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량한 책들의 문화사
Description
책소개
출판으로 본 일본제국-식민지 조선사 다시 쓰기
“발매금지 먹지 않는 책은 시시껄렁해!”
식민지와 제국의 문화적 만남 재조명
일본에서 일본 근현대 문학을 강의하는 지은이는 그간 일본제국의 근대사 다시 쓰기를 주장해왔다.
그 결과 『전후라는 이데올로기』(한국어판 2013년 현실문화), 『검열의 제국』(한국어판 2016 푸른역사) 등의 성과물을 일궈냈다.
여기서 ‘전후’라는 프레임을 통해 구축된 일본의 근대사는 패전국 일본의 희생자 의식에 의해 성립되었고 한반도 ‘식민지민’들의 체험조차도 자신들의 희생 담론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해왔다는 점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기억이 어떻게 망각되었는지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책은 지은이의 연구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에서의 제국 연구는 제국 일본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고 일본어와 한국어 자료가 어떻게 복잡하게 얽히면서 교착하는지에 관한 분석이 충분하지 않다.
지은이는 양국의 자료를 세심하게 살펴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출판 검열 등과 같이 피해와 가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일본어가 갖는 양의적 역할, 즉 일본어를 통해 일본에 대항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 등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잡아낼 수 없는 부분에 주목했다.
“발매금지 먹지 않는 책은 시시껄렁해!”
식민지와 제국의 문화적 만남 재조명
일본에서 일본 근현대 문학을 강의하는 지은이는 그간 일본제국의 근대사 다시 쓰기를 주장해왔다.
그 결과 『전후라는 이데올로기』(한국어판 2013년 현실문화), 『검열의 제국』(한국어판 2016 푸른역사) 등의 성과물을 일궈냈다.
여기서 ‘전후’라는 프레임을 통해 구축된 일본의 근대사는 패전국 일본의 희생자 의식에 의해 성립되었고 한반도 ‘식민지민’들의 체험조차도 자신들의 희생 담론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해왔다는 점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기억이 어떻게 망각되었는지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책은 지은이의 연구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에서의 제국 연구는 제국 일본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고 일본어와 한국어 자료가 어떻게 복잡하게 얽히면서 교착하는지에 관한 분석이 충분하지 않다.
지은이는 양국의 자료를 세심하게 살펴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출판 검열 등과 같이 피해와 가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일본어가 갖는 양의적 역할, 즉 일본어를 통해 일본에 대항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 등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잡아낼 수 없는 부분에 주목했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일본제국의 문화사, 식민지 조선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
제1장 프롤레타리아
1.
〈공산당 선언〉과 평민
2.
정보전 시대의 슬로 미디어 〈평민신문〉
3.
‘러시아 스파이露探’와 싸우는 평민 행상들
4.
‘신新/평민’과 조선인의 애매한 경계
제2장 도서관
1.
분서焚書와 ‘도서무관圖書無館’의 시대
2.
문화정치와 조선어의 규범화
3.
제국으로부터/제국으로의 향상심을 부채질하다
4.
야시장ㆍ노점이라는 공간
제3장 불령선인
1.
조선총독 정치의 신조어
2.
제국 미디어와 암闇미디어의 공방전
3.
법역法域의 간극과 불온한 정보전
4.
가네코 후미코ㆍ박열과 ‘후테이센징’들
제4장 검열
1.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 조선어와 일본어의 서로 다른 운명
2.
일본 본토와 일본어의 양의적인 역할
3.
검열제국의 탄생
제5장 자본
1.
발매금지라는 부가가치: 잡지 〈전기戰旗〉와 〈게 가공선〉
2.
잡지 〈전기〉와 비합법 상품의 자본화
3.
비합법 상품의 카탈로그, 〈전기〉
4.
이동 미디어로서의 ‘불령선인’과 식민지 시장
제6장 식민지
1.
야마모토 사네히코의 만주ㆍ조선
2.
〈개조〉와 〈동아일보〉의 연회
3.
개조사로부터 사회주의를 배우다
4.
개조사의 전향
5.
만주ㆍ조선이라는 신상품
제7장 번역
1.
내선일체의 표상으로서의 번역
2.
잡지 〈문장〉과 일본 본토에서 온 ‘전선문학선’
3.
제국의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의 전선
4.
여자들의 내선일체
5.
조선의 하야시 후미코, 최정희
제8장 전쟁
1.
옛 제국의 총력전과 군수 주가의 폭등
2.
〈광장의 고독〉과 식민지-일본
3.
한국(인) 없는 한국전쟁
4.
장혁주의 한국전쟁 종군기
5.
일본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맺음말 일본 근현대 문화사에 질문을 던지다
옮긴이 후기
주
초출 일람
찾아보기
머리말 일본제국의 문화사, 식민지 조선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
제1장 프롤레타리아
1.
〈공산당 선언〉과 평민
2.
정보전 시대의 슬로 미디어 〈평민신문〉
3.
‘러시아 스파이露探’와 싸우는 평민 행상들
4.
‘신新/평민’과 조선인의 애매한 경계
제2장 도서관
1.
분서焚書와 ‘도서무관圖書無館’의 시대
2.
문화정치와 조선어의 규범화
3.
제국으로부터/제국으로의 향상심을 부채질하다
4.
야시장ㆍ노점이라는 공간
제3장 불령선인
1.
조선총독 정치의 신조어
2.
제국 미디어와 암闇미디어의 공방전
3.
법역法域의 간극과 불온한 정보전
4.
