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오 이후의 중국
Description
책소개
『월 스트리트 저널』 ,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스』 등
수많은 해외 언론이 주목한 역사서
독보적인 중국 현대사 연구자
프랑크 디쾨터의 신작
1976년~2020년,
마오쩌둥 사망 후 시진핑 집권기까지
〈경제 기적〉을 이룬 현대 중국의 이면을 분석하다!
프랑크 디쾨터는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인민 3부작〉을 통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중국 인민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현장감 있게 그려 내며,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하고 중국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제 그 시선은 〈마오 이후〉로 향한다.
『마오 이후의 중국』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부터 2020년 시진핑 집권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경제 기적〉을 재검토하는 역사서다.
디쾨터는 중국 내 여러 기록 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부터 미발표된 회고록, 주요 인사의 비밀 일기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이 어떻게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탐구한다.
당의 주도하에 질서 정연하게 발전해 나가며 경제 기적을 일으켰다는 평가는 그저 외형적 서사에 불과하다.
초고속 성장을 거둔 지난 40여 년간의 현대사 이면에는 강력한 통제, 모순과 환상, 끊임없는 권력 암투가 자리해 있다.
특히 디쾨터는 2008년 금융 위기 속 독단적 행보, 서구의 간섭을 향한 적대감,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감시 체계를 갖춘 독재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산당의 목표는 민주주의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저항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책은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궤적을 따라가며, 오늘날의 중국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수많은 해외 언론이 주목한 역사서
독보적인 중국 현대사 연구자
프랑크 디쾨터의 신작
1976년~2020년,
마오쩌둥 사망 후 시진핑 집권기까지
〈경제 기적〉을 이룬 현대 중국의 이면을 분석하다!
프랑크 디쾨터는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인민 3부작〉을 통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가 중국 인민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현장감 있게 그려 내며, 새뮤얼 존슨상을 수상하고 중국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제 그 시선은 〈마오 이후〉로 향한다.
『마오 이후의 중국』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부터 2020년 시진핑 집권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경제 기적〉을 재검토하는 역사서다.
디쾨터는 중국 내 여러 기록 보관소에서 입수한 문서부터 미발표된 회고록, 주요 인사의 비밀 일기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중화 인민 공화국이 어떻게 초강대국으로 도약하게 되었는지를 면밀하게 탐구한다.
당의 주도하에 질서 정연하게 발전해 나가며 경제 기적을 일으켰다는 평가는 그저 외형적 서사에 불과하다.
초고속 성장을 거둔 지난 40여 년간의 현대사 이면에는 강력한 통제, 모순과 환상, 끊임없는 권력 암투가 자리해 있다.
특히 디쾨터는 2008년 금융 위기 속 독단적 행보, 서구의 간섭을 향한 적대감,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감시 체계를 갖춘 독재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산당의 목표는 민주주의 진영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저항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 책은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궤적을 따라가며, 오늘날의 중국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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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또 다른 독재자(1976~1979)
2 긴축(1979~1982)
3 개혁(1982~1984)
4 인민과 가격에 의한(1984~1988)
5 대학살(1989)
6 분수령(1989~1991)
7 사회주의 손에 들린 자본주의 도구(1992~1996)
8 큰 것이 아름답다(1997~2001)
9 세계화(2001~2008)
10 오만(2008~2012)
맺음말
감사의 말
주
선별 참고 문헌
찾아보기
1 또 다른 독재자(1976~1979)
2 긴축(1979~1982)
3 개혁(1982~1984)
4 인민과 가격에 의한(1984~1988)
5 대학살(1989)
6 분수령(1989~1991)
7 사회주의 손에 들린 자본주의 도구(1992~1996)
8 큰 것이 아름답다(1997~2001)
9 세계화(2001~2008)
10 오만(2008~2012)
맺음말
감사의 말
주
선별 참고 문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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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1985년 여름에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중국어 공부를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 「첫 문장」 중에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개입했다.
