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인 신학자 바울
Description
책소개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닌, 메시아를 전한 유대교 선교사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바울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오늘날 주목받는 신약학자인 저자 매튜 티센은 바울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나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넘어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신실한 유대인으로 살았던 인물로 그려낸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이탈한 인물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방인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수 있음을 유대교 내부에서 선포한 선교사였다.
이 책은 바울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율법, 의, 할례, 이방 선교, 성령, 메시아 예수, 부활 등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들을 “유대교적 상상력” 안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저자는 루터의 반율법주의, 샌더스로부터 시작된 “새 관점”, 묵시적 해석으로 이어지는 해석 사조를 넘어 “네 번째 관점”이라 불릴 만한 “유대교 내의 바울”이라는 해석 틀을 제시한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바울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오늘날 주목받는 신약학자인 저자 매튜 티센은 바울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나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넘어서,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면서도 죽는 날까지 신실한 유대인으로 살았던 인물로 그려낸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유대교로부터 이탈한 인물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방인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수 있음을 유대교 내부에서 선포한 선교사였다.
이 책은 바울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할 뿐 아니라, 율법, 의, 할례, 이방 선교, 성령, 메시아 예수, 부활 등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들을 “유대교적 상상력” 안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저자는 루터의 반율법주의, 샌더스로부터 시작된 “새 관점”, 묵시적 해석으로 이어지는 해석 사조를 넘어 “네 번째 관점”이라 불릴 만한 “유대교 내의 바울”이라는 해석 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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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말 15
서론 17
1장 바울을 다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33
2장 완전히 새로운 바울 읽기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잊혔던 바울 읽기인가? 53
3장 유대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75
4장 종말의 유대인 바울 93
5장 이방인 문제 109
6장 메시아 예수 127
7장 이방인 문제와 성형 수술 147
8장 프뉴마의 유전자 치료 177
9장 메시아의 몸들 197
10장 부활의 삶을 살기 215
11장 메시아의 재림의 절정으로서의 부활 231
12장 메시아와 유대인들 257
결론 273
참고문헌 277
서론 17
1장 바울을 다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33
2장 완전히 새로운 바울 읽기인가, 아니면 오랫동안 잊혔던 바울 읽기인가? 53
3장 유대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75
4장 종말의 유대인 바울 93
5장 이방인 문제 109
6장 메시아 예수 127
7장 이방인 문제와 성형 수술 147
8장 프뉴마의 유전자 치료 177
9장 메시아의 몸들 197
10장 부활의 삶을 살기 215
11장 메시아의 재림의 절정으로서의 부활 231
12장 메시아와 유대인들 257
결론 273
참고문헌 277
책 속으로
바울의 글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이 용어를 몰랐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사도행전이나 베드로전서가 바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기록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 또는 그가 조직하고 편지를 보낸 집단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둘째, 어쩌면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보다 대략 수십 년 먼저 사용되었고 바울도 이 명칭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의식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왜 그랬을까? 이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바울과 그의 최초기 독자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뿐더러, 그의 생각과도 맞지 않고(non-Pauline) 심지어 그의 생각에 반하는(un-Pauline) 것일 수도 있다.
--- 「1장 바울을 다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중에서
유대교는 이방인과 구원에 대해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믿음은 때때로 서로 충돌하고 대립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개별 유대인과 라이벌 그룹 간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신념은 현재 우리가 유대교라고 부르는 더 거대한 종교적 전통 안에 속한다.
우리가 현대의 독자로서 바울 서신을 접하면서 그 안에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율법과 정확히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놓고 바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확신 아래 하나님의 신탁과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지중해 세계에서 접했던 훨씬 더 거대한 대화의 장의 독특한 변형과 확장을 보게 된다.
--- 「3장 유대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중에서
그러나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이방인만을 묘사하려 했다는 가장 강력한 외적 증거는 실제로 에베소 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편지의 저자─바울 또는 그의 초창기 추종자 중 한 명─는 메시아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묘사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4:17-19).
--- 「5장 이방인 문제」 중에서
바울의 메시아사상은 복음의 사자로서의 자기 이해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기초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메시아사상을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더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많은 독자들을 좌절시키거나 당황하게 하는 주장을 한다(3:16).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그리스어, sperma) 모두에게 일련의 약속을 하셨다고 말한다.
(롬 4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유대 경전이 “씨들”(spermata) 대신 “씨”(sperma)라고 말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문법적으로 억지스러워 보이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씨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이 아니라 한 특정 개인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가 누구일까? 바로 메시아다.
--- 「6장 메시아 예수」 중에서
바울은 자신이 창세기를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아브라함 내러티브 자체가 알레고리라고 주장한다.그 차이는 중요하다.
그것은 민권 운동에 관한 역사적인 작품을 예수에 대한 알레고리로 취급하는 것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알레고리로 취급하는 것의 차이다.
