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로스 극장
Description
책소개
전작 《니체 극장》, 《하이데거 극장》을 통해 철학자의 깊은 내면세계와 장대한 사유의 공간을 탐사했던 고명섭이 지난 3년 반의 시간 동안 한국 정치 무대에서 펼쳐진 집권-반란-몰락의 드라마를 역사와 철학의 눈으로 조망하는 책 《카이로스 극장》을 출간했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내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영구 집권을 꿈꾸며 반란을 도모했다가 결국 시민들의 저항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시기를 관통하며 쓴 이 책은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한 시민의 기록이자, 이 과정을 동서고금의 사상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하여 한국 사회의 철학적 자산으로 남기고자 하는 철학하는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이 격렬한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명명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달리, ‘카이로스’는 미래에서 시작해 과거를 밝힘으로써 현재를 열어젖히는 시간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빛으로 삼아 과거를 해석함으로써 지금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이 카이로스다.
즉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그 꿈에 비추어 지나온 역사를 읽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은 폐기할 것인지 결단해야 할 시간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이 결단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인식, 새로운 눈을 저자는 함석헌의 표현을 빌려 ‘역사의 뜻’을 알아보는 일이라 말한다.
이 책은 지난 3년 반의 시간 동안 한국 시민들이 경험한 무도한 정치권력의 상승과 몰락, 그로 인해 사회가 겪은 충격과 진통을 읽어낼 틀을 제시한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철학, 신화와 문학, 종교와 예술을 넘나들며 한국 민주주의에 찾아온 위기를 폭넓은 맥락에서 조망하며,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변화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의 힘에 주목하게 한다.
저자가 펼쳐 보이는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다시 세우고 가꾸어야 할 민주주의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내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영구 집권을 꿈꾸며 반란을 도모했다가 결국 시민들의 저항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시기를 관통하며 쓴 이 책은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한 시민의 기록이자, 이 과정을 동서고금의 사상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하여 한국 사회의 철학적 자산으로 남기고자 하는 철학하는 사람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이 격렬한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 명명한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달리, ‘카이로스’는 미래에서 시작해 과거를 밝힘으로써 현재를 열어젖히는 시간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빛으로 삼아 과거를 해석함으로써 지금 할 일을 알려주는 것이 카이로스다.
즉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그 꿈에 비추어 지나온 역사를 읽고, 거기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은 폐기할 것인지 결단해야 할 시간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이 결단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인식, 새로운 눈을 저자는 함석헌의 표현을 빌려 ‘역사의 뜻’을 알아보는 일이라 말한다.
이 책은 지난 3년 반의 시간 동안 한국 시민들이 경험한 무도한 정치권력의 상승과 몰락, 그로 인해 사회가 겪은 충격과 진통을 읽어낼 틀을 제시한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철학, 신화와 문학, 종교와 예술을 넘나들며 한국 민주주의에 찾아온 위기를 폭넓은 맥락에서 조망하며,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변화의 주체로 등장한 시민의 힘에 주목하게 한다.
저자가 펼쳐 보이는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다시 세우고 가꾸어야 할 민주주의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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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 역사의 뜻이 밝히는 카이로스의 빛
제1부 좋은 정치의 조건 2022년
1.
크세노폰이 말하는 좋은 지도자의 조건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3.
소포클레스 합창이 들려주는 히브리스와 네메시스의 변증법
4.
우물에 빠진 탈레스, 생각에 잠긴 소크라테스
5.
“나라는 배, 정치가는 조타수” 플라톤의 말이 가리키는 것
6.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있다면
7.
“그 많던 연설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한비자와 데모스테네스
8.
억압된 것들은 다시 돌아온다
9.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10.
권력 중독자의 오만을 제어하려면
11.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12.
알키비아데스를 감전시키는 소크라테스의 권위
13.
루소와 로베스피에르가 꿈꾼 나라
14.
정치의 악순환을 막을 길은 없는가
15.
헤르메스의 동굴에서 법기술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제2부 더 나은 세계로 가는 길 2023년
16.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17.
‘데카르트의 광인’을 둘러싼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
18.
권력자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지 않으려면
19.
‘사회진화론’이라는 유령
20.
‘불행한 의식’과 ‘인생이라는 연극’
21.
우르바누스의 ‘십자군’인가, 라이문두스의 ‘동서 협력’인가
22.
마니의 포용인가, 슈미트의 적대인가
23.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인도
24.
샤머니즘, 무속 신앙, 무속 정치
25.
아브락사스에게서 배우는 한반도 평화의 길
26.
‘항일독립군인가 간도특설대인가’ 역사의식과 집단기억
27.
누가 ‘욥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28.
남방큰돌고래가 여는 인간?지구 공존의 길
제3부 정치 판단력과 창조적 영감 2024년
29.
정치 문해력이 필요한 시대
30.
성스러움이 사라진 종교에 남는 것
31.
신념도 없고 책임도 모르는 ‘권력정치’의 폐해
32.
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33.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34.
‘아레오파고스 권력 농단’이 부른 아테네 사법 민주화
35.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건 왜 그토록 어려운가
36.
저열화 경쟁 부르는 남북의 ‘짝패 관계’
37.
“교만은 파멸을 부른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경고
38.
일제 부역자들의 상식과 반상식
39.
윤리학 없는 논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0.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41.
우리는 역사 안에서 현재를 이겨내며 미래로 간다
제4부 카이로스의 빛 2025년
42.
내란 수괴의 무사유와 아이히만의 무사유
43.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44.
유사 파시즘 불러내는 내란 세력의 기괴한 믿음
45.
에로스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46.
나르시시즘적 권력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47.
정치가는 민주주의 교육자가 될 수 있는가
48.
히드라의 머리를 없애려면 몸통을 해체해야 한다
49.
언어가 타락하면 공동체가 타락한다
50.
역사는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다
에필로그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강증산의 여성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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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좋은 정치의 조건 2022년
1.
