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Description
책소개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중국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발굴하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현대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사태(周邊事態)”였다.
이 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것인가를 포함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여러 문제가 중국 사회에서 급부상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 달 반을 중심으로 그 앞뒤 8개월 동안 중국 각지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즉, 한국전쟁 발발 앞뒤로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기존 “마오쩌둥의 한국전쟁”이라는 관점에서의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이 책의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맹국 또는 준동맹국의 요청에 따라 군사력을 해외에 파병하면, 그 사회 내부에서 정치, 경제, 사회, 시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집단적자위권 행사의 정당성, 긴급사태를 명분으로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 방위력 증강이 평화 산업과 시민의 일상에 미치는 압력, 징병과 생사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중국 시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 시민은 권력자와는 다른 위치에서 현실적 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이 책은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금까지 간과돼 온 중요한 문제들에 접근한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현대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사태(周邊事態)”였다.
이 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것인가를 포함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여러 문제가 중국 사회에서 급부상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 달 반을 중심으로 그 앞뒤 8개월 동안 중국 각지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즉, 한국전쟁 발발 앞뒤로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기존 “마오쩌둥의 한국전쟁”이라는 관점에서의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이 책의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맹국 또는 준동맹국의 요청에 따라 군사력을 해외에 파병하면, 그 사회 내부에서 정치, 경제, 사회, 시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집단적자위권 행사의 정당성, 긴급사태를 명분으로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 방위력 증강이 평화 산업과 시민의 일상에 미치는 압력, 징병과 생사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중국 시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 시민은 권력자와는 다른 위치에서 현실적 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이 책은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금까지 간과돼 온 중요한 문제들에 접근한다.
-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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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을 펴내며
서론
제1부 관여인가 방치인가 - 먹구름 아래서
들어가며
제1장 화베이 지역
제2장 화둥 지역
제3장 둥베이 지역 - 선양, 진저우, 러허
제4장 시난 지역 - 충칭, 구이저우
나오며
제2부 지식분자 - 해외파병, 원자폭탄, 동맹, 조세
들어가며
제1장 정치적 스펙트럼
제2장 원자폭탄 문제 - 주커전의 경우
제3장 친미반소
제4장 조세, 동맹 - 구제강의 경우
나오며
제3부 상공업자 - 톈진, 상하이, 홍콩
들어가며
제1장 배후지
제2장 톈진
제3장 룽이런과 그 주변
제4장 홍콩
나오며
제4부 노동자, 농가 - 해외파병, 후방지원, 정권 교체
들어가며
제1장 화베이 지역
제2장 화동 지역
제3장 둥베이 지역
제4장 소의 운명
나오며
제5부 장병 - 대미 감정, 복원, 양심적 병역거부
들어가며
제1장 대미 감정
제2장 복원 희망 - 결혼, 농사
제3장 복원 거부
제4장 탈영
제5장 양심적 병역거부
나오며
제6부 쉬광야오의 전쟁 - 직업관, 생사관
들어가며
제1장 직업관
제2장 갈등
제3장 생사관
나오며
제7부 전국의 전환 - 태도 변경, 경제제재.
종군
들어가며
제1장 태도 변경
제2장 상공업계
제3장 종군
나오며
결론
옮긴이의 말
초출일람
찾아보기
책을 펴내며
서론
제1부 관여인가 방치인가 - 먹구름 아래서
들어가며
제1장 화베이 지역
제2장 화둥 지역
제3장 둥베이 지역 - 선양, 진저우, 러허
제4장 시난 지역 - 충칭, 구이저우
나오며
제2부 지식분자 - 해외파병, 원자폭탄, 동맹, 조세
들어가며
제1장 정치적 스펙트럼
제2장 원자폭탄 문제 - 주커전의 경우
제3장 친미반소
제4장 조세, 동맹 - 구제강의 경우
나오며
제3부 상공업자 - 톈진, 상하이, 홍콩
들어가며
제1장 배후지
제2장 톈진
제3장 룽이런과 그 주변
제4장 홍콩
나오며
제4부 노동자, 농가 - 해외파병, 후방지원, 정권 교체
들어가며
제1장 화베이 지역
제2장 화동 지역
제3장 둥베이 지역
제4장 소의 운명
나오며
제5부 장병 - 대미 감정, 복원, 양심적 병역거부
들어가며
제1장 대미 감정
제2장 복원 희망 - 결혼, 농사
제3장 복원 거부
제4장 탈영
제5장 양심적 병역거부
나오며
제6부 쉬광야오의 전쟁 - 직업관, 생사관
들어가며
제1장 직업관
제2장 갈등
제3장 생사관
나오며
제7부 전국의 전환 - 태도 변경, 경제제재.
