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룻밤에 읽는 남북국사
Description
책소개
통일신라와 발해, 후삼국시대의 도래와 고려의 통일까지
5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마지막
인문학, 동화, SF, 게임 시나리오 등 여러 장르에서 다채로운 글을 저술한 이문영 작가가 통일신라와 발해, 후삼국시대와 고려의 통일을 다룬 『하룻밤에 읽는 남북국사』를 출간했다.
이 책은 18년간 50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마지막 도서로,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남북국시대의 역사를 당대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재구성했다.
먼 훗날 현대의 분단시대를 연구할 역사가들은 오늘날을 ‘두 번째 남북국시대’로 명명할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남북국시대를 소개해 한반도 밖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단순히 통일신라와 발해의 역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당나라)-일본-북방 유목민족과 한반도의 상호작용을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한반도의 역사를 더욱 넓고 다층적인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이끈다.
전작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하룻밤에 읽는 조선시대사』에서 역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친절하게 풀이한 이문영 작가는 신간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수록해 독자의 흥미를 끈다.
수많은 사료를 검토해 역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이따금 당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설화, 향가, 한시, 그림, 유물을 소개한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그림 15개, 지도 17개, 사진 50개를 삽입하고 하단에 보충 설명을 달았다.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거짓과 오해를 반박하기 위해 학계의 최신 성과까지 섬세하게 해설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한국 고대사 최후의 하이라이트인 남북국시대를 즐겁게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50만 독자가 선택한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마지막
인문학, 동화, SF, 게임 시나리오 등 여러 장르에서 다채로운 글을 저술한 이문영 작가가 통일신라와 발해, 후삼국시대와 고려의 통일을 다룬 『하룻밤에 읽는 남북국사』를 출간했다.
이 책은 18년간 50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마지막 도서로,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남북국시대의 역사를 당대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재구성했다.
먼 훗날 현대의 분단시대를 연구할 역사가들은 오늘날을 ‘두 번째 남북국시대’로 명명할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남북국시대를 소개해 한반도 밖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했다.
단순히 통일신라와 발해의 역사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당나라)-일본-북방 유목민족과 한반도의 상호작용을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한반도의 역사를 더욱 넓고 다층적인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이끈다.
전작 『하룻밤에 읽는 한국 고대사』, 『하룻밤에 읽는 조선시대사』에서 역사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친절하게 풀이한 이문영 작가는 신간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를 수록해 독자의 흥미를 끈다.
수많은 사료를 검토해 역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이따금 당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설화, 향가, 한시, 그림, 유물을 소개한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그림 15개, 지도 17개, 사진 50개를 삽입하고 하단에 보충 설명을 달았다.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거짓과 오해를 반박하기 위해 학계의 최신 성과까지 섬세하게 해설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한국 고대사 최후의 하이라이트인 남북국시대를 즐겁게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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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목차
머리말 4
제1장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문무왕과 신문왕 18
ㆍ설총의 〈화왕계〉 32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구축한 효소왕과 성덕왕 35
ㆍ수로부인 설화와 수로왕 설화의 유사성 58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완성한 효성왕과 경덕왕 62
ㆍ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일대기 84
모반의 시대, 흔들리는 통일신라 92
ㆍ호국삼룡과 여의주 114
장보고와 청해진 118
ㆍ조신의 꿈 130
망국으로의 길 134
ㆍ당나라에서 벌어진 쟁장 사건 143
제2장 발해
발해를 건국하기까지 150
ㆍ고구려를 계승하고 당나라를 모방한 발해 166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173
영토를 넓히고 당과 대결한 무왕 179
ㆍ발해 뗏목탐사대 192
문왕의 치세 197
ㆍ당나라의 명장으로 활약한 고구려 유민들 208
혼란 속의 발해 217
해동성국의 시대 223
ㆍ홍라녀 전설 238
발해의 멸망 242
ㆍ백두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 254
발해 부흥운동과 계승국 257
ㆍ발해사에 대한 인식 263