가네코 후미코ㆍ박열과 ‘후테이센징’들
제4장 검열
1.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 조선어와 일본어의 서로 다른 운명
2.
일본 본토와 일본어의 양의적인 역할
3.
검열제국의 탄생
제5장 자본
1.
발매금지라는 부가가치: 잡지 〈전기戰旗〉와 〈게 가공선〉
2.
잡지 〈전기〉와 비합법 상품의 자본화
3.
비합법 상품의 카탈로그, 〈전기〉
4.
이동 미디어로서의 ‘불령선인’과 식민지 시장
제6장 식민지
1.
야마모토 사네히코의 만주ㆍ조선
2.
〈개조〉와 〈동아일보〉의 연회
3.
개조사로부터 사회주의를 배우다
4.
개조사의 전향
5.
만주ㆍ조선이라는 신상품
제7장 번역
1.
내선일체의 표상으로서의 번역
2.
잡지 〈문장〉과 일본 본토에서 온 ‘전선문학선’
3.
제국의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의 전선
4.
여자들의 내선일체
5.
조선의 하야시 후미코, 최정희
제8장 전쟁
1.
옛 제국의 총력전과 군수 주가의 폭등
2.
〈광장의 고독〉과 식민지-일본
3.
한국(인) 없는 한국전쟁
4.
장혁주의 한국전쟁 종군기
5.
일본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맺음말 일본 근현대 문화사에 질문을 던지다
옮긴이 후기
주
초출 일람
찾아보기
책 속으로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라는 말이 일본에 수입됐던 시기에 번역자들이 상정한 계급이란, 앞서 후지노 유코가 서술했던 ‘일본인 남성 집단’과 거의 겹쳤고 애초부터 ‘조센징’은 안중에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일본에 적용하기 위한 모색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일본어로 옮긴 이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이다.
--- p.29
사카이는 Proletarier의 번역어로 처음에 ‘평민’을 택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번역어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사紳士’와 ‘평민’이 라는 낱말인데, 그 말들의 원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이다.
‘평민’은 당시의 평민사, 〈평민신문〉을 생각할 때 그 느낌이 잘 살아있는 번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내겐 ‘평민’만으로는 부족했고, 이 때문에 다른 데서는 ‘평민, 즉 근대 노동계급’이라 쓰기도 했었다.”
--- p.34
아라하타 간손이 편집한 〈사회주의 전도 행상 일기〉(신센샤新泉社, 1971)의 표지인데, 청년 두 사람이 끌고 있는 짐수레는 러일전쟁 때의 우유배달용 수레와 동일한 형태이다.
이 수레에 관한 최초의 서술은 1904년 3월 13일 자 〈평민신문〉의 〈행상 전도의 소식〉란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도보로 전국을 돌며 집회를 열면서 짐수레에 싣고 있던 ‘사회주의 서적류’를 팔고 다녔다.
--- p.46
행상 여비는 반액으로 매입한 평민문고를 판매하여 충당했다.
이들은 〈평민신문〉 및 〈직언〉의 개인 독자들이나 전국 각지의 사회주의 단체를 방문하여 판매하는 것 외에도 담화회를 열거나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사회주의협회 회원을 모집했다.
--- p.49
〈평민신문〉, 〈직언〉이 내걸었던 ‘평민’이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특히 평민사나 사회주의운동의 ‘동지-독자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평민’에는 신분 해방령이 내려진 근대국가 일본 사회에서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계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회주의자들도 부락민 차별을 비판하면서도 ‘평민’과 구분짓기 위해 부락민을 ‘신평민’이라 불렀다.
동일한 구도 아래에서, ‘신평민’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 ‘조선인’ 역시 그런 ‘평민’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었다.
--- p.63
1910년대에 도서관은 사설 도서관만 해도 1909년 경성문고의 개관 이래 전국에 20개 정도 설립되었다.
그러나 부민府民들에게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1916년 6월 7일 자 석간에 〈경성에 무엇이 있길 원하는가〉라는 앙케이트 결과…에 따르면,… ① 공회당 (1,032명), ② 일본인-조선인 사교 기관(987명), ③ 혼마치의 혼잡을 막기 위한 교통 제한(978명), ④ 도서관(962명), ⑤ 미술관(947명), ⑥ 극장(918명), ⑦ 사립중학교(906명) 순이었다.
--- p.71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언문〔조선어〕 신문을 허용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 각 방면으로부터 여러 비난들을 받았다.…그러나 나는 조선인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기관 신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다소 반대 입장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치안을 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언문 신문을 허가했던 것이다.
--- p.80
이 무렵 한글보급운동의 선두에 서 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지면에는 일본어 서적의 광고가 넘쳐났다.
한글보급운동과 일본어 보급으로 연결되는 일본어 서적 광고가 같은 지면에서 사이좋게 공존하며 세력을 다져 간 것이다.
--- p.8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성 제대 도서관은 독일의 배상금을 사용해 중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들의 자료와 연구서를 모았고 1910년부터 총독부 관할 아래 있던 조선 왕실의 도서관 규장각의 장서들까지 이관시켰다.…경성제대의 장서는…1932년에는 35만 권으로 급증했다.
이는 조선 내 관립 및 사립 전문학교의 장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1938년…일본제국 전체에서 장서 수로는 5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 p.86
1920년대 조선어 신문을 보면 일본어로 된 수험준비서와 학습참고서 광고가 많이 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교육열이 비등하는 가운데 조선인의 입학을 허락하는 학교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광고 중에서 상위 7위까지는 중 학교 과정의 독학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걸었던 〈와세다대학 7대 강의〉 시리즈가 차지했다.
