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녹색혁명
Description
책소개
녹색혁명과 적색혁명의 치열한 만남
‘군중과학’, 중국 ‘굴기?起’의 바탕이 되다
역사서를 뛰어넘는 중국 다시 보기
중국 근현대사와 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지은이가 쓴 이 책은 마오쩌둥 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중국 농업과학사를 다룬 책이다.
아마도 읽기도 전에 “애걔” 하는 이가 대부분일 터다.
특히 1960년 전후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선입견을 산산이 깨뜨린다.
공식 문건, 전기(傳記), 언론 보도는 물론 현지 인터뷰, 포스터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마오 시대가 반과학적 시기가 아니라 인민이 직접 참여하고 생산하고 활용하는 ‘군중과학’을 통해 지속 가능한 농업 모델의 토대를 마련했던 시기였음을 흥미로우면서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와 함께 “어떤 방식의 발전이 지속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농업 과학에 대한 논의가 생산성 향상만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에, 지속 가능한 농업 정책을 고민하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군중과학’, 중국 ‘굴기?起’의 바탕이 되다
역사서를 뛰어넘는 중국 다시 보기
중국 근현대사와 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지은이가 쓴 이 책은 마오쩌둥 통치 시기를 중심으로 중국 농업과학사를 다룬 책이다.
아마도 읽기도 전에 “애걔” 하는 이가 대부분일 터다.
특히 1960년 전후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러한 선입견을 산산이 깨뜨린다.
공식 문건, 전기(傳記), 언론 보도는 물론 현지 인터뷰, 포스터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마오 시대가 반과학적 시기가 아니라 인민이 직접 참여하고 생산하고 활용하는 ‘군중과학’을 통해 지속 가능한 농업 모델의 토대를 마련했던 시기였음을 흥미로우면서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와 함께 “어떤 방식의 발전이 지속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농업 과학에 대한 논의가 생산성 향상만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 문제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에, 지속 가능한 농업 정책을 고민하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ㆍ한국 독자들에게
ㆍ서론
제1장 농업 과학과 사회주의 국가
서론
농업지식과 국가
토와 양
삼결합과 과학 실험 운동의 대두
모범, 네트워크, 그리고 지식
뿌리 뽑힌 토 과학
제2장 푸저룽: 사회주의 과학의 탄생
근현대 중국인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야기: 하나의 비틀림과 더불어
사회주의 중국 해충방제학의 초국가적인 세계
토 과학자 만들기
초국가적 세계 속 토의 의미
포스트마오 시기 양과 토의 운명
제3장 위안룽핑: 농민 지식인
마오 시대 사료 속의 위안룽핑
화궈펑 주석과 위안룽핑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다시 쓰인 교잡벼의 역사
유전학자들과 리센코주의자들 사이에서
“농민 지식인”
토 과학과 미국 전자기타의 만남
결론
제4장 중국 농민: ‘경험’과 ‘후진성’
‘노농’의 구성, 노농 지식의 구성
“농업 과학을 장악한 농민들”
기술 변혁의 모호함: 오래된 기술인가, 새로운 기술인가
농촌 공동체의 변혁
결론
제5장 지방 간부처럼 보기
다샤공사: 기층의 관점
하향식과 상향식 사이에서
“인재를 키우다”
자력갱생과 현장의 책임
저항의 수단으로서 자력갱생
농민의 저항에 대처하기
저항과 과학 실험의 의의
제6장 레이펑의 역설
책을 통한 학습을 둘러싼 정치
“내게는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혁명 과학 대 부르주아 과학: 프로파간다의 관점
혁명 과학과 부르주아 과학: 청년들의 관점
부르주아 과학이란 무엇인가: 1978년 이후 청년과 과학의 변화
제7장 기회와 실패
“훌륭한 기회”
기회의 범위와 한계
솔선수범과 인맥 동원