제3장 후삼국시대
후백제가 건국되다 272
후고구려의 성립 281
ㆍ통일신라 말기의 호족과 선종 296
왕건의 조상 301
ㆍ효녀 지은과 효종랑 311
삼국의 동상이몽 314
궁예의 몰락 323
자웅을 겨루는 왕건과 견훤 333
통일을 이룩한 고려 346
ㆍ왕건의 부인들 369
참고 문헌 373
지도1 통일신라와 발해의 국경 8
지도2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28
지도3 혜초의 여정 51
지도4 당 후기 절도사들의 난립 86
지도5 김헌창의 난 107
지도6 청해진과 신라방 122
지도7 대조영의 발해 건국 157
지도8 발해의 행정구역과 말갈부족의 위치 163
지도9 발해의 당나라 공격 187
지도10 발해 무왕 시대의 대외정세 188
지도11 소그디아나 지역 212
지도12 발해의 특산물 227
지도13 통일신라와 발해의 국제교통로 236
지도14 발해의 멸망 252
지도15 후삼국시대 호족의 난립 273
지도16 통일신라 5교 9산의 성립 299
지도17 후삼국시대 362
제1장 통일신라
통일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문무왕과 신문왕 18
ㆍ설총의 〈화왕계〉 32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구축한 효소왕과 성덕왕 35
ㆍ수로부인 설화와 수로왕 설화의 유사성 58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완성한 효성왕과 경덕왕 62
ㆍ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의 일대기 84
모반의 시대, 흔들리는 통일신라 92
ㆍ호국삼룡과 여의주 114
장보고와 청해진 118
ㆍ조신의 꿈 130
망국으로의 길 134
ㆍ당나라에서 벌어진 쟁장 사건 143
제2장 발해
발해를 건국하기까지 150
ㆍ고구려를 계승하고 당나라를 모방한 발해 166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173
영토를 넓히고 당과 대결한 무왕 179
ㆍ발해 뗏목탐사대 192
문왕의 치세 197
ㆍ당나라의 명장으로 활약한 고구려 유민들 208
혼란 속의 발해 217
해동성국의 시대 223
ㆍ홍라녀 전설 238
발해의 멸망 242
ㆍ백두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 254
발해 부흥운동과 계승국 257
ㆍ발해사에 대한 인식 263
제3장 후삼국시대
후백제가 건국되다 272
후고구려의 성립 281
ㆍ통일신라 말기의 호족과 선종 296
왕건의 조상 301
ㆍ효녀 지은과 효종랑 311
삼국의 동상이몽 314
궁예의 몰락 323
자웅을 겨루는 왕건과 견훤 333
통일을 이룩한 고려 346
ㆍ왕건의 부인들 369
참고 문헌 373
지도1 통일신라와 발해의 국경 8
지도2 통일신라의 행정구역 28
지도3 혜초의 여정 51
지도4 당 후기 절도사들의 난립 86
지도5 김헌창의 난 107
지도6 청해진과 신라방 122
지도7 대조영의 발해 건국 157
지도8 발해의 행정구역과 말갈부족의 위치 163
지도9 발해의 당나라 공격 187
지도10 발해 무왕 시대의 대외정세 188
지도11 소그디아나 지역 212
지도12 발해의 특산물 227
지도13 통일신라와 발해의 국제교통로 236
지도14 발해의 멸망 252
지도15 후삼국시대 호족의 난립 273
지도16 통일신라 5교 9산의 성립 299
지도17 후삼국시대 362
상세 이미지
책 속으로
삼국통일전쟁이 끝나자마자 신라는 당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당은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신라는 이에 대항했다.
전쟁이 거의 연이어 발생한 탓에 나당전쟁을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한다.
삼국은 이미 통일되었고, 통일신라는 새로운 적으로 대두한 당나라와 싸워 승리했다.
이 전쟁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신라라는 체제 아래 재편되었고, 세 나라의 백성이 전선에 투입되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와 만주에 끼치던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졌고, 그 틈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성립될 수 있었다.
--- 「머리말」 중에서
신라는 일본 천황과 황후는 물론이고 황태자와 친왕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는데, 이는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의 행위가 아니다.
조공을 받고 답례를 하던 당나라가 신라 왕족들에게 이런 식으로 물품을 하사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일본서기』 같은 일본 측 문헌에서는 신라 사신의 방문이 상세히 적혀 있다.
즉 신라 사신의 방문이 일본에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와 일본은 양국을 오가는 사신의 성격을 두고 동상이몽으로 해석했다.
두 나라의 오해는 결국양국 관계를 파탄시킨다.
양국 관계가 악화하는 시점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757년(경덕왕 16년), 관리에게 녹봉을 하사하던 정책을 폐지하고 녹읍을 하사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녹읍은 귀족의 특권을 상징하는데, 그런 녹읍의 부활이 귀족 세력의 성장으로 보일 순 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성장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시 신라 사회에 만연했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경덕왕 시기에는 자연재해가 매우 심했다.
경덕왕 4년, 한여름에 달걀 크기의 우박이 떨어졌다.
경덕왕 6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경덕왕 8년, 폭풍이 불었다.
경덕왕 13년, 또다시 한여름에 달걀 크기의 우박이 떨어졌다.
그다음 해에는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식량이 부족했다.
그다음 경덕왕 15년, 한여름에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가 재정이 성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 조정은 신하들에게 일일이 녹봉을 주기 힘들어졌다.
결국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는 알아서 세수를 거두라는 식으로 부담을 덜었던 셈이다.
물론 경덕왕의 조치가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았다.
각자의 토지를 갖게 된 귀족들은 서서히 부를 축적했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혜공왕의 나이는 19세였다.
충분히 직접 통치할 수 있는 나이다.
