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대용 평전 2
Description
책소개
신분제 철폐를 내세운 사회사상가·
화이론을 부정한 내재적 민족주의자·
‘실학자 담헌’을 둘러싼 ‘신화’는 잊어라
‘담헌 신화’의 비판적 읽기 결정판
조선 후기에 활약한 홍대용은, ‘4천 년 동안 사상에 빛나는 학자’ 6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 대표적 실학자다.
지은이는 방대한 관련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이런 통설에 설득력 있는 이의를 제기한다.
홍대용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의산문답』, 「임하경륜」은 물론이고 그가 북경의 청나라 지식인들 주고받은 편지며, 『수리정온』 등 당대 서양 수학·과학 저술까지 섭렵해 홍대용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16년 전 원고 집필을 시작해, 편집에만 3년이 걸린 원고지 5,500여 매-그사이 새로운 사료가 드러나 원고지 1,000여 매 분량이 추가되기도 했다- 분량의 이 책은, 볼륨 자체만으로도 우리 출판사에서 보기 드문 대작大作 평전이다.
화이론을 부정한 내재적 민족주의자·
‘실학자 담헌’을 둘러싼 ‘신화’는 잊어라
‘담헌 신화’의 비판적 읽기 결정판
조선 후기에 활약한 홍대용은, ‘4천 년 동안 사상에 빛나는 학자’ 6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 대표적 실학자다.
지은이는 방대한 관련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이런 통설에 설득력 있는 이의를 제기한다.
홍대용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의산문답』, 「임하경륜」은 물론이고 그가 북경의 청나라 지식인들 주고받은 편지며, 『수리정온』 등 당대 서양 수학·과학 저술까지 섭렵해 홍대용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16년 전 원고 집필을 시작해, 편집에만 3년이 걸린 원고지 5,500여 매-그사이 새로운 사료가 드러나 원고지 1,000여 매 분량이 추가되기도 했다- 분량의 이 책은, 볼륨 자체만으로도 우리 출판사에서 보기 드문 대작大作 평전이다.
목차
ㆍ책머리에
[01] 연암 그룹과 첫 벼슬
연암 그룹과 어울리다 | 1770년 4월부터 1774년 2월까지의 편지 |
1774년 2월 벼슬을 시작하다 | 세자익위사 시직 담헌 | 손유의·등사민과의 문답 |
손유의의 답 | 이단관의 변화
[02] 항주에서 편지가 오다
유금의 북경행 | 끊어졌던 엄성 쪽 소식이 10년 만에 전해지다 | 주문조의 편지 |
엄과의 편지 | 등사민과 주고받은 편지 | 1779년 엄과와 주문조 등에게 보낸 편지 |
연암이 보낸 편지 | 영천군수가 되다 | 손유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03] 천문학과 수학
서양 천문학·수학과 경화세족 | 담헌의 수학과 천문학 연구 | 담헌의 수학-《주해수용》 |
삼각함수 수용 | 천문 계산 | 천문 관측기기 | 음악 이론 | 담헌 수학·천문학의 의의
[04] 담헌 사유의 도착지, 《의산문답》과 〈임하경륜〉
담헌 사상의 최종 도착점 | 《의산문답》의 저술 시기와 형식 | 《의산문답》을 쓴 이유 |
한역 서양서의 천문학·지구자연학과 《의산문답》 | 관점의 전환, 인물균론 |
기와 천체, 물질 | 지구는 둥글다, 그리고 자전한다 | 중심 없는 세계 | 자연학의 조정 |
인간과 역사, 화이론의 부정 | 통제된 이상국가―〈임하경륜〉
[05] 담헌의 죽음과 그가 일으킨 파란
담헌의 죽음 | 담헌이 열었던 길이 막히다
에필로그-‘담헌 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ㆍ주
ㆍ찾아보기
[01] 연암 그룹과 첫 벼슬
연암 그룹과 어울리다 | 1770년 4월부터 1774년 2월까지의 편지 |
1774년 2월 벼슬을 시작하다 | 세자익위사 시직 담헌 | 손유의·등사민과의 문답 |
손유의의 답 | 이단관의 변화
[02] 항주에서 편지가 오다
유금의 북경행 | 끊어졌던 엄성 쪽 소식이 10년 만에 전해지다 | 주문조의 편지 |
엄과의 편지 | 등사민과 주고받은 편지 | 1779년 엄과와 주문조 등에게 보낸 편지 |
연암이 보낸 편지 | 영천군수가 되다 | 손유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03] 천문학과 수학
서양 천문학·수학과 경화세족 | 담헌의 수학과 천문학 연구 | 담헌의 수학-《주해수용》 |
삼각함수 수용 | 천문 계산 | 천문 관측기기 | 음악 이론 | 담헌 수학·천문학의 의의
[04] 담헌 사유의 도착지, 《의산문답》과 〈임하경륜〉
담헌 사상의 최종 도착점 | 《의산문답》의 저술 시기와 형식 | 《의산문답》을 쓴 이유 |
한역 서양서의 천문학·지구자연학과 《의산문답》 | 관점의 전환, 인물균론 |