크세노폰이 말하는 좋은 지도자의 조건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3.
소포클레스 합창이 들려주는 히브리스와 네메시스의 변증법
4.
우물에 빠진 탈레스, 생각에 잠긴 소크라테스
5.
“나라는 배, 정치가는 조타수” 플라톤의 말이 가리키는 것
6.
우리가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있다면
7.
“그 많던 연설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한비자와 데모스테네스
8.
억압된 것들은 다시 돌아온다
9.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10.
권력 중독자의 오만을 제어하려면
11.
‘리바이어던’은 어떻게 몰락하는가
12.
알키비아데스를 감전시키는 소크라테스의 권위
13.
루소와 로베스피에르가 꿈꾼 나라
14.
정치의 악순환을 막을 길은 없는가
15.
헤르메스의 동굴에서 법기술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제2부 더 나은 세계로 가는 길 2023년
16.
키케로의 ‘의무론’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17.
‘데카르트의 광인’을 둘러싼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
18.
권력자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지 않으려면
19.
‘사회진화론’이라는 유령
20.
‘불행한 의식’과 ‘인생이라는 연극’
21.
우르바누스의 ‘십자군’인가, 라이문두스의 ‘동서 협력’인가
22.
마니의 포용인가, 슈미트의 적대인가
23.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인도
24.
샤머니즘, 무속 신앙, 무속 정치
25.
아브락사스에게서 배우는 한반도 평화의 길
26.
‘항일독립군인가 간도특설대인가’ 역사의식과 집단기억
27.
누가 ‘욥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28.
남방큰돌고래가 여는 인간?지구 공존의 길
제3부 정치 판단력과 창조적 영감 2024년
29.
정치 문해력이 필요한 시대
30.
성스러움이 사라진 종교에 남는 것
31.
신념도 없고 책임도 모르는 ‘권력정치’의 폐해
32.
날뛰는 말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33.
창조적 영감은 어떻게 솟아나는가
34.
‘아레오파고스 권력 농단’이 부른 아테네 사법 민주화
35.
잘못된 생각을 바꾸는 건 왜 그토록 어려운가
36.
저열화 경쟁 부르는 남북의 ‘짝패 관계’
37.
“교만은 파멸을 부른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경고
38.
일제 부역자들의 상식과 반상식
39.
윤리학 없는 논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0.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41.
우리는 역사 안에서 현재를 이겨내며 미래로 간다
제4부 카이로스의 빛 2025년
42.
내란 수괴의 무사유와 아이히만의 무사유
43.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44.
유사 파시즘 불러내는 내란 세력의 기괴한 믿음
45.
에로스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46.
나르시시즘적 권력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47.
정치가는 민주주의 교육자가 될 수 있는가
48.
히드라의 머리를 없애려면 몸통을 해체해야 한다
49.
언어가 타락하면 공동체가 타락한다
50.
역사는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다
에필로그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강증산의 여성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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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칸트의 본디 생각에 입각해서 보면,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분업 체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 ‘최저 임금 제도’나 ‘노동 시간 규제’ 같은 것이 바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사물화하는 자본의 파도에 맞서 기나긴 투쟁을 통해 쌓은 사회적 방파제 가운데 일부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이런 사회적 방어 장치를 뜯어내겠다는 공언이 유력 후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의 책무를 생각하지 않는 시대 역행적인 발언이다.
자본의 탐욕에 재갈을 물리고 자본의 파괴적 힘을 다스리는 것이 나라가 해야 할 일 아닌가.
나라는 그런 일을 할 때 비로소 나라다워진다.
구성원 다수의 취약한 인간성을 보호하는 장치를 철폐하는 데 국가 권력을 쓰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쓰면서 그 자신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타자의 인간성을 파괴할 때 그 자신의 인간성도 파괴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중에서
탈레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소크라테스는 하늘로 향하던 눈을 땅으로 돌렸다.
이 두 방향의 사유를 통괄하여 인간과 인간의 삶에 관해 묻는 물음의 집적태가 ‘인문학’일 것이다.
여기서 칸트의 무덤에 새겨진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을 떠올려봄 직하다.
“더 자주 더 오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그것이다.” 별과 도덕을 하나로 이어 경외와 경탄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이 바로 인문학의 마음일 것이다.
인문학은 불필요하다는 말이 틈만 나면 쏟아진다.
트라키아 하녀의 비웃음과 다를 바 없다.
대선 기간에 공공연히 인문학을 부정하던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취임을 앞두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쓸모없는 인문학’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기류가 더 거세질 게 뻔하다.
그러나 인문학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돈 되는 것에만 눈을 돌리는 세계에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공동체가 들어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 「인문학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맞서」 중에서
마키아벨리는 폴리비오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런 파멸의 순환을 막으려면 군주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의 장점을 살린 혼합정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혼합형 공화정은 그 뒤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을 거쳐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로 이어졌다.
또 이 혼합정체가 보편성을 확보한 뒤로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을 밀어내고 정권교체론이 들어섰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맡을 때 정치가 안정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정치의 안정과 향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힘과 좋은 힘이 경쟁하는 방식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쁜 힘이 좋은 힘을 제압하는 방식의 정권교체라면 그런 교체는 정치의 성숙도 나라의 발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정치 변동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공익에 헌신하는 마음을 앗아감으로써, 사익과 탐욕이 법의 정신을 비웃으며 활개 치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부른다.
이 역사의 악순환을 저지할 길은 없는가.
--- 「정치의 악순환을 막을 길은 없는가」 중에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창조와 부정의 사이클을 만들어나가는 작가의 자기억제다.
창조적 활동을 거리를 두고 봄으로써 그 열정을 억누르고, 동시에 파괴적 활동이 완전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그 열정을 제어하는 것이 자기억제다.
여기에 창작의 비밀이 있다.
자기억제는 인간의 자기창조에도 핵심 동력이 된다.
