‘내맡김’의 중간 지대
‘개성 없는’ 형상, ‘그게 그거’인 불상
기다림의 시간과 내맡김의 미학
09 웃음의 철학과 유머의 미학 : 비극과 희극 사이, 두 가지 웃음 사이
극한의 웃음, 웃음의 극한
비극적 사유와 충실성
철학적 웃음과 웃음의 철학
웃음의 물리학
유머의 정치학
익살, 혹은 내용으로서의 유머
해학, 혹은 표현으로서의 유머
사유의 웃음과 웃음의 사유
10 검은 여래와 어둠의 미학 : 석굴의 어둠과 어둠 속의 산사
석굴과 어둠
빛과 어둠
존재론적 여래와 미학적 여래
어둠의 미학
어둠의 미학과 어둠 속의 산사
11 존재론적 여래와 ‘나름’의 미학 : 세 가지 미학적 여래와 탈속의 함정
불교미학의 불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미학
여래의 미학
여래의 미학과 내재적 비평
‘불이의 미학’과 ‘와비의 종교’
‘다선일여’와 차의 미학
나름의 미학과 파격의 스타일
미학적 여래의 세 극 : 금빛 여래, 검은 여래, 하얀 여래
12 형상들의 합종연횡과 횡단의 미학 : 혼종의 감각과 불교 트랜스내셔널리즘
여성화된 신체, 혹은 혼성의 미감
지배자의 형상과 불보살의 형상
동물과 괴물, 혼종의 형상들
‘연횡’, 미시적 성분들의 횡단적 연대
연횡적 건축술의 조형 능력
역설의 철학, 역감의 미학
횡단의 미학과 불교의 트랜스내셔널리즘
닫는 글_ 불교미학의 얼굴들
참고문헌
책 속으로
미의 보편적 본질이 비례라는 말은 모든 비례가 미라는 게 아니라 특정한 비례만이 미라는 말이다.
특정한 비례를 척도로 삼는 미학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비례가 미적 보편성을 갖는 비례라고 해야 할까? 기하학과 비례를 우주적 보편성이라 믿었던 서구인들이지만,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원과 정사각형을 좋아했고, 바로크시대 건축가는 직사각형을 좋아했고, 미켈란젤로는 이전이라면 ‘찌그러진 원’이라 했을 타원을 건축에 적극 도입했다.
어떤 게 ‘진정한’ 미적 비례일까? 르네상스 지지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바로크양식을 추하다고 했지만, 그의 제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바로크양식 또한 아름답다고 했다.
부르크하르트가 그런 뵐플린을 극도로 미워하여 자기 장례식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 두 가지 다른 비례의 미감이 서구 미술사에서조차 경쟁적이었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를 둘러싼 이러한 대립은 서구의 미술사가나 미학자 사이에서도 단일한 ‘보편성’의 이름으로 쉽게 설득할 수 없는 것임을 방증한다.
--- p.31
일정한 패턴의 작품이 있는 곳이라면 명시적 이론이 없어도 미학은 존재한다.
해명되지 않은 채 작품 속에 깃들어 존재한다.
그것은 작품이 만들어질 때 이미 작동하고 있었고, 만들어진 작품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먼저 작품을 만들 도제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해명되지 않거나 침묵 속에 존속해온 그 미감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할 때, 미감은 작품 속에서 불려 나와 ‘미학’이 된다.
미감이란 작품 속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미학이고, 미학이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미감이다.
--- pp.50-51
그러나 ‘정말 같은’ 형상에 대한 욕망이 반드시 외양(appearance)의 정확한 재현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욕망은 종종 사실이라기에는 과도한 외양으로 예술가를 이끌기도 한다.
룽먼(龍門) 석굴이나 마이지산(麥積山) 석굴을 비롯해 북위(北魏)시대의 많은 불상에서 발견되는 과도한 옷주름이 그렇다.
가령 마이지산 44굴의 불상은 상하 비례로만 봐도 반 이상이 아래로 늘어진 옷주름이고, 정면에서 보이는 옷 표면의 넓이는 불상의 2배가 넘는다.
그뿐 아니라 옷주름의 화려함이 우리의 시선을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불상의 얼굴이나 수인(手印)을 지은 두 손의 신체로부터 벗어나 아래로 잡아끌 만큼 과도하다.
불상에서 옷주름이 이리 클 이유를 일상이나 종교 안에서는 찾기 힘들다.