기와 천체, 물질 | 지구는 둥글다, 그리고 자전한다 | 중심 없는 세계 | 자연학의 조정 |
인간과 역사, 화이론의 부정 | 통제된 이상국가―〈임하경륜〉
[05] 담헌의 죽음과 그가 일으킨 파란
담헌의 죽음 | 담헌이 열었던 길이 막히다
에필로그-‘담헌 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ㆍ주
ㆍ찾아보기
책 속으로
1770~1774년까지 4년 동안 담헌이 백탑白塔 부근에 살던 박지원·이덕무·박제가·서상수徐常修·유득공 등 이른바 ‘연암 그룹’과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p.15
박종채는 연암의 학문적 지향이 이용후생과 경제명물 등의 실용학에 있었고, 담헌의 지론도 동일하였다고 말한다.
실용학에 대한 지향은 경화세족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들은 사족 체제가 노정한 허다한 문제를 수정하려 했으니, 그 수정의 의지가 제도적 개혁 프로그램으로 나타났던 것이다.…정주학 역시 현실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이용후생과 경제명물의 학문’과 정주학은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윤리적 문제를 주 영역으로 삼는 것과는 별도로 ‘이용후생’과 ‘경제명물’의 영역에서 사족 체제가 노정한 문제를 수정하려 했을 뿐이다.
--- p.26
그의 천문학은 관측으로 얻은 수치와 수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천문학과 자연학, 수학을 주제로 다른 사람과 토론한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 p.27
담헌과 연암 그룹 사이에는 경제에 대한 견해가 거의 대척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연암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호부가豪富家의 토지 겸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권력으로 토지 소유를 제한할 것을 역설했지만, 담헌은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해 정전제 실시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면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연구하기를 바랐다.
--- p.30
담헌은 그 비현실성을 누구보다 비판했던 사람이다.…일상의 생활 속에서 유가의 도덕이 실천된다면, 그것이 곧 성과 천도에 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 현실과 삶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성리학의 관념만을 논하는 것은 초학자에게 필요치 않고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은, 실천적 정주학을 지향하는 담헌의 단골 비판 소재였다.
--- p.110
담헌은 “진시황이 잡서를 태우지 않았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제자백가의 말들이 한갓 이목만 어지럽혔을 뿐이니, 태운들 무슨 해가 될 것이 있었겠습니까?”라 했다.
담헌의 직정적이고 근본주의적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 말은 뒤에 《의산문답》에서 반복된다.
또 훈고를 맹렬히 비판했던 담헌은 정주학적 진리 외의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p.122
이단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비판을 넘기 위해 담헌은 모든 사상은 다 말폐가 있다고 말한다.
이단에 말폐가 있듯, 성인의 대중지정한 사고에서 나온 행위도 말폐가 있다.
달리 말해 정학도 말폐가 있다는 것이다.
--- p.151
김종후에게서 확인한 실천 없는 강퍅한 정통 유가의 엄격함도 이단의 진실성을 깊이 사유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계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의산문답》에서 역설된 지구가 둥글다는 설은 상대주의를 낳게 했다.
또한 그가 접속한 연암은 공안파公安派의 문학이론에서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담헌은 문학에 냉담했지만, 아마도 연암과의 대화는 그로 하여금 일종의 가치 상대주의를 인정하게 했을 것이다.
--- p.155
《의산문답》의 결론 부분에서 담헌은 화이론을 부정한다.
그의 북경행을 이끌었던 동기 중 하나였던 중화와 이적의 차등론을 스스로 부정했던 것이다.