이 무렵부터 혜공왕은 직접 통치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죽은 경덕왕의 왕비인 만월부인은 남편의 정책을 번복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친정을 시작한 혜공왕이 귀족 세력에 밀려 아버지의 업적 중 하나를 뒤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시중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사건이 혜공왕의 수족을 끊어내기 위한 귀족 세력의 공작이었을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문헌 내용이 너무나도 간략한 탓에 추측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 아쉬울 따름이다.
학자들은 〈신라촌락문서〉가 현에서 기록한 후 상급기관에서 정리한 행정문서일 것이라 추정한다.
즉 현에서 기록하고, 주에서 정리한 다음, 왕경으로 보고된 문서인 것이다.
이 사료는 신라가 지방을 세밀한 기준으로 분류하여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을을 이끄는 촌주에게 ‘촌주위답’이라는 토지를 따로 제공하는 등 촌주의 살림을 보장했다는 사실도 이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 조정이 조금이라도 미래를 생각했다면 청해진을 보존하고 해상무역로를 계속 운영하며 무역의 이점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사병화된 집단의 무서움을 겪은 신라 조정은 미래를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851년(문성왕 13년), 신라는 청해진을 없앴고 다시는 해상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신라 왕실은 편안해졌다.
문성왕은 이후 벌어진 여러 반란을 모두 진압하였다.
--- 「제1장 통일신라」 중에서
이쯤 되면 “말갈도 원래 한민족의 한 갈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발해 이후 나라를 세운 금나라, 청나라의 여진족이 곧 말갈이다.
그러니 이들의 역사도 다 한국사가 된다.”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변치 않는 속성이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가령 한국 성씨 중 아주 많은 성씨가 사실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중국 한족과 한반도의 한민족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인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중략) … 발해는 만주를 지배하는 주체가 한민족에서 여진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존속된 국가였다.
점차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확립하던 말갈인은 228년 만에 발해가 멸망하며 그 정체성을 상실했고, 결국 자신들의 국가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해는 역사 속에서 두 갈래로 뻗어가는 분기점에서 세워진 나라였다.
오늘날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하고, 나라를 세운 주체도 속말말갈로 둔갑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국을 자처했고, 대외적으로 주장하진 않았으나 나라 안에서만큼은 황제국으로 자칭했다.
황제국이 타국의 속국일 리 없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선진국가인 당나라의 제도를 배워 국가를 정비했다.
엄연히 다른 문화를 꽃피운 독립된 국가였다.
발해의 외교정책이 급변한 이유 중 하나는 돌궐이 흑수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골칫거리였다.
발해 무왕은 흑수말갈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동생 대문예와의 내분으로 시기를 놓쳤고, 흑수말갈은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채 당나라와 독자적으로 교섭했다.
발해는 돌궐이 흑수말갈과 손을 잡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게다가 신라가 발해 남쪽에 바짝 다가왔으니 신라와 친밀한 당나라를 적대하는 노선은 결코 발해에 유리하지 않았다.
즉 발해는 자국의 생존을 위해 당나라에 가까워지려는 거란을 공격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당과 화친할 기회를 마련했다.
또한 흑수말갈을 끌어들이려는 돌궐을 멀리하였다.
이에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수립했다.
선왕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발해를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신년 정월 조회에 사신이 참석하도록 했었다.
따라서 발해는 사신을 9~10월에 보내 5월 정도에 귀국하게 조치했다.
하지만 선왕 때부터는 사신을 11월경에 보내 정월 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 같다.
이에 일본은 사신이 오는 횟수를 줄여 보복했다.
사신이란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도 양국 간 교역이라는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견된다.
즉 선왕 치세 때 일본은 발해 사신을 12년에 한 번 오게 제한하여 교역을 규제한 것이다.
선왕 때 일본으로 사신을 여섯 번이나 보내서 일본 내에서는 “발해 사신은 이웃나라 손님이 아니라 상인일 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발해의 특산물 중 옥주의 풀솜인 ‘면(?)’에 관해서도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이 글자는 오늘날 면(綿)의 옛 글자다.
면(綿)은 일반적으로 목화에서 얻은 솜을 뜻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고려의 문익점 이전에도 목화를 재배했다는 증거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발해의 기후는 목화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면(?)이란 글자는 목화솜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던 글자다.
그러니 이 한자가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단어인지 알아야 한다.
명나라 때 편찬된 백과사전 『천공개물(天工開物)』에는 면(綿)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이 책에서 말하기를 비단은 누에고치를 풀어서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실을 뽑아낸 뒤에 남는 고치의 부스러기를 모아 솜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을 ‘풀솜’ 또는 ‘고치솜’이라고 한다.
풀솜은 솜뭉치 형태 그대로 이용하거나 다시 실로 뽑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풀솜을 실로 만들어 짠 천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따라서 면(綿)이라는 글자가 문익점 이전부터 쓰였다고 해서 그때에도 목화솜이 있었다는 식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발해의 멸망은 갑작스러웠다.