그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중에 자행된 실수들이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그것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지적하는 동지들도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마오쩌둥 동지와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마오쩌둥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며, 우리 당의 전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마오쩌둥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 당을 더럽히는 것이다.〉
--- p.64
다롄, 톈진, 상하이, 원저우, 광저우를 포함한 14개의 도시가 개방되었고 사실상 특별 경제 구역이 되었다.
베이징에서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앞서 선전에는 수십억 위안을 쏟아부었지만 이제 그들은 새롭게 특구로 지정된 도시들에 보다 많은 자금을 지원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개방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라고 자오쯔양은 설명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매번 베이징에 찾아오지 말라.〉 실제로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의 재원에 압박을 덜 가하는 대가로 보다 많은 재량을 얻었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인 시나리오처럼 보였다.
--- p.124
자정이 지나자마자 총리는 텔레비전에 나와 준비된 원고를 낭독했다.
〈우리는 혼란을 신속하게 종식하기 위해 확고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우리가 이 사태를 조기에 종식시키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 p.193~194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자의 손에 들린 자본주의 도구가 안전할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그의 비전에는 한 가지 모순이 존재했고, 그가 기본적인 경제 법칙조차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권력 분립에 기반한 정치 체제에서 중앙은행은 이른바 이자율과 예대율이라는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주요한 금융 도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사회주의 체제하의 은행들은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다.
1979년 이후에 진행된 잇단 분권화로 지방 은행들은 시장이든, 중앙 정부의 계획이든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지방의 당 서기가 내리는 지시만 따를 뿐이었다.
중앙 정부의 끊임없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시장 규율이나 당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을 포함해 생산 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던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지방 정부에 분산되었던 권력을 회수하여 위에서 아래로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의 모든 지도자를 굴복시킬 만큼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고, 도려내고, 불태우고, 응징할 준비가 된 독재자가 필요했다.
한 지방 은행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개화된 마오쩌둥이다〉.
--- p.269
1997년 9월에 장쩌민은 공공 부문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
중국 공산당 제15차 전국 대표 대회의 연설에서 그는 당의 새로운 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주어라.〉 〈큰 것이 아름답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정책은 수천 개의 작고 비효율적인 공장들을 없애고, 대신에 한국이 재벌을 육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산업 자체를 이끌어 갈 거대 기업들을 육성할 것을 요구했다.
당은 기업가적인 열정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보다 베이징의 관료들이 미래의 승자들을 선정하고 국가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그들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기보다 오히려 늘릴 계획이었다.
국영 기업에 보내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확장하든가 아니면 소멸하라.
베이징의 관료들은 최고이자 최대라고 생각되는 기업들을 직접 선정해서 특혜 대출과 개발 자금, 기타 다른 형태의 국가 지원을 퍼부었다.
--- p.305
2009년 4월에 중국 인민 은행 총재 저우샤오촨은 금융 위기에 맞선 중국의 빠른 대처가 중국 정치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했다고 선언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 지도부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충분히 입증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거울 삼아 국제 사회에서 조언자 역할을 자처하고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우월성을 증명하게 될 새로운 접근 방식, 즉 〈중국식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후진타오는 이를 〈중국의 길〉이라고 불렀다.
--- p.387~388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는 두 배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그동안 부채는 세 배로 늘어나 총생산의 280퍼센트에 달했다.
중국의 부채 의존도는 사회 기반 시설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에서 보다 많은 내수로 수요를 이동시킴으로써 개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못했는데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부분의 부(富)가 국민이 아닌 국가로 유입되었기 때문이었다.
2020년 5월에 리커창이 지적했듯이 중국에서는 6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140달러로 한 달을 살았는데, 이는 도시에서 방 하나를 임대하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보다 많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당원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대대적인 수입의 재분재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그럴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듯 보였다.
--- 「첫 문장」 중에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개입했다.