--- p.91
1933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분서 3천 권 대동강 변의 연기로〉라는 기사를 읽어 보자.
“…분서는 옛적 진시황이나 멀리 독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불일간[며칠 뒤]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도 3천여 책이 연기로 화하리라 한다.
이것은 평양서에서 지금까지 압수하여 두었던 것들…로, 그중에는 일본 등대사燈臺社가 발행한 문제의 서적 〈심판〉, 〈마지막 날〉 등을 비롯하여 좀처럼 얻기 힘든 사회과학서 종류가 대부분이고, 눈을 바로 뜨지 못할‘에로’ 서적도 그중에 섞여 있다고 한다.
--- p.95
‘선인’이라는 말은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의 지배정책이 만들어낸 신조어(일본어)였다.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의 표기는 ‘한국’, ‘한국인’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칙령에 의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는 조선으로 칭’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먼저 모든 공문서나 지명 등에서 ‘대한’과 ‘황제’라는 말은 사용이 금지되었다.…책 제목에 ‘대한’이라는 문자가 포함된 것은 압수되고 그중 일부는 소각되었다.
--- p.107
이마무라 도모에 따르면,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어다.…‘한국사 데이 터베이스’, ‘한국역사 정보통합 시스템’에서 ‘불령선인’을 검색해 보면, 일본의 공문서에서는 항일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맵핑mapping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1910년 무렵부터 ‘불령선인’이라는 말의 사용이 서서히 증가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113
(지하) ‘신문’의 경우, 1919년 3월부터 7월 사이에 발행된 것만 해도 30개가 넘는다.
해외에서 발행된 것까지를 포함하면 60개 이상이 된다.…3·1독립운동 시기에 발행됐던 지하 미디어 〈독립신문〉은…3월 1일 하루에만 서울에서 1만 부 이상 뿌려짐으로써 독립선언서 못지않게 사람들의 정보 원천이 되었다.
--- p.125
1923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는 1922년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 독서 경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일본어 서적을 언급한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의 〈경제론〉, 〈해방〉이나 〈개조〉가 다뤄졌으며 간행과 동시에 날개 돋친 듯 팔려…품절·절판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 p.133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기 반년 전에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불령선인’에 대한 오해가 심각한 수준임을 토로했다.
그들은 “세상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라고 우려했다.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현사회〉도 두 차례 발행된 뒤 중단되는데, 가네코와 박열이 공동으로 미디어를 간행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불령선인’이 소멸됐던 것은 아니다.
--- p.142
조선어 미디어 시대의 개막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검열의 정비와 강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이를 ‘차압=탄압=저항(항일)’이라는 정형화된 등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조선일보〉는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던 대정大正친목회가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 동아일보〉를 넘어서는 30건의 차압, 23회의 발금, 그리고 두 번의 장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기존 연구는 이러한 숫자에만 의존해 〈조선일보〉의 피해를 부각하고 미디어 자체의 성격을 놓치고 있다.
--- p.160
조선총독부 출판정책은 1910년대에는 발금과 압수가, 1920년대에는 검열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어 문헌은 미국, 중국, 만주, 러시아 등에서 신문·잡지·서적으로 간행된다.…일본 본토는 본격적으로 ‘불령선인’들이 ‘불온한’ 조선어 미디어를 생산하는 공장이 됐던 것이다.
간행물의 대다수는 사회주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 p.164
1925년에는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시기부터 1934년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이 와해되기까지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잡지로 〈전기戰旗〉가 있다.
--- p.180
‘순진한 학도들’의 용돈을 노려야만 하는 ‘좌익적 출판사’의 주된 경쟁 상대는 ‘사회주의’의 상품화에 여념이 없는 개조사나 중앙공론사 같은 ‘부르주아’ 출판사다.
예컨대 “엔본 소동 때 가장 비극 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1928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간행을 둘러싼 ‘좌익적 출판사’(연맹판: 이와나미쇼텐, 기보카쿠, 도진샤, 고분도, 소분 카쿠) 대 ‘부르주아 출판사’(개조사) 간의 치열한 경쟁이 그것이다.
--- p.184
“책값이 싼지 비싼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쿄 어느 서점에서 들은 이야긴데, 〈게 가공선〉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무래도 발금 처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진열대에 내놓지 않고 감춰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책은 반드시 팔리게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신생 출판사였던 전기사는 검열, 즉 권력과의 대항을 가시화하면서 발금-비합법이라는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 p.190
코프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본토에 있는 20만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는 잠재적인 독자였으며, 일본공산당을 지탱하기 위한 매력적인 ‘시장’이었다.…조선인 노동자가 실제로 일본어·조선어 문장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동무〉를 창간한 이북만 등의 조선협의회의 임무는 20만 조선인 노동자를 독자로 조직하고 잡지 이름을 빌려 자금을 모으는 불령선인이 되는 것이었다.
--- p.221
야마모토 사네히코는 출판 역사에 남는 ‘엔본’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1926년의 〈현대일본문학전집〉은 근대 이후의 각종 명작을 한 권에 1엔 값으로 예약을 받았는데, 제1회 모집에서 25만 명의 예약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엔본 붐에 의해 오늘날의 출판과 유통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또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 p.228
야마모토 사네히코를 초대해 송진우가 연회를 베풀던 1932년, 동아일보사의 오너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광고주를 접대하거나 조선으로 초대하여 금강산을 관광시키면서 광고를 수주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일본 당국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고 “지주와 상공업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p.236
야마모토는 개조사의 주력 상품인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의 주요 고객이던 조선의 젊은 청년들에 대해 이 같은 저항 사상보다도 민족이나 전통에 더 신경 쓰라고 호소한다.