《의산문답》의 화이론 부정은 한국 사상사에서 중국 중심주의 부정, 나아가 민족주의의 주체적 성립으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국가경영론 혹은 사회사상을 담은 〈임하경륜〉의 일부 주장은 신분제를 부정한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지전설과 화이론의 부정, 신분 제의 철폐로 요약되는 담헌의 사상을 평가하는 대주제는 명료하게 하나로 수렴된다.
그것은 ‘자생적 근대’다.
담헌의 삶과 사상에서 20세기 사람들은 스스로 근대를 향해 진보했던 한국사의 발전 동태를 읽어냈다.
하지만 이 독해가 담헌의 삶과 그가 남긴 텍스트를 엄밀하게 읽은 결과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 p.229
“홍군은 서실 천장에 성도星圖를 붙여 연구하는 마음이 가장 정밀하다.” 곧 담헌은 자신의 서재 천장에 별자리 그림을 붙여 놓고 천문학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43
조선의 수학은 실용수학이었던 바, 사족 체제는 그것을 기술직 중인 중 계사計士 집단에 맡겼다.
담헌은 사족인 자신이 수학을 연구하는 것을 변명해야만 했다.
그는 공자가 ‘위리委吏’가 되었을 때 “회계는 마땅히 처리해야 한다”고 했던 말과 공자 문하에 육예 가운데 하나로 수학이 포함되어 있던 사실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다.
담헌은 그것을 “옛사람이 실용에 힘쓴” 증거로 삼았다.
--- p.249
《주해수용》은…담헌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의 실용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해수용》은 무슨 새로운 수학사적 발견을 담은 대단한 수학책일 수는 없다.…《주해수용》의 수학은 대부분 중국의 전통 수학과 일부 한국 수학을 인용해 편집한 결과물일 뿐이다.
--- p.251
그가 만든 혼천의는 정확하게 천체를 관측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천체관이 확립되어있는 이상, 그것을 활용해 하늘을 본들 육안에 의한 관측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관찰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천체나 천문 현상은 없었던 것이 그 증거다…담헌의 천문학…가장 큰 의의는 담헌이 천체를 계산이 가능한 입체적·물리적·기하학적 공간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재래의 중국과 조선 천문학은 지구와 태양, 달, 그리고 행성과 여타의 천체를 측정 가능한 공간에 있는 물리적인 실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 p.312
《의산문답》은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 나아가 “중화도 없고 오랑캐도 없다”는 화이관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전근대적 우주관을 끝장낸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평가받는다.
또한 화이론의 부정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내재적 민족주의의 신호탄으로 읽혔다.
그런가 하면 〈임하경륜〉의 특정 부분은 전근대적 신분제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요컨대 담헌의 지전설, 우주 무한론, 화이관의 부정, 신분제에 대한 언급은 모두 조선의 사상사에서 ‘내재적 근대’를 알리는 중대한 징표로 해석되었다.
--- p.316
지원설地圓說: 지구가 둥글다면 대척지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반박에 대해 지구는 무한한 공간에 떠 있기 때문에 상하, 사방의 방위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우주무한설).
에 지구의 모든 곳은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
--- p.325
대척지설을 반박하기 위한 또 다른 논거로 지구가 자전할 때 ‘기氣’가 지구의 표면 쪽으로 쏠려 인간과 사물이 지구의 중심으로 향한다고 주장함(지전설地轉說).
--- p.326
《의산문답》은 조선 최초의 전면적인 지구자연학 저술이다.
《의산문답》의 지구자연학이 《주자어류》와 《성리대전》을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두 텍스트의 존재가 《의산문답》의 자연학을 추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 p.331
담헌의 지전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조선 지식계에 큰 충격을 던진 것도 아니었다.
《의산문답》은 간행되지도 않았고 필사본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지전설만은 연암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 p.369
그 중국 문명의 보편성을 청이 구현한다면 청은 곧 중화가 되는 것이고, 조선이 구현한다면 곧 조선이 중화가 된다.
과거 조선의 ‘소중화’는 이런 논리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이 중화일 수 있다면 청 역시 중화일 수 있다.
조선과 청은 모두 원래 이적이기 때문이다.
담헌의 화이론 부정은 이런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 p.404
화이론을 부정하는 것은…중심과 주변이란 관계의 설정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지, 조선이란 중심을 다시 설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담헌의 발언은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민족의 주체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 p.405
그가 지방관으로서 여러 곳을 전전했으니, 토지제도의 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을 보일 만도 하지만 《담헌서》 어디에도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을 다룬 글은 보이지 않는다.