중국의 궁셴(鞏縣, 공현) 석굴 1굴의 불상도 그렇다.
종종 ‘룽먼 양식’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스타일에서 극적으로 나타나지만, 불상에서 옷자락 주름에 대한 관심은 비록 정도 차는 있으나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삼국시대의 유명한 반가사유상이나, 일본 가마쿠라시대 케이파(慶派)의 불상들이 그렇다.
--- p.106
‘완전성’의 미학은 단일한 만큼 획일적인 정답을 가정한다.
그러한 완전성의 관념은 정답의 ‘정확성’을 가정하며 ‘정교함’이나 ‘정밀함’은 정답에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지칭한다.
‘정연함’은 그 정확한 선을 따라 형태들을 배열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어느 것이나 하나의 정답이 주는 단순성을 구현하거나 보충한다.
반면 배흘림기둥은 하나의 표현적 목적조차 단일한 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현적 적절성(adequacy)만 갖는다면 약간 더 튀어나오거나 약간 덜 튀어나온 것 모두가 가능한 답이다.
따라서 가능한 여러 답 중 하나를 ‘대충’ 선택하면 된다.
대충 선택하기에 선택할 때마다 약간씩 다른 기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이 더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 더 적절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이론적 판단이 아니라 감각적 판단에 속한다.
그렇기에 만드는 사람이나 제작 조건에 따라 다른 답들이 가능하다.
정답이 있지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이다.
각각의 기둥을 다르게 만드는 이러한 차이는 단일한 정답의 기둥과 달리 쉽게 싫증나지 않는 미묘한 다양성을 형성한다.
--- p.169
수평선과 수직선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건축물이지만, 서구와는 아주 다른 감각의 건축물이었다.
든든한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으로 건축물 전체를 떠받치는 양상의 구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럼에도 대단히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이토록 기하학적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이렇게 다른 감각의 기하학적 건축이 있었던 것이다.
기하학적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르게 사용되며 다른 양상으로 조성되는 다른 기하학이 있는 것 아닐까? 해발 3700미터 높이를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두통으로 체감하며 사원에서 사원으로 돌아다니다, 답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갑자기 한 단어가 마치 무슨 깨달음인 양 툭 튀어 올랐다.
‘매달림’.
‘그래 이건 매달림의 기하학이야!’ 그러고 보니 약간 기울며 물매진 벽의 선도 곧고 강직한 직선이라기보다는 안쪽으로 오목하게 흘려 들어간 것이 꼭 매달린 천처럼 보였다.
--- p.208
건물의 배치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담장을 두르는 대신 건물들을 사변형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물론 사변형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런데 건물들이 이렇게 마당을 둘러쌀 때 건물과 마당의 관계는 역전되기도 한다.
둘러싸는 건물이 프레임이 되며 그 안의 마당이 중심의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건물들이 위요하며 보호해주는 중심으로 서의 마당.
이때 둘러싸는 건물들의 형태는 마당의 ‘윤곽선’이 되면서 마당에 표정을 부여한다.
이 경우 표정을 얻은 마당이 형상이 되고 그걸 둘러싼 건물은 배경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건물들에 의해 둘러싸인 마당은 풍경의 주연이 된다.
마당의 윤곽선이 사변형이길 그치고, 옆으로 이어진 길들이 평행성과 직각성을 벗어나게 될 때 마당은 좀 더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된다.
좁아졌다 넓어지며 숨 쉬는 신체가 되며, 종종 움직이고 춤추는 신체의 표정마저 갖게 된다.
--- p.301
불화나 불상에도 초점이 있다.
삼존불이나 오존불의 초점은 중앙의 불상이고, 영산회상도의 초점은 많은 인물의 한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이다.
이를 보는 이가 놓치지 않도록 대개는 크기 차이를 둔다.
즉 초점화된 인물은 크게 그리거나 커다랗게 만든다.
광배의 크기나 화려함으로 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산회상도처럼 인물 수가 너무 많고 크기 차이를 늘리기 어려울 때는 초점화 효과가 크지 않다.
실은 애써 크게 차원수를 늘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유사한 위상을 가진 인물을 증식시켜 초점을 늘리기도 한다.