분출하는 열정과 동일한 강도로 그 열정을 제어함으로써 팽팽한 활과 같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슐레겔은 보았다.
이것이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이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체화한 인간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언제나 형성 중인 인간이며 자기의심을 통해 자기 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봄으로써 자기 행동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를 넘어서려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다.
이런 태도는 다른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권력의 자기중심성에 갇히지 않으려면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대로를 활보하는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목격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중에서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함석헌이 말한 대로 역사는 “예언이자 심판”이다.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받드느냐에 따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이냐?’는 물음의 답도 달라진다.
역사의식이 뒤틀리면 미래의 역사가 뒤틀린다.
나라와 동포를 팔아넘긴 자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뉴라이트’ 집권 세력의 집요한 역사 바꿔치기 작업은 세상이 바뀌면 또다시 나라를 바치고 큰 나라의 마름 노릇을 하겠다는 집단 고백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엔 자존의식도 자기긍정도 없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국가를 이끌면 나라 전체의 윤리의식이 저열해진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니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힘이 정의를 대체하고 각자도생이 생존의 법칙이 된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은 나라, 역사의 참뜻을 묻지 않는 나라는 들개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다.
---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에서
해월의 가르침대로 도덕을 자연 만물에까지 확장하면, 사물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전혀 다르게 열릴 수 있다.
경물이 도덕의 궁극이라는 해월 사상의 참뜻을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해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의 사물 학대가 그 끝에 이르러 사물이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와서야 거대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반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에게 법인격을 주자는 운동이다.
동식물, 더 나아가 하천과 호수 같은 자연물을 자립적 권리 주체로 인정해주자는 것은 근대법 체계를 뛰어넘는 발상이다.
…… 동식물과 자연물이 인격을 부여받으면 이 근대법 체계를 뚫고 사람을 후견인으로 삼아 ‘비인간’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남방큰돌고래가 기수가 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구 공생의 길을 여는 것이다.
…… 그때의 중심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그 근대적 주체의 오만을 비워낸 ‘빈 중심’이다.
인간이 빈 중심으로 서서 만물을 인간의 이웃으로 받들고 모시는 그때가 인간이 비로소 근대의 몽매에서 깨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 「경천도 경인도 오직 경물에 이르러서야 그 도덕을 완성할 수 있다」 중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정치에 대한 소명’을 지닌 인간이라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동시에 견지해야 한다.
신념윤리가 맹목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책임윤리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며, 반대로 책임윤리가 최후까지 관철되려면 신념윤리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 윤리를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는 하나로 묶여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온전한 정치를 구현한다.
그렇다면 이런 ‘윤리정치’에 진정으로 대립하는 것은 무엇일까? 베버가 이 강연에서 짤막하지만 강력한 언어로 비판하는 ‘권력정치’가 윤리정치의 맞은편에 있는 정치 유형이다.
베버가 말하는 권력정치는 윤리적?이념적 가치가 아닌,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정치다.
권력이 주는 ‘위세’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정치가 노리는 것이다.
……
“우리는 권력정치 신조를 지닌 전형적인 인물들이 갑자기 내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고,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속이 텅 빈 제스처의 이면에 어떤 허약함과 무력함이 숨겨져 있는지 안다.” …… 안타까운 것은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권력이 추는 춤에 휩쓸려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정치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권력정치가 발호하는 곳에서는 국민의 삶도 멍이 든다.
--- 「권력정치가 발호하는 곳에서는 국민의 삶도 멍이 든다」 중에서
아테네 민중은 재판의 공정성이 무너지는 데 분노해 사법제도의 혁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기원전 461년 에피알데스가 주도한 사법개혁이다.
이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재판을 진행하는 배심원제도가 등장했다.
…… 배심원제도는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담합 관행을 무너뜨리고 시민주권을 사법 영역 전반으로 확대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점이었다.
아테네 사법 민주화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 소수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와 관행은 국민의 저항에 부닥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 법치라는 공화국의 정신은 법 위에서 법을 사유화하는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방종한 특권 세력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이 검찰 권력이다.
아테네 시민의 주권적 명령으로 사법권을 박탈당한 아레오파고스의 사례는 이 나라 검찰 권력의 미래를 예고한다.
--- 「아테네 사법 민주화가 예고하는 검찰 권력의 미래」 중에서
모든 공동체는 언어 공동체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다.
그 언어가 어떤 수준의 언어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의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을 동력으로 삼은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더 무서운 것은 정치 언어의 타락이다.
정치 언어는 압도적인 위력을 지녔기에 그 언어의 타락은 나라 전체의 타락을 불러온다.
민주주의와 민주 헌정을 파괴하는 내란 행위를 ‘자유대한민국’을 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구국의 결단인 양 묘사하는 정치 언어는 언어의 몰락이고 죽음이다.
그런 언어를 실어 나르는 미디어는 자멸을 선동하는 미디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그 언어가 일그러지면 우리의 생각도 일그러진다.
언어는 눈이고 창이다.
언어가 이기심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넓게 볼 수 없고 높게 볼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사람 사는 공동체가 되려면 언어가 맑아져야 한다.
좋은 정치는 언어를 정련함으로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의 공동체 언어는 탐욕의 언어, 짐승의 울부짖음을 넘어 더 멀리 날아야 한다.
유한한 존재로서 인간은 분업 체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수단으로 쓰더라도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한다는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다.
…… ‘최저 임금 제도’나 ‘노동 시간 규제’ 같은 것이 바로 인간을 수단화하고 사물화하는 자본의 파도에 맞서 기나긴 투쟁을 통해 쌓은 사회적 방파제 가운데 일부다.
지난 대선 기간 중에 이런 사회적 방어 장치를 뜯어내겠다는 공언이 유력 후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의 책무를 생각하지 않는 시대 역행적인 발언이다.
자본의 탐욕에 재갈을 물리고 자본의 파괴적 힘을 다스리는 것이 나라가 해야 할 일 아닌가.
