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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Description
책소개
거대한 야망이 맞부딪친 두 숙적의 필연적 대결
유럽의 판도를 재편한 19세기 최후의 대전쟁


근대 유럽에서 수차례 갈등을 거듭해온 프로이센과 프랑스.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은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여론전을 벌이며 이내 전쟁으로 치달았다.
신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가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프로이센이 반격해 순식간에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수도 파리를 포위했다.
프랑스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제국을 세우며 강대국으로 우뚝 섰고, 프랑스는 그동안 유럽 대륙에서 차지해온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200만 명 넘는 병사가 참전하고 18만 명 이상이 사망한, 나폴레옹 전쟁과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발발한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도서로, 20여 년간 이 전쟁을 연구해온 레이철 크라스틸 교수가 집필했다.
저자는 전쟁의 전말을 충실히 소개하는 동시에 이 전쟁이 세계사·전쟁사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전략·전술, 외교, 동원 체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 전쟁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지도부를 비롯해 하급 장교·병사·시민 등 전쟁에 휩쓸린 주체들의 증언을 활용해 전쟁이 사람들의 감정과 일상의 질서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독일-프랑스 사이 민족주의 갈등의 폭발, 군국주의의 강화,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 전국가적 동원이 이루어진 총력전의 대두 등 이 전쟁의 양상이 곧 20세기 세계대전을 예시했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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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지도

1장 선전포고
2장 동원
3장 병력 집중과 전쟁 지휘
4장 전투
5장 후퇴
6장 전환점
7장 스당으로 가는 길
8장 스당과 바제유
9장 새로운 시작
10장 파리의 전략
11장 선택
12장 포위전
13장 파리의 가을
14장 관대함
15장 고통의 날들
16장 크리스마스
17장 겨울의 극장
18장 최후의 저항
19장 휴전에서 평화조약까지
20장 전쟁의 결산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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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유럽인들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워털루 전쟁과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발발한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서, 200만 명 이상의 병사가 참전했고 그중 18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전쟁의 와중에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으며, 프랑스는 안정적인 공화국의 토대를 닦았다.
이 전쟁은 근대 유럽에서 한 국가의 군대가 가장 극적이고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쟁 중 하나로,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주도권을 결정적으로 종식시키고, 새로운 강대국 독일의 등장을 알린 사건이었다.
--- p.6 「머리말」 중에서

전쟁에서 동원은 전쟁과 관련된 인력, 무기, 물자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조율하는 방대한 과제인 동시에 대중 선전 활동이며, 심지어 감정 관리 기술마저 필요한 작업이다.
거기엔 대규모 인력 이동뿐 아니라 훈련 시설의 확대, 현재 비축된 무기의 투입 준비와 미리 정해진 일정에 따른 장비 배급도 포함된다.
또한 1870년에는 동원이라는 과제가 군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경험한 사건이었다.
예비군이든 정규군이든 전쟁을 위해 떠나는 것은 이제까지 갖고 있던 시야를 새로 열고, 공유하고자 하는 무언가 새롭고 짜릿한 경험의 시작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1870년 전쟁은 교전국이 대규모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자원해서 여러 형태로 전쟁에 가담한 민간인-군인이 등장한 전쟁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국가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전쟁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 p.62 「2장 동원」 중에서

8월 6일에 벌어진 두 전투는 프랑스에게 비극이었다.
프랑스군은 잘 싸웠고, 잘 방어했으며, 끈질기게 반격했다.
샤스포 소총은 약속했던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프뢰슈빌레르에서는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열세였고, 스피셰렌에서는 독일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독일군은 그렇게 잘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열은 프랑스 방어 진지에서 날아오는 맹렬한 포화를 받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대규모 보병 공격 없이 신속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움직이면서, 프랑스군 방어 전선의 틈새를 찾아 최대한 활용했다.
프로이센군은 그들이 만난 병력이 대규모인지 소규모 연대인지 몰랐지만, 기꺼이 전투에 임했다.
그들은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기꺼이 바라보았고, 독일 군인들이 총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기꺼이 믿었다.
결국 프로이센의 전쟁 방식이 적을 무너뜨렸다.
--- p.129 「4장 전투」 중에서