특정한 비례를 척도로 삼는 미학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비례가 미적 보편성을 갖는 비례라고 해야 할까? 기하학과 비례를 우주적 보편성이라 믿었던 서구인들이지만,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원과 정사각형을 좋아했고, 바로크시대 건축가는 직사각형을 좋아했고, 미켈란젤로는 이전이라면 ‘찌그러진 원’이라 했을 타원을 건축에 적극 도입했다.
어떤 게 ‘진정한’ 미적 비례일까? 르네상스 지지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바로크양식을 추하다고 했지만, 그의 제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바로크양식 또한 아름답다고 했다.
부르크하르트가 그런 뵐플린을 극도로 미워하여 자기 장례식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 두 가지 다른 비례의 미감이 서구 미술사에서조차 경쟁적이었음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를 둘러싼 이러한 대립은 서구의 미술사가나 미학자 사이에서도 단일한 ‘보편성’의 이름으로 쉽게 설득할 수 없는 것임을 방증한다.
--- p.31
일정한 패턴의 작품이 있는 곳이라면 명시적 이론이 없어도 미학은 존재한다.
해명되지 않은 채 작품 속에 깃들어 존재한다.
그것은 작품이 만들어질 때 이미 작동하고 있었고, 만들어진 작품으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먼저 작품을 만들 도제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해명되지 않거나 침묵 속에 존속해온 그 미감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할 때, 미감은 작품 속에서 불려 나와 ‘미학’이 된다.
미감이란 작품 속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미학이고, 미학이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미감이다.
--- pp.50-51
그러나 ‘정말 같은’ 형상에 대한 욕망이 반드시 외양(appearance)의 정확한 재현만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욕망은 종종 사실이라기에는 과도한 외양으로 예술가를 이끌기도 한다.
룽먼(龍門) 석굴이나 마이지산(麥積山) 석굴을 비롯해 북위(北魏)시대의 많은 불상에서 발견되는 과도한 옷주름이 그렇다.
가령 마이지산 44굴의 불상은 상하 비례로만 봐도 반 이상이 아래로 늘어진 옷주름이고, 정면에서 보이는 옷 표면의 넓이는 불상의 2배가 넘는다.
그뿐 아니라 옷주름의 화려함이 우리의 시선을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불상의 얼굴이나 수인(手印)을 지은 두 손의 신체로부터 벗어나 아래로 잡아끌 만큼 과도하다.
불상에서 옷주름이 이리 클 이유를 일상이나 종교 안에서는 찾기 힘들다.
중국의 궁셴(鞏縣, 공현) 석굴 1굴의 불상도 그렇다.
종종 ‘룽먼 양식’이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스타일에서 극적으로 나타나지만, 불상에서 옷자락 주름에 대한 관심은 비록 정도 차는 있으나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삼국시대의 유명한 반가사유상이나, 일본 가마쿠라시대 케이파(慶派)의 불상들이 그렇다.
--- p.106
‘완전성’의 미학은 단일한 만큼 획일적인 정답을 가정한다.
그러한 완전성의 관념은 정답의 ‘정확성’을 가정하며 ‘정교함’이나 ‘정밀함’은 정답에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시도를 지칭한다.
‘정연함’은 그 정확한 선을 따라 형태들을 배열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어느 것이나 하나의 정답이 주는 단순성을 구현하거나 보충한다.
반면 배흘림기둥은 하나의 표현적 목적조차 단일한 답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답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표현적 적절성(adequacy)만 갖는다면 약간 더 튀어나오거나 약간 덜 튀어나온 것 모두가 가능한 답이다.
따라서 가능한 여러 답 중 하나를 ‘대충’ 선택하면 된다.
대충 선택하기에 선택할 때마다 약간씩 다른 기둥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고 어느 것이 더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분명 더 적절한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이론적 판단이 아니라 감각적 판단에 속한다.
그렇기에 만드는 사람이나 제작 조건에 따라 다른 답들이 가능하다.
정답이 있지만,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것이다.
각각의 기둥을 다르게 만드는 이러한 차이는 단일한 정답의 기둥과 달리 쉽게 싫증나지 않는 미묘한 다양성을 형성한다.
--- p.169
수평선과 수직선과 사각형으로 구성된 건축물이지만, 서구와는 아주 다른 감각의 건축물이었다.
든든한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으로 건축물 전체를 떠받치는 양상의 구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럼에도 대단히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이토록 기하학적인데 이토록 다를 수 있다니! 이렇게 다른 감각의 기하학적 건축이 있었던 것이다.