종군
들어가며
제1장 태도 변경
제2장 상공업계
제3장 종군
나오며
결론
옮긴이의 말
초출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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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이미지
책 속으로
남성은 다음 날부터 인민지원군이 조선에서 유엔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게 될 줄도, 열흘 뒤에 자신이 전선에 나서는 선택을 강요받게 될 줄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산책길로 외교 시설이 밀집한 이곳을 택한 데는 그 일대에 풍기는 무언가 이국적인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둥자오민샹 서쪽 입구로 들어선 뒤 오른쪽에 있는 미국총영사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일 전 고궁박물원에서 리다자오(李大釗)를 처형할 때 사용한 교수대 전시를 관람했다.
하지만 소련대사관 앞을 지나면서, 리다자오가 그곳에서 장쭤린(張作霖)의 부하에게 체포됐다는 사실을 떠올린 흔적을 그의 일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날 밤 남성의 관심은 오로지 연애에 쏠려 있었다.
--- p.25
조선 남쪽은 미국의 영향 아래 있으므로 이승만의 참패는 곧 미국의 패배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앞으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을 통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을 무력 지원한 것이다.
만약 이승만이 이기지 못하고 미국이 격분해 사태가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북조선이 패하면 조선인민군은 반드시 우리 둥베이 지역으로 후퇴할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가 무장 해제에 나선다면 사회주의 국가 간 상호 협력이라는 원칙은 훼손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미국은 그걸 구실로 우리 둥베이 지역으로 진격해 올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에 맞서 반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전쟁의 규모가 커져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 p.40-41
“어머니는 제가 막내딸이라 무척 귀여워하십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조국에 대한 제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위해 저는 지원군에 참가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 p.91
주커전은 이 책에서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 이유로 “소련 요인”을 지목한 대목에도 주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췌했다.
“콤프턴 박사와 스팀슨 씨의 논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한 연합국의 계획 중 만주에서의 소련 참전이 진짜 이유였다.” 또 11월 14일 일기에는 《미국 전략폭격 조사단 보고》의 일본 종전 공작 관련 일부를 인용했다.
“모든 상세한 조사와 살아남은 일본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소련이 참전하지 않고, 미국이 상륙 작전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1945년 12월 31일까지 틀림없이 항복했을 것이다.” 주커전은 1945년 8월 15일 자 《뉴욕 타임스》의 기사도 인용했다.
“〈소련이 전쟁을 끝냈다: 공군장성 클레어 셔놀트, 원자폭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참전이 대일전에 결정타(CHENNAULT HOLDS SOVIET FORCED END; Russia’s Entry Decided War With Japan Despite Atomic Bomb, Air General Says)〉에서 이와 관련한 로마 주재 특파원의 취재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소련의 참전이 전쟁 종결의 결정타였으며 설사 원자폭탄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으리라는 것이 클레어 셔놀트 장군의 의견’”이었다.
--- pp.112-113
그들의 실감으로 미국이 중국에 있었을 때는 장사하기 편했다.
지금처럼 규제가 많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면 대출 중단이나 금융 통제로 자금 사정이 나빠질 것이며, 결국 상공업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지원부대가 조선으로 건너간 뒤 시장에서는 면화와 면사를 사재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일부 상공업자는 사업 의욕을 잃고 영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규모 상공업자나 부동산 소유자 중 일부는 도시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장사할 수 없을 것이고, 시골로 돌아가면 토지개혁으로 땅과 집을 몰수당할까 봐 걱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 p.166
상인이나 점원은 후방지원 근무를 꺼린다.