나라는 그런 일을 할 때 비로소 나라다워진다.
구성원 다수의 취약한 인간성을 보호하는 장치를 철폐하는 데 국가 권력을 쓰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단으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쓰면서 그 자신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타자의 인간성을 파괴할 때 그 자신의 인간성도 파괴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의 도덕법칙이 말하는 것」 중에서
탈레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고 소크라테스는 하늘로 향하던 눈을 땅으로 돌렸다.
이 두 방향의 사유를 통괄하여 인간과 인간의 삶에 관해 묻는 물음의 집적태가 ‘인문학’일 것이다.
여기서 칸트의 무덤에 새겨진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을 떠올려봄 직하다.
“더 자주 더 오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커지는 경탄과 경외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그것이다.” 별과 도덕을 하나로 이어 경외와 경탄으로 바라보는 그 마음이 바로 인문학의 마음일 것이다.
인문학은 불필요하다는 말이 틈만 나면 쏟아진다.
트라키아 하녀의 비웃음과 다를 바 없다.
대선 기간에 공공연히 인문학을 부정하던 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취임을 앞두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쓸모없는 인문학’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기류가 더 거세질 게 뻔하다.
그러나 인문학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돈 되는 것에만 눈을 돌리는 세계에 인간다운 삶, 인간다운 공동체가 들어설 수 없음은 분명하다.
--- 「인문학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맞서」 중에서
마키아벨리는 폴리비오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런 파멸의 순환을 막으려면 군주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의 장점을 살린 혼합정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혼합형 공화정은 그 뒤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론을 거쳐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로 이어졌다.
또 이 혼합정체가 보편성을 확보한 뒤로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을 밀어내고 정권교체론이 들어섰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가 번갈아가며 정권을 맡을 때 정치가 안정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정치의 안정과 향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힘과 좋은 힘이 경쟁하는 방식의 정권교체가 아니라, 나쁜 힘이 좋은 힘을 제압하는 방식의 정권교체라면 그런 교체는 정치의 성숙도 나라의 발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하는 정치 변동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공익에 헌신하는 마음을 앗아감으로써, 사익과 탐욕이 법의 정신을 비웃으며 활개 치는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부른다.
이 역사의 악순환을 저지할 길은 없는가.
--- 「정치의 악순환을 막을 길은 없는가」 중에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창조와 부정의 사이클을 만들어나가는 작가의 자기억제다.
창조적 활동을 거리를 두고 봄으로써 그 열정을 억누르고, 동시에 파괴적 활동이 완전한 파괴로 끝나지 않도록 그 열정을 제어하는 것이 자기억제다.
여기에 창작의 비밀이 있다.
자기억제는 인간의 자기창조에도 핵심 동력이 된다.
분출하는 열정과 동일한 강도로 그 열정을 제어함으로써 팽팽한 활과 같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슐레겔은 보았다.
이것이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이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체화한 인간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언제나 형성 중인 인간이며 자기의심을 통해 자기 확신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 봄으로써 자기 행동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를 넘어서려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다.
이런 태도는 다른 누구보다 권력자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권력의 자기중심성에 갇히지 않으려면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대로를 활보하는 동화 속 이야기를 현실에서 목격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 「권력자는 아이러니스트로 거듭나야 한다」 중에서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 항일독립군을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그 독립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를 기억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함석헌이 말한 대로 역사는 “예언이자 심판”이다.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받드느냐에 따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이냐?’는 물음의 답도 달라진다.
역사의식이 뒤틀리면 미래의 역사가 뒤틀린다.
나라와 동포를 팔아넘긴 자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뉴라이트’ 집권 세력의 집요한 역사 바꿔치기 작업은 세상이 바뀌면 또다시 나라를 바치고 큰 나라의 마름 노릇을 하겠다는 집단 고백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엔 자존의식도 자기긍정도 없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쥐고 국가를 이끌면 나라 전체의 윤리의식이 저열해진다.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니 타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힘이 정의를 대체하고 각자도생이 생존의 법칙이 된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은 나라, 역사의 참뜻을 묻지 않는 나라는 들개의 소굴이 될 수밖에 없다.
---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중에서
해월의 가르침대로 도덕을 자연 만물에까지 확장하면, 사물을 보는 우리의 안목이 전혀 다르게 열릴 수 있다.
경물이 도덕의 궁극이라는 해월 사상의 참뜻을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미증유의 재난에 직면해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의 사물 학대가 그 끝에 이르러 사물이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와서야 거대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반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에게 법인격을 주자는 운동이다.
동식물, 더 나아가 하천과 호수 같은 자연물을 자립적 권리 주체로 인정해주자는 것은 근대법 체계를 뛰어넘는 발상이다.
…… 동식물과 자연물이 인격을 부여받으면 이 근대법 체계를 뚫고 사람을 후견인으로 삼아 ‘비인간’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남방큰돌고래가 기수가 돼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지구 공생의 길을 여는 것이다.
…… 그때의 중심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의 지배자라는 의미의 중심이 아니라, 그 근대적 주체의 오만을 비워낸 ‘빈 중심’이다.
인간이 빈 중심으로 서서 만물을 인간의 이웃으로 받들고 모시는 그때가 인간이 비로소 근대의 몽매에서 깨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 「경천도 경인도 오직 경물에 이르러서야 그 도덕을 완성할 수 있다」 중에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정치에 대한 소명’을 지닌 인간이라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동시에 견지해야 한다.
신념윤리가 맹목적인 것이 되지 않으려면 책임윤리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며, 반대로 책임윤리가 최후까지 관철되려면 신념윤리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두 가지 윤리를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는 하나로 묶여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온전한 정치를 구현한다.
그렇다면 이런 ‘윤리정치’에 진정으로 대립하는 것은 무엇일까? 베버가 이 강연에서 짤막하지만 강력한 언어로 비판하는 ‘권력정치’가 윤리정치의 맞은편에 있는 정치 유형이다.