기하학적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감각에 의해 다르게 사용되며 다른 양상으로 조성되는 다른 기하학이 있는 것 아닐까? 해발 3700미터 높이를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두통으로 체감하며 사원에서 사원으로 돌아다니다, 답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갑자기 한 단어가 마치 무슨 깨달음인 양 툭 튀어 올랐다.
‘매달림’.
‘그래 이건 매달림의 기하학이야!’ 그러고 보니 약간 기울며 물매진 벽의 선도 곧고 강직한 직선이라기보다는 안쪽으로 오목하게 흘려 들어간 것이 꼭 매달린 천처럼 보였다.
--- p.208
건물의 배치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담장을 두르는 대신 건물들을 사변형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물론 사변형이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런데 건물들이 이렇게 마당을 둘러쌀 때 건물과 마당의 관계는 역전되기도 한다.
둘러싸는 건물이 프레임이 되며 그 안의 마당이 중심의 자리를 얻기 때문이다.
건물들이 위요하며 보호해주는 중심으로 서의 마당.
이때 둘러싸는 건물들의 형태는 마당의 ‘윤곽선’이 되면서 마당에 표정을 부여한다.
이 경우 표정을 얻은 마당이 형상이 되고 그걸 둘러싼 건물은 배경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건물들에 의해 둘러싸인 마당은 풍경의 주연이 된다.
마당의 윤곽선이 사변형이길 그치고, 옆으로 이어진 길들이 평행성과 직각성을 벗어나게 될 때 마당은 좀 더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된다.
좁아졌다 넓어지며 숨 쉬는 신체가 되며, 종종 움직이고 춤추는 신체의 표정마저 갖게 된다.
--- p.301
불화나 불상에도 초점이 있다.
삼존불이나 오존불의 초점은 중앙의 불상이고, 영산회상도의 초점은 많은 인물의 한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이다.
이를 보는 이가 놓치지 않도록 대개는 크기 차이를 둔다.
즉 초점화된 인물은 크게 그리거나 커다랗게 만든다.
광배의 크기나 화려함으로 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산회상도처럼 인물 수가 너무 많고 크기 차이를 늘리기 어려울 때는 초점화 효과가 크지 않다.
실은 애써 크게 차원수를 늘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유사한 위상을 가진 인물을 증식시켜 초점을 늘리기도 한다.
--- p.362
출판사 리뷰
불교미술은 다 ‘그게 그거’?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새롭고도 놀라운 본격 불교미학 탐색서
침묵 속에 존재하던 불교미술의 미감을
새로운 철학적 근거로 깨워 내다
불교미학이란 불교 예술작품에 응결된 미감에 대한 이론이다.
불교는 미추와 호오의 분별을 하지 말라는 교의로 인해 미학을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지만, 아시아 전역에서 극히 다양한 양상으로 수많은 ‘예술작품’을 남겼다.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만든 것도, 그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도 분명 특정한 미감의 작용이다.
미학이란 이름의 지식이나 개념이 없어도 미학은 이렇게 작품들 속에 깃든 채 존재한다.
이 책은 이렇듯 불교 예술작품 속에 깃든, 말없이 존재하는 이 미감을 침묵에서 깨어나 말하게 하려는 시도다.
‘불교미학’이란 말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한국의 미’로 잘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하지만 그가 거기서 실제로 찾아낸 것은 이름 없는 도공들의 미학, 민예품의 미학이어서 불교미학이라 말할 수 없다.
불교예술은 그처럼 작가 없는 작품도 많지만, 작가나 승려, 때론 국가마저 개입하며 의도적으로 조성된 것, 다기 같은 공예품만이 아니라 불상, 불화, 건축, 탑, 석굴 등 아주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나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티베트나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서역’이라 불리던 지역의 작가들은 나름의 멋진 작품들을 만들었다.
불교미술을 매개로 새롭게 넓히는
‘동양’이라는 영역과 예술작품에 대한 미감
동양미학이나 동양사상 등을 연구할 때 ‘동양’이란 말로 중국, 한국, 일본 정도를 떠올리는 상상력은 사실 아시아 전역을 횡단하는 불교미학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다.