실패
‘실패의 서사’ 재검토하기
에필로그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적색혁명과 녹색혁명
오늘날의 모범촌락
농민들과 새로운 언어의 정치
중국에서의 식량주권 운동
중국, 전 지구적 식량 운동, 그리고 마오 시대 과학적 영농의 유산
ㆍ감사의 말
ㆍ옮긴이의 말
ㆍ주
ㆍ참고문헌
ㆍ찾아보기
ㆍ서론
제1장 농업 과학과 사회주의 국가
서론
농업지식과 국가
토와 양
삼결합과 과학 실험 운동의 대두
모범, 네트워크, 그리고 지식
뿌리 뽑힌 토 과학
제2장 푸저룽: 사회주의 과학의 탄생
근현대 중국인 과학자의 전형적인 이야기: 하나의 비틀림과 더불어
사회주의 중국 해충방제학의 초국가적인 세계
토 과학자 만들기
초국가적 세계 속 토의 의미
포스트마오 시기 양과 토의 운명
제3장 위안룽핑: 농민 지식인
마오 시대 사료 속의 위안룽핑
화궈펑 주석과 위안룽핑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다시 쓰인 교잡벼의 역사
유전학자들과 리센코주의자들 사이에서
“농민 지식인”
토 과학과 미국 전자기타의 만남
결론
제4장 중국 농민: ‘경험’과 ‘후진성’
‘노농’의 구성, 노농 지식의 구성
“농업 과학을 장악한 농민들”
기술 변혁의 모호함: 오래된 기술인가, 새로운 기술인가
농촌 공동체의 변혁
결론
제5장 지방 간부처럼 보기
다샤공사: 기층의 관점
하향식과 상향식 사이에서
“인재를 키우다”
자력갱생과 현장의 책임
저항의 수단으로서 자력갱생
농민의 저항에 대처하기
저항과 과학 실험의 의의
제6장 레이펑의 역설
책을 통한 학습을 둘러싼 정치
“내게는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혁명 과학 대 부르주아 과학: 프로파간다의 관점
혁명 과학과 부르주아 과학: 청년들의 관점
부르주아 과학이란 무엇인가: 1978년 이후 청년과 과학의 변화
제7장 기회와 실패
“훌륭한 기회”
기회의 범위와 한계
솔선수범과 인맥 동원
실패
‘실패의 서사’ 재검토하기
에필로그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에서의 적색혁명과 녹색혁명
오늘날의 모범촌락
농민들과 새로운 언어의 정치
중국에서의 식량주권 운동
중국, 전 지구적 식량 운동, 그리고 마오 시대 과학적 영농의 유산
ㆍ감사의 말
ㆍ옮긴이의 말
ㆍ주
ㆍ참고문헌
ㆍ찾아보기
책 속으로
중국의 입장에서 더욱 문제적인 측면은 녹색 혁명론자들이 과학과 기술의 힘을 사회적·정치적 혁명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사회주의 중국은 ‘녹색혁명’이라는 용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와 동일한 종류의 농업기술들을 ‘과학적 영농’이라고 지칭했다.
--- p.18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농촌 과학 실험 운동’은 실천적 경험이 풍부한 ‘노농老農’, 혁명적 열의를 가진 ‘지식청년’, 그리고 올바른 정치적 견해를 견지한 현장 간부가 협력하는 이른바 ‘삼결합’의 원리에 입각하여 중국 농촌 전역에서 조직된 기층 ‘과학 실험 소조小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그들은 과학 기술 영역에서도 ‘정치 우선주의’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 p.19
군중과학을 우선시하는 급진적 주장과 엘리트적이고 전문적인 과학을 특권화하는 기술관료주의적 입장이 이른바 토土와 양洋이라는 이분법의 양극에 대응하고 있었다.
비록 국가가 “토양병거土洋竝擧” 같은 슬로건이나 간부, 기술원, 농민을 하나의 과학 실험 소조로 묶는 “삼결합” 조직법 등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으나,
--- p.50
토土란 다수의 군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해 낸 과학이라는, 마오 시대의 급진적인 과학 비전을 구성하는 일련의 의미들―토착적, 중국적, 지역적, 소박한, 군중의, 투박한―을 가리킨다.
이는 양洋―외국적, 서양적, 엘리트적, 전문적, 상아탑의―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 p.75
‘4대 현대화’로 대표되는 덩샤오핑의 기술관료주의 노선하에서 막대한 투자를 받게 된 전문 (양) 과학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중국 전역의 기층 과학 실험 소조들과 그것들이 대표했던 삼결합 인식론 또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 시점 이후로 과학적 영농은 점점 더 “녹색혁명적”으로 변해 갔고 점점 더 “적색혁명적” 색채를 잃어 갔다.