그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중에 자행된 실수들이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그것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지적하는 동지들도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마오쩌둥 동지와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마오쩌둥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며, 우리 당의 전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마오쩌둥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 당을 더럽히는 것이다.〉
--- p.64
다롄, 톈진, 상하이, 원저우, 광저우를 포함한 14개의 도시가 개방되었고 사실상 특별 경제 구역이 되었다.
베이징에서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앞서 선전에는 수십억 위안을 쏟아부었지만 이제 그들은 새롭게 특구로 지정된 도시들에 보다 많은 자금을 지원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개방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라고 자오쯔양은 설명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매번 베이징에 찾아오지 말라.〉 실제로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의 재원에 압박을 덜 가하는 대가로 보다 많은 재량을 얻었고, 이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인 시나리오처럼 보였다.
--- p.124
자정이 지나자마자 총리는 텔레비전에 나와 준비된 원고를 낭독했다.
〈우리는 혼란을 신속하게 종식하기 위해 확고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라고 그는 선언했다.
〈우리가 이 사태를 조기에 종식시키지 못하고 방치한다면 우리 중 누구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 p.193~194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자의 손에 들린 자본주의 도구가 안전할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그의 비전에는 한 가지 모순이 존재했고, 그가 기본적인 경제 법칙조차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권력 분립에 기반한 정치 체제에서 중앙은행은 이른바 이자율과 예대율이라는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주요한 금융 도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사회주의 체제하의 은행들은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다.
1979년 이후에 진행된 잇단 분권화로 지방 은행들은 시장이든, 중앙 정부의 계획이든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지방의 당 서기가 내리는 지시만 따를 뿐이었다.
중앙 정부의 끊임없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시장 규율이나 당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을 포함해 생산 수단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던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지방 정부에 분산되었던 권력을 회수하여 위에서 아래로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의 모든 지도자를 굴복시킬 만큼 대규모의 숙청을 단행하고, 도려내고, 불태우고, 응징할 준비가 된 독재자가 필요했다.
한 지방 은행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개화된 마오쩌둥이다〉.
--- p.269
1997년 9월에 장쩌민은 공공 부문의 발목을 잡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천명했다.
중국 공산당 제15차 전국 대표 대회의 연설에서 그는 당의 새로운 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주어라.〉 〈큰 것이 아름답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정책은 수천 개의 작고 비효율적인 공장들을 없애고, 대신에 한국이 재벌을 육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산업 자체를 이끌어 갈 거대 기업들을 육성할 것을 요구했다.
당은 기업가적인 열정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기보다 베이징의 관료들이 미래의 승자들을 선정하고 국가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그들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기보다 오히려 늘릴 계획이었다.
국영 기업에 보내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확장하든가 아니면 소멸하라.
베이징의 관료들은 최고이자 최대라고 생각되는 기업들을 직접 선정해서 특혜 대출과 개발 자금, 기타 다른 형태의 국가 지원을 퍼부었다.
--- p.305
2009년 4월에 중국 인민 은행 총재 저우샤오촨은 금융 위기에 맞선 중국의 빠른 대처가 중국 정치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했다고 선언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 지도부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충분히 입증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국 정부를 거울 삼아 국제 사회에서 조언자 역할을 자처하고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그 우월성을 증명하게 될 새로운 접근 방식, 즉 〈중국식 사회주의〉를 추진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후진타오는 이를 〈중국의 길〉이라고 불렀다.
--- p.387~388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는 두 배의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그동안 부채는 세 배로 늘어나 총생산의 280퍼센트에 달했다.
중국의 부채 의존도는 사회 기반 시설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에서 보다 많은 내수로 수요를 이동시킴으로써 개선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내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못했는데 매우 단순한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부분의 부(富)가 국민이 아닌 국가로 유입되었기 때문이었다.