〈경성[제국]대학 방문〉의 장에서는 “조선의 대학생들이 지닌 지향”이 순문학보다도 “철학 및 법학에 기울어져” 있음을 우려하고, “일본 본토 유학을 경험한 조선예술 연구자는 무엇보다도 민족문화를 만들어내는 언어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p.258
〈문장〉 제2호부터는 ‘전선문학선’란이 만들어져 폐간 직전까지 이어졌다.
‘전선문학선’은 히노 아시헤이나 하야시 후미코등 인기 있는 일본 본토 작가의 종군기를, 관련 정보가 전혀 없이 편집을 약간 가미한 형태로, 조선어 번역으로 실었다.
--- p.281
〈문장〉 편집주간이던 소설가 이태준은 1939년 3월에 결성된 황국위문작가단의 운영에 협력했다.
그는 황군위문작가단을 위해 조선문단 사절 파견비로 100엔을 기부했으며, 편집부원 전원이 황군 위문품 비용 명목으로 각기 1엔씩을 냈다.
그리하여 문단 사절로서 소설가 김동인, 비평가 박영희, 시인 임학수가 파견됐다.
--- p.286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학교생활을 특집으로 꾸민 잡지 〈삼천리〉에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은 이는 다름 아닌 펜부대로 파견된 하야시 후미코와 요시야 노부코였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잡지 〈여성〉에 “도쿄의 유학생은 물론이고 요즘 조선의 중학생조차 조선 책은 읽지도 않고, 보잘것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보일 정도이다.
--- p.307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는 모윤숙·장덕조·최정희가 거론된다.
이들이 작품이나 강연회에서 적극적으로 전쟁 협력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런 황민화 정책에 부응한 일본어 소설은 일곱 작품이 확인되는데, 그중 최정희의 것이 여섯 편이다.
--- p.316
(한국전쟁) 개전 다음 날인 월요일의 니혼바시카부토쵸에서는 아침부터 주식을 사려는 주문이 쇄도했다.
6월 24일 토요일의 전체 거래가 103만 주였던 것에 비해 25일은 7할이 증가된 180만 주였다.
인기가 집중됐던 주식은 그때까지 30~40엔 선에서 바닥을 맴돌던‘ 옛 군수주軍需株’였다.
주가는 급등을 거듭했고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4배가 되었다고 한다.
--- p.325
일본은 사상자 19명을 낸 해상보안청 ‘특별 소해대掃海隊’나 선박 등, 옛 제국의 다양한 자원들을 활용하여 참전했다.
예컨대…〈맥아더는 일본에서 상륙부대 7만을 보내어 인천 상륙을 감행했다.
일본에서 출발한 LST 47척 가운데 37척은 일본인 선원이 몰고 있었다.
--- p.326
7월 25일에 미국 육군은 보도 기준을 확대하여 국제연합군 지휘관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금지했다.
이미 맥아더 사령부는 특파원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적에게 원조와 안도감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본보기로 일부 특파원들을 한반도에서 추방하거나 취재 거점인 도쿄에서 한반도로 복귀하는 것을 금지했다.
--- p.332
장혁주는 1932년의 〈개조〉 현상 공모에서 2등으로 뽑혀 도쿄 문단에서도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발표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한다〉(〈문예〉 1939년 2월) 이래로 내선일체 정책에 찬동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면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조선인으로부터 당시의 전쟁 협력을 추궁받으면서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 p.341
인민군으로 종군하고 전사했던 김사량의 〈바다가 보인다〉는 점령군과 일본 정부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던 김달수의 번역으로 〈중앙공론〉(1953년 가을호 문예특집)에 실린, 인민군 측 시각에서 쓴 종군기였다.
당시 김달수는 일본공산당 국제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었으며 일본공산당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조직인 재일 조선문화단체연합회로부터도 ‘백안시’되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일본에 적용하기 위한 모색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일본어로 옮긴 이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이다.
--- p.29
사카이는 Proletarier의 번역어로 처음에 ‘평민’을 택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번역어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사紳士’와 ‘평민’이 라는 낱말인데, 그 말들의 원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이다.
‘평민’은 당시의 평민사, 〈평민신문〉을 생각할 때 그 느낌이 잘 살아있는 번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내겐 ‘평민’만으로는 부족했고, 이 때문에 다른 데서는 ‘평민, 즉 근대 노동계급’이라 쓰기도 했었다.”
--- p.34
아라하타 간손이 편집한 〈사회주의 전도 행상 일기〉(신센샤新泉社, 1971)의 표지인데, 청년 두 사람이 끌고 있는 짐수레는 러일전쟁 때의 우유배달용 수레와 동일한 형태이다.
이 수레에 관한 최초의 서술은 1904년 3월 13일 자 〈평민신문〉의 〈행상 전도의 소식〉란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도보로 전국을 돌며 집회를 열면서 짐수레에 싣고 있던 ‘사회주의 서적류’를 팔고 다녔다.
--- p.46
행상 여비는 반액으로 매입한 평민문고를 판매하여 충당했다.
이들은 〈평민신문〉 및 〈직언〉의 개인 독자들이나 전국 각지의 사회주의 단체를 방문하여 판매하는 것 외에도 담화회를 열거나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사회주의협회 회원을 모집했다.