원래 도시에서는 별도의 생계 수단이 없어서, 만약 후방지원의 부담을 도시 빈민에게 지우면 남은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세 차례의 후방지원 동원에서 도시별로 다른 방식들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자무쓰(佳木斯)에서는 처음에 호선 방식으로 지원자를 뽑았으나, 당첨된 자들은 모두 거부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동원에서는 정원을 각 마을에 배정하고 해당 상가가 금전을 부담해 인력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고용된 자는 일부 빈민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영업의 임시 도우미, 실직한 독신자, 신원미상자, 정권의 비판이나 추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자뿐이었다.
이들은 매번 중도 탈주하거나 꾀병을 핑계로 조기 귀환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세 번의 동원 중 도주 및 조기 귀환자는 222명으로 전체의 22%에 달했다.
푸진현(富錦縣)에서는 제비뽑기 방식을 적용했는데, 당첨된 상인은 예외 없이 돈을 내고 대리인을 고용했다.
이 대리인의 대부분은 불량배였다.
--- p.248
산속에 갇힌 부대는 대엿새 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때로는 소량의 말 사료로 굶주림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마실 물조차 없어서, 목이 마르면 동굴의 암벽 사이로 스며 나오는 수분을 핥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餓死)는 흔한 일이었고, 어떤 동굴 안에 있던 병사 전원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만, 적의 봉쇄를 뚫고 식량이 공급됐을 때는 가끔 소고기 통조림 하나를 통째로 먹을 수 있었다.
--- p.334
대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불안과 격분이 뒤섞여 마음이 몹시 불쾌하다.
정신이 위축되고 식사와 보행에 모두 기운이 없다.
뭔가 자극이 필요하지만, 무엇이 자극이 될 수 있을까.
편지를 써도 쓸 내용이 없고 논다고 해도 갈 곳이 없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을 잠시 떠올려보지만, 흥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후에 어휘 정리에 몰두해 쓰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마음이 안정됐다.
--- p.407
그러나 마오쩌둥과 장둥쑨은 정치체제와 대외 정책에서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
장둥쑨은 미국과 소련 양쪽의 장점을 받아들여 새로운 민주정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장둥쑨 선생, 당신이 말하는 새로운 민주란 결국 미국식 민주일 뿐이다.
서방 정치에서는 집권당과 반대당을 나누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중국의 혁명정권은 공산당과 제3자가 이룬 공동 성과다.
자신이 자신을 반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며 일축했다.
당시 회담에 동행했던 다른 인사의 회상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신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민주 당파가 인민대중의 입장에 서서 중국공산당과 보조를 맞추고 성실히 협력하며, 도중에 결별하거나 ‘반대파’를 만들거나 ‘중간노선’을 걷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가 산책길로 외교 시설이 밀집한 이곳을 택한 데는 그 일대에 풍기는 무언가 이국적인 분위기에 끌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둥자오민샹 서쪽 입구로 들어선 뒤 오른쪽에 있는 미국총영사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일 전 고궁박물원에서 리다자오(李大釗)를 처형할 때 사용한 교수대 전시를 관람했다.
하지만 소련대사관 앞을 지나면서, 리다자오가 그곳에서 장쭤린(張作霖)의 부하에게 체포됐다는 사실을 떠올린 흔적을 그의 일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날 밤 남성의 관심은 오로지 연애에 쏠려 있었다.
--- p.25
조선 남쪽은 미국의 영향 아래 있으므로 이승만의 참패는 곧 미국의 패배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앞으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을 통합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을 무력 지원한 것이다.
만약 이승만이 이기지 못하고 미국이 격분해 사태가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북조선이 패하면 조선인민군은 반드시 우리 둥베이 지역으로 후퇴할 것이다.
이때 우리나라가 무장 해제에 나선다면 사회주의 국가 간 상호 협력이라는 원칙은 훼손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미국은 그걸 구실로 우리 둥베이 지역으로 진격해 올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에 맞서 반격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전쟁의 규모가 커져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 p.40-41
“어머니는 제가 막내딸이라 무척 귀여워하십니다.