2020년 5월에 리커창이 지적했듯이 중국에서는 6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140달러로 한 달을 살았는데, 이는 도시에서 방 하나를 임대하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보다 많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당원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대대적인 수입의 재분재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그럴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듯 보였다.
--- p.431~432
출판사 리뷰
역사적 대전환의 시작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은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지도부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며, 〈사인방〉을 희생양으로 삼아 체제 정비에 나섰다.
그럼에도 마오쩌둥 사상은 전략적 필요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덩샤오핑은 복권과 함께 〈사회주의식 현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개혁 개방〉을 공식화했다.
디쾨터에 따르면, 이는 또 다른 독재에 불과하다.
사실상 기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그 시스템을 정밀하게 조율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여전히 모든 경제 흐름을 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시장과 은행은 정치적 논리에 따라 작동했다.
초고속 성장의 구조적 모순
선전과 주하이 등 여러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해외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고, 농촌에 계약 책임제를 도입하면서 중국은 급속한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1985년 산업 성장률은 무려 22퍼센트에 달했고, 도시화와 산업화도 가속화되었다.
인상적인 수치이나,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회계 조작, 부정부패 등이 뒤엉켜 있었다.
은행들은 지속적으로 무분별한 대출을 일삼았으며, 1984년에는 인플레이션이 23퍼센트를 기록했다.
디쾨터는 중국의 계획 경제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오로지 맹목적인 생산과 맹목적인 개발, 맹목적인 조달만 이루어졌다.
톈안먼 광장에서 봉인된 미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1978~1979년 〈민주의 벽〉 사건, 1980년대 대학생 시위로 정치 개혁에 대한 기대가 잠시 부상했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는 그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 당 지도부는 이를 적대적인 외국 세력이 선동한 〈반혁명적 폭동〉으로 규정하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이후에도 사회 안정이라는 명분하에 참혹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제 중국은 광적으로 경제 성장만을 강조했고 그사이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중국은 개혁을 약속하는 국가에서, 개혁의 환상을 활용하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세계화 전략의 양면성
1990년대에 접어들어 장쩌민은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1997년 홍콩 반환, 2001년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으로 인해 중국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듯한 인상을 주었고, 값싼 노동력과 막대한 규모의 내수 시장을 매력적으로 여긴 외국 기업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디쾨터는 중국이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내부적으로는 규제를 확대하는 이중적인 전술을 고수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은행은 적자를 감춘 채 대출을 이어 가고, 지방 정부는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기업은 회계를 조작해 실적을 부풀렸다.
미비한 제도와 허술한 정책, 누적된 부채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심화시키고 고착화할 터였다.
선전과 감시 체제의 진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통제 중심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같은 해 발생한 세계 금융 위기에 단행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은 국가 주도의 경제 모델에 다시금 정당성을 부여한 계기가 되었고 중국식 방식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다.
이후 시진핑은 한층 노골적으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천명하며 독자적 노선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이념·기업·언론·인터넷 등 그야말로 모든 것에 감시와 검열을 강화했다.
디쾨터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막다른 길에 봉착한 듯 보였다.〉
우리는 현대 중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전 세계는 오랫동안 중국의 경제 개혁이 결국 정치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어 왔다.
그러나 디쾨터는 지난 40년간 중국이 무엇을 은폐하고 무엇을 동원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이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중국은 〈질적인 성장을 도외시하면서 성장률이라는 단 하나의 수치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개방은 사람과 사상, 재화, 자본 등의 이동을 의미〉하지만, 〈중국은 그 모든 흐름을 통제하고 대개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도록 허용한다〉고 지적한다.
『마오 이후의 중국』은 〈인민 3부작〉을 잇는 역작으로, 경제 성장 뒤에 숨겨진 권위주의적 통치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로써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직면한 과제와 향후 세계 권력 구조의 재편에 미칠 심대한 영향을 조망하려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은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지도부는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며, 〈사인방〉을 희생양으로 삼아 체제 정비에 나섰다.