북방의 강대국이 그토록 허망하게 패망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고 느낄 만하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무언가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때, ‘백두산 폭발’이라는 그럴싸한 가설을 접하고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심정으로 그 가설을 덜컥 믿어버리게 된다.
인간의 심리상 이렇게 한번 잘못된 신념을 가지게 되면 웬만해서는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역사학은 바로 이러한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의식을 발달시키는 학문이다.
--- 「제2장 발해」 중에서
후백제의 시작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르게는 889년, 즉 견훤이 봉기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한 892년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선언한 900년으로 보기도 한다.
의견마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이렇게 주장이 분분한 까닭으로, 후백제가 자국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 멸망한 탓이 크다.
현재로서는 견훤이 자립한 시점은 889년이고, 후백제를 건국한 시점은 900년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통치는 물리력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백성들을 정신적으로도 복속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다.
신라 왕실은 ‘교종’을 사상적 지주로 삼았는데, 지방 호족들은 새롭게 대두한 ‘선종’을 사상적 지주로 받아들였다.
교종이 경전 위주의 불교라면,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다.
백성들은 어려운 한문 지식을 요구하는 교종보다 참선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행동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을 쉽게 받아들였다.
선종 승려들도 자신들의 사찰을 보호할 군사력이 있는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교종이 왕실과 귀족을 옹호하는 어용 종파로 전락한 상황에서, 선종은 교종과 대립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780년 이후 당나라에 공부하러 간 승려는 118명에 달한다.
기록에 적히지 않은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이 유학 승려 중에는 진골 신분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는 승려도 진골이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당나라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런 승려들에게 새롭게 대두한 선종은 매력적이었다.
이런 유학 승려가 대거 신라로 귀국한 일이 생겼다.
당시 당나라 황제 무종이 불교를 억압하는 ‘폐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845년을 전후하여 신라 승려들은 강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선종 승려 중 많은 사람이 중앙보다 지방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들은 어차피 중앙에서는 출세할 수 없었다.
신라 왕실도 이런 변화를 모르지 않았다.
선종 승려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도 했다.
여기에 응한 승려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게 되어도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는 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보령 지방의 호족 김흔은 성주산파(성주산문)를, 강릉 지방의 호족 김씨는 도굴산파(도굴산문)를, 김해 지방의 호족 김인광은 봉림산파(봉림산문)를 개창하도록 지지했다.
이밖에 여러 호족이 선종 승려와 단단히 결합했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서는 고려에서 온 60여 세의 함보(函普)라는 인물이 여진족의 땅인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갔고, 그의 7세손이 금나라의 태조 아쿠타라고 적혀 있다.
거기다 신라 왕실의 김씨는 금나라의 국명과 한자가 같다.
남송 사람이 금나라에 붙잡혀 있을 때 저술한 『송막기문(松漠紀聞)』이란 사료에서는 “아쿠타의 선조 이름은 감복(龕福)이고,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고 적혀 있다.
고대 한국어에는 ㄱ과 ㅎ이 오가는 경우가 있고, 그런 점에서 ‘감복’과 ‘함보’가 음이 통한다고 보면,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송나라 사람이 자신에게 들리는 대로 이름을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고려사』에서는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라고도 함)이 여진의 시조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과 마의태자를 연결할 물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신라인이나 고려인이 여진 왕실의 조상이라는 ‘기록’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다.
무언가 근사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린 나머지 신라의 마지막 태자가 여진족의 조상으로 호출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설령 『금사』의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근 200년 전의 시조가 고려인이라 하더라도, 금나라의 역사를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은 한반도를 모두 차지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신라는 이에 대항했다.
전쟁이 거의 연이어 발생한 탓에 나당전쟁을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한다.
삼국은 이미 통일되었고, 통일신라는 새로운 적으로 대두한 당나라와 싸워 승리했다.
이 전쟁이 바로 나당전쟁이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신라라는 체제 아래 재편되었고, 세 나라의 백성이 전선에 투입되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와 만주에 끼치던 당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졌고, 그 틈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성립될 수 있었다.
--- 「머리말」 중에서
신라는 일본 천황과 황후는 물론이고 황태자와 친왕들에게도 선물을 보냈는데, 이는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의 행위가 아니다.
조공을 받고 답례를 하던 당나라가 신라 왕족들에게 이런 식으로 물품을 하사했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일본서기』 같은 일본 측 문헌에서는 신라 사신의 방문이 상세히 적혀 있다.
즉 신라 사신의 방문이 일본에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와 일본은 양국을 오가는 사신의 성격을 두고 동상이몽으로 해석했다.
두 나라의 오해는 결국양국 관계를 파탄시킨다.
양국 관계가 악화하는 시점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757년(경덕왕 16년), 관리에게 녹봉을 하사하던 정책을 폐지하고 녹읍을 하사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녹읍은 귀족의 특권을 상징하는데, 그런 녹읍의 부활이 귀족 세력의 성장으로 보일 순 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의 성장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시 신라 사회에 만연했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경덕왕 시기에는 자연재해가 매우 심했다.