전자의 경우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후자의 경우 알레고리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며, 독자는 알레고리의 원래 의도를 정확하게 해독해야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 내러티브가 본래 알레고리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즉 아브라함 내러티브의 원래 의도는 원래부터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21-31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원래 의미가 무엇이며, 이제 그들의 현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트리폰과 같은 그리스-로마 작가와 요세푸스나 필론과 같은 유대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알레고리아”(all?goria)는 바울 시대에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알레고리는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장치였지, 후대의 독자들이 비(非)알레고리 텍스트에 적용할 외적 해석 전략이 아니었다.
--- 「7장 이방인 문제와 성형 수술」 중에서
따라서 바울이 프뉴마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대 경전뿐만 아니라 프뉴마가 우주에서 최고의 물질로 여겨졌던 당시의 지적 맥락의 영향 아래서 프뉴마를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 않은 한, 그의 독자들은 프뉴마를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 즉 영원하고 신성한 물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만약 그가 주변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려 했다면─또 그가 의사소통에 매우 서투른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당연히 불가피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 「8장 프뉴마의 유전자 치료」 중에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을 때 현대의 천체물리학이 끼어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 대다수(어쩌면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하므로, 바울이 “영적”이라고 표현하면 우리는 그가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15:44의 NRSV 번역은 심기어진 첫 번째 몸과 심기어진 씨에서 나오는 두 번째 몸을 구별한다.
“육체적인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육체적인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도 있다.”적어도 이 번역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육체적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프쉬키코스”(psychikos)인데, 이 단어는 육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을 뜻하는 단어인 “프쉬케”(psych?)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비록 바울이 물질적인 몸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두 몸을 구분하는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인간을 살아 있는 영혼으로(eis psych?n z?san) 만드셨다고 말하는 창세기 2:7을 암시한다.
이 본래의 “영혼 같은”(psychikos) 몸과 달리 부활의 몸은 프뉴마적인 몸이 될 것이다.
둘째, 내가 영적이라는 용어 대신 프뉴마적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 독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육체적인 것과 상반된다는 추론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은 물질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을.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첫째, 바울은 이 용어를 몰랐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사도행전이나 베드로전서가 바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기록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 또는 그가 조직하고 편지를 보낸 집단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 또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둘째, 어쩌면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보다 대략 수십 년 먼저 사용되었고 바울도 이 명칭을 알고 있었지만, 바울은 의식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왜 그랬을까? 이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바울과 그의 최초기 독자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뿐더러, 그의 생각과도 맞지 않고(non-Pauline) 심지어 그의 생각에 반하는(un-Pauline) 것일 수도 있다.
--- 「1장 바울을 다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중에서
유대교는 이방인과 구원에 대해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다양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믿음은 때때로 서로 충돌하고 대립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개별 유대인과 라이벌 그룹 간에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신념은 현재 우리가 유대교라고 부르는 더 거대한 종교적 전통 안에 속한다.
우리가 현대의 독자로서 바울 서신을 접하면서 그 안에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율법과 정확히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놓고 바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확신 아래 하나님의 신탁과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지중해 세계에서 접했던 훨씬 더 거대한 대화의 장의 독특한 변형과 확장을 보게 된다.
--- 「3장 유대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중에서
그러나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이방인만을 묘사하려 했다는 가장 강력한 외적 증거는 실제로 에베소 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편지의 저자─바울 또는 그의 초창기 추종자 중 한 명─는 메시아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묘사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4:17-19).
--- 「5장 이방인 문제」 중에서
바울의 메시아사상은 복음의 사자로서의 자기 이해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방인을 포함한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기초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메시아사상을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더 폭넓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많은 독자들을 좌절시키거나 당황하게 하는 주장을 한다(3:16).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그리스어, sperma) 모두에게 일련의 약속을 하셨다고 말한다.
(롬 4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유대 경전이 “씨들”(spermata) 대신 “씨”(sperma)라고 말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문법적으로 억지스러워 보이는 주장을 펼친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씨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이 아니라 한 특정 개인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가 누구일까? 바로 메시아다.
--- 「6장 메시아 예수」 중에서
바울은 자신이 창세기를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아브라함 내러티브 자체가 알레고리라고 주장한다.그 차이는 중요하다.
그것은 민권 운동에 관한 역사적인 작품을 예수에 대한 알레고리로 취급하는 것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알레고리로 취급하는 것의 차이다.
전자의 경우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후자의 경우 알레고리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며, 독자는 알레고리의 원래 의도를 정확하게 해독해야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 내러티브가 본래 알레고리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즉 아브라함 내러티브의 원래 의도는 원래부터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21-31에서 바울은 독자들에게 이 원래 의미가 무엇이며, 이제 그들의 현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트리폰과 같은 그리스-로마 작가와 요세푸스나 필론과 같은 유대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알레고리아”(all?goria)는 바울 시대에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알레고리는 저자가 사용한 문학적 장치였지, 후대의 독자들이 비(非)알레고리 텍스트에 적용할 외적 해석 전략이 아니었다.