그럼에도 마오쩌둥 사상은 전략적 필요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덩샤오핑은 복권과 함께 〈사회주의식 현대화〉를 기치로 내걸고 〈개혁 개방〉을 공식화했다.
디쾨터에 따르면, 이는 또 다른 독재에 불과하다.
사실상 기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대신에 그 시스템을 정밀하게 조율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여전히 모든 경제 흐름을 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시장과 은행은 정치적 논리에 따라 작동했다.
초고속 성장의 구조적 모순
선전과 주하이 등 여러 지역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해외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고, 농촌에 계약 책임제를 도입하면서 중국은 급속한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1985년 산업 성장률은 무려 22퍼센트에 달했고, 도시화와 산업화도 가속화되었다.
인상적인 수치이나,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회계 조작, 부정부패 등이 뒤엉켜 있었다.
은행들은 지속적으로 무분별한 대출을 일삼았으며, 1984년에는 인플레이션이 23퍼센트를 기록했다.
디쾨터는 중국의 계획 경제에는 〈계획〉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오로지 맹목적인 생산과 맹목적인 개발, 맹목적인 조달만 이루어졌다.
톈안먼 광장에서 봉인된 미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1978~1979년 〈민주의 벽〉 사건, 1980년대 대학생 시위로 정치 개혁에 대한 기대가 잠시 부상했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는 그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 당 지도부는 이를 적대적인 외국 세력이 선동한 〈반혁명적 폭동〉으로 규정하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이후에도 사회 안정이라는 명분하에 참혹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제 중국은 광적으로 경제 성장만을 강조했고 그사이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중국은 개혁을 약속하는 국가에서, 개혁의 환상을 활용하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세계화 전략의 양면성
1990년대에 접어들어 장쩌민은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1997년 홍콩 반환, 2001년 세계 무역 기구(WTO) 가입으로 인해 중국은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듯한 인상을 주었고, 값싼 노동력과 막대한 규모의 내수 시장을 매력적으로 여긴 외국 기업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디쾨터는 중국이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내부적으로는 규제를 확대하는 이중적인 전술을 고수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은행은 적자를 감춘 채 대출을 이어 가고, 지방 정부는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기업은 회계를 조작해 실적을 부풀렸다.
미비한 제도와 허술한 정책, 누적된 부채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심화시키고 고착화할 터였다.
선전과 감시 체제의 진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고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통제 중심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같은 해 발생한 세계 금융 위기에 단행된 대규모 경기 부양책은 국가 주도의 경제 모델에 다시금 정당성을 부여한 계기가 되었고 중국식 방식에 대한 자신감은 커졌다.
이후 시진핑은 한층 노골적으로 〈중국이 다른 나라들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천명하며 독자적 노선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이념·기업·언론·인터넷 등 그야말로 모든 것에 감시와 검열을 강화했다.
디쾨터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그들은 막다른 길에 봉착한 듯 보였다.〉
우리는 현대 중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전 세계는 오랫동안 중국의 경제 개혁이 결국 정치 개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품어 왔다.
그러나 디쾨터는 지난 40년간 중국이 무엇을 은폐하고 무엇을 동원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이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중국은 〈질적인 성장을 도외시하면서 성장률이라는 단 하나의 수치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개방은 사람과 사상, 재화, 자본 등의 이동을 의미〉하지만, 〈중국은 그 모든 흐름을 통제하고 대개는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도록 허용한다〉고 지적한다.
『마오 이후의 중국』은 〈인민 3부작〉을 잇는 역작으로, 경제 성장 뒤에 숨겨진 권위주의적 통치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로써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직면한 과제와 향후 세계 권력 구조의 재편에 미칠 심대한 영향을 조망하려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7월 25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528쪽 | 908g | 162*231*34mm
- ISBN13 : 9788932925288
- ISBN10 : 8932925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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