프랑스군은 여러 군단이 방향을 잃고 싸울 에너지도 상실한 채 전선 뒤로 무질서하게 몰려들었고, 독일군은 다양한 각도에서 동일한 목표 지점을 향해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 프랑스군은 결국 스당으로 후퇴했다.
왕세자는 “무기도 없이 불안에 떨면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프랑스군 보병들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했다.
“절망이 프랑스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들은 포로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가능성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늦은 오후, 르브룅과 두에, 뒤크로는 각각 스당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프랑스군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설명했다.
나폴레옹 3세는 마침내 스당에 백기를 게양했다.
--- p.259 「8장 스당과 바제유」 중에서

9월 4일의 혁명은 어떤 폭력이나 소요사태 없이 일어났으며, 사람들은 모두 오후 8시경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파리시는 고요함을 유지했다.
이 혁명적인 날은 새로운 정부가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쟁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엄청난 의문을 남겼다.
군중 속의 많은 사람은 전쟁을 일으킨 ‘두 폭군’의 어리석은 야만성을 비난했으며, 새로운 공화국 선포를 살인적인 전쟁의 종식과 동일시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끝까지 싸우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들이 거둔 승리를 완결하고 프랑스 영토를 합병하고자 마음먹은 침략군의 즉각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방위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맹세했다.
--- p.273 「9장 새로운 시작」 중에서

수중 전신 케이블을 통해서 외부와 소통할 수 없게 된 파리 시민들은 이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열기구는 프랑스 혁명 전쟁 와중에 소통과 정찰 용도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석탄가스가 개발되면서 열기구는 더욱 실용적으로 사용되었다.
1870년 여름 고다르라는 발명가가 정부에 이 열기구를 사용하도록 부추겼다.
르뵈프는 열기구에 관심이 없었지만 팔리카오는 그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파리가 봉쇄되자 열기구가 통신수단으로서 매우 유용해진 것이다.
펠릭스 나다르라는 이름의 사진작가가 9월 21일에 실험 삼아 파리 상공에 열기구를 띄웠다.
23일에는 실험 열기구가 파리 상공을 날아 도시 밖으로 보내졌으며, 26일에는 처음으로 정기적인 운행 서비스가 개시되었다.
--- p.304 「10장 파리의 전략」 중에서

절망과 불안은 전쟁에 휘말린 수많은 여성의 운명이었다.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여성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고립감과 위험을 느꼈다.
조르주 상드는 손자들이 천연두에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노앙(앵드르)에서 생루프(크뢰즈)로 여행한 일이 있는데, 함께 여행했던 레오니는 그때 느꼈던 두려움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았다.
“요즘 [전쟁 중] 당신들은 이전에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나쁜 생각을 하고 있어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를 파멸시키려 계획하고 있는 적의 스파이임에 틀림없다고 상상하고 있잖아요.” 상드는 저녁 안개 속을 헤쳐가면서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동의했다.
비뇌이 부인의 여동생 티욀랭 부인은 남편과 함께 외르에루아르에 있는 별장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도중에 프로이센 군인들이 마차를 멈춰 세우고는 올라타서 여행의 일부 구간을 동행했다.
티욀랭 부인은 “그들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여행자들은 목적지에 별 탈 없이 도착했다.
--- p.339 「11장 선택」 중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는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포격을 준비하는 것을 묵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하지만 분명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성과를 거둠으로써 승리를 달성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이전에 설정했던 목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거둔 승리들은 충분히 피비린내 났기 때문이다.
--- p.440 「13장 파리의 가을」 중에서