‘동양’이란 차라리 불교미술을 매개로 교류하고 혼합되며 지역마다 만들어진 문화적 영역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불교미학’이란 주제로 이 책이 시도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많은 문헌에서 불교미술에 대한 미적 평가를 해 왔으니 불교미학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평가는 가령 ‘비례’나 ‘사실성’, ‘숭고’나 ‘초월성’ 같은 개념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서양미학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차용 그 자체가 나쁘다 할 순 없다.
그러나 이데아나 신 같은 초월자를 전제로 하는 세계의 미학적 개념을, 어떤 초월자도 없으며 모든 것은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세계의 미술작품에, 더구나 사실적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익살을 위해 ‘웃기는 비례’를 즐겨 사용하고 미완인 듯한 작품을 만들던 세계의 미술작품에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히 부당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언제나 이류의 비례미, 삼류의 사실성, 어느 것을 봐도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를 벗어나기 힘들다.
새로운 기준으로 삼을 만한
탈식민주의적 미학 개념!
독자적인 미학적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야기된, 불교의 예술작품을 ‘그게 그거인’ 것처럼 여기는 미감이 자리 잡힌 데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서구화를 문명화 혹은 개화로 간주하던 낡은 관념이나 서구적 감각을 판단의 척도로 삼던 서구 중심적이자 식민주의적 관점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작품들이 저런 형상으로 추구하려던 미감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작품 속에 깃든 미감을 개념화하여 그 작품들을 보고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이 고창된 지 한참 지났지만, 미학에서 이런 시도는 국지적인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탈식민주의 시대에 불교예술을 통해 비서구적 미학을 새로이 정립하려는 이 책의 시도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다음 문장은 이 시도를 요약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한 불교미술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특이성의 별자리들을 초월자가 사라진 내재성의 하늘에 그려 넣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성신에 대응할 비례, 재현, 숭고의 미학적 삼위일체가 다른 별들을 배경으로 밀쳐내며 눈부시게 빛나는 단순명료한 초월성의 하늘”을 대신하여 “별자리들이 제각각 빛을 내며 종종 이어지고 섞이며 때로 중첩될 만큼 인접한 내재성의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서양 미학적인 기존 개념들을 뛰어넘어
재료와 형상이 함께 만드는 미학에 주목하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서양 미학의 개념적 삼위일체라 할 ‘비례’와 ‘재현’, ‘숭고’를 벗어나고, 그리스주의적인 감각을 벗어나 불교미술, 나아가 동양미술을 볼 수 있는 개념들을 찾아 나선다.
즉 거대한 것에 압도당하며 발생하는 숭고를 대신해 상 없는 상을 형성하는 미시적 작용을 ‘미학적 여래’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예술에서 형상의 오랜 독재를 대신해서 재료와 형상이 함께 만드는 공작의 미학을 주목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보편성을 대신하는 미감이 만드는 다른 유형의 기하학을 찾아내고, ‘완전성’에 반하여 불완전성이 갖는 힘, 그리하여 파격과 미완, 삐딱함과 공조하는 ‘대충의 미학’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더불어 건물과 마당이 서로를 만들어주는 호옹의 미학과 무한을 있는 그대로 유한한 마당 속에 품어 안는 ‘외부성’의 미학도 도출한다.
나아가 입체화에 반하는 평면화의 미감을 피아니시모의 힘과 짝짓고,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에서 보는 이를 애써 당기고 끌고 가지 않는 ‘내맡김의 미학’을 본다.
다른 한편 불조나 불제자를 기꺼이 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머의 미학 속에서 웃음의 철학을 보기도 한다.
애써 만든 상이나 그림을 어둠 속에 묻는 어둠의 미학과 모든 것이 갖는 나름대로의 미를 보라는 ‘나름의 미학’ 또한 여기 추가된다.
불교미술은 다 ‘그게 그거 아닌가’하는 통념에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답하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을 섞고 미시적 성분을 반복하고 부가하여 형상을 만드는 혼성과 혼종의 미학을 책의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이렇게 ‘발굴’해 낸 미학적 개념들이 닫힌 체계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새로이 찾아내는 이후의 개념들에 대해 열어 두고자 함이다.
이 책은 초월성의 사유와 대응하는 서구 미학과 대비하여 내재성의 사유와 짝을 이루는 불교미학을 시도한다.
이로써 불교미술에서 찾아낸 미학은 초월성의 미학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향한 하나의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했지만 내재성의 사유와 이어진 미감이라면 어느 영역에서든, 심지어 서양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미감을 추적하여 새로운 미학적 개념과 짝지어 주려는 미학적 시도들이 이로써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아직 부재하는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다.
