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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제국의 탄생
독일제국의 탄생
Description
책소개
비스마르크의 리더십과 프로이센의 독일 제국 선포

김장수 교수(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독일제국의 탄생』이 푸른사상사 「서양근대사 총서 10」으로 출간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이 무너진 뒤 독일권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통일에 대한 열망과 유럽 전체를 휩쓴 혁명의 돌풍 속에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선포하기까지의 과정을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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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ㆍ 책머리에

제1장 독일권 통일을 둘러싼 갈등
1.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2.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3.
에르푸르트 연합의회
4.
슈바르첸베르크의 반격
5.
올뮈츠 굴욕

제2장 비스마르크의 등판과 덴마크 전쟁
1.
비스마르크의 등판
2.
덴마크 전쟁
3.
프로이센의 야심

제3장 형제전쟁
1.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대립
2.
바트 가슈타인 협정
3.
프로이센-이탈리아 비밀 군사동맹
4.
형제전쟁
5.
북독일연방의 탄생
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출범

제4장 프랑스와의 전쟁
1.
룩셈부르크 대공국 문제
2.
프랑스의 대응
3.
에스파냐 왕위 계승
4.
엠스로부터의 전보
5.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5장 독일제국의 탄생
1.
독일제국의 준비 과정
2.
독일제국의 탄생

ㆍ 마무리하면서
ㆍ 참고문헌
ㆍ 찾아보기

상세 이미지
상세 이미지 1

책 속으로
1848년 10월 26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소독일주의 원칙에 따른 독일 통일안이 공식적으로 제시되었다.
즉 오스트리아가 기존의 영토를 견지하는 대신 통일국가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소독일주의를 지향하는 세력은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을 통일해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했다.
나아가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독일권에서 축출하려고 했다.

--- p.22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비스마르크의 의도에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었다.
1870년 초까지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에 필요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1869년 11월 바이에른에서 치른 지방선거에서 분리주의 세력이 강세를 보였고 친프로이센 내각 역시 크게 약화했다.
게다가 1870년 2월에는 비스마르크가 바덴과의 즉각적 통합을 요구하는 제국의회의 제안을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는데, 이에 대해 국민자유당은 그가 민족적 대의에 무관심하다는 비난을 가했다.
또한 1870년에는 제국의회 선거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새로 출범하는 제국의회는 강제 예산을 재검토할 권한도 가지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통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도 부여받았다.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위신을 드높일 수 있는 승리가 자유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자신에 대한 신뢰 역시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빌헬름 1세를 연방 황제, 혹은 아마도 독일제국 황제로 추대하기 위한 계획도 추진하고 있었다.

--- pp.170-171

비스마르크는 정치 운영이나 예식에서 어떤 것도 우연에 내맡기지 않았다.
그런 만큼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의례를 갖춰 독일 황제로 즉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왕의 머리에 황제관을 씌울 수 있거나 씌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주교는 어떠할까? 국왕 자신이 전 영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주교였다.
빌헬름 1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04년에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황제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을 인지한 비스마르크는 사전 계획을 세웠다.
그것에 따라‘ 거울의 홀’에서는 짧은 예배가 치러졌고, 빌헬름 1세 일행은 홀 끝에 설치된 단상으로 걸어갔다.
빌헬름 1세가 중앙에 자리 잡고 다른 제후들이 양옆에 도열했다.
비스마르크는 차분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독일제국 선포문을 낭독했다.
비스마르크의 계획대로 최고 연장자인 바덴 대공국의 프리드리히 대공이 앞으로 걸어나가 빌헬름 1세가 그동안 듣기 원했던‘ 독일 황제’ 대신“ 빌헬름 황제 만세”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은 칼을 뽑았고 황제는 즉위했다.
--- pp.215-217

출판사 리뷰
독일은 1871년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국을 선포하기까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국가와 도시로 이루어진 느슨한 집합체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나폴레옹의 침공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독일권에서는 통일에 대한 열망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그러한 민족적 과제를 실천해야 하는 국가로 부상했다.
오스트리아는 연방제 형식의 대독일주의를,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나머지 국가들의 통합을 통한 소독일주의를 주장했으므로, 독일 통합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군사 강국 프로이센의 실세로 등장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평화적 방법으로의 통합을 단념하고 전쟁을 통한 독일 통일의 비전을 그린다.
김장수 교수(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의 『독일제국의 탄생』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등 외부 세력의 간섭을 물리치고 독일을 통일하여 제국을 선포하기까지의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책머리에 중에서

오토 대제 이후 약 천 년 동안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에 격파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나폴레옹의 보호국이 된 라인연방, 호엔촐레른의 프로이센,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등장한 독일연방은 독일 민족의 기대와 달리 35개의 대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Freistadt)로 구성된 엉성한 정치 체제여서 독일의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의 불만을 샀다.

1830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7월혁명의 영향으로 통일의 필요성은 독일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고, 1848년 3월 혁명 이후에는 독일 전역에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시위까지 일어났다.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국민의회의 주된 과제는 독일연방을 하나의 통일국가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별 연방 국가를 그대로 둔 채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통일 방안에 대한 의원들의 의견 역시 일치되지 않았다.
당시 국민의회에서 제시된 독일 통일 방안은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였다.

대독일주의는 독일연방에 가입한 국가들을 통일 독일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고,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 통일을 구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먼저 제시된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가 반대함에 따라 채택되지 못했고, 소독일주의 역시 오스트리아의 반대와 프로이센의 소극적인 자세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자국 영역 모두가 통일독일에 포함되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통일보다는 연방 체제를 선호했다.
결국 3월혁명 기간 중 제시된 독일 통합안은 이해 당사국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것을 통해 독일 통일을 평화적 방법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 매우 어렵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그러다가 1850년대부터 일부 정치가들, 특히 보수주의 성향의 정치가들이 독일 통일을 다시 거론했는데, 거기서는 평화적 방법보다 무력을 통해 통일을 구현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프로이센의 정치가들로부터 제시되었다.

1861년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군비 증강 문제로 의회와 대립하면서 실세로 등장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실현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는 통일 쟁의 시발점이 된 덴마크 전쟁의 진행 과정과 결과 및 후유증, 그리고 이후 독일 통일의 걸림돌로 등장한 외부 세력, 특히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전쟁도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한다.
아울러 통일전쟁 이후 등장한 독일제국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0월 20일
- 쪽수, 무게, 크기 : 240쪽 | 148*218*20mm
- ISBN13 : 9791130823317
- ISBN10 : 113082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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