경덕왕 4년, 한여름에 달걀 크기의 우박이 떨어졌다.
경덕왕 6년,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경덕왕 8년, 폭풍이 불었다.
경덕왕 13년, 또다시 한여름에 달걀 크기의 우박이 떨어졌다.
그다음 해에는 전국에 기근이 들었다.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식량이 부족했다.
그다음 경덕왕 15년, 한여름에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국가 재정이 성치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 조정은 신하들에게 일일이 녹봉을 주기 힘들어졌다.
결국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는 알아서 세수를 거두라는 식으로 부담을 덜었던 셈이다.
물론 경덕왕의 조치가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았다.
각자의 토지를 갖게 된 귀족들은 서서히 부를 축적했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시 혜공왕의 나이는 19세였다.
충분히 직접 통치할 수 있는 나이다.
이 무렵부터 혜공왕은 직접 통치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죽은 경덕왕의 왕비인 만월부인은 남편의 정책을 번복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친정을 시작한 혜공왕이 귀족 세력에 밀려 아버지의 업적 중 하나를 뒤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시중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했다는 사건이 혜공왕의 수족을 끊어내기 위한 귀족 세력의 공작이었을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문헌 내용이 너무나도 간략한 탓에 추측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 아쉬울 따름이다.
학자들은 〈신라촌락문서〉가 현에서 기록한 후 상급기관에서 정리한 행정문서일 것이라 추정한다.
즉 현에서 기록하고, 주에서 정리한 다음, 왕경으로 보고된 문서인 것이다.
이 사료는 신라가 지방을 세밀한 기준으로 분류하여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을을 이끄는 촌주에게 ‘촌주위답’이라는 토지를 따로 제공하는 등 촌주의 살림을 보장했다는 사실도 이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라 조정이 조금이라도 미래를 생각했다면 청해진을 보존하고 해상무역로를 계속 운영하며 무역의 이점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사병화된 집단의 무서움을 겪은 신라 조정은 미래를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851년(문성왕 13년), 신라는 청해진을 없앴고 다시는 해상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신라 왕실은 편안해졌다.
문성왕은 이후 벌어진 여러 반란을 모두 진압하였다.
--- 「제1장 통일신라」 중에서
이쯤 되면 “말갈도 원래 한민족의 한 갈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발해 이후 나라를 세운 금나라, 청나라의 여진족이 곧 말갈이다.
그러니 이들의 역사도 다 한국사가 된다.”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변치 않는 속성이라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가령 한국 성씨 중 아주 많은 성씨가 사실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중국 한족과 한반도의 한민족이 연합하여 세운 나라인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중략) … 발해는 만주를 지배하는 주체가 한민족에서 여진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존속된 국가였다.
점차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확립하던 말갈인은 228년 만에 발해가 멸망하며 그 정체성을 상실했고, 결국 자신들의 국가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해는 역사 속에서 두 갈래로 뻗어가는 분기점에서 세워진 나라였다.
오늘날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에 불과하고, 나라를 세운 주체도 속말말갈로 둔갑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국을 자처했고, 대외적으로 주장하진 않았으나 나라 안에서만큼은 황제국으로 자칭했다.
황제국이 타국의 속국일 리 없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선진국가인 당나라의 제도를 배워 국가를 정비했다.
엄연히 다른 문화를 꽃피운 독립된 국가였다.
발해의 외교정책이 급변한 이유 중 하나는 돌궐이 흑수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골칫거리였다.
발해 무왕은 흑수말갈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동생 대문예와의 내분으로 시기를 놓쳤고, 흑수말갈은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채 당나라와 독자적으로 교섭했다.
발해는 돌궐이 흑수말갈과 손을 잡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게다가 신라가 발해 남쪽에 바짝 다가왔으니 신라와 친밀한 당나라를 적대하는 노선은 결코 발해에 유리하지 않았다.
즉 발해는 자국의 생존을 위해 당나라에 가까워지려는 거란을 공격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당과 화친할 기회를 마련했다.
또한 흑수말갈을 끌어들이려는 돌궐을 멀리하였다.
이에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적극적으로 수립했다.
선왕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발해를 조공국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신년 정월 조회에 사신이 참석하도록 했었다.
따라서 발해는 사신을 9~10월에 보내 5월 정도에 귀국하게 조치했다.
하지만 선왕 때부터는 사신을 11월경에 보내 정월 조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 같다.
이에 일본은 사신이 오는 횟수를 줄여 보복했다.
사신이란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도 양국 간 교역이라는 중대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견된다.
즉 선왕 치세 때 일본은 발해 사신을 12년에 한 번 오게 제한하여 교역을 규제한 것이다.