연암이 자신의 지방관 경험을 토대로 한전론限田論을 〈한민명전의〉에서 치밀하게 주장한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 p.410
담헌은 왕의 사유재산인 내수사 토지와 궁방전을 모두 혁파해서 호조 관할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또 양사가 탄핵권을 독점하는 것을 비판하여, 10여 명에 불과한 양사의 소수 관원이 정부 각 부처의 전문적 분야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음에도 탄핵권을 독점하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 p.414
담헌은 인간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적합한 직업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애인까지 모두 직업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유의유식하는 자는 국가가 처벌하고 향리에서 추방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에게 직업을 주는 건, 그들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유의유식하는 자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능과 능력에 따른 직업의 분배는…신분제 철폐로 종종 해석되었다.
--- p.417
담헌은 노비제에 대한 생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임하경륜〉은 물론이거니와 《담헌서》 전체에 걸쳐 조선의 노비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비제를 문제 삼은 적도 없다.
--- p.421
담헌이 구상한 이상사회의 백성은 원칙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부득이한 경우 거주의 이전이 허락되지만, 그 역시 철저한 관, 즉 국가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진다.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농민은 거주를 이전할 수 있고, 또 농토를 분배받을 수 있다.
임의로 거주를 이전하는 자는 당연히 처벌을 받고, 책임자 역시 처벌을 받는다.
--- p.432
《이재난고》는 담헌이 진휼곡 1천 석 중 500석은 원래 목적대로 진휼에 쓰고, 나머지 500석은 1천 석으로 쳐서 민간에 빌려주었다고 전한다.
1천 석 전부를 쓰지 않고 500석을 사적으로 착복한 뒤 그것에 100퍼센트 이자를 붙여 궁핍한 백성들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 p.442
담헌이 죽은 뒤 그가 연구했던 천문학과 수학은 금세 잊히고 농수각의 천문의기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윤석의 기록에 의하면, 홍대용의 조카 홍서는 홍대용이 소장했던 《율력연원》 2질과 《역상고성 후편》을 홍원이 1786년 봄·여름 사이에 50냥에 권세가에 팔아 버렸고, 집안의 책은 모두 서울의 적질嫡姪이 가져갔다고 이야기했다.
--- p.15
박종채는 연암의 학문적 지향이 이용후생과 경제명물 등의 실용학에 있었고, 담헌의 지론도 동일하였다고 말한다.
실용학에 대한 지향은 경화세족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이들은 사족 체제가 노정한 허다한 문제를 수정하려 했으니, 그 수정의 의지가 제도적 개혁 프로그램으로 나타났던 것이다.…정주학 역시 현실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이용후생과 경제명물의 학문’과 정주학은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윤리적 문제를 주 영역으로 삼는 것과는 별도로 ‘이용후생’과 ‘경제명물’의 영역에서 사족 체제가 노정한 문제를 수정하려 했을 뿐이다.
--- p.26
그의 천문학은 관측으로 얻은 수치와 수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천문학과 자연학, 수학을 주제로 다른 사람과 토론한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 p.27
담헌과 연암 그룹 사이에는 경제에 대한 견해가 거의 대척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연암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를 지어 호부가豪富家의 토지 겸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권력으로 토지 소유를 제한할 것을 역설했지만, 담헌은 토지제도의 개혁에 대해 정전제 실시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면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연구하기를 바랐다.
--- p.30
담헌은 그 비현실성을 누구보다 비판했던 사람이다.…일상의 생활 속에서 유가의 도덕이 실천된다면, 그것이 곧 성과 천도에 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 현실과 삶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성리학의 관념만을 논하는 것은 초학자에게 필요치 않고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은, 실천적 정주학을 지향하는 담헌의 단골 비판 소재였다.
--- p.110
담헌은 “진시황이 잡서를 태우지 않았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제자백가의 말들이 한갓 이목만 어지럽혔을 뿐이니, 태운들 무슨 해가 될 것이 있었겠습니까?”라 했다.
담헌의 직정적이고 근본주의적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 말은 뒤에 《의산문답》에서 반복된다.
또 훈고를 맹렬히 비판했던 담헌은 정주학적 진리 외의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p.122
이단의 부정적 속성에 대한 비판을 넘기 위해 담헌은 모든 사상은 다 말폐가 있다고 말한다.