--- p.49
〈평민신문〉, 〈직언〉이 내걸었던 ‘평민’이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특히 평민사나 사회주의운동의 ‘동지-독자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평민’에는 신분 해방령이 내려진 근대국가 일본 사회에서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백정계급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회주의자들도 부락민 차별을 비판하면서도 ‘평민’과 구분짓기 위해 부락민을 ‘신평민’이라 불렀다.
동일한 구도 아래에서, ‘신평민’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 ‘조선인’ 역시 그런 ‘평민’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었다.
--- p.63
1910년대에 도서관은 사설 도서관만 해도 1909년 경성문고의 개관 이래 전국에 20개 정도 설립되었다.
그러나 부민府民들에게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1916년 6월 7일 자 석간에 〈경성에 무엇이 있길 원하는가〉라는 앙케이트 결과…에 따르면,… ① 공회당 (1,032명), ② 일본인-조선인 사교 기관(987명), ③ 혼마치의 혼잡을 막기 위한 교통 제한(978명), ④ 도서관(962명), ⑤ 미술관(947명), ⑥ 극장(918명), ⑦ 사립중학교(906명) 순이었다.
--- p.71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언문〔조선어〕 신문을 허용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 각 방면으로부터 여러 비난들을 받았다.…그러나 나는 조선인의 분위기를 알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기관 신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다소 반대 입장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치안을 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언문 신문을 허가했던 것이다.
--- p.80
이 무렵 한글보급운동의 선두에 서 있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조선어 신문의 지면에는 일본어 서적의 광고가 넘쳐났다.
한글보급운동과 일본어 보급으로 연결되는 일본어 서적 광고가 같은 지면에서 사이좋게 공존하며 세력을 다져 간 것이다.
--- p.8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성 제대 도서관은 독일의 배상금을 사용해 중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들의 자료와 연구서를 모았고 1910년부터 총독부 관할 아래 있던 조선 왕실의 도서관 규장각의 장서들까지 이관시켰다.…경성제대의 장서는…1932년에는 35만 권으로 급증했다.
이는 조선 내 관립 및 사립 전문학교의 장서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1938년…일본제국 전체에서 장서 수로는 5위에 해당되는 규모였다.
--- p.86
1920년대 조선어 신문을 보면 일본어로 된 수험준비서와 학습참고서 광고가 많이 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교육열이 비등하는 가운데 조선인의 입학을 허락하는 학교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광고 중에서 상위 7위까지는 중 학교 과정의 독학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걸었던 〈와세다대학 7대 강의〉 시리즈가 차지했다.
--- p.91
1933년 8월 1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분서 3천 권 대동강 변의 연기로〉라는 기사를 읽어 보자.
“…분서는 옛적 진시황이나 멀리 독일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불일간[며칠 뒤] 평양의 대동강 변에서도 3천여 책이 연기로 화하리라 한다.
이것은 평양서에서 지금까지 압수하여 두었던 것들…로, 그중에는 일본 등대사燈臺社가 발행한 문제의 서적 〈심판〉, 〈마지막 날〉 등을 비롯하여 좀처럼 얻기 힘든 사회과학서 종류가 대부분이고, 눈을 바로 뜨지 못할‘에로’ 서적도 그중에 섞여 있다고 한다.
--- p.95
‘선인’이라는 말은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의 지배정책이 만들어낸 신조어(일본어)였다.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의 표기는 ‘한국’, ‘한국인’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칙령에 의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는 조선으로 칭’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먼저 모든 공문서나 지명 등에서 ‘대한’과 ‘황제’라는 말은 사용이 금지되었다.…책 제목에 ‘대한’이라는 문자가 포함된 것은 압수되고 그중 일부는 소각되었다.
--- p.107
이마무라 도모에 따르면,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조어다.…‘한국사 데이 터베이스’, ‘한국역사 정보통합 시스템’에서 ‘불령선인’을 검색해 보면, 일본의 공문서에서는 항일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맵핑mapping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1910년 무렵부터 ‘불령선인’이라는 말의 사용이 서서히 증가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113
(지하) ‘신문’의 경우, 1919년 3월부터 7월 사이에 발행된 것만 해도 30개가 넘는다.
해외에서 발행된 것까지를 포함하면 60개 이상이 된다.…3·1독립운동 시기에 발행됐던 지하 미디어 〈독립신문〉은…3월 1일 하루에만 서울에서 1만 부 이상 뿌려짐으로써 독립선언서 못지않게 사람들의 정보 원천이 되었다.
--- p.125
1923년 1월 1일 자 〈조선일보〉는 1922년도에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 독서 경향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일본어 서적을 언급한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의 〈경제론〉, 〈해방〉이나 〈개조〉가 다뤄졌으며 간행과 동시에 날개 돋친 듯 팔려…품절·절판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 p.133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기 반년 전에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불령선인’에 대한 오해가 심각한 수준임을 토로했다.
그들은 “세상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라고 우려했다.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결국 〈현사회〉도 두 차례 발행된 뒤 중단되는데, 가네코와 박열이 공동으로 미디어를 간행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불령선인’이 소멸됐던 것은 아니다.
--- p.142
조선어 미디어 시대의 개막은 조선총독부에 의한 검열의 정비와 강화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이를 ‘차압=탄압=저항(항일)’이라는 정형화된 등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조선일보〉는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던 대정大正친목회가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 동아일보〉를 넘어서는 30건의 차압, 23회의 발금, 그리고 두 번의 장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기존 연구는 이러한 숫자에만 의존해 〈조선일보〉의 피해를 부각하고 미디어 자체의 성격을 놓치고 있다.