--- p.96
1953년부터 푸저룽은 사탕수수 천공벌레를 방제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생물학적 방제체인 트리코그람마 기생말벌을 배양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 p.114
1975년 봄 농림부는 전국 식물 보호 회의를 소집하여 향후 “예방을 최우선으로 하는 통합방제”를 국책으로 삼겠다고 결정했다.…‘통합방제’란 주로 값비싼 화학 살충제의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농적·수작업 방법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 p.116
1972년 가을 푸저룽은 다샤공사를 방문하여 농민들과 간부들에게 해충방제에 대해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 했다.
그는 특히 ‘곤충을 이용한 곤충 방제[以蟲治蟲]’ 방법의 활용과 미생물 중심의 접근법에 초점을 맞췄다.
곧이어 현지 간부 마이바오샹麥寶祥의 열정적인 지원하에 푸저룽은 시범 사업에 착수했다.
--- p.117
인민공사 사원社員들은 기꺼이 해충을 잡는 데 유익한 개구리 포획을 금지하고, 미생물 방제시설 및 말벌 사육장을 건설하려 했다.
또한 농민들을 교육하고, 기술팀을 설치·양성하며, 논해충을 방제하기 위해 오리 사육을 체계화하기로 결정했다.
--- p.118
리스메이는…중국의 발전을 위해 ‘토종 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당시의 급진적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체현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푸저룽에게 리스메이를 후원하는 일은 ‘유학파 전문가’라는 양의 정체성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군중과학이라는 토의 의제를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 p.124
푸저 룽은…자신의 연구를 농촌으로 가져가“ 누추한 오두막”을 그럴 듯한 말벌 배양장으로 개조하여 그곳에서 아나스타투스 말벌을 키우는 실험을 진행했다.
동시에 그는 해충방제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기술 인력을 30명 이상 양성했다.
기사는 푸저룽이 농촌에서 반년 동안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고 노동하며 많은 것들을 배움으로써 마치 용광로에서 강철이 다듬어지듯 점점 ‘단련’되어 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 p.125
현장에 도착하면 푸저룽과 그의 동료들은 인민공사에서의 생활에 몰두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는 토의 비전에 부합하게끔 과학자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했고, 농업 생산에 관한 회의에 참석했으며,…현지 인민공사에서 몇 안 되는 가용 자원을 활용해 연구에 필요한 설비들을 만들었으며, 미생물 방제체를 배양하기 위해 신설한 공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잠을 청했다.
--- p.128
중국은 양 과학 분야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배울 수 있는 사회주의 중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과학으로서 토라는 토대를 제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는 세계를 향해―제3세계뿐만 아니라 스웨덴 같은 유럽의 우호적인 국가들을 향해서도―미 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제공하는 선택지 외에 ‘제3의 길’을 제시하려 했던 데탕트 시대 중국의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 p.136
위안룽핑에 대한 책을 세 권이나 쓴 한 전기 작가는 매 작품마다 “당 사상의 연구 촉진 효과”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장을 반드시 포함시켰다.
그는 위안룽핑을 “한 명의 저명한 육종 전문가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교잡벼 연구와 긴밀하게 결합시킨 자연철학자”로 묘사했다.
--- p.170
한 전기는 위안룽핑이 안장농학교에서 연구하던 초창기에 모판을 기르기 위해 가마 공장에서 버려진 토기 항아리를 주워 와 사용 했다고 전한다.
이는 당시 선전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력갱생’과 ‘근검절약’의 구체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 p.184
농민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지식을 갖추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은 교육, 신기술 추광, 과학 실험 소조 참여, 그리고 드문 경우이지만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 p.218
1965년에 이르러 노농들은 기술 간부들과 함께 새로운 농업 연구 소조에 가입했다.
“과거에 노농들은 오직 오랜 옛 경험만을 논의했지만, 현재……그들은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로써 과연 농민도 과학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명확해졌다.”
--- p.220
많은 좌파 관찰자들은 1970년대 중국에서 과학의 재구축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누군가 마오주의 과학이 자연 혹은 동료 인간에 대한 “지배라는 요소를 최소화했다”고 말한다면, 마오 시대의 이상에 대해 가장 공감하는 사람들조차 필시 이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투쟁의 문제’였다.