이단에 말폐가 있듯, 성인의 대중지정한 사고에서 나온 행위도 말폐가 있다.
달리 말해 정학도 말폐가 있다는 것이다.
--- p.151
김종후에게서 확인한 실천 없는 강퍅한 정통 유가의 엄격함도 이단의 진실성을 깊이 사유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 다른 계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의산문답》에서 역설된 지구가 둥글다는 설은 상대주의를 낳게 했다.
또한 그가 접속한 연암은 공안파公安派의 문학이론에서 상대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담헌은 문학에 냉담했지만, 아마도 연암과의 대화는 그로 하여금 일종의 가치 상대주의를 인정하게 했을 것이다.
--- p.155
《의산문답》의 결론 부분에서 담헌은 화이론을 부정한다.
그의 북경행을 이끌었던 동기 중 하나였던 중화와 이적의 차등론을 스스로 부정했던 것이다.
《의산문답》의 화이론 부정은 한국 사상사에서 중국 중심주의 부정, 나아가 민족주의의 주체적 성립으로 평가받았다.
아울러 국가경영론 혹은 사회사상을 담은 〈임하경륜〉의 일부 주장은 신분제를 부정한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지전설과 화이론의 부정, 신분 제의 철폐로 요약되는 담헌의 사상을 평가하는 대주제는 명료하게 하나로 수렴된다.
그것은 ‘자생적 근대’다.
담헌의 삶과 사상에서 20세기 사람들은 스스로 근대를 향해 진보했던 한국사의 발전 동태를 읽어냈다.
하지만 이 독해가 담헌의 삶과 그가 남긴 텍스트를 엄밀하게 읽은 결과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 p.229
“홍군은 서실 천장에 성도星圖를 붙여 연구하는 마음이 가장 정밀하다.” 곧 담헌은 자신의 서재 천장에 별자리 그림을 붙여 놓고 천문학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 p.243
조선의 수학은 실용수학이었던 바, 사족 체제는 그것을 기술직 중인 중 계사計士 집단에 맡겼다.
담헌은 사족인 자신이 수학을 연구하는 것을 변명해야만 했다.
그는 공자가 ‘위리委吏’가 되었을 때 “회계는 마땅히 처리해야 한다”고 했던 말과 공자 문하에 육예 가운데 하나로 수학이 포함되어 있던 사실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다.
담헌은 그것을 “옛사람이 실용에 힘쓴” 증거로 삼았다.
--- p.249
《주해수용》은…담헌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의 실용적 목적에 봉사하기 위한 책이었다.
이런 이유로 《주해수용》은 무슨 새로운 수학사적 발견을 담은 대단한 수학책일 수는 없다.…《주해수용》의 수학은 대부분 중국의 전통 수학과 일부 한국 수학을 인용해 편집한 결과물일 뿐이다.
--- p.251
그가 만든 혼천의는 정확하게 천체를 관측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천체관이 확립되어있는 이상, 그것을 활용해 하늘을 본들 육안에 의한 관측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관찰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천체나 천문 현상은 없었던 것이 그 증거다…담헌의 천문학…가장 큰 의의는 담헌이 천체를 계산이 가능한 입체적·물리적·기하학적 공간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재래의 중국과 조선 천문학은 지구와 태양, 달, 그리고 행성과 여타의 천체를 측정 가능한 공간에 있는 물리적인 실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 p.312
《의산문답》은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 나아가 “중화도 없고 오랑캐도 없다”는 화이관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전근대적 우주관을 끝장낸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평가받는다.
또한 화이론의 부정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내재적 민족주의의 신호탄으로 읽혔다.
그런가 하면 〈임하경륜〉의 특정 부분은 전근대적 신분제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요컨대 담헌의 지전설, 우주 무한론, 화이관의 부정, 신분제에 대한 언급은 모두 조선의 사상사에서 ‘내재적 근대’를 알리는 중대한 징표로 해석되었다.
--- p.316
지원설地圓說: 지구가 둥글다면 대척지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반박에 대해 지구는 무한한 공간에 떠 있기 때문에 상하, 사방의 방위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우주무한설).
에 지구의 모든 곳은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함.