그래서 조선에 가는 것을 반대하십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이 조국에 대한 제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위해 저는 지원군에 참가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 p.91
주커전은 이 책에서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 이유로 “소련 요인”을 지목한 대목에도 주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발췌했다.
“콤프턴 박사와 스팀슨 씨의 논문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한 연합국의 계획 중 만주에서의 소련 참전이 진짜 이유였다.” 또 11월 14일 일기에는 《미국 전략폭격 조사단 보고》의 일본 종전 공작 관련 일부를 인용했다.
“모든 상세한 조사와 살아남은 일본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소련이 참전하지 않고, 미국이 상륙 작전을 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1945년 12월 31일까지 틀림없이 항복했을 것이다.” 주커전은 1945년 8월 15일 자 《뉴욕 타임스》의 기사도 인용했다.
“〈소련이 전쟁을 끝냈다: 공군장성 클레어 셔놀트, 원자폭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참전이 대일전에 결정타(CHENNAULT HOLDS SOVIET FORCED END; Russia’s Entry Decided War With Japan Despite Atomic Bomb, Air General Says)〉에서 이와 관련한 로마 주재 특파원의 취재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소련의 참전이 전쟁 종결의 결정타였으며 설사 원자폭탄이 없었더라도 일본은 항복했으리라는 것이 클레어 셔놀트 장군의 의견’”이었다.
--- pp.112-113
그들의 실감으로 미국이 중국에 있었을 때는 장사하기 편했다.
지금처럼 규제가 많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면 대출 중단이나 금융 통제로 자금 사정이 나빠질 것이며, 결국 상공업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다.
지원부대가 조선으로 건너간 뒤 시장에서는 면화와 면사를 사재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일부 상공업자는 사업 의욕을 잃고 영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규모 상공업자나 부동산 소유자 중 일부는 도시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장사할 수 없을 것이고, 시골로 돌아가면 토지개혁으로 땅과 집을 몰수당할까 봐 걱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 p.166
상인이나 점원은 후방지원 근무를 꺼린다.
원래 도시에서는 별도의 생계 수단이 없어서, 만약 후방지원의 부담을 도시 빈민에게 지우면 남은 가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세 차례의 후방지원 동원에서 도시별로 다른 방식들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자무쓰(佳木斯)에서는 처음에 호선 방식으로 지원자를 뽑았으나, 당첨된 자들은 모두 거부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동원에서는 정원을 각 마을에 배정하고 해당 상가가 금전을 부담해 인력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고용된 자는 일부 빈민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영업의 임시 도우미, 실직한 독신자, 신원미상자, 정권의 비판이나 추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자뿐이었다.
이들은 매번 중도 탈주하거나 꾀병을 핑계로 조기 귀환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세 번의 동원 중 도주 및 조기 귀환자는 222명으로 전체의 22%에 달했다.
푸진현(富錦縣)에서는 제비뽑기 방식을 적용했는데, 당첨된 상인은 예외 없이 돈을 내고 대리인을 고용했다.
이 대리인의 대부분은 불량배였다.
--- p.248
산속에 갇힌 부대는 대엿새 동안 먹을 것이 없어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때로는 소량의 말 사료로 굶주림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마실 물조차 없어서, 목이 마르면 동굴의 암벽 사이로 스며 나오는 수분을 핥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餓死)는 흔한 일이었고, 어떤 동굴 안에 있던 병사 전원이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만, 적의 봉쇄를 뚫고 식량이 공급됐을 때는 가끔 소고기 통조림 하나를 통째로 먹을 수 있었다.
--- p.334
대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불안과 격분이 뒤섞여 마음이 몹시 불쾌하다.
정신이 위축되고 식사와 보행에 모두 기운이 없다.
뭔가 자극이 필요하지만, 무엇이 자극이 될 수 있을까.
편지를 써도 쓸 내용이 없고 논다고 해도 갈 곳이 없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대상을 잠시 떠올려보지만, 흥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후에 어휘 정리에 몰두해 쓰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마음이 안정됐다.
--- p.407
그러나 마오쩌둥과 장둥쑨은 정치체제와 대외 정책에서 입장이 일치하지 않았다.