선왕 때 일본으로 사신을 여섯 번이나 보내서 일본 내에서는 “발해 사신은 이웃나라 손님이 아니라 상인일 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발해의 특산물 중 옥주의 풀솜인 ‘면(?)’에 관해서도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이 글자는 오늘날 면(綿)의 옛 글자다.
면(綿)은 일반적으로 목화에서 얻은 솜을 뜻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고려의 문익점 이전에도 목화를 재배했다는 증거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발해의 기후는 목화 재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면(?)이란 글자는 목화솜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던 글자다.
그러니 이 한자가 원래 무엇을 가리키는 단어인지 알아야 한다.
명나라 때 편찬된 백과사전 『천공개물(天工開物)』에는 면(綿)에 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이 책에서 말하기를 비단은 누에고치를 풀어서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실을 뽑아낸 뒤에 남는 고치의 부스러기를 모아 솜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을 ‘풀솜’ 또는 ‘고치솜’이라고 한다.
풀솜은 솜뭉치 형태 그대로 이용하거나 다시 실로 뽑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풀솜을 실로 만들어 짠 천은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따라서 면(綿)이라는 글자가 문익점 이전부터 쓰였다고 해서 그때에도 목화솜이 있었다는 식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발해의 멸망은 갑작스러웠다.
북방의 강대국이 그토록 허망하게 패망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고 느낄 만하다.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무언가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때, ‘백두산 폭발’이라는 그럴싸한 가설을 접하고는 “그러면 그렇지.”라는 심정으로 그 가설을 덜컥 믿어버리게 된다.
인간의 심리상 이렇게 한번 잘못된 신념을 가지게 되면 웬만해서는 그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역사학은 바로 이러한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의식을 발달시키는 학문이다.
--- 「제2장 발해」 중에서
후백제의 시작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르게는 889년, 즉 견훤이 봉기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의견으로는 무진주에서 왕을 자칭한 892년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선언한 900년으로 보기도 한다.
의견마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이렇게 주장이 분분한 까닭으로, 후백제가 자국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 멸망한 탓이 크다.
현재로서는 견훤이 자립한 시점은 889년이고, 후백제를 건국한 시점은 900년이 맞다고 할 수 있다.
통치는 물리력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백성들을 정신적으로도 복속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다.
신라 왕실은 ‘교종’을 사상적 지주로 삼았는데, 지방 호족들은 새롭게 대두한 ‘선종’을 사상적 지주로 받아들였다.
교종이 경전 위주의 불교라면,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중시하는 불교다.
백성들은 어려운 한문 지식을 요구하는 교종보다 참선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행동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종을 쉽게 받아들였다.
선종 승려들도 자신들의 사찰을 보호할 군사력이 있는 호족들과 손을 잡았다.
교종이 왕실과 귀족을 옹호하는 어용 종파로 전락한 상황에서, 선종은 교종과 대립하는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780년 이후 당나라에 공부하러 간 승려는 118명에 달한다.
기록에 적히지 않은 사람까지 생각한다면 이보다 많았을 것이다.
이 유학 승려 중에는 진골 신분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신라에서는 승려도 진골이어야만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당나라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런 승려들에게 새롭게 대두한 선종은 매력적이었다.
이런 유학 승려가 대거 신라로 귀국한 일이 생겼다.
당시 당나라 황제 무종이 불교를 억압하는 ‘폐불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845년을 전후하여 신라 승려들은 강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선종 승려 중 많은 사람이 중앙보다 지방에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앞서 말한 바처럼 이들은 어차피 중앙에서는 출세할 수 없었다.
신라 왕실도 이런 변화를 모르지 않았다.
선종 승려들을 중앙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도 했다.
여기에 응한 승려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게 되어도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는 이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보령 지방의 호족 김흔은 성주산파(성주산문)를, 강릉 지방의 호족 김씨는 도굴산파(도굴산문)를, 김해 지방의 호족 김인광은 봉림산파(봉림산문)를 개창하도록 지지했다.
이밖에 여러 호족이 선종 승려와 단단히 결합했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서는 고려에서 온 60여 세의 함보(函普)라는 인물이 여진족의 땅인 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갔고, 그의 7세손이 금나라의 태조 아쿠타라고 적혀 있다.
거기다 신라 왕실의 김씨는 금나라의 국명과 한자가 같다.
남송 사람이 금나라에 붙잡혀 있을 때 저술한 『송막기문(松漠紀聞)』이란 사료에서는 “아쿠타의 선조 이름은 감복(龕福)이고, 여진 추장은 신라 사람이다.”라고 적혀 있다.
고대 한국어에는 ㄱ과 ㅎ이 오가는 경우가 있고, 그런 점에서 ‘감복’과 ‘함보’가 음이 통한다고 보면,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송나라 사람이 자신에게 들리는 대로 이름을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고려사』에서는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라고도 함)이 여진의 시조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과 마의태자를 연결할 물적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신라인이나 고려인이 여진 왕실의 조상이라는 ‘기록’ 자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일 수 있다.
