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Description
책소개
근대화 우등생 일본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국인들이 몰랐던 ‘축적’과 ‘가교’의 시간, 에도시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른 일본의 ‘에도시대’ 대해부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길을 묻다!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반일’민족주의를 제고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내부의 문제를 직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은 어떤 사회였으며,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시험대 앞에서 일본은 최우등생, 중국은 열등생, 조선은 낙제생이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혹시 훈도시를 입고 칼을 찬 야만의 나라에 고래古來부터 문물을 전수해주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 중 유독 일본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홀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2017년 현재 일본은 총 2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에서는 그때마다 메이지유신을 지목하고, 이후 근대화 과정에 부러움을 보낸다.
그러한 분석을 접할 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저력을 만든 것이 정말로 그 100년일까? 과연 100년 만에 그러한 국가적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도달한 종착지는 일본 ‘근세의 재발견’이다.
한국인들이 몰랐던 ‘축적’과 ‘가교’의 시간, 에도시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른 일본의 ‘에도시대’ 대해부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길을 묻다!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반일’민족주의를 제고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내부의 문제를 직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은 어떤 사회였으며,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시험대 앞에서 일본은 최우등생, 중국은 열등생, 조선은 낙제생이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혹시 훈도시를 입고 칼을 찬 야만의 나라에 고래古來부터 문물을 전수해주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 중 유독 일본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홀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2017년 현재 일본은 총 2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에서는 그때마다 메이지유신을 지목하고, 이후 근대화 과정에 부러움을 보낸다.
그러한 분석을 접할 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저력을 만든 것이 정말로 그 100년일까? 과연 100년 만에 그러한 국가적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도달한 종착지는 일본 ‘근세의 재발견’이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에도 한복판 200년 된 소바집의 의미
제2장 역사를 바꾼 우연(1): 에도의 탄생
허허벌판에서의 시작 |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 | 다이묘의 등골을 빼 인프라를 구축하다
제3장 역사를 바꾼 우연(2): 참근교대제
근대화의 예습, 참근교대제 | 폭포수와 같은 낙수효과 |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 서민 계급이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다 | 전국 네트워크의 구축
제4장 ‘된장(미소)’으로 본 근대 일본의 정치경제학
전략물자가 된 ‘미소’ | 부국강병의 꿈이 담긴 ‘센다이미소’ | 품질과 신뢰로 에도 시장을 뚫다 | 새로운 시대, 넘버원 미소의 자리는? | 경쟁과 자율성이 꽃피운 미소 문화