베버가 말하는 권력정치는 윤리적?이념적 가치가 아닌, 권력의 획득과 향유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정치다.
권력이 주는 ‘위세’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정치가 노리는 것이다.
……
“우리는 권력정치 신조를 지닌 전형적인 인물들이 갑자기 내적으로 붕괴하는 것을 보고, 잘난 체하고 우쭐대지만 실상 속이 텅 빈 제스처의 이면에 어떤 허약함과 무력함이 숨겨져 있는지 안다.” …… 안타까운 것은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권력이 추는 춤에 휩쓸려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권력정치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만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다.
권력정치가 발호하는 곳에서는 국민의 삶도 멍이 든다.
--- 「권력정치가 발호하는 곳에서는 국민의 삶도 멍이 든다」 중에서
아테네 민중은 재판의 공정성이 무너지는 데 분노해 사법제도의 혁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가 기원전 461년 에피알데스가 주도한 사법개혁이다.
이 개혁으로 시민이 직접 재판을 진행하는 배심원제도가 등장했다.
…… 배심원제도는 소수 특권층이 서로서로 봐주는 담합 관행을 무너뜨리고 시민주권을 사법 영역 전반으로 확대한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점이었다.
아테네 사법 민주화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 소수가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와 관행은 국민의 저항에 부닥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 법치라는 공화국의 정신은 법 위에서 법을 사유화하는 특권층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방종한 특권 세력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이 검찰 권력이다.
아테네 시민의 주권적 명령으로 사법권을 박탈당한 아레오파고스의 사례는 이 나라 검찰 권력의 미래를 예고한다.
--- 「아테네 사법 민주화가 예고하는 검찰 권력의 미래」 중에서
모든 공동체는 언어 공동체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다.
그 언어가 어떤 수준의 언어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의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을 동력으로 삼은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더 무서운 것은 정치 언어의 타락이다.
정치 언어는 압도적인 위력을 지녔기에 그 언어의 타락은 나라 전체의 타락을 불러온다.
민주주의와 민주 헌정을 파괴하는 내란 행위를 ‘자유대한민국’을 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구국의 결단인 양 묘사하는 정치 언어는 언어의 몰락이고 죽음이다.
그런 언어를 실어 나르는 미디어는 자멸을 선동하는 미디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그 언어가 일그러지면 우리의 생각도 일그러진다.
언어는 눈이고 창이다.
언어가 이기심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넓게 볼 수 없고 높게 볼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사람 사는 공동체가 되려면 언어가 맑아져야 한다.
좋은 정치는 언어를 정련함으로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의 공동체 언어는 탐욕의 언어, 짐승의 울부짖음을 넘어 더 멀리 날아야 한다.
--- 「언어가 타락하면 공동체가 타락한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 정치 무대에서 펼쳐진 내란 세력의 집권-몰락 드라마
‘맥베스적’ 정치 서사를 읽어가는 역사적 통찰과 철학적 전망
‘동서고금의 사유’를 하나로 엮는 우리 지성사의 새로운 풍경
검찰 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모든 비판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온갖 사적 이익을 취하던 끝에 내란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 절대 권력의 꿈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저자는 이를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와 겹쳐 읽는다.
피로 왕관을 찬탈한 맥베스는 불안에 떨다 폭군이 되고 반란을 자초한다.
반란군의 창끝이 코앞에 다가오고, 부인마저 목숨을 버렸을 때에야 그는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며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절망 속에서 깨닫는다.
이 책은 오늘의 한국 정치 무대에서 이 맥베스의 서사를 고스란히 재연한 내란 세력의 집권-몰락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구성 또한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집필 순서를 따랐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시 벌어졌던 사건들과 저자가 제시하는 풍부한 인문학적 텍스트를 교차해 읽으며,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 거대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역사적 통찰과 철학적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에 쓴 글에서 저자는 배를 폴리스에, 정치가를 조타수에,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을 조타술에 비유한 플라톤의 《정치가》를 인용한다.
“조타수와 선원들의 무능으로 배가 침몰해 사라지듯이, ‘가장 중대한 것’(통치술)을 모르는 자들의 무능으로 많은 나라가 몰락하고 있고 몰락해왔으며 몰락할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선주(민중)들의 눈을 가리고 권력을 얻어 공동체의 재산을 탕진하는 선원(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국가》를 인용하며, 사이비 조타수가 키를 잡게 되면 배가 춤을 추다 난파할 수 있다는 2000년 전 플라톤의 경고를 전한다.
이러한 경고가 무색하게도 당시 한국 사회라는 배는 난파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현시점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플라톤의 이 오랜 경고를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한편, 저자는 해석과 통역의 신이자 은폐와 왜곡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 신화의 양면성과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나란히 읽으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타락할 때 초래되는 결과를 우려한다.
법치란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채 보편적 이성 자체가 다스린다는 뜻인데,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자들이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헤르메스의 모습을 한다면 시민들은 더 이상 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저자의 이런 진단은 사법부와 검찰의 방해로 내란 세력에 대한 단죄가 여의치 않은 현시점에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법이 정적을 공격하는 부당한 무기가 될 때, 법이 반대자를 치는 날카로운 도구가 될 때, 그 법은 법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암수가 된다.
‘욕구 없는 정신’으로서 법은 사라지고 ‘정신 없는 욕구’만 날뛴다.
권한을 남용해 있는 죄는 묻어버리고 없는 죄는 만들어낼 때, 그 부당행위에 법원이 가담해 법의 정신을 희롱할 때, 법은 있되 법이 없는 무법 상태가 벌어진다.
법을 다루는 법기술자들이 법의 적이 된다.