또한 불교미술을 불교적 미감에 따라 보고 비평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들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티베트의 사원이나 태국의 불탑, 한국의 마애불처럼 아주 다른 유형의 작품들 모두에 다가갈 수 있는 미학적 개념들을 제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 조형물들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안한다.
미학책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철학책으로도 뛰어난 책, 『불교를 미학하다』
『불교를 미학하다』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매우 독창적이고 창안한 개념들은 흔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철학자 들뢰즈와 과타리는 “철학이란 개념을 창안하는 작업”이라 한 바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뛰어난 철학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40권 가까운 단독 저서를 써냈는데, 아마도 그중에서 이 책이 가장 뛰어난 저서가 될 것이다.
『불교를 미학하다』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이 그리 새로울 게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드물었던 것은 어쩌면 서구의 사고방식을 손안에서 다룰 수 있는 철학이나 미학에 대한 지식, 서양 미술이나 건축에 대한 지식, 동시에 불교철학에 대한 소화된 사유와 불교미술에 대한 지식 등 하나로 모으기 힘든 ‘잡스러운’ 지식이 전문성을 중시하는 학자의 세계에서 흔치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저자는 극히 다양한 영역에서 마흔 권 남짓한 책을 썼다.
그러면서 스스로 ‘전공은 잡학’임을 자처했다.
그러했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물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는 일단 불교미술 전공자를 비롯해 불교미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미술사나 도상학적 지식과는 별도로 미술 작품들에 대한 미적 판단을 하고자 할 때, 여기서 제안하는 미학적 개념들은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불교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까지는 아니라 해도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 혹은 여행을 통해 절이나 불교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은 이들에게도 이 책은 좋은 친구가 되리라 믿는다.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절’이나 절 이름, 혹은 작품 이름 이상으로는 세심하게 볼 지점을 찾지 못하던 이들에게, 또한 유심히 보지만 몇 번 반복되면 다 비슷해 보여서 대강 보던 이들에게 이 책은 불교미학과 새로이 만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서구적 미학과 미감에 대한
비판적 대조와 대비!
철학이나 종교로서의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 및 관련 전공자들에게도 이 책은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예술이나 미학을 매개로 서구적 사유와 불교적 사유, 서구적 감각과 불교적 감각이 대조되며 서구와 다른 불교적 사유의 특이성이나 종교적 특이성이 선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불교를 떠나 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나 철학적 관심을 가진 이들 또한 이 책의 독자가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은 불교미술에 대한 책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미학, 내재성의 사유와 감각을 다룬 책이고, ‘내재성의 미학’을 위한 시론이란 점에서 미학이나 철학에 대한 관심에 적절하게 호응할 것이다.
또한 탈식민주의적 이론이나 연구에 관심을 갖는 이들, 혹은 비서구적 내지 반서구적 사유와 감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분명 아주 촉발적인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불교미학이 한편으로는 불교미학의 긍정적 특이성을 포착하지만 동시에 이제까지 불교미술을 보던 서구적 미학이나 미감을 비판적으로 대조·대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자는 서구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다양한 접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새롭고도 놀라운 본격 불교미학 탐색서
침묵 속에 존재하던 불교미술의 미감을
새로운 철학적 근거로 깨워 내다
불교미학이란 불교 예술작품에 응결된 미감에 대한 이론이다.
불교는 미추와 호오의 분별을 하지 말라는 교의로 인해 미학을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지만, 아시아 전역에서 극히 다양한 양상으로 수많은 ‘예술작품’을 남겼다.
그것을 그런 방식으로 만든 것도, 그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도 분명 특정한 미감의 작용이다.
미학이란 이름의 지식이나 개념이 없어도 미학은 이렇게 작품들 속에 깃든 채 존재한다.
이 책은 이렇듯 불교 예술작품 속에 깃든, 말없이 존재하는 이 미감을 침묵에서 깨어나 말하게 하려는 시도다.
‘불교미학’이란 말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한국의 미’로 잘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하지만 그가 거기서 실제로 찾아낸 것은 이름 없는 도공들의 미학, 민예품의 미학이어서 불교미학이라 말할 수 없다.