--- p.160
조선총독부 출판정책은 1910년대에는 발금과 압수가, 1920년대에는 검열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어 문헌은 미국, 중국, 만주, 러시아 등에서 신문·잡지·서적으로 간행된다.…일본 본토는 본격적으로 ‘불령선인’들이 ‘불온한’ 조선어 미디어를 생산하는 공장이 됐던 것이다.
간행물의 대다수는 사회주의에 관한 내용이었다.
--- p.164
1925년에는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시기부터 1934년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이 와해되기까지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잡지로 〈전기戰旗〉가 있다.
--- p.180
‘순진한 학도들’의 용돈을 노려야만 하는 ‘좌익적 출판사’의 주된 경쟁 상대는 ‘사회주의’의 상품화에 여념이 없는 개조사나 중앙공론사 같은 ‘부르주아’ 출판사다.
예컨대 “엔본 소동 때 가장 비극 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1928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간행을 둘러싼 ‘좌익적 출판사’(연맹판: 이와나미쇼텐, 기보카쿠, 도진샤, 고분도, 소분 카쿠) 대 ‘부르주아 출판사’(개조사) 간의 치열한 경쟁이 그것이다.
--- p.184
“책값이 싼지 비싼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쿄 어느 서점에서 들은 이야긴데, 〈게 가공선〉이 처음 나왔을 때는 아무래도 발금 처분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진열대에 내놓지 않고 감춰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책은 반드시 팔리게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신생 출판사였던 전기사는 검열, 즉 권력과의 대항을 가시화하면서 발금-비합법이라는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 p.190
코프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본토에 있는 20만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는 잠재적인 독자였으며, 일본공산당을 지탱하기 위한 매력적인 ‘시장’이었다.…조선인 노동자가 실제로 일본어·조선어 문장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개의치 않았다.
〈우리동무〉를 창간한 이북만 등의 조선협의회의 임무는 20만 조선인 노동자를 독자로 조직하고 잡지 이름을 빌려 자금을 모으는 불령선인이 되는 것이었다.
--- p.221
야마모토 사네히코는 출판 역사에 남는 ‘엔본’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1926년의 〈현대일본문학전집〉은 근대 이후의 각종 명작을 한 권에 1엔 값으로 예약을 받았는데, 제1회 모집에서 25만 명의 예약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엔본 붐에 의해 오늘날의 출판과 유통의 기반이 되는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또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가들에게 지면을 제공함으로써 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 p.228
야마모토 사네히코를 초대해 송진우가 연회를 베풀던 1932년, 동아일보사의 오너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는 도쿄와 오사카에서 광고주를 접대하거나 조선으로 초대하여 금강산을 관광시키면서 광고를 수주했다.
이로 인해 〈동아일보〉는 “일본 당국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고 “지주와 상공업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기구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p.236
야마모토는 개조사의 주력 상품인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의 주요 고객이던 조선의 젊은 청년들에 대해 이 같은 저항 사상보다도 민족이나 전통에 더 신경 쓰라고 호소한다.
〈경성[제국]대학 방문〉의 장에서는 “조선의 대학생들이 지닌 지향”이 순문학보다도 “철학 및 법학에 기울어져” 있음을 우려하고, “일본 본토 유학을 경험한 조선예술 연구자는 무엇보다도 민족문화를 만들어내는 언어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 p.258
〈문장〉 제2호부터는 ‘전선문학선’란이 만들어져 폐간 직전까지 이어졌다.
‘전선문학선’은 히노 아시헤이나 하야시 후미코등 인기 있는 일본 본토 작가의 종군기를, 관련 정보가 전혀 없이 편집을 약간 가미한 형태로, 조선어 번역으로 실었다.
--- p.281
〈문장〉 편집주간이던 소설가 이태준은 1939년 3월에 결성된 황국위문작가단의 운영에 협력했다.
그는 황군위문작가단을 위해 조선문단 사절 파견비로 100엔을 기부했으며, 편집부원 전원이 황군 위문품 비용 명목으로 각기 1엔씩을 냈다.
그리하여 문단 사절로서 소설가 김동인, 비평가 박영희, 시인 임학수가 파견됐다.
--- p.286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학교생활을 특집으로 꾸민 잡지 〈삼천리〉에서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뽑은 이는 다름 아닌 펜부대로 파견된 하야시 후미코와 요시야 노부코였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잡지 〈여성〉에 “도쿄의 유학생은 물론이고 요즘 조선의 중학생조차 조선 책은 읽지도 않고, 보잘것없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보일 정도이다.
--- p.307
중일전쟁 이후 전쟁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는 모윤숙·장덕조·최정희가 거론된다.
이들이 작품이나 강연회에서 적극적으로 전쟁 협력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이런 황민화 정책에 부응한 일본어 소설은 일곱 작품이 확인되는데, 그중 최정희의 것이 여섯 편이다.
--- p.316
(한국전쟁) 개전 다음 날인 월요일의 니혼바시카부토쵸에서는 아침부터 주식을 사려는 주문이 쇄도했다.
6월 24일 토요일의 전체 거래가 103만 주였던 것에 비해 25일은 7할이 증가된 180만 주였다.
인기가 집중됐던 주식은 그때까지 30~40엔 선에서 바닥을 맴돌던‘ 옛 군수주軍需株’였다.
주가는 급등을 거듭했고 휴전협정이 조인되던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4배가 되었다고 한다.
--- p.325
일본은 사상자 19명을 낸 해상보안청 ‘특별 소해대掃海隊’나 선박 등, 옛 제국의 다양한 자원들을 활용하여 참전했다.