장둥쑨은 미국과 소련 양쪽의 장점을 받아들여 새로운 민주정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장둥쑨 선생, 당신이 말하는 새로운 민주란 결국 미국식 민주일 뿐이다.
서방 정치에서는 집권당과 반대당을 나누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중국의 혁명정권은 공산당과 제3자가 이룬 공동 성과다.
자신이 자신을 반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며 일축했다.
당시 회담에 동행했던 다른 인사의 회상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신정권의 수립 과정에서 “민주 당파가 인민대중의 입장에 서서 중국공산당과 보조를 맞추고 성실히 협력하며, 도중에 결별하거나 ‘반대파’를 만들거나 ‘중간노선’을 걷지 말 것을 요구했다.”
--- p.485
출판사 리뷰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중국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발굴하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현대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사태(周邊事態)”였다.
이 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것인가를 포함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여러 문제가 중국 사회에서 급부상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에서 보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제1진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한 1950년 10월 19일이나 제1차 전역(戰役)이 시작되는 10월 25일이 “주사위가 던져졌다”라는 의미에서 분기점이다.
그러나 당시 일반 시민들은 군사 개입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초기에는 군사행동이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중국 시민들은 “반미원조(反美援朝)” 선전 기사가 신문 지면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시작한 10월 하순부터 “항미원조(抗美援朝)” 운동 지지를 호소하는 각 당파 명의의 공동선언이 공표된 11월 5일을 거치면서, 지원부대의 참전 보도와 각종 “항미원조” 동원 집회 소식을 접했다.
그때부터 12월 초까지는 평화에 대한 강한 기대가 있어서 대규모 파병 참전을 반신반의하다가 점차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 책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 달 반을 중심으로 그 앞뒤 8개월 동안 중국 각지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즉, 한국전쟁 발발 앞뒤로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기존 “마오쩌둥의 한국전쟁”이라는 관점에서의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조명한 역작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그동안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지도부, 군사·외교 엘리트의 결정 과정 중심으로 서술돼 왔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사를 정면으로 뒤집는 문제작이다.
저자 천자오빈은 기존 한국전쟁 연구가 ‘국가의 의지’, ‘정권의 판단’, ‘지도자의 결심’에만 초점을 맞춰 온 결과, 실제로 그 전쟁을 가장 먼저 체감하고, 가장 직접적인 생활의 충격을 받고, 가장 현실적인 고민을 했던 보통 중국 시민들의 내면이 역사에서 지워져 왔다고 지적한다.
즉 “한국전쟁 당시 중국 시민은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가 한 번 지워지고, 그 뒤의 연구에서 다시 지워진 셈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과거 중국의 냉전사·외교사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제1부는 전쟁 발발 직후 중국 사회에 퍼진 불안과 충격을 다루며, 중앙정부의 결정과는 별개로 일반 시민들이 제3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투하 가능성에 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상공업자들과 도시 노동자들은 파병이 가져올 경제적 타격을 우려했고, 식량·생필품 가격 급등과 공장 운영 불안정, 징병 확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일상 자체가 뒤흔들렸다.
제2부는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압박 속에서 중국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어떻게 전쟁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를 추적한다.
상공업 경영자들은 미국과의 전면 충돌 가능성을 경계하며 전쟁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지방의 민간인들은 전쟁이 자신들의 생애에 어떤 재난을 불러올지 깊은 비관에 빠졌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공식 입장에 호응하는 듯 보이나, 실상은 생존·경제·안전에 관한 실질적 불안이 시민들의 판단을 흔들고 있었다.
이어지는 제3부는 교육기관과 청년층의 반응을 통해 전쟁이 젊은 세대의 일상과 사고방식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학생들은 “괜히 관여했다가 손해만 보는 것 아니냐”라는 회의에서부터, 장기화될 전쟁이 학업·진로·가정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전쟁을 둘러싼 정부의 선전과 실제 시민 감정 사이의 간극 역시 이 시기에 더욱 크게 드러났다.
제4부는 전쟁에 참여한 일선 병사들과 그 가족의 경험을 조명한다.
징집 통보를 받은 청년들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고, 가족들은 전쟁터로 보내는 아들을 두고 애도에 가까운 불안에 잠겼다.