그러나 결코 비폭력적이지는 않았다.
--- p.249
산시성 신현에서 작성된 1971년도 한 문건에 의하면, “대다수의 빈하중농 군중”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을 키워야 하고,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혁명 지도자들은 농민과 지식청년 중에서 ‘싹’을 선발하고 그들이 3대 혁명 운동에 참여하도록 북돋아 과학 실험 소조를 구성케 해야 했다.
--- p.270
중국의 기층 공동체들 또한 공동체 차원의 경제 발전을 위한 원칙으로서 자력갱생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았다.
널리 수용된 자력갱생의 표준 목표는 현지 공동체들이 더이상 곡물을 수입하지 않고 자급자족하거나 심지어 수출하는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276
국가는 현지 공동체가 도움을 받기 위해 “상부에 연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기층에서 종자, 비료, 살충제를 생산할 것을 더욱 장려했다.
종자 생산을 두고 “사자일보四自一輔”라는 접근법이 취해졌다.
즉 현지에서 스스로 종자 선정, 보급, 보관, 사용을 책임지고, 그 보유 물량을 다른 이웃 지역과의 적절한 교환을 통해 보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은 1958년 전국 종자 업무 회의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 p.279
“…나는 해충이 있건 없건 사방에 살충제를 쓸데없이 뿌려댄 생산대 농민들과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농민들은 ‘농사를 수십 년 지었지만 이제 막 3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자네가 나보다 낫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고요.
농민들이 한 말입니다.”
--- p.317
1974년에 출판된 한 문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집체의 생산 임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패는 손실이었다.
그러나 과학 소조,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 실패는 훌륭한 교육이었다.
실패로 인해 우리는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과정, 농민들로부터 재교육을 받아 자신의 세계관을 개조하는 과정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 p.381
마오가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이듬해에 새로운 지도부는 과학, 청년, 경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항에 대해 추진된 급진적인 정책을 “거대한 실패”로 규정했다.…지식청년과 공청단에 관한 최근의 한 역사 연구는 문화대혁명 이전 청년들이 주도한 과학 실험 소조가 겨우 20~30퍼센트의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 p.386
실패 서사가 이미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마오주의적 특색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후적으로 더 큰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특히…유독 중국과 사회주의 세계에 대해서만 그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비난한다.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만약 미국의 경제·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가 들어섰다고 가정해 보자.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미 농무부의 청년 프로그램 ‘4-H’를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 p.388
농민들에게 신기술의 가치를 납득시키고 이를 채택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교육시키는 데 농업 추광과 과학 실험 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채택된 신기술들은 대대적인 식량 증산을 가능케 했고, 결과적으로 먹거리를 싼값으로 널리 공급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포스트마오 시기 경제 성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p.396
신향촌 건설 운동은 대안적인 경로를 추구하면서 중국 농촌에 자본주의적 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려 한다.
반면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계획은 주로 촌락과 전 지구적 시장 사이의 연결성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려 한다.
--- p.405
리창핑이 ‘농민 종자 주권’을 외친 것은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이 전 지구적 식량주권 운동(중국어로 식물주권食物主權 또는 양식주권粮食主權) 에 참여하고 있는 최근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 p.424
토 과학에 대한 마오 시대의 긍정이라도 없었다면, 아마도 오랜 세월 농촌을 지켜 온 다양한 형태의 지식들이 통째로 부정당했을 공산이 크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에서 농민의 지식을 긍정하는 논조를 찾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바로 이 공백을 참여형 식물 육종 프로젝트와 인민 식량주권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비판적인 사회과학자들이 채워 가고 있는 것이다.
--- p.428
중국의 경험은 결코 녹색혁명 이데올로기의 결함들이 적색혁명에 의해 기적처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지 않는다.
화학물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농업이 불러일으킨 환경적인 악영향은, 그리고 식량과 노동의 공평한 분배보다 오직 생산의 증가만을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된 인적 비용은, 지구의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야기했다.
이런 이유로 사회주의 중국은 ‘녹색혁명’이라는 용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와 동일한 종류의 농업기술들을 ‘과학적 영농’이라고 지칭했다.