“그들은 우리 옆에서 함께 걸으면서,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고 적들의 보복이 극에 달했던 장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우리가 들은 모든 이야기를 감히 반복할 자신이 없다.” 감정적·정신적 긴장이 “당시 벌어진 폭력적인 소란과 가슴 아픈 드라마에 잘 드러났으며, 그 결과 사람들의 신경계를 격하게 뒤흔들어놓았다.
사람들이 보인 광기와 히스테리, 신경쇠약, 각종 마비 증상은 이 모든 비극적인 사건이 초래한 결과였다.” 다른 사람들의 보고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은 미쳐버려서 훗날 일종의 포탄 쇼크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보이는 증상을 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명칭이 없었다.
--- p.454-455 「14장 관대함」 중에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새로운 무기가 더 큰 부상과 더 심각한 신체 손상을 야기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프랑스 샤스포 소총의 경우, 총알이 들어간 신체 부위의 입구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지만, “총알이 회전하면서 뚫고 나간 곳에는 트럼펫 입구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상처가 만들어졌다.” 미트라이외즈 기관총은 아주 빠르고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살상했다.
포탄과 그 파편은 병사들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혔다.
병사들은 전장에서 전우들이 어떻게 속절없이 쓰러지는지를 목격했다.
그토록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직접 본 것은 그들에게 깊은 충격을 남겼다.
로젠탈은 1871년 1월 21일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쓰러진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전장에서 우리가 건너야 했던 피 웅덩이에 대해 몸서리치면서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때 하늘을 울렸던 모든 신음과 울부짖음을 떠올리면, 이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나의 모든 활력과 의지가 다 사라집니다.”
--- p.490 「15장 고통의 날들」 중에서

베르사유에서는 다른 역사적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독일 제국의 선언이다.
독일 통일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 일련의 전쟁은 정복 전쟁이 아니라 프로이센이 쌓아온 힘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 p.571 「17장 겨울의 극장」 중에서

프로이센군은 격노했다.
프랑스군의 이번 공격은 지난 4개월 동안 독일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온 파르티잔 저항군에 대한 최악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평온해 보였던 구역에 갑자기 나타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제는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샤쇠르 부대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왔고 퐁트누아와 어떤 접촉도 없었지만, 프로이센군은 이번 사보타주의 책임을 퐁트누아 주민들에게 돌렸다.
그래서 프로이센 제57보병연대는 마을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대화재는 4일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마을에 있던 55채의 가옥 중 단 4채와 교회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나아가 프로이센군은 민간인 23명을 인질로 잡았다.
주민들은 추위와 눈으로부터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몇 주 동안 고통을 겪었다.

--- p.600 「18장 최후의 저항」 중에서

5월 21일, 베르사유가 파견한 군대가 파리에 입성해 ‘피의 주간’으로 알려진 시가전을 시작했다.
여기서 수천 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도 즉결 처형되었다.
일부 코뮌 구성원들은 불을 질러 튀일리 궁전과 시청사를 파괴했고, 다른 일부 사람들은 파리 대주교를 포함한 포로들을 처형했다.
그 밖에 수천 명이 더 포로로 잡혔다.
독일 병사들은 개선문에는 삼색기가 휘날리는 동안 팡테옹에는 코뮌의 붉은 깃발이 계속 휘날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베르사유의 군대가 진군하는 것을 주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파리에 거주하던 독일인 59명이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5월 28일, 봉기는 막을 내렸다.
파리 코뮌은, 이미 전쟁 이전에 존재했으며 포위 공격과 클럽 운동으로 인해 더욱 증폭된 프랑스의 사회적 갈등을 반영했다.
당시에 널리 인식된 것과 달리, 코뮌은 프랑스가 수개월간의 희생 끝에 결국 독일에게 항복한 것에 대한 실망과, 이에 대한 단순한 분노에서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 p.626-627 「19장 휴전에서 평화조약까지」 중에서

그렇지만 선견지명이 있고 희망에 찬 한 작가는 이 전쟁 속에서 우리의 공통된 인간성을 존중해줄 미래 평화의 씨앗을 보았다.
조르주 상드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파괴의 기술이기 때문에 결코 삶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결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동맹이라는 꿈이 실현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20세기의 업적이 될 것입니다
--- p.664 「20장 전쟁의 결산」 중에서