--- p.325
대척지설을 반박하기 위한 또 다른 논거로 지구가 자전할 때 ‘기氣’가 지구의 표면 쪽으로 쏠려 인간과 사물이 지구의 중심으로 향한다고 주장함(지전설地轉說).
--- p.326
《의산문답》은 조선 최초의 전면적인 지구자연학 저술이다.
《의산문답》의 지구자연학이 《주자어류》와 《성리대전》을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두 텍스트의 존재가 《의산문답》의 자연학을 추동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 p.331
담헌의 지전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조선 지식계에 큰 충격을 던진 것도 아니었다.
《의산문답》은 간행되지도 않았고 필사본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지전설만은 연암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 p.369
그 중국 문명의 보편성을 청이 구현한다면 청은 곧 중화가 되는 것이고, 조선이 구현한다면 곧 조선이 중화가 된다.
과거 조선의 ‘소중화’는 이런 논리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조선이 중화일 수 있다면 청 역시 중화일 수 있다.
조선과 청은 모두 원래 이적이기 때문이다.
담헌의 화이론 부정은 이런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 p.404
화이론을 부정하는 것은…중심과 주변이란 관계의 설정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지, 조선이란 중심을 다시 설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담헌의 발언은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으로부터 ‘민족의 주체성’을 끄집어내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
--- p.405
그가 지방관으로서 여러 곳을 전전했으니, 토지제도의 모순에 대한 심각한 인식을 보일 만도 하지만 《담헌서》 어디에도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을 다룬 글은 보이지 않는다.
연암이 자신의 지방관 경험을 토대로 한전론限田論을 〈한민명전의〉에서 치밀하게 주장한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 p.410
담헌은 왕의 사유재산인 내수사 토지와 궁방전을 모두 혁파해서 호조 관할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또 양사가 탄핵권을 독점하는 것을 비판하여, 10여 명에 불과한 양사의 소수 관원이 정부 각 부처의 전문적 분야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음에도 탄핵권을 독점하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 p.414
담헌은 인간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적합한 직업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애인까지 모두 직업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유의유식하는 자는 국가가 처벌하고 향리에서 추방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에게 직업을 주는 건, 그들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유의유식하는 자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능과 능력에 따른 직업의 분배는…신분제 철폐로 종종 해석되었다.
--- p.417
담헌은 노비제에 대한 생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임하경륜〉은 물론이거니와 《담헌서》 전체에 걸쳐 조선의 노비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비제를 문제 삼은 적도 없다.
--- p.421
담헌이 구상한 이상사회의 백성은 원칙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부득이한 경우 거주의 이전이 허락되지만, 그 역시 철저한 관, 즉 국가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진다.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농민은 거주를 이전할 수 있고, 또 농토를 분배받을 수 있다.
임의로 거주를 이전하는 자는 당연히 처벌을 받고, 책임자 역시 처벌을 받는다.
--- p.432
《이재난고》는 담헌이 진휼곡 1천 석 중 500석은 원래 목적대로 진휼에 쓰고, 나머지 500석은 1천 석으로 쳐서 민간에 빌려주었다고 전한다.
1천 석 전부를 쓰지 않고 500석을 사적으로 착복한 뒤 그것에 100퍼센트 이자를 붙여 궁핍한 백성들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 p.442
담헌이 죽은 뒤 그가 연구했던 천문학과 수학은 금세 잊히고 농수각의 천문의기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윤석의 기록에 의하면, 홍대용의 조카 홍서는 홍대용이 소장했던 《율력연원》 2질과 《역상고성 후편》을 홍원이 1786년 봄·여름 사이에 50냥에 권세가에 팔아 버렸고, 집안의 책은 모두 서울의 적질嫡姪이 가져갔다고 이야기했다.
--- p.445
출판사 리뷰
평전의 전범-종합적·입체적 인물상 복원
‘대작’인 것만이 이 책의 미덕이 아니다.
여태 경학經學, 역사비평, 천문학과 자연학, 수학, 음악학, 실학 등 분절적으로 이해됐던 홍대용의 성취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 그가 종래 알려졌던 ‘실학자’가 아니라, 진시황의 ‘분서’가 정당한 것이라 평했을 정도로 철저한 정주학자였음을 밝혀냈다.
여기 더해 그의 집안이 넉넉한 경화세족이었다든가, 십대 시절의 방황, 스승 김원행에 대한 비판적 의문 제기, 부친 홍역이 연루된 부패 사건, 북경행 전까지 홍대용의 수학 수준 등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 홍대용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
홍대용이 쓴 수학책 『주해수용』을 이해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수학책까지 들춰봤다니 더 말할 게 없다.