--- p.18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농촌 과학 실험 운동’은 실천적 경험이 풍부한 ‘노농老農’, 혁명적 열의를 가진 ‘지식청년’, 그리고 올바른 정치적 견해를 견지한 현장 간부가 협력하는 이른바 ‘삼결합’의 원리에 입각하여 중국 농촌 전역에서 조직된 기층 ‘과학 실험 소조小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그들은 과학 기술 영역에서도 ‘정치 우선주의’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 p.19
군중과학을 우선시하는 급진적 주장과 엘리트적이고 전문적인 과학을 특권화하는 기술관료주의적 입장이 이른바 토土와 양洋이라는 이분법의 양극에 대응하고 있었다.
비록 국가가 “토양병거土洋竝擧” 같은 슬로건이나 간부, 기술원, 농민을 하나의 과학 실험 소조로 묶는 “삼결합” 조직법 등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으나,
--- p.50
토土란 다수의 군중이 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생산해 낸 과학이라는, 마오 시대의 급진적인 과학 비전을 구성하는 일련의 의미들―토착적, 중국적, 지역적, 소박한, 군중의, 투박한―을 가리킨다.
이는 양洋―외국적, 서양적, 엘리트적, 전문적, 상아탑의―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 p.75
‘4대 현대화’로 대표되는 덩샤오핑의 기술관료주의 노선하에서 막대한 투자를 받게 된 전문 (양) 과학과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중국 전역의 기층 과학 실험 소조들과 그것들이 대표했던 삼결합 인식론 또한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 시점 이후로 과학적 영농은 점점 더 “녹색혁명적”으로 변해 갔고 점점 더 “적색혁명적” 색채를 잃어 갔다.
--- p.96
1953년부터 푸저룽은 사탕수수 천공벌레를 방제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생물학적 방제체인 트리코그람마 기생말벌을 배양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 p.114
1975년 봄 농림부는 전국 식물 보호 회의를 소집하여 향후 “예방을 최우선으로 하는 통합방제”를 국책으로 삼겠다고 결정했다.…‘통합방제’란 주로 값비싼 화학 살충제의 사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농적·수작업 방법들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 p.116
1972년 가을 푸저룽은 다샤공사를 방문하여 농민들과 간부들에게 해충방제에 대해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수락 했다.
그는 특히 ‘곤충을 이용한 곤충 방제[以蟲治蟲]’ 방법의 활용과 미생물 중심의 접근법에 초점을 맞췄다.
곧이어 현지 간부 마이바오샹麥寶祥의 열정적인 지원하에 푸저룽은 시범 사업에 착수했다.
--- p.117
인민공사 사원社員들은 기꺼이 해충을 잡는 데 유익한 개구리 포획을 금지하고, 미생물 방제시설 및 말벌 사육장을 건설하려 했다.
또한 농민들을 교육하고, 기술팀을 설치·양성하며, 논해충을 방제하기 위해 오리 사육을 체계화하기로 결정했다.
--- p.118
리스메이는…중국의 발전을 위해 ‘토종 전문가’를 배출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당시의 급진적인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체현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푸저룽에게 리스메이를 후원하는 일은 ‘유학파 전문가’라는 양의 정체성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군중과학이라는 토의 의제를 지지한다는 점을 보여 줄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 p.124
푸저 룽은…자신의 연구를 농촌으로 가져가“ 누추한 오두막”을 그럴 듯한 말벌 배양장으로 개조하여 그곳에서 아나스타투스 말벌을 키우는 실험을 진행했다.
동시에 그는 해충방제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기술 인력을 30명 이상 양성했다.
기사는 푸저룽이 농촌에서 반년 동안 농민과 더불어 생활하고 노동하며 많은 것들을 배움으로써 마치 용광로에서 강철이 다듬어지듯 점점 ‘단련’되어 갔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 p.125
현장에 도착하면 푸저룽과 그의 동료들은 인민공사에서의 생활에 몰두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장벽을 허문다는 토의 비전에 부합하게끔 과학자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했고, 농업 생산에 관한 회의에 참석했으며,…현지 인민공사에서 몇 안 되는 가용 자원을 활용해 연구에 필요한 설비들을 만들었으며, 미생물 방제체를 배양하기 위해 신설한 공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잠을 청했다.