우리는 국가 권력이 고문과 조작으로 범법자를 만들어내고 판사가 그렇게 만들어진 범법자에게 정찰제 가격을 매기듯 형을 선고하던 가혹하고 끔찍한 시대를 지나왔다.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법기술자들이 파놓은 이 어두운 헤르메스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
- 129~130쪽
이처럼 저자는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에 집적된 온갖 병폐와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지난 3년 반의 시간을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신화와 종교, 문학과 예술 텍스트와 엮어 풍부하게 해석해낸다.
드넓은 인문학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2020년대 한국 사회가 경험한 한 편의 강렬한 ‘정치 철학 드라마’를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의 정치사, 지성사 속에 자리매김해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가
역사의 뜻을 밝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너와 나의 자유가 이루는 공동 존재의 꿈을 찾는 카이로스의 시간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인 카이로스는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뜻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혐오의 말들이 범람하며 역사 인식을 뒤흔드는 일들이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환한 빛 속에서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긴 말이다.
저자는 오늘의 현실은 기나긴 역사의 집적물이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제대로 보려면 지나온 시간이 만든 역사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 즉 과거로부터 이어져 우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지를 가릴 수 있는 눈, 그 눈이 열리는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이 책은 그 눈을 열어주는 인식의 빛, 섬광처럼 찾아오는 통찰과 결단의 순간에 필요한 지적 토양을 제공한다.
저자는 미래에서 오는 빛으로 과거를 새롭게 읽어 현재를 밝히는 일, 즉 한국 사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지성의 작용이 필요한 시점임을 역설하며, 함석헌이 1960년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내며 세운 ‘역사의 뜻’이라는 개념을 불러들인다.
함석헌이 말하는 역사의 뜻은 우리 공동체의 열망, 공동체가 함께 꾸는 공동의 꿈이다.
또한 함석헌은 역사는 ‘심판인 동시에 예언’이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기억해 계승해나갈지를 판단하고, 만들고 싶은 나라를 함께 꿈꾸며, 그 꿈을 가슴에 품은 채 현실을 직시할 때 더 나은 미래를 그려갈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 고유의 정치적 경험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맥락을 함께 소환하면서 이 책을 한국의 사상사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는 작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이 ‘역사의 뜻’을 실현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함께 생동하는 미래, 우리 각자가 자기를 창조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인의 나라, 자유인과 자유인이 만나 이루는 민주공화국을 그려 보인다.
이와 같은 미래를 설계해야 할 적기, 공동체의 집합적 꿈꾸기를 도모해야 할 결단의 시기, 바로 그 카이로스의 순간이 지금이다.
뜻을 품은 역사는 자유의 역사다.
함석헌은 자유를 ‘스스로 함’이라고 풀이한다.
스스로 하기에 자유는 생명이다.
역사 안에서 우리 각자는 자유이고 생명이다.
우리 각자는 힘써 움직임으로써 길을 만들어 나가는 생동하는 자유다.
동시에 각자의 자유는 언제나 타자의 존재를 앞에 둔 자유다.
우리는 공동 존재로 태어나 공동 존재로 산다.
그러기에 타자 없이 각자가 있을 수 없다.
너 없이는 나도 있을 수 없다.
너를 너로 알아보고 나서야 나를 나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전제로 하여 피어난다.
너의 자유가 없다면 나의 자유도 없다.
모든 자유는 너와 나 사이에 제약된 자유다.
타자 없는 자유는 추상적 자유, 자유에 반하는 자유다.
나의 자유가 참된 자유라면 그 자유는 언제나 너의 자유를 품는다.
…… 민주공화국은 자유인과 자유인이 만나 이루는 나라다.
그 자유의 공간에 창조의 힘이 분출할 때 우리 각자는 자기다운 자기를 꽃피울 수 있다.
그렇게 자기를 창조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인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함석헌이 힘써 부른 역사의 뜻일 것이다.
그 역사의 뜻에 비추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지는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순간은 빛이고 눈이다.
빛이 빛나면 눈이 열린다.
- 20~21쪽
시민은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되는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좋은 정치를 만드는 시민의 용기와 지혜
이 책은 페르시아제국의 수십 만 대군을 맞닥뜨린 아테네가 맞붙어 싸울 것인지, 문을 걸어 잠그고 전쟁을 피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끝에 아폴론 신의 뜻을 묻고, 그 신탁을 해석할 최종 권한을 시민들에게 돌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화로 문을 연다.
책의 서두에서 시민의 집합적 지혜가 이룬 승리와 번영, 그 결과로 얻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최전성기를 묘사한 것은 거기에 담긴 정신, 시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임을 보여준다.
이어서 저자는 아테네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로 제안한 폴리테이아, 즉 민주정과 귀족정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정을 언급하며, 고대의 폴리스는 물론 이를 이어받은 현대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시민의 역량이 나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임을 강조한다.
정치를 보는 시민의 눈이 흐려지면 민주주의는 길을 벗어나 미끄러지기 마련이며, 일탈한 민주주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주체도 결국 시민이라는 메시지는 내란 세력의 발호를 막지는 못했으나 결국 그들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주체가 된 한국 시민들을 차갑게 일깨우는 지적이다.
국민이야말로 ‘현대의 군주’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을 군주의 이성이 아니라 국민의 이성으로 읽을 때 그 진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어두운 힘의 지배는 영속하지 않는다.
어둠은 끝내 빛을 불러온다.
누가 불러오는가? 국민이 불러온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어둠을 거부하고 어둠에 항거함으로써 빛을 불러들인다.
국민이 선악의 변증법을 실행하는 역사의 주체다.
- 138쪽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시민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하는 판단력을 키워 거짓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정치답게 되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시민의 판단 능력에 달려 있다.
……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정치적 문해력이 없다면, 아무리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더라도 민주주의는 튼튼해지지 않는다.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맹목이 번성하면 민주주의는 말라 죽는다.
- 227~230쪽
계엄 포고령이 내려지던 밤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간 용감한 시민들, 이후 수개월 동안 광장을 지키며 무너져 내린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지혜로운 시민들의 힘이 모여 한국 사회는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중이다.