예컨대…〈맥아더는 일본에서 상륙부대 7만을 보내어 인천 상륙을 감행했다.
일본에서 출발한 LST 47척 가운데 37척은 일본인 선원이 몰고 있었다.
--- p.326
7월 25일에 미국 육군은 보도 기준을 확대하여 국제연합군 지휘관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사를 금지했다.
이미 맥아더 사령부는 특파원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적에게 원조와 안도감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본보기로 일부 특파원들을 한반도에서 추방하거나 취재 거점인 도쿄에서 한반도로 복귀하는 것을 금지했다.
--- p.332
장혁주는 1932년의 〈개조〉 현상 공모에서 2등으로 뽑혀 도쿄 문단에서도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발표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한다〉(〈문예〉 1939년 2월) 이래로 내선일체 정책에 찬동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면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조선인으로부터 당시의 전쟁 협력을 추궁받으면서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었다.
--- p.341
인민군으로 종군하고 전사했던 김사량의 〈바다가 보인다〉는 점령군과 일본 정부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던 김달수의 번역으로 〈중앙공론〉(1953년 가을호 문예특집)에 실린, 인민군 측 시각에서 쓴 종군기였다.
당시 김달수는 일본공산당 국제파의 일원으로 분류되었으며 일본공산당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조직인 재일 조선문화단체연합회로부터도 ‘백안시’되고 있었다.
--- p.347
출판사 리뷰
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열쇠, 출판문화
19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출판사나 신문사의 경영인, 편집인의 회고록, 일지, 경영자료 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조사하는 지은이에 따르면 예나 지금이나 잡지나 출판 기획자는 시대변화에 상당히 민감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출판 미디어를 사양산업으로 취급하지만 별다른 놀잇거리가 없었던 과거에는 세대, 젠더, 계층, 민족을 불문하고 책 읽기가 중요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지은이는 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출판문화만큼 훌륭한 재료는 없다고 믿는다.
일본제국이 전쟁 프로파간다를 위해 하야시 후미코 등 순문학 소설가들을 전장에 보내 종군기를 쓰게 하고 고단샤나 아사히 신문사 사장을 대외 선전을 위한 전쟁 담당 부서에 동원하는 이유를 촘촘히 그려냈다.
더불어 하야시 후미코와 소설가 최정희의 관련성, 1930년대 일본의 대표적 잡지 〈개조〉의 야마모토 사네히코에 대한 〈동아일보〉 간부들의 접대 등도 시야에 넣었다.
강력한 검열에도 살아남은 ‘불령’한 책들
지은이가 이 책을 관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강력한 검열도 출판문화를 죽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제국은 내무성 산하에 출판경찰을 두고 있었고 사상검사도 활약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판매금지 명령이 떨어지더라도 감시망을 피해 수레를 동원한 ‘전도 행상’ 등을 통해 유통시키고 수익을 내는 출판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불어 일본제국의 합법/비합법 출판자본이 식민지 조선의 출판시장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파고들었다.
예컨대 일본제국의 정치 권력이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 할수록 사회주의 서적을 열망하는 독자가 늘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제국의 탄압이 자본생산의 동력이 되었음을 논증하려고 했고, 그 지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힌트를 얻고자 했다.
일본어의 역할에 관한 설명도 눈에 띈다.
침략자가 강제하는 언어였지만 조선어 문헌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강한 현실에서 저항을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급했던 것도 일본어 서적이었다는 것이다.
또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 식민지에서 출세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본어 서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러일전쟁에서 내선일체를 거쳐 한국전쟁까지
이 책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프롤레타리아〉에서는 러일전쟁 후에 간행된 최초의 〈공산당선언〉의 일본어 번역에서 proletariat의 번역어로써 ‘평민’이 선택 과정과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을 논했다.
2장 〈도서관〉에서는 제국의 아카이브로써 조선의 도서관에 주목했고, 그것들이 어떤 말과 사람들을 포섭하고 배제했는가를 논증했다.
3장 〈불령선인〉과 4장 〈검열〉에서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본토에서 출판한 후 내무성 도서과에서 검열을 받은 후 한반도에 반입을 하는 전술을 전개했음을 논한다.
또 ‘불령’한 조선어 미디어를 만든 당사자들이 내무성의 ‘내열(사전 조율)’을 요구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은 사전에 자신의 정보를 당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디어 유통의 가능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아슬아슬한 교섭이었다.
5장 〈자본〉과 6장 〈식민지〉는 일본 내지와 조선의 미디어 자본이 ‘불령’함을 생성하는 씨앗을 배태하면서 독서환경과 시장을 재편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해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7장 〈번역〉에서는 중일전쟁 당시 미디어 통제가 제국의 중심인 도쿄와 식민지 조선에서 위계관계를 재생산하면서 연동함으로써 일어나는 문화 현상에 주목했다.