제5장 여행천국의 나라, 관광입국의 시대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 |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 | 여행의 대중화: 장기투어, 고講, 료칸, 유곽 | 시대를 앞서간 ‘觀光’의 탄생
제6장 출판문화 융성의 키워드: 포르노, 카피라이트, 렌털
출판 혁명의 시작은 포르노 | 시대를 풍미한 초베스트셀러의 등장 | 유교의 이상을 완성한 『경전여사』 | 일본판 카피라이트, ‘판권’의 탄생 | ‘대본업’의 등장과 공유경제 |문화 융성은 시장 활성화의 이음동의어
제7장 교육의 힘: 번교, 데라코야, 주쿠
공교육의 핵심 번교藩校 | 도쿄대학으로 이어진 막부의 3대 직할 교육기관 | 서민교육의 중심 ‘데라코야’ | 신지식인의 산실 ‘주쿠塾’
제8장 뉴스와 광고 전단의 원형: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에도시대의 신문, ‘요미우리’ | 광고지의 효시 ‘히키후다’
제9장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연 『해체신서』
일본 지식계를 강타한 서양 해부학 | 일본 최초의 본격 번역서 『해체신서』 | 하나오카 세이슈의 세계 최초 전신마취 외과수술 | 호시노, 인체 골격 제작에 나서다
제10장 시대를 앞서간 지도 이노즈伊能圖
은퇴 후 시작한 천문학 공부 | 측량 마니아 이노, 걸어서 에조치까지 | 17년에 걸친 10차례의 측량 여행 | 이노즈, 정확성의 비결
제11장 사전으로 서구 문명과 언어의 통로를 만들다
0에서 1을 만드는 도전 | 일본 난학자들의 보물, 『두후하루마』 |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 | 근대화를 촉진한 언어의 통로
제12장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의 힘, 섬유혁명
근세 초기 동아시아 무역 | 목면 보급과 자본주의의 맹아 | 도시의 중심 에도, 새로운 시장의 확대
제13장 도시 서민문화의 진화: 패션의 유행과 ‘이키粹’ 문화
규제와 간섭이 만들어낸 문화의 진화 | ‘이키’의 미의식, 심플한 세련됨을 추구하다
제14장 문화에서 산업으로, 도자기 대국의 탄생
다도의 유행과 도자기 전쟁 | 도자기의 신, 이삼평 | 진화하는 아리타야키 | 하이엔드부터 보급형 자기까지
제15장 도자기 산업의 발달사: ‘예술의 후원’과 치열한 경쟁
만국박람회로 판로를 뚫다 | 민관학 공동 체제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다 | 조선의 도자기가 정체되는 동안……
제16장 에도 지식인의 초상: 시대가 변하면 지식도 변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에게서 찾다 | 이시다 바이간, 상인의 길을 밝히다 |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바라보다
제17장 ‘대망’의 화폐 통일: 삼화제와 화폐 개혁
금화 은화 동화 3종이 본위화폐로 | 화폐개혁, 펀치를 맞다
제18장 ‘화폐의 덫’과 막부체제의 한계
이원적 화폐 유통구조와 료가에쇼 | 화폐본위경제와 미곡본위경제 병행의 모순 | 중앙화폐와 지역화폐 병존의 모순
에필로그
도판 출처
제1장 에도 한복판 200년 된 소바집의 의미
제2장 역사를 바꾼 우연(1): 에도의 탄생
허허벌판에서의 시작 |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 | 다이묘의 등골을 빼 인프라를 구축하다
제3장 역사를 바꾼 우연(2): 참근교대제
근대화의 예습, 참근교대제 | 폭포수와 같은 낙수효과 |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 서민 계급이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다 | 전국 네트워크의 구축
제4장 ‘된장(미소)’으로 본 근대 일본의 정치경제학
전략물자가 된 ‘미소’ | 부국강병의 꿈이 담긴 ‘센다이미소’ | 품질과 신뢰로 에도 시장을 뚫다 | 새로운 시대, 넘버원 미소의 자리는? | 경쟁과 자율성이 꽃피운 미소 문화
제5장 여행천국의 나라, 관광입국의 시대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 |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 | 여행의 대중화: 장기투어, 고講, 료칸, 유곽 | 시대를 앞서간 ‘觀光’의 탄생
제6장 출판문화 융성의 키워드: 포르노, 카피라이트, 렌털
출판 혁명의 시작은 포르노 | 시대를 풍미한 초베스트셀러의 등장 | 유교의 이상을 완성한 『경전여사』 | 일본판 카피라이트, ‘판권’의 탄생 | ‘대본업’의 등장과 공유경제 |문화 융성은 시장 활성화의 이음동의어
제7장 교육의 힘: 번교, 데라코야, 주쿠
공교육의 핵심 번교藩校 | 도쿄대학으로 이어진 막부의 3대 직할 교육기관 | 서민교육의 중심 ‘데라코야’ | 신지식인의 산실 ‘주쿠塾’
제8장 뉴스와 광고 전단의 원형: ‘요미우리’와 ‘히키후다’
에도시대의 신문, ‘요미우리’ | 광고지의 효시 ‘히키후다’
제9장 과학적 사고의 문을 연 『해체신서』
일본 지식계를 강타한 서양 해부학 | 일본 최초의 본격 번역서 『해체신서』 | 하나오카 세이슈의 세계 최초 전신마취 외과수술 | 호시노, 인체 골격 제작에 나서다