깊게 파고들고 넓게 살피는 지은이의 저술 방식에는 어지간한 동료 연구자들이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해서 홍대용이 정주학의 진리성을 부정한 적이 없고, 단지 실천을 도외시 하는 주자朱子 맹신을 비판한 ‘실천적 정주학자’였음을 논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계 뚜렷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흔히 홍대용은 전근대적 우주관을 무너뜨린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 평가된다.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제시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은이는 홍대용의 자연학은 관측과 수학에 의거한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의 기론氣論에 입각한 선언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계를 지적한다.
물류상감설과 같은 재래의 동기감응설을 끌어오는가 하면 도가의 수련을 통해 천체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태연히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담헌이 제작했던 혼천의가 관측기구가 아니라 천체 모형이었으며, 자신의 서재 천장에 별자리 그림을 붙여 놓고 천문학 연구에 열중했다든가 하는 사례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전설은 지구 자전만 이야기했지 공전에 대해서는 침묵했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구중심설을 깨뜨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궤를 달리한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홍대용의 지구 자전설이 담긴 『의산문답』이 인쇄되어 읽히지 않았기에 그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민과 동떨어진 신분제 해체론
지은이는 홍대용이 신분제 타파 등 평등을 강조한 사회사상가라는 주장 역시 ‘신화’라고 논증한다.
우선 그가 남긴 모든 글에서 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평가는, 그가 〈임하경륜〉에서 ‘놀고 먹는’ 유식遊食 사족을 비판한 대목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는 오독誤讀이라는 것이다.
담헌 자신이 노비를 거느린 지주였으며, 음직으로 벼슬을 살았다.
그러니 재능과 학문이 있는 농부나 장사꾼의 자식이 조정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 공경의 자제가 관청의 하인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진실성 혹은 실천성이 결여된 수사로 보았다.
민이 수탈당하는 사회 모순에 대해 말하기는커녕 영천 군수로 있을 때 진휼곡을 착복하고 그것을 군민에게 빌려주어 갑절로 받아내려 했다고 꼬집는다.
또한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농민은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농민은 거주를 이전할 수 있고, 농토를 분배받을 수 있는 통제사회였다.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과 달리 토지 소유제 등 〈임하경륜〉에 담긴 그의 ‘개혁책’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단편적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화이론 부정의 진짜 이유와 그 실체
조선에서의 ‘화이론’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에 대한 충절의식을 내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홍대용이 북경행 이후 평생 소중하게 여겼던 엄성·반정균 등 중국인 벗들은 이미 청 체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담헌이 귀국길에 만나 희원외도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간단한 논리로 복색을 들먹이며 화와 이를 구분하려는 담헌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니 담헌이 이후 저술한 『의산문답』에서 화·이의 구분은 그저 허구라고 역설한 데는 개인적 동기가 있었다고 지은이는 해석한다.
귀국 후 벌어진 논쟁에서 김종후가 엄성 등을 명에 대한 충절 의식도 없이 오랑캐 조정에 벼슬하고자 하는 비루한 자로 몰아붙이자 그들과의 사귐을 중히 여겼던 담헌이 이를 논파하기 위해 화·이의 구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는 설명이다.
이는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중국도 당연히 중심이 아니라는 지원설地圓說에 근거한 것이기도 해도 이를 그저 ‘민족의 주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지은이가 그려낸 홍대용은, 우리가 ‘교과서’로 익힌 홍대용상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홍대용의 성취와 의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20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있기를 바랐던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1,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담헌학’-만약 있다면-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책이다.
덧붙이자면 역사 바로 보기를 원한다면 무의미한 여정은 아닐 것이다.
‘대작’인 것만이 이 책의 미덕이 아니다.
여태 경학經學, 역사비평, 천문학과 자연학, 수학, 음악학, 실학 등 분절적으로 이해됐던 홍대용의 성취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 그가 종래 알려졌던 ‘실학자’가 아니라, 진시황의 ‘분서’가 정당한 것이라 평했을 정도로 철저한 정주학자였음을 밝혀냈다.