--- p.128
중국은 양 과학 분야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배울 수 있는 사회주의 중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과학으로서 토라는 토대를 제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는 세계를 향해―제3세계뿐만 아니라 스웨덴 같은 유럽의 우호적인 국가들을 향해서도―미 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제공하는 선택지 외에 ‘제3의 길’을 제시하려 했던 데탕트 시대 중국의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 p.136
위안룽핑에 대한 책을 세 권이나 쓴 한 전기 작가는 매 작품마다 “당 사상의 연구 촉진 효과” 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장을 반드시 포함시켰다.
그는 위안룽핑을 “한 명의 저명한 육종 전문가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교잡벼 연구와 긴밀하게 결합시킨 자연철학자”로 묘사했다.
--- p.170
한 전기는 위안룽핑이 안장농학교에서 연구하던 초창기에 모판을 기르기 위해 가마 공장에서 버려진 토기 항아리를 주워 와 사용 했다고 전한다.
이는 당시 선전 문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력갱생’과 ‘근검절약’의 구체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 p.184
농민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지식을 갖추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정은 교육, 신기술 추광, 과학 실험 소조 참여, 그리고 드문 경우이지만 과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다.
--- p.218
1965년에 이르러 노농들은 기술 간부들과 함께 새로운 농업 연구 소조에 가입했다.
“과거에 노농들은 오직 오랜 옛 경험만을 논의했지만, 현재……그들은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로써 과연 농민도 과학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명확해졌다.”
--- p.220
많은 좌파 관찰자들은 1970년대 중국에서 과학의 재구축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러나 누군가 마오주의 과학이 자연 혹은 동료 인간에 대한 “지배라는 요소를 최소화했다”고 말한다면, 마오 시대의 이상에 대해 가장 공감하는 사람들조차 필시 이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투쟁의 문제’였다.
그러나 결코 비폭력적이지는 않았다.
--- p.249
산시성 신현에서 작성된 1971년도 한 문건에 의하면, “대다수의 빈하중농 군중”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먼저 씨앗을 키워야 하고,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혁명 지도자들은 농민과 지식청년 중에서 ‘싹’을 선발하고 그들이 3대 혁명 운동에 참여하도록 북돋아 과학 실험 소조를 구성케 해야 했다.
--- p.270
중국의 기층 공동체들 또한 공동체 차원의 경제 발전을 위한 원칙으로서 자력갱생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았다.
널리 수용된 자력갱생의 표준 목표는 현지 공동체들이 더이상 곡물을 수입하지 않고 자급자족하거나 심지어 수출하는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p.276
국가는 현지 공동체가 도움을 받기 위해 “상부에 연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기층에서 종자, 비료, 살충제를 생산할 것을 더욱 장려했다.
종자 생산을 두고 “사자일보四自一輔”라는 접근법이 취해졌다.
즉 현지에서 스스로 종자 선정, 보급, 보관, 사용을 책임지고, 그 보유 물량을 다른 이웃 지역과의 적절한 교환을 통해 보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은 1958년 전국 종자 업무 회의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 p.279
“…나는 해충이 있건 없건 사방에 살충제를 쓸데없이 뿌려댄 생산대 농민들과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지식이 있었으니까요.
농민들은 ‘농사를 수십 년 지었지만 이제 막 3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자네가 나보다 낫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아니고요.
농민들이 한 말입니다.”
--- p.317
1974년에 출판된 한 문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집체의 생산 임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패는 손실이었다.
그러나 과학 소조, 특히 우리 청년들에게 실패는 훌륭한 교육이었다.
실패로 인해 우리는 이론과 실천을 통합하는 과정, 농민들로부터 재교육을 받아 자신의 세계관을 개조하는 과정을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었다.”
--- p.381
마오가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이듬해에 새로운 지도부는 과학, 청년, 경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항에 대해 추진된 급진적인 정책을 “거대한 실패”로 규정했다.…지식청년과 공청단에 관한 최근의 한 역사 연구는 문화대혁명 이전 청년들이 주도한 과학 실험 소조가 겨우 20~30퍼센트의 성공만을 거두었을 뿐이라고 추정한다.