불교예술은 그처럼 작가 없는 작품도 많지만, 작가나 승려, 때론 국가마저 개입하며 의도적으로 조성된 것, 다기 같은 공예품만이 아니라 불상, 불화, 건축, 탑, 석굴 등 아주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조선이나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티베트나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서역’이라 불리던 지역의 작가들은 나름의 멋진 작품들을 만들었다.
불교미술을 매개로 새롭게 넓히는
‘동양’이라는 영역과 예술작품에 대한 미감
동양미학이나 동양사상 등을 연구할 때 ‘동양’이란 말로 중국, 한국, 일본 정도를 떠올리는 상상력은 사실 아시아 전역을 횡단하는 불교미학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이다.
‘동양’이란 차라리 불교미술을 매개로 교류하고 혼합되며 지역마다 만들어진 문화적 영역 전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불교미학’이란 주제로 이 책이 시도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물론 많은 문헌에서 불교미술에 대한 미적 평가를 해 왔으니 불교미학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평가는 가령 ‘비례’나 ‘사실성’, ‘숭고’나 ‘초월성’ 같은 개념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서양미학에서 차용한 것이었다.
차용 그 자체가 나쁘다 할 순 없다.
그러나 이데아나 신 같은 초월자를 전제로 하는 세계의 미학적 개념을, 어떤 초월자도 없으며 모든 것은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세계의 미술작품에, 더구나 사실적 재현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익살을 위해 ‘웃기는 비례’를 즐겨 사용하고 미완인 듯한 작품을 만들던 세계의 미술작품에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대단히 부당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언제나 이류의 비례미, 삼류의 사실성, 어느 것을 봐도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를 벗어나기 힘들다.
새로운 기준으로 삼을 만한
탈식민주의적 미학 개념!
독자적인 미학적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야기된, 불교의 예술작품을 ‘그게 그거인’ 것처럼 여기는 미감이 자리 잡힌 데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서구화를 문명화 혹은 개화로 간주하던 낡은 관념이나 서구적 감각을 판단의 척도로 삼던 서구 중심적이자 식민주의적 관점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와 반대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작품들이 저런 형상으로 추구하려던 미감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작품 속에 깃든 미감을 개념화하여 그 작품들을 보고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이 고창된 지 한참 지났지만, 미학에서 이런 시도는 국지적인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탈식민주의 시대에 불교예술을 통해 비서구적 미학을 새로이 정립하려는 이 책의 시도는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다음 문장은 이 시도를 요약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양한 불교미술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특이성의 별자리들을 초월자가 사라진 내재성의 하늘에 그려 넣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 성신에 대응할 비례, 재현, 숭고의 미학적 삼위일체가 다른 별들을 배경으로 밀쳐내며 눈부시게 빛나는 단순명료한 초월성의 하늘”을 대신하여 “별자리들이 제각각 빛을 내며 종종 이어지고 섞이며 때로 중첩될 만큼 인접한 내재성의 하늘”을 보게 될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서양 미학적인 기존 개념들을 뛰어넘어
재료와 형상이 함께 만드는 미학에 주목하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서양 미학의 개념적 삼위일체라 할 ‘비례’와 ‘재현’, ‘숭고’를 벗어나고, 그리스주의적인 감각을 벗어나 불교미술, 나아가 동양미술을 볼 수 있는 개념들을 찾아 나선다.
즉 거대한 것에 압도당하며 발생하는 숭고를 대신해 상 없는 상을 형성하는 미시적 작용을 ‘미학적 여래’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예술에서 형상의 오랜 독재를 대신해서 재료와 형상이 함께 만드는 공작의 미학을 주목한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보편성을 대신하는 미감이 만드는 다른 유형의 기하학을 찾아내고, ‘완전성’에 반하여 불완전성이 갖는 힘, 그리하여 파격과 미완, 삐딱함과 공조하는 ‘대충의 미학’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더불어 건물과 마당이 서로를 만들어주는 호옹의 미학과 무한을 있는 그대로 유한한 마당 속에 품어 안는 ‘외부성’의 미학도 도출한다.
나아가 입체화에 반하는 평면화의 미감을 피아니시모의 힘과 짝짓고,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에서 보는 이를 애써 당기고 끌고 가지 않는 ‘내맡김의 미학’을 본다.
다른 한편 불조나 불제자를 기꺼이 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머의 미학 속에서 웃음의 철학을 보기도 한다.
애써 만든 상이나 그림을 어둠 속에 묻는 어둠의 미학과 모든 것이 갖는 나름대로의 미를 보라는 ‘나름의 미학’ 또한 여기 추가된다.