여기 더해 그의 집안이 넉넉한 경화세족이었다든가, 십대 시절의 방황, 스승 김원행에 대한 비판적 의문 제기, 부친 홍역이 연루된 부패 사건, 북경행 전까지 홍대용의 수학 수준 등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내 홍대용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
홍대용이 쓴 수학책 『주해수용』을 이해하기 위해 중고등학교 수학책까지 들춰봤다니 더 말할 게 없다.
깊게 파고들고 넓게 살피는 지은이의 저술 방식에는 어지간한 동료 연구자들이 토를 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해서 홍대용이 정주학의 진리성을 부정한 적이 없고, 단지 실천을 도외시 하는 주자朱子 맹신을 비판한 ‘실천적 정주학자’였음을 논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계 뚜렷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흔히 홍대용은 전근대적 우주관을 무너뜨린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 평가된다.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제시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지은이는 홍대용의 자연학은 관측과 수학에 의거한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의 기론氣論에 입각한 선언적 상상력으로 구성된 것이라 한계를 지적한다.
물류상감설과 같은 재래의 동기감응설을 끌어오는가 하면 도가의 수련을 통해 천체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황당한 말까지 태연히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담헌이 제작했던 혼천의가 관측기구가 아니라 천체 모형이었으며, 자신의 서재 천장에 별자리 그림을 붙여 놓고 천문학 연구에 열중했다든가 하는 사례도 마찬가지다.
또한 자전설은 지구 자전만 이야기했지 공전에 대해서는 침묵했기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구중심설을 깨뜨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궤를 달리한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홍대용의 지구 자전설이 담긴 『의산문답』이 인쇄되어 읽히지 않았기에 그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민과 동떨어진 신분제 해체론
지은이는 홍대용이 신분제 타파 등 평등을 강조한 사회사상가라는 주장 역시 ‘신화’라고 논증한다.
우선 그가 남긴 모든 글에서 민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든다.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평가는, 그가 〈임하경륜〉에서 ‘놀고 먹는’ 유식遊食 사족을 비판한 대목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는 오독誤讀이라는 것이다.
담헌 자신이 노비를 거느린 지주였으며, 음직으로 벼슬을 살았다.
그러니 재능과 학문이 있는 농부나 장사꾼의 자식이 조정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고 공경의 자제가 관청의 하인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말은 진실성 혹은 실천성이 결여된 수사로 보았다.
민이 수탈당하는 사회 모순에 대해 말하기는커녕 영천 군수로 있을 때 진휼곡을 착복하고 그것을 군민에게 빌려주어 갑절로 받아내려 했다고 꼬집는다.
또한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농민은 국가의 허락이 있어야 농민은 거주를 이전할 수 있고, 농토를 분배받을 수 있는 통제사회였다.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과 달리 토지 소유제 등 〈임하경륜〉에 담긴 그의 ‘개혁책’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단편적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화이론 부정의 진짜 이유와 그 실체
조선에서의 ‘화이론’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에 대한 충절의식을 내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홍대용이 북경행 이후 평생 소중하게 여겼던 엄성·반정균 등 중국인 벗들은 이미 청 체제를 인정하고 있었다.
담헌이 귀국길에 만나 희원외도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간단한 논리로 복색을 들먹이며 화와 이를 구분하려는 담헌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러니 담헌이 이후 저술한 『의산문답』에서 화·이의 구분은 그저 허구라고 역설한 데는 개인적 동기가 있었다고 지은이는 해석한다.
귀국 후 벌어진 논쟁에서 김종후가 엄성 등을 명에 대한 충절 의식도 없이 오랑캐 조정에 벼슬하고자 하는 비루한 자로 몰아붙이자 그들과의 사귐을 중히 여겼던 담헌이 이를 논파하기 위해 화·이의 구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는 설명이다.
이는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중국도 당연히 중심이 아니라는 지원설地圓說에 근거한 것이기도 해도 이를 그저 ‘민족의 주체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지은이가 그려낸 홍대용은, 우리가 ‘교과서’로 익힌 홍대용상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홍대용의 성취와 의미에 대한 주류의 해석은, 20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있기를 바랐던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1,4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지만 ‘담헌학’-만약 있다면-의 시작이자 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은 책이다.
덧붙이자면 역사 바로 보기를 원한다면 무의미한 여정은 아닐 것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0월 29일
- 쪽수, 무게, 크기 : 584쪽 | 152*224*35mm
- ISBN13 : 9791156123071
- ISBN10 : 1156123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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