제10장 시대를 앞서간 지도 이노즈伊能圖
은퇴 후 시작한 천문학 공부 | 측량 마니아 이노, 걸어서 에조치까지 | 17년에 걸친 10차례의 측량 여행 | 이노즈, 정확성의 비결
제11장 사전으로 서구 문명과 언어의 통로를 만들다
0에서 1을 만드는 도전 | 일본 난학자들의 보물, 『두후하루마』 |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 | 근대화를 촉진한 언어의 통로
제12장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의 힘, 섬유혁명
근세 초기 동아시아 무역 | 목면 보급과 자본주의의 맹아 | 도시의 중심 에도, 새로운 시장의 확대
제13장 도시 서민문화의 진화: 패션의 유행과 ‘이키粹’ 문화
규제와 간섭이 만들어낸 문화의 진화 | ‘이키’의 미의식, 심플한 세련됨을 추구하다
제14장 문화에서 산업으로, 도자기 대국의 탄생
다도의 유행과 도자기 전쟁 | 도자기의 신, 이삼평 | 진화하는 아리타야키 | 하이엔드부터 보급형 자기까지
제15장 도자기 산업의 발달사: ‘예술의 후원’과 치열한 경쟁
만국박람회로 판로를 뚫다 | 민관학 공동 체제로 해외시장을 개척하다 | 조선의 도자기가 정체되는 동안……
제16장 에도 지식인의 초상: 시대가 변하면 지식도 변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자에게서 찾다 | 이시다 바이간, 상인의 길을 밝히다 |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바라보다
제17장 ‘대망’의 화폐 통일: 삼화제와 화폐 개혁
금화 은화 동화 3종이 본위화폐로 | 화폐개혁, 펀치를 맞다
제18장 ‘화폐의 덫’과 막부체제의 한계
이원적 화폐 유통구조와 료가에쇼 | 화폐본위경제와 미곡본위경제 병행의 모순 | 중앙화폐와 지역화폐 병존의 모순
에필로그
도판 출처
책 속으로
이에야스는 위기의 순간마다 기회를 찾아낸 창의적 발상의 소유자였다.
이번에도 그의 기지가 발휘된다.
택지를 마련하기 위해 내륙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매립의 대상지가 된 곳은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였다.
현재 도쿄의 중심부인 황거皇居 인근의 히비야 일대는 ‘入江’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육지가 아니라 하구河口에 해당하는 바다였다.
이에야스는 이곳에 성 북쪽에 위치한 간다야마神田山를 깎아 조달한 토사土砂를 퍼부어 바다를 메우고 땅을 만들었다.
도심 운하를 파면서 나온 흙들도 다
털어 넣었다.
속전속결로 해치운 이른바 ‘돌관突貫공사’였다.
수만 명의 인원이 산을 깎고 흙을 운반하고 바다를 메우고 지반을 다져 불과 1년 만에 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광대한 매립지를 조성하였다.
현재의 히비야 공원에서 신바시新橋를 거쳐 하마초浜町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서울에 비유하면 시청 앞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이 조선 선조宣祖 때 만든 매립지라는 것이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40~41쪽)
로마 격언에 ‘도로는 강자가 만들고, 약자가 부순다’는 말이 있다.
체제가 잘 정비된 우수한 국가일수록 충실한 사회 인프라를 갖추고, 그렇지 못한 국가일수록 사회 인프라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이다.
무가들이 실력 본위의 경쟁을 벌이는 일본 특유의 정치상황 속에서, 막부를 에도에 두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 천하보청 및 참근교대제와 맞물려 혁신적인 도시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이것이 에도시대의 요체要諦이다.
(48쪽)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이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독자 징세권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하루라도 약정된 날보다 늦게 도착하면 막부의 질책과 막대한 비용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각 번은 사전에 선발대를 파견하여 치밀하게 일정을 짜는 한편, 도로 사정이 열악하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여 도로를 개보수改補修 하는 등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 이동시 현대 화폐로 수행원 1인당 식비와 숙박비로 하루 6000엔 정도의 비용을 상정할 경우 평균 3~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된다.