출판사 리뷰
거대한 야망이 맞부딪친 두 숙적의 필연적 대결
유럽의 판도를 재편한 19세기 최후의 대전쟁


근대 유럽에서 수차례 갈등을 거듭해온 프로이센과 프랑스.
에스파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은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가 여론전을 벌이며 이내 전쟁으로 치달았다.
신식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프랑스가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지만, 프로이센이 반격해 순식간에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수도 파리를 포위했다.
프랑스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프로이센의 승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으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제국을 세우며 강대국으로 우뚝 섰고, 프랑스는 그동안 유럽 대륙에서 차지해온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200만 명 넘는 병사가 참전하고 18만 명 이상이 사망한, 나폴레옹 전쟁과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발발한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책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도서로, 20여 년간 이 전쟁을 연구해온 레이철 크라스틸 교수가 집필했다.
저자는 전쟁의 전말을 충실히 소개하는 동시에 이 전쟁이 세계사·전쟁사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전략·전술, 외교, 동원 체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 전쟁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뿐만 아니라, 지도부를 비롯해 하급 장교·병사·시민 등 전쟁에 휩쓸린 주체들의 증언을 활용해 전쟁이 사람들의 감정과 일상의 질서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독일-프랑스 사이 민족주의 갈등의 폭발, 군국주의의 강화,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 전국가적 동원이 이루어진 총력전의 대두 등 이 전쟁의 양상이 곧 20세기 세계대전을 예시했음을 드러낸다.


비스마르크가 자극하고 프랑스가 시작한 전쟁

19세기 후반 유럽은 산업화가 진행되며 정치·사회·경제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급성장을 이루어낸 프로이센이 총리 비스마르크의 주도 아래 독일 통일을 위해 움직이면서 국제 질서가 요동치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를 상대로 한 전쟁을 승리해 북독일연방의 맹주로서 독일 국가들을 병합해나갔고, 마지막 남은 국가들을 병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서 결정적 위기가 발생했다.
1870년 여름, 왕위가 공석이 된 에스파냐에서 프로이센 빌헬름 왕의 친척인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제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프랑스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포위 전략에 불만을 품어왔던 프랑스가, 프로이센이 이를 되풀이하는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오폴트가 왕위를 포기했지만, 프랑스는 빌헬름 왕에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제안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도록 압박했다.
빌헬름 왕은 정중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를 더 퉁명스럽고 모욕적으로 보이게 편집해 공표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프랑스는 같은 해 7월 선전포고를 했고,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전역에서도 전쟁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프랑스는 동맹국을 찾았지만, 프로이센은 그동안 비스마르크가 주도해온 외교 정책의 성과에 힘입어 각국으로부터 중립을 얻어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원 체계와 병력 집중이 가른 승패

저자 크라스틸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전개를 충실히 소개하는 동시에 그 역사적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보여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산업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생긴 변화다.
대표적으로 철도 등 근대적 운송 수단의 등장으로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신속히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되면서, 근대적 교육을 통해 국민군을 육성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전쟁에서 매우 중요해졌다.
전국가적 동원이 이루어지면서 과거와 같이 전쟁이 단순히 왕조나 군대 사이가 아니라 국가/국민 간의 전쟁으로 확장되었다.
이 책은 초반부에 ‘동원’과 ‘병력 집중’에 관해 상세히 서술하면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동원 체계와 이를 지휘하는 지도부 역량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프로이센은 수차례 전쟁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정예 병력을 적재적소에 집중 배치했지만, 프랑스는 그 체계가 정립되지 않아 혼선을 빚었다.
그 결과 프로이센은 100만의 예비 병력을 남기고도 42만 병력을 집중적으로 집결시킨 반면, 프랑스는 동원 가능한 병력의 60퍼센트인 30만 병사를 긴 전선에 늘어놓은 채 무기와 식량도 제대로 보급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했다.