--- 「7장 이방인 문제와 성형 수술」 중에서
따라서 바울이 프뉴마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유대 경전뿐만 아니라 프뉴마가 우주에서 최고의 물질로 여겨졌던 당시의 지적 맥락의 영향 아래서 프뉴마를 언급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이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 않은 한, 그의 독자들은 프뉴마를 당연히 주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로, 즉 영원하고 신성한 물질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만약 그가 주변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의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려 했다면─또 그가 의사소통에 매우 서투른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당연히 불가피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 「8장 프뉴마의 유전자 치료」 중에서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을 때 현대의 천체물리학이 끼어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 대다수(어쩌면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하므로, 바울이 “영적”이라고 표현하면 우리는 그가 비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15:44의 NRSV 번역은 심기어진 첫 번째 몸과 심기어진 씨에서 나오는 두 번째 몸을 구별한다.
“육체적인 몸으로 심고,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육체적인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도 있다.”적어도 이 번역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육체적인”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프쉬키코스”(psychikos)인데, 이 단어는 육체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영혼을 뜻하는 단어인 “프쉬케”(psych?)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비록 바울이 물질적인 몸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두 몸을 구분하는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인간을 살아 있는 영혼으로(eis psych?n z?san) 만드셨다고 말하는 창세기 2:7을 암시한다.
이 본래의 “영혼 같은”(psychikos) 몸과 달리 부활의 몸은 프뉴마적인 몸이 될 것이다.
둘째, 내가 영적이라는 용어 대신 프뉴마적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 독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육체적인 것과 상반된다는 추론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당신은 물질적인 복보다 영적인 복을.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 「11장 메시아의 재림의 절정으로서의 부활」 중에서
출판사 리뷰
티센의 가장 큰 강점은 이러한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논의를 탁월하게 명쾌하고 생동감 있는 문체로 풀어낸다는 데 있다.
바울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떤 의미의 유대인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처럼 정밀하고 설득력 있게 답한 책은 드물다.
20세기 후반 “유대교 내 예수” 연구가 예수의 유대적 맥락을 회복했다면 이제는 바울의 차례다.
티센은 바울이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율법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할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유대교 내부에서 복음을 확장한 인물임을 강조한다.
바울의 급진성은 유대교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신학적 상상을 제시한 데 있었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단지 바울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신약성경 전체, 기독교 신학과 유대교의 관계,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만든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조차도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신약성경에서조차 이 명칭은 외부인이 붙인 이름일 뿐, 바울 스스로 사용한 정체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의 각 장은 바울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왜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방인의 무할례를 받아들였는가? 왜 부활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 왜 그는 자신을 메시아 예수의 “사자”이자 “대사”로 표현했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바울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신약학자, 신학생, 목회자는 물론,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원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소중한 안내서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가독성을 겸비한 드문 저작으로, 바울 연구자에게는 새로운 자극을, 일반 신자에게는 명쾌한 입문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메시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교적 언어와 상상력 안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저작이다.
오늘날 신학은 다시 경계 위에 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과 역사, 학문과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성찰해야 할 때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그 경계 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가장 정직한 대답을 제시한다.
한 인물을 새롭게 이해할 때, 우리의 성경 읽기와 신학, 역사 인식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전환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전환을 가능케 하는 가장 탁월한 입문서다.
바울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어떤 의미의 유대인이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처럼 정밀하고 설득력 있게 답한 책은 드물다.
20세기 후반 “유대교 내 예수” 연구가 예수의 유대적 맥락을 회복했다면 이제는 바울의 차례다.
티센은 바울이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율법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할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유대교 내부에서 복음을 확장한 인물임을 강조한다.
바울의 급진성은 유대교를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신학적 상상을 제시한 데 있었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단지 바울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신약성경 전체, 기독교 신학과 유대교의 관계,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만든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조차도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신약성경에서조차 이 명칭은 외부인이 붙인 이름일 뿐, 바울 스스로 사용한 정체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의 각 장은 바울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왜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방인의 무할례를 받아들였는가? 왜 부활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 왜 그는 자신을 메시아 예수의 “사자”이자 “대사”로 표현했는가? 이 질문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바울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신약학자, 신학생, 목회자는 물론, 바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원하는 일반 독자에게도 소중한 안내서다.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가독성을 겸비한 드문 저작으로, 바울 연구자에게는 새로운 자극을, 일반 신자에게는 명쾌한 입문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메시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교적 언어와 상상력 안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저작이다.
오늘날 신학은 다시 경계 위에 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과 역사, 학문과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성찰해야 할 때다.
『유대인 신학자 바울』은 그 경계 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가장 정직한 대답을 제시한다.
한 인물을 새롭게 이해할 때, 우리의 성경 읽기와 신학, 역사 인식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전환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전환을 가능케 하는 가장 탁월한 입문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7월 23일
- 쪽수, 무게, 크기 : 292쪽 | 152*225*20mm
- ISBN13 : 9791161293035
- ISBN10 : 116129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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