--- p.386
실패 서사가 이미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마오주의적 특색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후적으로 더 큰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특히…유독 중국과 사회주의 세계에 대해서만 그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비난한다.
정치와 이데올로기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만약 미국의 경제·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가 들어섰다고 가정해 보자.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미 농무부의 청년 프로그램 ‘4-H’를 과연 어떻게 평가할까?
--- p.388
농민들에게 신기술의 가치를 납득시키고 이를 채택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교육시키는 데 농업 추광과 과학 실험 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채택된 신기술들은 대대적인 식량 증산을 가능케 했고, 결과적으로 먹거리를 싼값으로 널리 공급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포스트마오 시기 경제 성장에서 대단히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p.396
신향촌 건설 운동은 대안적인 경로를 추구하면서 중국 농촌에 자본주의적 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려 한다.
반면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계획은 주로 촌락과 전 지구적 시장 사이의 연결성을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려 한다.
--- p.405
리창핑이 ‘농민 종자 주권’을 외친 것은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이 전 지구적 식량주권 운동(중국어로 식물주권食物主權 또는 양식주권粮食主權) 에 참여하고 있는 최근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 p.424
토 과학에 대한 마오 시대의 긍정이라도 없었다면, 아마도 오랜 세월 농촌을 지켜 온 다양한 형태의 지식들이 통째로 부정당했을 공산이 크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국가의 공식적인 정책에서 농민의 지식을 긍정하는 논조를 찾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리고 바로 이 공백을 참여형 식물 육종 프로젝트와 인민 식량주권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비판적인 사회과학자들이 채워 가고 있는 것이다.
--- p.428
중국의 경험은 결코 녹색혁명 이데올로기의 결함들이 적색혁명에 의해 기적처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지 않는다.
화학물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농업이 불러일으킨 환경적인 악영향은, 그리고 식량과 노동의 공평한 분배보다 오직 생산의 증가만을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된 인적 비용은, 지구의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야기했다.
--- p.431
출판사 리뷰
마오쩌둥이 꿈꾼 ‘다른 과학’
이 책을 읽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마오쩌둥이 꿈꾼 ‘다른 과학’이, 냉전 시기에 미국 주도로 탄생한 ‘녹색혁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 사회주의 혁명에 접목해간 과정에 주목하는 독법이다.
지은이가 엘리트 과학기술인 중심의 하향식(양洋)이 아니라 농민 군중 중심의 상향식(토土)으로 생산현장에서 이뤄지는 농업 수확량 증대가 이뤄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살핀 덕분이다.
이를 통해 서양 과학기술과 전통 과학지식의 조화를 꾀하는 ‘토양병거(土洋竝擧)’, 정책의 실험과 실행의 확산을 뜻하는 ‘유점도면(由點到面)’, 농촌 과학실험 운동을 위해 노농(老農)과 지식청년, 현장 간부가 협력하는 ‘삼결합(三結合)’ 등 다양하고도 현실적인 개념들을 접할 수 있다.
이는 마오 시대의 ‘과학적 영농’과 관련된 다양하고 유의미한 경험들을 역사적 망각에서 길어 올려, 어떻게 하면 충분한 먹거리를 생산하면서도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 과학기술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 나가도록 하는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
과학자와 농민 지식인의 분투
과학사를 다룬 책이지만 딱딱하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녹색혁명과 적색혁명의 접점에서 활약했던 유명 과학자는 물론 현장의 농민 지식인과 지역 간부들의 노력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어서다.
미국에서 분류학을 배웠지만 귀국해서는 기생말벌을 이용한 사탕수수 천공벌레 방제법을 개발한 푸저룽은 ‘양’ 과학의 대표주자.
그는 문화혁명 기간에 농촌의 공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누추한 오두막’을 그럴듯한 말벌 배양장으로 개조해 연구를 이어갔고, 흰개미 방제법을 개발한 농민 리스메이를 발굴해 대학 강단으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서남농업대학교를 졸업하고 농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저명한 벼 육종학자 위안룽핑은 대표적인 ‘토’과학자.
그 또한 안장농학교에서 연구하던 초창기에 모판을 기르기 위해 가마 공장에서 버려진 토기 항아리를 주워 와 사용했다.