이러한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여기에 여행 경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요가 큰 에도 체재비가 더해지면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다이묘 세수의 절반을 넘어서는 막대한 액수였다.(53쪽)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중앙과 지방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55~56쪽)
근대에 눈 뜬 유럽에서도 서민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현상이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타 지역을 여행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에도시대 중기부터 일반 서민층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여행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서구와 비교해도 무려 100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근세 초엽부터 독특한 종교·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구축된 여행 생태계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인적 이동과 교류를 의미하며, 이는 정보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물건의 이동보다 훨씬 큰 파급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여행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治安, 희구希求의 대상이 되는 명소·명물, 유희 또는 도락道樂거리가 존재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일시적이나마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간과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전근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행 대중화의 조건이 충족되고 제약이 제거되었다.
일본은 18세기 중엽에 이미 연간 100만이 넘는 여행객이 전국을 누비는 세계 최고의 여행천국이었다 (73~74쪽)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17세기 이후 일본의 출판문화는 엄청난 기세로 성장한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000여 종의 신간이 서점에 쏟아져 나오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거의 모든 국민이 책을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대국’이 되었다.
전근대 사회임에도 어떻게 이러한 기적과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포르노pornography, 판권copyright, 대여업rental business에 그 비결이 있다.
(89쪽)
기존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존재이던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개념 전환이 이루어지자 발달된 상업자본과 유통망에 힘입어 상업출판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 100만의 정치경제 중심지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어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출판시대가 꽃을 피운다.
구사조시 서적과 우키요에 등의 화첩류, 본격 모노가타리[物語]인 ‘요미혼’ 등이 큰 인기를 모음에 따라 교토를 제치고 에도가 제1의 출판 시장으로 도약한다.
에도의 출판 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여행 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되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으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가 직업으로 등장하는 등 현대 출판 시장을 방불케 하는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된다.
(94~95쪽)
에도시대의 교육체계와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지배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다.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교육의 특징은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 익혀야 할 지식과 교양이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이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 직업생활에 필요한 봉공奉公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교육 등이 서민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되었다.
신분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기초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전근대사회로서는 발전된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111쪽)
1774년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서양의 문물은 물건의 형태로 접하거나 대화를 통해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는 수준이었을 뿐, 서양의 ‘책’이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이나 약간의 아는 단어를 통해 추측할 뿐, 지식의 보고인 책이 지식 흡수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해체신서』가 출간되자 난학자蘭學者들 사이에 책을 지식의 전달 도구로 삼기 위한 ‘번역’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사실 그 이전부터 서양의 책에 적혀 있는 꼬부랑글자의 뜻만 알 수 있으면 그 지식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신서』 이전에 번역서가 없었던 것은 ‘사전辭典·dictionary’이 없었기 때문이다.
(153쪽)
막부의 사치금지령을 비슷한 시기 조선의 사치금지령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도 사치금지령을 내려 화려한 의복을 규제하였다.
염색천의 소비가 늘면 염료의 소재가 되는 환금작물 재배량이 늘어나 미곡 등 식량 작물 재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빙하기에 해당하는 근세에 기근, 흉작 등이 빈번했다는 점도 두 나라 정부의 의복 규제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규제였지만 사치금지령은 조선보다 일본 사회에 더 영향이 컸다.
조선인들은 의복색 규제와 관계없이 아예 염색을 하지 않고 면포를 표백, 탈색하여 흰옷을 입고 다니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상복喪服으로나 입는 백의白衣를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것은 예禮에 맞지 않다고 하여 흰옷을 규제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양반·평민을 가리지 않고 흰옷은 더욱 선호되고, 평상복의 대세가 되었다.
백의 선호는 조선의 염색 기술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염색천은 제대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기술자들은 관청에 예속되어 기술적·예술적 자율성이 제약되었다.
(184~185쪽)
일본 파빌리온에 진열된 전체 길이 2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화병은 당시 서구인들도 본 적이 없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사이즈에서 여타 국가의 도자기를 압도하며, 예술성과 화제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아리타의 자기들은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일약 일본 파빌리온 최고의 인기 전시물이 되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요즘의 위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국제행사였다.