이 장은 국가가 말하는 ‘정의로운 전쟁’과 개인이 체감하는 ‘상실의 공포’, ‘생계의 위기’ 사이의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제5부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중국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사회 구조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보여준다.
지역 간 이동, 시장의 불안정, 공급 체계의 교란, 지역마다 다른 전쟁 인식 등을 통해 중국 사회의 복잡한 다층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은 단일한 ‘국가적 사건’이 아니라, 지역과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르게 체험되는 다중적 현실이었다.
제6부는 쉬광야오라는 한 지식인의 생애사에 초점을 맞춰, 전쟁이 개인의 직업적 소명과 생사관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깊이 있게 제시한다.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그는 문화장교이자 작가 지망생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금 ‘창작의 길’과 ‘당원·군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의 일기에 기록된 두 개의 내적 목소리, 그리고 전쟁 기억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전쟁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제7부는 이를 집대성하듯, 중국 시민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다층적이고 종종 모순적인 감정 세계를 정리한다.
전쟁을 지지하는 목소리, 회피하려는 심리, 국가의 선전과 개인의 현실적 판단이 충돌하는 지점, 동맹에 대한 의구심,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불안 등 시민들의 다양한 반응이 서로 얽혀 있다.
이 장은 한국전쟁이 단순히 국가의 전략적 선택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시민 각자의 두려움·희망·계산·윤리적 고민이 담긴 사회적 경험의 집합체로 파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기존 연구들과 달리 이 책은 분석의 초점을 국가가 아니라 ‘시민’에 맞춘다.
지은이는 다양한 ‘직업’과 지역’의 중국 시민들이 ‘친미’와 ‘반미’뿐 아니라, 전쟁에 관한 ‘염증’, ‘반대’, ‘회피’ 등 다양한 생각과 감정(affect)을 가지고 행동했던 사정에 주목한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베이징만이 아니라, 톈진, 칭다오, 난징, 상하이, 푸저우, 우한, 충칭, 광저우, 홍콩, 선양, 창춘 등 주요 지역 도시의 사례를 통해 중국 시민들의 구체적인 반응을 발굴한다.
이러한 시도는 어떠한 효과를 낳을까? 바로, 기존 연구들에 대한 ‘도전’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state narrative)’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중국 시민이 체감한 한국전쟁을 조명한 역작이다.
군인이자 작가였던 ‘쉬광야오’의 전쟁
중국 시민들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경험하고 받아들였는지를 다층적으로 조명한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제6부에서 한 인물의 내면과 생애사를 통해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정신적 갈등과 선택의 순간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이 장의 주인공인 쉬광야오(徐光耀)는 소년병으로 전장을 누비고, 이후 문화장교와 작가 지망생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일기와 기록은 전쟁이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직업적 소명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1925년 허베이의 중농 가정에서 태어난 쉬광야오는 루거우차오사변 직후 팔로군에 입대한 뒤, 어린 나이부터 참혹한 전투와 전우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 사이사이 문학적 재능을 발견해 작가의 삶을 꿈꾸었고, 신문에 단편을 투고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했다.
1949년 톈진 주둔 시기에는 군의 대규모 소탕전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
1950년 초여름, 그는 중앙문학연구소 설립 소식을 접하며 전업 작가가 되려는 희망에 한층 가까워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그의 삶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군 내부에서는 전선 지원과 후방 파견을 둘러싼 분위기가 고조됐고, 그는 ‘작가로서의 소명’을 따라 문학연구소 입소를 기다릴 것인지, ‘공산당원으로서의 의무’에 따라 한국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깊은 갈등에 빠졌다.
쉬광야오의 일기에는 이러한 갈등이 두 개의 내적 목소리로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하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학문·창작의 길로 나아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선에서 조선 인민의 국제주의 정신을 체험하고 군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일시적 충동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다독였지만, 그 어떤 결정도 마음을 가볍게 해 주지 못했다.
그의 내면을 더욱 무겁게 만든 것은 소년병 시절 겪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전투 중 폭격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전우들, “우박처럼 쓸려나가던 병사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악몽처럼 되살아났다고 기록했다.