근검절약을 통해 자력갱생하고자 진력했던 이들의 삶은 역사의 큰 물줄기에 가려지기 쉬운 인간적 흥미를 제공한다.
중국은 과학기술계의 ‘졸부’가 아니다
지난해 말 중국이 고성능 저비용의 인공지능(AI) ‘딥시크’를 개발했다는 뉴스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우리 국민 대부분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중국은 적어도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벼락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오 시대부터 과학계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과학자가 될 수 있는 교육과 취업 기회를 제공한 ‘군중과학’ 노선이 중국 ‘굴기’의 밑바탕에 있음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오 시대 ‘군중과학’에 의해 채택, 보급된 신기술 덕분에 대대적인 식량 증산이 이뤄지면서 싼값의 먹거리 공급이 가능해져 포스트마오 시기 경제 성장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우리 독자에게 그저 보아넘길 수 없는 책인 이유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마오쩌둥이 꿈꾼 ‘다른 과학’이, 냉전 시기에 미국 주도로 탄생한 ‘녹색혁명’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 사회주의 혁명에 접목해간 과정에 주목하는 독법이다.
지은이가 엘리트 과학기술인 중심의 하향식(양洋)이 아니라 농민 군중 중심의 상향식(토土)으로 생산현장에서 이뤄지는 농업 수확량 증대가 이뤄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살핀 덕분이다.
이를 통해 서양 과학기술과 전통 과학지식의 조화를 꾀하는 ‘토양병거(土洋竝擧)’, 정책의 실험과 실행의 확산을 뜻하는 ‘유점도면(由點到面)’, 농촌 과학실험 운동을 위해 노농(老農)과 지식청년, 현장 간부가 협력하는 ‘삼결합(三結合)’ 등 다양하고도 현실적인 개념들을 접할 수 있다.
이는 마오 시대의 ‘과학적 영농’과 관련된 다양하고 유의미한 경험들을 역사적 망각에서 길어 올려, 어떻게 하면 충분한 먹거리를 생산하면서도 농민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 과학기술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 나가도록 하는 성찰을 제공할 것이다.
과학자와 농민 지식인의 분투
과학사를 다룬 책이지만 딱딱하지 않은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녹색혁명과 적색혁명의 접점에서 활약했던 유명 과학자는 물론 현장의 농민 지식인과 지역 간부들의 노력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어서다.
미국에서 분류학을 배웠지만 귀국해서는 기생말벌을 이용한 사탕수수 천공벌레 방제법을 개발한 푸저룽은 ‘양’ 과학의 대표주자.
그는 문화혁명 기간에 농촌의 공방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숙식하며 ‘누추한 오두막’을 그럴듯한 말벌 배양장으로 개조해 연구를 이어갔고, 흰개미 방제법을 개발한 농민 리스메이를 발굴해 대학 강단으로 이끌어주기도 했다.
서남농업대학교를 졸업하고 농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저명한 벼 육종학자 위안룽핑은 대표적인 ‘토’과학자.
그 또한 안장농학교에서 연구하던 초창기에 모판을 기르기 위해 가마 공장에서 버려진 토기 항아리를 주워 와 사용했다.
근검절약을 통해 자력갱생하고자 진력했던 이들의 삶은 역사의 큰 물줄기에 가려지기 쉬운 인간적 흥미를 제공한다.
중국은 과학기술계의 ‘졸부’가 아니다
지난해 말 중국이 고성능 저비용의 인공지능(AI) ‘딥시크’를 개발했다는 뉴스로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우리 국민 대부분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중국은 적어도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벼락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오 시대부터 과학계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과학자가 될 수 있는 교육과 취업 기회를 제공한 ‘군중과학’ 노선이 중국 ‘굴기’의 밑바탕에 있음을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오 시대 ‘군중과학’에 의해 채택, 보급된 신기술 덕분에 대대적인 식량 증산이 이뤄지면서 싼값의 먹거리 공급이 가능해져 포스트마오 시기 경제 성장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우리 독자에게 그저 보아넘길 수 없는 책인 이유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7월 29일
- 쪽수, 무게, 크기 : 548쪽 | 794g | 152*224*27mm
- ISBN13 : 9791156122999
- ISBN10 : 1156122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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