‘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빈 박람회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 관람객이 다녀갔고,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일본의 회화·공예품은 관람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람회 내내 화제를 불러 모았던 만큼 아리타야키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참가단이 준비해간 찻잔, 접시 등의 소품류가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일본 국내에 추가 주문이 쇄도하였다.
1872년 4만 5000엔이었던 일본의 도자기 수출액은 빈 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에는 11만 6000엔으로 2.5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빈 박람회에 출품된 아리타야키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전체를 견인하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207쪽)
에도시대 일본 사회는 도시화, 자본화, 시장화의 진전으로 기존의 지식·사상으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계속 직면하였고, 이러한 한계 상황을 맞아 지식인들이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견고한 지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신분을 넘어 각 직역별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신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상은 일종의 지식시장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높은 과학기술, 인문·사회과학 수준을 자랑하는 현대 일본의 지적 역동성과 다양성은 지식이 독점되지 않고 공론의 장에서 경합한 에도시대 지식시장의 태동胎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35쪽)
이번에도 그의 기지가 발휘된다.
택지를 마련하기 위해 내륙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매립의 대상지가 된 곳은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였다.
현재 도쿄의 중심부인 황거皇居 인근의 히비야 일대는 ‘入江’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육지가 아니라 하구河口에 해당하는 바다였다.
이에야스는 이곳에 성 북쪽에 위치한 간다야마神田山를 깎아 조달한 토사土砂를 퍼부어 바다를 메우고 땅을 만들었다.
도심 운하를 파면서 나온 흙들도 다
털어 넣었다.
속전속결로 해치운 이른바 ‘돌관突貫공사’였다.
수만 명의 인원이 산을 깎고 흙을 운반하고 바다를 메우고 지반을 다져 불과 1년 만에 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광대한 매립지를 조성하였다.
현재의 히비야 공원에서 신바시新橋를 거쳐 하마초浜町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서울에 비유하면 시청 앞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이 조선 선조宣祖 때 만든 매립지라는 것이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40~41쪽)
로마 격언에 ‘도로는 강자가 만들고, 약자가 부순다’는 말이 있다.
체제가 잘 정비된 우수한 국가일수록 충실한 사회 인프라를 갖추고, 그렇지 못한 국가일수록 사회 인프라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이다.
무가들이 실력 본위의 경쟁을 벌이는 일본 특유의 정치상황 속에서, 막부를 에도에 두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 천하보청 및 참근교대제와 맞물려 혁신적인 도시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이것이 에도시대의 요체要諦이다.
(48쪽)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이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독자 징세권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하루라도 약정된 날보다 늦게 도착하면 막부의 질책과 막대한 비용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각 번은 사전에 선발대를 파견하여 치밀하게 일정을 짜는 한편, 도로 사정이 열악하면 스스로 비용을 부담하여 도로를 개보수改補修 하는 등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 이동시 현대 화폐로 수행원 1인당 식비와 숙박비로 하루 6000엔 정도의 비용을 상정할 경우 평균 3~4억 엔 정도의 경비가 편도 이동에 소요된다.
이러한 다이묘가 전국에 270여 가문이 산재해 있었으니 지금 돈으로 매년 수조 원이 길거리에 뿌려진 셈이다.
여기에 여행 경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요가 큰 에도 체재비가 더해지면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다이묘 세수의 절반을 넘어서는 막대한 액수였다.(53쪽)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중앙과 지방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에도라는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55~56쪽)
근대에 눈 뜬 유럽에서도 서민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현상이다.
철도교통망이 정비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타 지역을 여행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에도시대 중기부터 일반 서민층 사이에 상당한 수준의 여행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서구와 비교해도 무려 100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근세 초엽부터 독특한 종교·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구축된 여행 생태계는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인적 이동과 교류를 의미하며, 이는 정보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물건의 이동보다 훨씬 큰 파급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여행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물질적·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治安, 희구希求의 대상이 되는 명소·명물, 유희 또는 도락道樂거리가 존재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일시적이나마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간과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전근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행 대중화의 조건이 충족되고 제약이 제거되었다.