불교미술은 다 ‘그게 그거 아닌가’하는 통념에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답하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을 섞고 미시적 성분을 반복하고 부가하여 형상을 만드는 혼성과 혼종의 미학을 책의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이렇게 ‘발굴’해 낸 미학적 개념들이 닫힌 체계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새로이 찾아내는 이후의 개념들에 대해 열어 두고자 함이다.
이 책은 초월성의 사유와 대응하는 서구 미학과 대비하여 내재성의 사유와 짝을 이루는 불교미학을 시도한다.
이로써 불교미술에서 찾아낸 미학은 초월성의 미학과 대비되는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새로운 길로 향한 하나의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시작했지만 내재성의 사유와 이어진 미감이라면 어느 영역에서든, 심지어 서양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미감을 추적하여 새로운 미학적 개념과 짝지어 주려는 미학적 시도들이 이로써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내재성의 미학이라는, 아직 부재하는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다.
또한 불교미술을 불교적 미감에 따라 보고 비평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들을 제안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티베트의 사원이나 태국의 불탑, 한국의 마애불처럼 아주 다른 유형의 작품들 모두에 다가갈 수 있는 미학적 개념들을 제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게 그거인’ 불상이나 불화, 조형물들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개념들을 제안한다.
미학책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철학책으로도 뛰어난 책, 『불교를 미학하다』
『불교를 미학하다』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관점은 매우 독창적이고 창안한 개념들은 흔한 예상을 뛰어넘는다.
철학자 들뢰즈와 과타리는 “철학이란 개념을 창안하는 작업”이라 한 바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뛰어난 철학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40권 가까운 단독 저서를 써냈는데, 아마도 그중에서 이 책이 가장 뛰어난 저서가 될 것이다.
『불교를 미학하다』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이 그리 새로울 게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드물었던 것은 어쩌면 서구의 사고방식을 손안에서 다룰 수 있는 철학이나 미학에 대한 지식, 서양 미술이나 건축에 대한 지식, 동시에 불교철학에 대한 소화된 사유와 불교미술에 대한 지식 등 하나로 모으기 힘든 ‘잡스러운’ 지식이 전문성을 중시하는 학자의 세계에서 흔치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저자는 극히 다양한 영역에서 마흔 권 남짓한 책을 썼다.
그러면서 스스로 ‘전공은 잡학’임을 자처했다.
그러했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물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는 일단 불교미술 전공자를 비롯해 불교미술에 관심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미술사나 도상학적 지식과는 별도로 미술 작품들에 대한 미적 판단을 하고자 할 때, 여기서 제안하는 미학적 개념들은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불교미술에 대한 특별한 관심까지는 아니라 해도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 혹은 여행을 통해 절이나 불교미술을 접할 기회가 많은 이들에게도 이 책은 좋은 친구가 되리라 믿는다.
눈으로 보기는 하지만 ‘절’이나 절 이름, 혹은 작품 이름 이상으로는 세심하게 볼 지점을 찾지 못하던 이들에게, 또한 유심히 보지만 몇 번 반복되면 다 비슷해 보여서 대강 보던 이들에게 이 책은 불교미학과 새로이 만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서구적 미학과 미감에 대한
비판적 대조와 대비!
철학이나 종교로서의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 및 관련 전공자들에게도 이 책은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예술이나 미학을 매개로 서구적 사유와 불교적 사유, 서구적 감각과 불교적 감각이 대조되며 서구와 다른 불교적 사유의 특이성이나 종교적 특이성이 선명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불교를 떠나 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나 철학적 관심을 가진 이들 또한 이 책의 독자가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은 불교미술에 대한 책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의 미학, 내재성의 사유와 감각을 다룬 책이고, ‘내재성의 미학’을 위한 시론이란 점에서 미학이나 철학에 대한 관심에 적절하게 호응할 것이다.
또한 탈식민주의적 이론이나 연구에 관심을 갖는 이들, 혹은 비서구적 내지 반서구적 사유와 감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분명 아주 촉발적인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불교미학이 한편으로는 불교미학의 긍정적 특이성을 포착하지만 동시에 이제까지 불교미술을 보던 서구적 미학이나 미감을 비판적으로 대조·대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자는 서구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다양한 접점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9월 23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640쪽 | 152*224*36mm
- ISBN13 : 979119451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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