8장 〈전쟁〉에서는 일본 미디어의 한국전쟁 보도가 구 일본제국의 지적 체계와 경제력의 부활(한국전쟁 참전)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면서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적인 평화국가, 일본’의 자화상 그리기에 부심하는 모습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 전문가들이 꼽은 ‘지금 꼭 권하고 싶은 책’
이 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로 쓰인 책이면서 식민지를 전면에 내세운 단행본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많은 일본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마이니치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그리고 교도통신사(23개 지방신문 전재)에서 서평을 실었고, 〈도서신문〉?〈주간 독서인〉 등 서평 전문 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24년 상반기를 대표하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의 출판 유통을 조망하면서 ‘내지’와 식민지의 복잡한 교섭과 갈등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근대사를 트랜스내셔널하게 재해석한 좋은 책”(후쿠마 요시아키 교토대학 교수), “문학사, 문화사, 사상사, 미디어사, 사회운동사 등 복수의 영역을 포괄하는 연구서”(고미부치 노리츠구 와세다대학 교수), “한국과 책 전문가 45인이 ‘지금 꼭 권하고 싶은 책’으로 선택”(마츠이 리에 아토미학원대학 교수) 등의 서평이 이 책의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1900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출판사나 신문사의 경영인, 편집인의 회고록, 일지, 경영자료 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조사하는 지은이에 따르면 예나 지금이나 잡지나 출판 기획자는 시대변화에 상당히 민감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출판 미디어를 사양산업으로 취급하지만 별다른 놀잇거리가 없었던 과거에는 세대, 젠더, 계층, 민족을 불문하고 책 읽기가 중요한 취미 생활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지은이는 제국의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출판문화만큼 훌륭한 재료는 없다고 믿는다.
일본제국이 전쟁 프로파간다를 위해 하야시 후미코 등 순문학 소설가들을 전장에 보내 종군기를 쓰게 하고 고단샤나 아사히 신문사 사장을 대외 선전을 위한 전쟁 담당 부서에 동원하는 이유를 촘촘히 그려냈다.
더불어 하야시 후미코와 소설가 최정희의 관련성, 1930년대 일본의 대표적 잡지 〈개조〉의 야마모토 사네히코에 대한 〈동아일보〉 간부들의 접대 등도 시야에 넣었다.
강력한 검열에도 살아남은 ‘불령’한 책들
지은이가 이 책을 관통해서 주장하는 것은 강력한 검열도 출판문화를 죽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제국은 내무성 산하에 출판경찰을 두고 있었고 사상검사도 활약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판매금지 명령이 떨어지더라도 감시망을 피해 수레를 동원한 ‘전도 행상’ 등을 통해 유통시키고 수익을 내는 출판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불어 일본제국의 합법/비합법 출판자본이 식민지 조선의 출판시장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파고들었다.
예컨대 일본제국의 정치 권력이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 할수록 사회주의 서적을 열망하는 독자가 늘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제국의 탄압이 자본생산의 동력이 되었음을 논증하려고 했고, 그 지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힌트를 얻고자 했다.
일본어의 역할에 관한 설명도 눈에 띈다.
침략자가 강제하는 언어였지만 조선어 문헌에 대한 검열이 상대적으로 강한 현실에서 저항을 꿈꾸는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급했던 것도 일본어 서적이었다는 것이다.
또 독서가 취미인 사람들, 식민지에서 출세를 꿈꾸는 이들에게 일본어 서적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러일전쟁에서 내선일체를 거쳐 한국전쟁까지
이 책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프롤레타리아〉에서는 러일전쟁 후에 간행된 최초의 〈공산당선언〉의 일본어 번역에서 proletariat의 번역어로써 ‘평민’이 선택 과정과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을 논했다.
2장 〈도서관〉에서는 제국의 아카이브로써 조선의 도서관에 주목했고, 그것들이 어떤 말과 사람들을 포섭하고 배제했는가를 논증했다.
3장 〈불령선인〉과 4장 〈검열〉에서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본토에서 출판한 후 내무성 도서과에서 검열을 받은 후 한반도에 반입을 하는 전술을 전개했음을 논한다.
또 ‘불령’한 조선어 미디어를 만든 당사자들이 내무성의 ‘내열(사전 조율)’을 요구했던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은 사전에 자신의 정보를 당국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디어 유통의 가능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아슬아슬한 교섭이었다.
5장 〈자본〉과 6장 〈식민지〉는 일본 내지와 조선의 미디어 자본이 ‘불령’함을 생성하는 씨앗을 배태하면서 독서환경과 시장을 재편하고 이를 통해 이익을 취해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7장 〈번역〉에서는 중일전쟁 당시 미디어 통제가 제국의 중심인 도쿄와 식민지 조선에서 위계관계를 재생산하면서 연동함으로써 일어나는 문화 현상에 주목했다.
8장 〈전쟁〉에서는 일본 미디어의 한국전쟁 보도가 구 일본제국의 지적 체계와 경제력의 부활(한국전쟁 참전)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면서 폭력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적인 평화국가, 일본’의 자화상 그리기에 부심하는 모습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 전문가들이 꼽은 ‘지금 꼭 권하고 싶은 책’
이 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일본어로 쓰인 책이면서 식민지를 전면에 내세운 단행본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많은 일본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마이니치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그리고 교도통신사(23개 지방신문 전재)에서 서평을 실었고, 〈도서신문〉?〈주간 독서인〉 등 서평 전문 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24년 상반기를 대표하는 책으로 선정되었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의 출판 유통을 조망하면서 ‘내지’와 식민지의 복잡한 교섭과 갈등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근대사를 트랜스내셔널하게 재해석한 좋은 책”(후쿠마 요시아키 교토대학 교수), “문학사, 문화사, 사상사, 미디어사, 사회운동사 등 복수의 영역을 포괄하는 연구서”(고미부치 노리츠구 와세다대학 교수), “한국과 책 전문가 45인이 ‘지금 꼭 권하고 싶은 책’으로 선택”(마츠이 리에 아토미학원대학 교수) 등의 서평이 이 책의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6월 15일
- 쪽수, 무게, 크기 : 418쪽 | 616g | 152*224*21mm
- ISBN13 : 9791156122968
- ISBN10 : 1156122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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