일본은 18세기 중엽에 이미 연간 100만이 넘는 여행객이 전국을 누비는 세계 최고의 여행천국이었다 (73~74쪽)
16세기까지 일본의 출판문화는 유럽,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뒤처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상황이 반전된다.
17세기 이후 일본의 출판문화는 엄청난 기세로 성장한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200여 개의 출판업자가 경쟁하고, 18세기 중반이 되면 연간 1000여 종의 신간이 서점에 쏟아져 나오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거의 모든 국민이 책을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대국’이 되었다.
전근대 사회임에도 어떻게 이러한 기적과 같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포르노pornography, 판권copyright, 대여업rental business에 그 비결이 있다.
(89쪽)
기존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존재이던 ‘책’이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개념 전환이 이루어지자 발달된 상업자본과 유통망에 힘입어 상업출판 시장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인구 100만의 정치경제 중심지 에도에 출판업자들이 모여들어 연간 수백 종의 신간을 발행하는 본격적인 상업출판시대가 꽃을 피운다.
구사조시 서적과 우키요에 등의 화첩류, 본격 모노가타리[物語]인 ‘요미혼’ 등이 큰 인기를 모음에 따라 교토를 제치고 에도가 제1의 출판 시장으로 도약한다.
에도의 출판 시장에서는 각종 오락물, 실용서, 여행 가이드북 등 다양한 장르가 개척되고,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전문적으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전업작가’가 직업으로 등장하는 등 현대 출판 시장을 방불케 하는 비즈니스 생태계가 구축된다.
(94~95쪽)
에도시대의 교육체계와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지배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교육이다.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교육의 특징은 서민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유지, 발전을 위해 익혀야 할 지식과 교양이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이다.
이에 따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교육, 직업생활에 필요한 봉공奉公교육, 공동생활에 필요한 도덕교육 등이 서민교육의 중심 내용으로 강조되었다.
신분제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모든 사회 구성원은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기초 교육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은 전근대사회로서는 발전된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111쪽)
1774년 『해체신서』의 출간은 일본 지식인 사회에 일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서양의 문물은 물건의 형태로 접하거나 대화를 통해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는 수준이었을 뿐, 서양의 ‘책’이라는 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이나 약간의 아는 단어를 통해 추측할 뿐, 지식의 보고인 책이 지식 흡수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해체신서』가 출간되자 난학자蘭學者들 사이에 책을 지식의 전달 도구로 삼기 위한 ‘번역’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사실 그 이전부터 서양의 책에 적혀 있는 꼬부랑글자의 뜻만 알 수 있으면 그 지식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신서』 이전에 번역서가 없었던 것은 ‘사전辭典·dictionary’이 없었기 때문이다.
(153쪽)
막부의 사치금지령을 비슷한 시기 조선의 사치금지령과 비교하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유교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도 사치금지령을 내려 화려한 의복을 규제하였다.
염색천의 소비가 늘면 염료의 소재가 되는 환금작물 재배량이 늘어나 미곡 등 식량 작물 재배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빙하기에 해당하는 근세에 기근, 흉작 등이 빈번했다는 점도 두 나라 정부의 의복 규제에 영향을 미쳤다.
같은 규제였지만 사치금지령은 조선보다 일본 사회에 더 영향이 컸다.
조선인들은 의복색 규제와 관계없이 아예 염색을 하지 않고 면포를 표백, 탈색하여 흰옷을 입고 다니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상복喪服으로나 입는 백의白衣를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것은 예禮에 맞지 않다고 하여 흰옷을 규제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양반·평민을 가리지 않고 흰옷은 더욱 선호되고, 평상복의 대세가 되었다.
백의 선호는 조선의 염색 기술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염색천은 제대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기술자들은 관청에 예속되어 기술적·예술적 자율성이 제약되었다.