동원 체계와 이를 활용하는 역량에서 나타난 차이는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었다.
프랑스군은 샤스포 소총, 미트라이외즈 기관총 등 신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고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하긴 했지만, 프로이센군은 신식 크루프 대포를 적극 활용하고 전쟁 초기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프랑스군을 점차 밀어냈다.
더욱이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지휘관들의 전략적 무능이 맞물려 프로이센군이 빠르게 주도권을 잡았다.
개전 2개월 만에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결정적 승리를 거뒀고 나폴레옹 3세의 항복을 받아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 정부인 국민방위정부를 수립하며 전쟁을 이어나갔지만, 수도 파리가 포위당한 채 남은 지역에서도 연달아 패배하면서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1871년 1월, 프로이센은 점령지인 베르사유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하며 사실상 승리를 과시했다.
프랑스는 곧 휴전에 동의했고, 이에 반대한 사회주의자들이 3월에 파리 코뮌을 수립하기도 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결국 5월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 전쟁은 유럽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독일의 승리가 지닌 의미


이 전쟁의 결과는 저자가 ‘유럽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평할 정도로 향후 유럽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근대 유럽의 국제 질서가 재편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당시까지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던 주도권을 결정적으로 종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고 제국을 수립함으로써 이후 유럽을 넘어 세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새로운 강대국 독일의 등장을 알렸다.
반면 프랑스는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 수립으로 가는 길을 열면서 유럽 정치 지형의 변동이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이 전쟁은 다방면에서 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승리한 독일 국민은 통일이 독일의 군사적 위력에 힘입은 것이라고 여겼고, 군부 지도자들은 행운과 온건한 정치가 이러한 성공을 가능하게 하고 지속시켜주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정치와 사회에서 계속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유럽 전역에서도 프로이센 군대의 사례를 모방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하려 했다.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것은 독일과 나머지 세계 모두에 재앙이었다고 저자는 평한다.
아울러 이 전쟁에서 드러난 독일-프랑스의 민족주의적 반감, 전국가적 동원 체계의 중요성, 대량 살상무기의 등장에서 비롯된 전술의 변화와 잔혹 행위 등은 장차 벌어질 세계대전을 예시했다.


다만, 저자는 이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프랑스-독일 갈등이나 1914년에 주요 유럽 국가를 상호각축전으로 몰아넣은 동맹 체제의 발전으로 직접 연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전쟁 후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외교 정책은 그러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목표를 두었고, 프랑스와 독일 모두 서로를 향한 반감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대인들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하는
지도자들의 고뇌와 민간인의 참혹한 현실


저자는 전쟁에 휩쓸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면서 적재적소에서 구체적인 증언들을 적극 활용하며 다큐멘터리처럼 서술한다.
나폴레옹 3세 황제와 빌헬름 왕, 비스마르크 등 주요 정치가와 군 지도부뿐 아니라 하급 장교와 일반 병사, 그리고 민간인과 외국인까지 아우르며 생동감을 더한다.
정치-외교-전쟁 전반에서 주도권을 두고 벌인 참모총장 몰트케와 총리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복잡하게 뒤엉킨 이 전쟁의 한 편린을 보여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와 바이에른 출신 중위 라스베르크의 기록을 따라가며 상층 지도부와 하급 장교의 시선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여러 당대인의 기록, 특히 조르주 상드, 쥘리에트 아당, 에르미온 키네 등 당시 여성 작가들의 기록을 통해 전쟁에 휘말린 수많은 민간인의 고통스런 전쟁 경험과 행동 양태에 주목하면서 이 전쟁이 당시 민간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들여다본다.
전국가적 동원이 이루어지고 전장이 확대되면서 전쟁에 휩싸이는 민간인의 수 역시 크게 증가했다.
나아가 이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은 포격의 직접적인 표적으로 여겨졌고, 국가가 식별해서 강제 이주시켜야 하는 국가적인 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불안정은 작은 불씨만으로도 쉽게 폭발할 수 있는 강력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이렇게 전쟁의 성격이 달라지면서 민간인의 전쟁 경험 또한 크게 변화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남성이 대부분 징집된 후 남겨진 여성들의 피난 경험과 후방에서 맡았던 역할이다.
이 책은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를 통해 놓치기 쉬운 전쟁 속 인간의 현실을 포착함으로써, 전쟁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2월 01일
- 쪽수, 무게, 크기 : 704쪽 | 152*225*40mm
- ISBN13 : 9791194263814
- ISBN10 : 11942638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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