무언가 근사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욕망이 꿈틀거린 나머지 신라의 마지막 태자가 여진족의 조상으로 호출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설령 『금사』의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근 200년 전의 시조가 고려인이라 하더라도, 금나라의 역사를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제3장 후삼국시대」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남북국시대를 둘러싼 갑론을박
한국사에 무관심한 독자는 물론, 한국사에 친숙한 독자도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생소할 수 있다.
남북국시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 시대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작가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독자와 소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북국시대란 용어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불완전하다는, 이른바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주장과 함께 등장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우연히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긴 했으나 고구려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 못했고, 만주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었으니, 통일신라라는 표현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하자는 사람들, 나아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배신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대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일단 타당하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부적절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도 않다.
저자가 제1장 통일신라 편에서 거듭 강조하듯이 ‘일통삼한’이란 용어는 삼국통일 이후 즉위한 신문왕 시기부터 통용되었다.
당나라 사신이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가 왜 ‘태종’이냐고 따졌을 때 “김춘추가 김유신을 얻어 일통삼한했기 때문”이라 항변했다는 기록만 봐도, 당시를 살던 사람들 사이에 통일 의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당전쟁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신라라는 체제 아래 재편되었고, 세 나라의 백성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같은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더군다나 나당전쟁으로 한반도와 만주에 끼치던 당나라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그 틈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세워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즉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립되었다는 사실과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한반도를 통일했다는 사실은 충돌하지 않는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른다고 해서, 발해의 역사를 배제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라인과 발해인을 무턱대고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남북국으로, 그러니까 정통성을 다투는 국가로 이해하지 않았다.
서로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처럼 신라와 발해 역시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제2장 발해 편에서 거론하듯이 신라는 발해를 과거 삼한과 구분되는 ‘말갈족의 나라’로 불렀고, 발해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견제하고자 일본과의 외교에 힘썼다.
두 나라 모두 우리 역사의 한 갈래에서 뻗어져 나온 국가임은 확실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경쟁자 내지는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했다는 사실만 연거푸 깨닫는다.
그동안 교과서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는 양국의 후신으로서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했다는 거대하고 튼튼한 단일 서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서사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신라인과 발해인이 나름의 동질감을 공유해야 자연스럽겠지만 그런 사료는 아직 발견되진 않았다.
양국이 적대했다면 이후 한반도를 제패한 고려는 과연 누구의 후신이 되는 것인가?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은 삼국시대 이후 어떻게 고려로 계승되었는가? 독자들이 느낄 의문을 예측했는지, 작가는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으로서 제3장 후삼국시대 편을 마련하였다.
더 나은 논쟁을 위하여
이문영 작가는 사료가 단일한 진실만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거에 남긴 역사서의 기록조차 서로 충돌하는 일이 허다하다.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서술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사료에서 거론하는 과거의 기록을 발밑에 둔 채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사료가 하나의 진실만 말하지 않듯이 역사적 맥락도 단일하지 않다.
발해는 만주를 지배하는 주체가 한민족에서 여진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존속된 국가였다.
점차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확립하던 말갈인은 228년 만에 발해가 멸망하며 그 정체성을 상실했고, 결국 별도의 국가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해는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한민족과 말갈족이 두 갈래로 뻗어가는 분기점에서 세워진 과도기적 국가였다.
또한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서 발해는 자국의 생존을 모색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북방 유목민족, 일본과 교류하며 신라를 견제했다.
발해라는 나라의 복합적인 정체성, 남북국을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한다면 신라인과 발해인이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들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양국이 서로를 낯설게 느끼는 게 더욱 자연스럽다.
결국 이 문제에서 어색함 내지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입맛대로 역사를 왜곡하는 현대인의 잘못일 뿐이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개념이나 목적을 위해 역사를 재단하는 현대인의 잘못일 뿐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과거를 일방적으로 재단한다면 역사를 이해하기는커녕 역사를 자의적으로 악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즉 작가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바꿀 것을 요청한다.
신라와 발해가 번영하고 몰락하는 과정에, 고려가 신라인과 발해인을 흡수한 과정에 주목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두 강대국을 이기고 한반도를 제패한 신라는 내부의 부정부패와 권력 다툼으로 찬찬히 무너졌고, 한때 북방을 평정한 발해는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순식간에 패망했다.
신라와 발해라는 체제가 실패하자 시대는 후삼국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포용하지 못한 채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고집했다.
왕건의 고려는 신라국왕의 귀순을 받아내고 발해유민을 흡수하며 스스로 시대의 대안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가 만일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한다면, 남북국시대가 지나간 후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도래했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남북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배우면서 한반도 고대사를 바라보는 독자의 편협한 시야를 더욱 확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한국사에 무관심한 독자는 물론, 한국사에 친숙한 독자도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생소할 수 있다.