(184~185쪽)
일본 파빌리온에 진열된 전체 길이 2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화병은 당시 서구인들도 본 적이 없는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사이즈에서 여타 국가의 도자기를 압도하며, 예술성과 화제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아리타의 자기들은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일약 일본 파빌리온 최고의 인기 전시물이 되었다.
당시 만국박람회는 요즘의 위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국제행사였다.
‘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개최된 빈 박람회에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 관람객이 다녀갔고, 아리타야키를 비롯한 일본의 회화·공예품은 관람객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박람회 내내 화제를 불러 모았던 만큼 아리타야키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참가단이 준비해간 찻잔, 접시 등의 소품류가 현장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일본 국내에 추가 주문이 쇄도하였다.
1872년 4만 5000엔이었던 일본의 도자기 수출액은 빈 박람회가 개최된 1873년에는 11만 6000엔으로 2.5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빈 박람회에 출품된 아리타야키는 일본의 도자기 수출 전체를 견인하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207쪽)
에도시대 일본 사회는 도시화, 자본화, 시장화의 진전으로 기존의 지식·사상으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계속 직면하였고, 이러한 한계 상황을 맞아 지식인들이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견고한 지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신분을 넘어 각 직역별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신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상은 일종의 지식시장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높은 과학기술, 인문·사회과학 수준을 자랑하는 현대 일본의 지적 역동성과 다양성은 지식이 독점되지 않고 공론의 장에서 경합한 에도시대 지식시장의 태동胎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35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지금의 일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에도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그 당시 에도에 필적할 만한 유럽의 도시로는 런던이 100만 명이었고, 파리는 50만 명이었다.
1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는 유럽 전체에서도 20개 도시에 불과했다).
이에야스가 에도로 옮겨와 처음에 착수한 것은, 치수治水사업과 상수도의 개통, 택지 마련을 위한 매립 공사였다.
(현재의 히비야 공원에서 신바시新橋와 하마초浜町에 걸쳐 있는 매립지는, 서울에 비유하면 조선 선조宣祖 때 시청 앞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을 매립하는 것과 같다.) 도시기반 확충과 함께 지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장려하고, 각종 기술자, 상인, 학자 등의 인적 자원이 확충되자 도시 에도는 같은 시기 유럽국가들에 견주어도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막부를 에도에 두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 ‘천하보청’ 및 ‘참근교대제’와 맞물려 혁신적인 도시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그중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 씨줄과 날줄을 엮어 에도를 말하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외양外樣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 시장, 경쟁, 이동, 통합, 자치, 공공이라는 근대성의 요소가 어떻게 ‘수용·변용·내재화’를 거쳤는지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한 분석에는 저자가 직업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바라본 시각이 작용하였다.
외교관의 세계에는 “유능한 외교관은 모든 분야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고, 한 분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전체적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중시하는 외교관의 직업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일 터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총합적 상호관계를 통시적diachronic·공시적synchronic 종횡으로 엮어내어 세계사적·지역적 좌표 속에서 이해의 틀을 구성하는 그러한 총합적 이해의 틀에는 생활문화사적 접근이 중요한 요소로 내포되어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생활문화사적 관점에 기반하여 현대 일본의 원형原型으로서 에도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가 반영되었다.
당시 형성된 구성원들의 정서적 태도와 생활양식은 알맹이가 꽤 단단한 것이어서 현대 일본사회에도 연속성을 갖고 이어져 ‘일본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 소바집이 생기려면? 참근교대제의 낙수 효과, 된장의 정치경제학, 여행천국의 나라, 출판문화 융성의 비결, 세계최초의 전신마취 수술, 시대를 앞서간 지도 이노즈, 번역의 힘, 『해체신서』가 일으킨 혁명적 변화, 도자기와 차문화 등등 추상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실용과 실증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에도시대의 각종 도구적 성취와 특징을 중요한 소재로서 다루고 있다.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의 일본 역사에 대한 관심은 『대망大望』으로 대표되는 일본 센고쿠戰國시대의 영웅군담 스토리, 메이지유신,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르는 전쟁 스토리에 집중된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에도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식은 트리플 마이너리그의 역사이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이고 축적의 시대였다.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를 거의 모든 선행조건들이 그 시기에 결정되었다.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를 되풀이하는 저주에 빠질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왜 빼앗겼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조선은 선善한데 일본이 악惡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선악론은 역사를 반쪽만 바라보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관을 택하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20세기 벽두에 조선은 약했고 일본은 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왜 일본은 강했고 조선은 약했는가’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일본의 근세는 조선 근세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의 근세를 보면 비로소 조선의 근세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책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역사이지만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역사’인 일본 근세에 대한 한국 내의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한국 근대화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일본 근세를 진지하게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에도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그 당시 에도에 필적할 만한 유럽의 도시로는 런던이 100만 명이었고, 파리는 50만 명이었다.