저자는 이 힘을 ‘에로스의 힘’이라고 말한다.
“에로스를 품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을 향해 나아가 그 아름다운 것 안에서 좋은 것, 훌륭한 것을 낳고자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에로스를 품은 우리 시민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찬 전망을 내놓는다.
내란 세력이 써낸 집권-반란-몰락의 드라마를 절망-저항-승리의 드라마로 다시 쓴 한국 시민의 경험이 웅변하는 바가 곧 ‘역사의 뜻’일 것이다.
저자는 역사상 명멸한 수많은 나라와 그 각각이 취한 정치체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치사상의 발전을 오늘의 한국 현실과 정교하게 엮어 시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풍부한 이야기로서 전달한다.
깊고 넓은 인문학자의 통찰과 현장을 살피는 지식인의 날카로운 눈, 풍부한 서사를 구성하는 문학가의 필치를 두루 갖춘 저자 고명섭의 독보적인 성취인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학적인 정치 평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선사할 것이다.
‘맥베스적’ 정치 서사를 읽어가는 역사적 통찰과 철학적 전망
‘동서고금의 사유’를 하나로 엮는 우리 지성사의 새로운 풍경
검찰 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모든 비판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온갖 사적 이익을 취하던 끝에 내란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 절대 권력의 꿈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졌다.
저자는 이를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와 겹쳐 읽는다.
피로 왕관을 찬탈한 맥베스는 불안에 떨다 폭군이 되고 반란을 자초한다.
반란군의 창끝이 코앞에 다가오고, 부인마저 목숨을 버렸을 때에야 그는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며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절망 속에서 깨닫는다.
이 책은 오늘의 한국 정치 무대에서 이 맥베스의 서사를 고스란히 재연한 내란 세력의 집권-몰락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구성 또한 2022년 3월부터 2025년 9월까지 집필 순서를 따랐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시 벌어졌던 사건들과 저자가 제시하는 풍부한 인문학적 텍스트를 교차해 읽으며, 한국 사회를 뒤흔든 이 거대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역사적 통찰과 철학적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에 쓴 글에서 저자는 배를 폴리스에, 정치가를 조타수에,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술을 조타술에 비유한 플라톤의 《정치가》를 인용한다.
“조타수와 선원들의 무능으로 배가 침몰해 사라지듯이, ‘가장 중대한 것’(통치술)을 모르는 자들의 무능으로 많은 나라가 몰락하고 있고 몰락해왔으며 몰락할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선주(민중)들의 눈을 가리고 권력을 얻어 공동체의 재산을 탕진하는 선원(정치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국가》를 인용하며, 사이비 조타수가 키를 잡게 되면 배가 춤을 추다 난파할 수 있다는 2000년 전 플라톤의 경고를 전한다.
이러한 경고가 무색하게도 당시 한국 사회라는 배는 난파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현시점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플라톤의 이 오랜 경고를 다시금 되새기게 될 것이다.
한편, 저자는 해석과 통역의 신이자 은폐와 왜곡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 신화의 양면성과 “법은 욕구 없는 지성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나란히 읽으며,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타락할 때 초래되는 결과를 우려한다.
법치란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채 보편적 이성 자체가 다스린다는 뜻인데,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자들이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헤르메스의 모습을 한다면 시민들은 더 이상 그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저자의 이런 진단은 사법부와 검찰의 방해로 내란 세력에 대한 단죄가 여의치 않은 현시점에도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법이 정적을 공격하는 부당한 무기가 될 때, 법이 반대자를 치는 날카로운 도구가 될 때, 그 법은 법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암수가 된다.
‘욕구 없는 정신’으로서 법은 사라지고 ‘정신 없는 욕구’만 날뛴다.
권한을 남용해 있는 죄는 묻어버리고 없는 죄는 만들어낼 때, 그 부당행위에 법원이 가담해 법의 정신을 희롱할 때, 법은 있되 법이 없는 무법 상태가 벌어진다.
법을 다루는 법기술자들이 법의 적이 된다.
우리는 국가 권력이 고문과 조작으로 범법자를 만들어내고 판사가 그렇게 만들어진 범법자에게 정찰제 가격을 매기듯 형을 선고하던 가혹하고 끔찍한 시대를 지나왔다.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법기술자들이 파놓은 이 어두운 헤르메스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
- 129~130쪽
이처럼 저자는 한국 사회가 걸어온 길에 집적된 온갖 병폐와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지난 3년 반의 시간을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 신화와 종교, 문학과 예술 텍스트와 엮어 풍부하게 해석해낸다.
드넓은 인문학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2020년대 한국 사회가 경험한 한 편의 강렬한 ‘정치 철학 드라마’를 수천 년에 이르는 인류의 정치사, 지성사 속에 자리매김해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가
역사의 뜻을 밝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너와 나의 자유가 이루는 공동 존재의 꿈을 찾는 카이로스의 시간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인 카이로스는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뜻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혐오의 말들이 범람하며 역사 인식을 뒤흔드는 일들이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환한 빛 속에서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긴 말이다.
저자는 오늘의 현실은 기나긴 역사의 집적물이기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제대로 보려면 지나온 시간이 만든 역사를 바르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 즉 과거로부터 이어져 우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을 간직하고 무엇을 폐기할 것인지를 가릴 수 있는 눈, 그 눈이 열리는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이 책은 그 눈을 열어주는 인식의 빛, 섬광처럼 찾아오는 통찰과 결단의 순간에 필요한 지적 토양을 제공한다.
저자는 미래에서 오는 빛으로 과거를 새롭게 읽어 현재를 밝히는 일, 즉 한국 사회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지성의 작용이 필요한 시점임을 역설하며, 함석헌이 1960년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내며 세운 ‘역사의 뜻’이라는 개념을 불러들인다.