남북국시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면 당시 시대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작가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독자와 소통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북국시대란 용어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불완전하다는, 이른바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주장과 함께 등장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우연히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긴 했으나 고구려 영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 못했고, 만주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었으니, 통일신라라는 표현이 합당하지 않다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하자는 사람들, 나아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배신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대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일단 타당하다.
그렇다면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부적절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도 않다.
저자가 제1장 통일신라 편에서 거듭 강조하듯이 ‘일통삼한’이란 용어는 삼국통일 이후 즉위한 신문왕 시기부터 통용되었다.
당나라 사신이 무열왕 김춘추의 묘호가 왜 ‘태종’이냐고 따졌을 때 “김춘추가 김유신을 얻어 일통삼한했기 때문”이라 항변했다는 기록만 봐도, 당시를 살던 사람들 사이에 통일 의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나당전쟁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신라라는 체제 아래 재편되었고, 세 나라의 백성이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같은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더군다나 나당전쟁으로 한반도와 만주에 끼치던 당나라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그 틈에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가 세워질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즉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립되었다는 사실과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한반도를 통일했다는 사실은 충돌하지 않는다.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부른다고 해서, 발해의 역사를 배제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라인과 발해인을 무턱대고 하나의 민족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남북국으로, 그러니까 정통성을 다투는 국가로 이해하지 않았다.
서로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북한처럼 신라와 발해 역시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제2장 발해 편에서 거론하듯이 신라는 발해를 과거 삼한과 구분되는 ‘말갈족의 나라’로 불렀고, 발해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를 견제하고자 일본과의 외교에 힘썼다.
두 나라 모두 우리 역사의 한 갈래에서 뻗어져 나온 국가임은 확실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경쟁자 내지는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했다는 사실만 연거푸 깨닫는다.
그동안 교과서를 포함한 여러 매체에서는 양국의 후신으로서 고려가 한반도를 재통일했다는 거대하고 튼튼한 단일 서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서사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신라인과 발해인이 나름의 동질감을 공유해야 자연스럽겠지만 그런 사료는 아직 발견되진 않았다.
양국이 적대했다면 이후 한반도를 제패한 고려는 과연 누구의 후신이 되는 것인가? 한반도 역사의 정통성은 삼국시대 이후 어떻게 고려로 계승되었는가? 독자들이 느낄 의문을 예측했는지, 작가는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으로서 제3장 후삼국시대 편을 마련하였다.
더 나은 논쟁을 위하여
이문영 작가는 사료가 단일한 진실만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과거에 남긴 역사서의 기록조차 서로 충돌하는 일이 허다하다.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서는 합당하지 않은 서술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사료에서 거론하는 과거의 기록을 발밑에 둔 채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사료가 하나의 진실만 말하지 않듯이 역사적 맥락도 단일하지 않다.
발해는 만주를 지배하는 주체가 한민족에서 여진족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존속된 국가였다.
점차 ‘발해인’이란 정체성을 확립하던 말갈인은 228년 만에 발해가 멸망하며 그 정체성을 상실했고, 결국 별도의 국가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발해는 전통적으로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한민족과 말갈족이 두 갈래로 뻗어가는 분기점에서 세워진 과도기적 국가였다.
또한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서 발해는 자국의 생존을 모색해야 했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북방 유목민족, 일본과 교류하며 신라를 견제했다.
발해라는 나라의 복합적인 정체성, 남북국을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고려한다면 신라인과 발해인이 서로에게서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들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양국이 서로를 낯설게 느끼는 게 더욱 자연스럽다.
결국 이 문제에서 어색함 내지는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입맛대로 역사를 왜곡하는 현대인의 잘못일 뿐이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개념이나 목적을 위해 역사를 재단하는 현대인의 잘못일 뿐이다.
현대인의 시선에서 과거를 일방적으로 재단한다면 역사를 이해하기는커녕 역사를 자의적으로 악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즉 작가는 독자들에게 질문을 바꿀 것을 요청한다.
신라와 발해가 번영하고 몰락하는 과정에, 고려가 신라인과 발해인을 흡수한 과정에 주목할 것을 거듭 당부한다.
두 강대국을 이기고 한반도를 제패한 신라는 내부의 부정부패와 권력 다툼으로 찬찬히 무너졌고, 한때 북방을 평정한 발해는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순식간에 패망했다.
신라와 발해라는 체제가 실패하자 시대는 후삼국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포용하지 못한 채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고집했다.
왕건의 고려는 신라국왕의 귀순을 받아내고 발해유민을 흡수하며 스스로 시대의 대안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리가 만일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다면,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논쟁을 해야 한다면, 남북국시대가 지나간 후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도래했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다면 남북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역사를 배우면서 한반도 고대사를 바라보는 독자의 편협한 시야를 더욱 확장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7월 01일
- 쪽수, 무게, 크기 : 380쪽 | 590g | 153*226*22mm
- ISBN13 : 9791192376530
- ISBN10 : 1192376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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