1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는 유럽 전체에서도 20개 도시에 불과했다).
이에야스가 에도로 옮겨와 처음에 착수한 것은, 치수治水사업과 상수도의 개통, 택지 마련을 위한 매립 공사였다.
(현재의 히비야 공원에서 신바시新橋와 하마초浜町에 걸쳐 있는 매립지는, 서울에 비유하면 조선 선조宣祖 때 시청 앞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을 매립하는 것과 같다.) 도시기반 확충과 함께 지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장려하고, 각종 기술자, 상인, 학자 등의 인적 자원이 확충되자 도시 에도는 같은 시기 유럽국가들에 견주어도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막부를 에도에 두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 ‘천하보청’ 및 ‘참근교대제’와 맞물려 혁신적인 도시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그중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 씨줄과 날줄을 엮어 에도를 말하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외양外樣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 시장, 경쟁, 이동, 통합, 자치, 공공이라는 근대성의 요소가 어떻게 ‘수용·변용·내재화’를 거쳤는지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한 분석에는 저자가 직업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바라본 시각이 작용하였다.
외교관의 세계에는 “유능한 외교관은 모든 분야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고, 한 분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전체적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중시하는 외교관의 직업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일 터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총합적 상호관계를 통시적diachronic·공시적synchronic 종횡으로 엮어내어 세계사적·지역적 좌표 속에서 이해의 틀을 구성하는 그러한 총합적 이해의 틀에는 생활문화사적 접근이 중요한 요소로 내포되어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생활문화사적 관점에 기반하여 현대 일본의 원형原型으로서 에도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가 반영되었다.
당시 형성된 구성원들의 정서적 태도와 생활양식은 알맹이가 꽤 단단한 것이어서 현대 일본사회에도 연속성을 갖고 이어져 ‘일본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 소바집이 생기려면? 참근교대제의 낙수 효과, 된장의 정치경제학, 여행천국의 나라, 출판문화 융성의 비결, 세계최초의 전신마취 수술, 시대를 앞서간 지도 이노즈, 번역의 힘, 『해체신서』가 일으킨 혁명적 변화, 도자기와 차문화 등등 추상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실용과 실증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에도시대의 각종 도구적 성취와 특징을 중요한 소재로서 다루고 있다.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의 일본 역사에 대한 관심은 『대망大望』으로 대표되는 일본 센고쿠戰國시대의 영웅군담 스토리, 메이지유신,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르는 전쟁 스토리에 집중된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에도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식은 트리플 마이너리그의 역사이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이고 축적의 시대였다.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를 거의 모든 선행조건들이 그 시기에 결정되었다.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를 되풀이하는 저주에 빠질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왜 빼앗겼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조선은 선善한데 일본이 악惡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선악론은 역사를 반쪽만 바라보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관을 택하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20세기 벽두에 조선은 약했고 일본은 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왜 일본은 강했고 조선은 약했는가’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일본의 근세는 조선 근세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의 근세를 보면 비로소 조선의 근세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책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역사이지만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역사’인 일본 근세에 대한 한국 내의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한국 근대화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일본 근세를 진지하게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17년 08월 07일
- 쪽수, 무게, 크기 : 276쪽 | 416g | 154*215*20mm
- ISBN13 : 9788964620885
- ISBN10 : 8964620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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