함석헌이 말하는 역사의 뜻은 우리 공동체의 열망, 공동체가 함께 꾸는 공동의 꿈이다.
또한 함석헌은 역사는 ‘심판인 동시에 예언’이라고 말했다.
역사에서 무엇을 심판하고 무엇을 기억해 계승해나갈지를 판단하고, 만들고 싶은 나라를 함께 꿈꾸며, 그 꿈을 가슴에 품은 채 현실을 직시할 때 더 나은 미래를 그려갈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 고유의 정치적 경험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동서양의 철학적 사유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맥락을 함께 소환하면서 이 책을 한국의 사상사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는 작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렇다면 이 ‘역사의 뜻’을 실현한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나의 자유와 너의 자유가 함께 생동하는 미래, 우리 각자가 자기를 창조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인의 나라, 자유인과 자유인이 만나 이루는 민주공화국을 그려 보인다.
이와 같은 미래를 설계해야 할 적기, 공동체의 집합적 꿈꾸기를 도모해야 할 결단의 시기, 바로 그 카이로스의 순간이 지금이다.
뜻을 품은 역사는 자유의 역사다.
함석헌은 자유를 ‘스스로 함’이라고 풀이한다.
스스로 하기에 자유는 생명이다.
역사 안에서 우리 각자는 자유이고 생명이다.
우리 각자는 힘써 움직임으로써 길을 만들어 나가는 생동하는 자유다.
동시에 각자의 자유는 언제나 타자의 존재를 앞에 둔 자유다.
우리는 공동 존재로 태어나 공동 존재로 산다.
그러기에 타자 없이 각자가 있을 수 없다.
너 없이는 나도 있을 수 없다.
너를 너로 알아보고 나서야 나를 나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전제로 하여 피어난다.
너의 자유가 없다면 나의 자유도 없다.
모든 자유는 너와 나 사이에 제약된 자유다.
타자 없는 자유는 추상적 자유, 자유에 반하는 자유다.
나의 자유가 참된 자유라면 그 자유는 언제나 너의 자유를 품는다.
…… 민주공화국은 자유인과 자유인이 만나 이루는 나라다.
그 자유의 공간에 창조의 힘이 분출할 때 우리 각자는 자기다운 자기를 꽃피울 수 있다.
그렇게 자기를 창조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자유인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함석헌이 힘써 부른 역사의 뜻일 것이다.
그 역사의 뜻에 비추어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지는 순간이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순간은 빛이고 눈이다.
빛이 빛나면 눈이 열린다.
- 20~21쪽
시민은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되는가
민주주의를 지키고 좋은 정치를 만드는 시민의 용기와 지혜
이 책은 페르시아제국의 수십 만 대군을 맞닥뜨린 아테네가 맞붙어 싸울 것인지, 문을 걸어 잠그고 전쟁을 피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끝에 아폴론 신의 뜻을 묻고, 그 신탁을 해석할 최종 권한을 시민들에게 돌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화로 문을 연다.
책의 서두에서 시민의 집합적 지혜가 이룬 승리와 번영, 그 결과로 얻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최전성기를 묘사한 것은 거기에 담긴 정신, 시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본질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임을 보여준다.
이어서 저자는 아테네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로 제안한 폴리테이아, 즉 민주정과 귀족정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정을 언급하며, 고대의 폴리스는 물론 이를 이어받은 현대의 민주공화국에서도 시민의 역량이 나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임을 강조한다.
정치를 보는 시민의 눈이 흐려지면 민주주의는 길을 벗어나 미끄러지기 마련이며, 일탈한 민주주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주체도 결국 시민이라는 메시지는 내란 세력의 발호를 막지는 못했으나 결국 그들을 권좌에서 몰아내는 주체가 된 한국 시민들을 차갑게 일깨우는 지적이다.
국민이야말로 ‘현대의 군주’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을 군주의 이성이 아니라 국민의 이성으로 읽을 때 그 진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사자의 사나움과 여우의 간교함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 어두운 힘의 지배는 영속하지 않는다.
어둠은 끝내 빛을 불러온다.
누가 불러오는가? 국민이 불러온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어둠을 거부하고 어둠에 항거함으로써 빛을 불러들인다.
국민이 선악의 변증법을 실행하는 역사의 주체다.
- 138쪽
정치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시민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분별하는 판단력을 키워 거짓을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정치답게 되는 것은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시민의 판단 능력에 달려 있다.
……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정치적 문해력이 없다면, 아무리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더라도 민주주의는 튼튼해지지 않는다.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맹목이 번성하면 민주주의는 말라 죽는다.
- 227~230쪽
계엄 포고령이 내려지던 밤 국회의사당 앞으로 달려간 용감한 시민들, 이후 수개월 동안 광장을 지키며 무너져 내린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지혜로운 시민들의 힘이 모여 한국 사회는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중이다.
저자는 이 힘을 ‘에로스의 힘’이라고 말한다.
“에로스를 품은 인간이 아름다운 것을 향해 나아가 그 아름다운 것 안에서 좋은 것, 훌륭한 것을 낳고자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려 에로스를 품은 우리 시민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찬 전망을 내놓는다.
내란 세력이 써낸 집권-반란-몰락의 드라마를 절망-저항-승리의 드라마로 다시 쓴 한국 시민의 경험이 웅변하는 바가 곧 ‘역사의 뜻’일 것이다.
저자는 역사상 명멸한 수많은 나라와 그 각각이 취한 정치체제,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치사상의 발전을 오늘의 한국 현실과 정교하게 엮어 시민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풍부한 이야기로서 전달한다.
깊고 넓은 인문학자의 통찰과 현장을 살피는 지식인의 날카로운 눈, 풍부한 서사를 구성하는 문학가의 필치를 두루 갖춘 저자 고명섭의 독보적인 성취인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문학적인 정치 평론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선사할 것이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24일
- 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408쪽 | 722g | 158*233*23mm
- ISBN13 : 979116981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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