이 트라우마는 한국전쟁 참여 여부를 앞두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을 다시 끌어올렸고, 그의 판단에 미묘하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제6부는 쉬광야오의 경험을 통해 한국전쟁이 중국의 한 지식인에게 제기한 도전-소명과 의무 사이의 갈등, 전쟁이 남긴 심리적 상처, 그리고 시대적 격변이 삶의 방향을 흔드는 과정-을 한 인간의 목소리로 깊이 있게 담아낸다.
동시에 이는 전쟁의 구조적 서사 속에서 개별 시민이 어떤 자리에서 고민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창을 제공한다.
「신화사통신」의 『내부참고』를 기초로 시민의 감정을 실증적으로 복원하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철저하게 실증적 자료에 기반한 연구라는 점이다.
저자는 국가 통신사인 「신화사통신」이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급 지도 기관의 정책 결정을 돕기 위해 사회 여론이나 상황을 수집해 보고하는 내부 간행물인 「신화사통신」의 『내부참고』, 중국 외교부 당안관(국가문서보관소) 자료, 지방 정부가 남긴 정책 보고서, 1950년대 도시·농촌 지역의 생생한 기록, 베이징대학과 각종 단체의 활동 문건,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시민들이 남긴 개인 일기와 회고록을 망라해 분석한다.
특히 『내부참고』는 일반 공개 자료와 달리 당시 지방·도시의 시민 반응을 그대로 기록한 1차 자료로, “전쟁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저자는 이러한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각 계층 시민이 파병 문제를 두고 어떤 논리를 펼쳤는지, 전쟁 공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 지도부의 선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층위별로 재구성한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연구 경험-홍콩, 베이징, 충칭, 창춘 등지의 공문서관을 찾아다니며 일회성 기록조차 놓치지 않으려 했던 수십 년의 노력-을 통해 시민의 ‘단편적 발언’을 하나의 구조 속에 재배치한다.
이렇게 구축된 감정사(感情史)·정동사(情動史)는 기존 한국전쟁 연구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쟁의 일상성과 개인의 선택, 사회적 감정이 어떻게 역사적 과정과 연결되는지를 새롭게 보여 준다.
이러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결론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맹국 또는 준동맹국의 요청에 따라 군사력을 해외에 파병하면, 그 사회 내부에서 정치, 경제, 사회, 시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집단적자위권 행사의 정당성, 긴급사태를 명분으로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 방위력 증강이 평화 산업과 시민의 일상에 미치는 압력, 징병과 생사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중국 시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 시민은 권력자와는 다른 위치에서 현실적 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이 책은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금까지 간과돼 온 중요한 문제들에 접근한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현대 중국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변사태(周邊事態)”였다.
이 전쟁에 군사력을 파견할 것인가를 포함해 전쟁과 평화에 관한 여러 문제가 중국 사회에서 급부상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에서 보면,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 제1진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한 1950년 10월 19일이나 제1차 전역(戰役)이 시작되는 10월 25일이 “주사위가 던져졌다”라는 의미에서 분기점이다.
그러나 당시 일반 시민들은 군사 개입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초기에는 군사행동이 은밀하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중국 시민들은 “반미원조(反美援朝)” 선전 기사가 신문 지면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시작한 10월 하순부터 “항미원조(抗美援朝)” 운동 지지를 호소하는 각 당파 명의의 공동선언이 공표된 11월 5일을 거치면서, 지원부대의 참전 보도와 각종 “항미원조” 동원 집회 소식을 접했다.
그때부터 12월 초까지는 평화에 대한 강한 기대가 있어서 대규모 파병 참전을 반신반의하다가 점차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 책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한 달 반을 중심으로 그 앞뒤 8개월 동안 중국 각지 시민들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즉, 한국전쟁 발발 앞뒤로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기존 “마오쩌둥의 한국전쟁”이라는 관점에서의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조명한 역작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그동안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지도부, 군사·외교 엘리트의 결정 과정 중심으로 서술돼 왔던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사를 정면으로 뒤집는 문제작이다.
저자 천자오빈은 기존 한국전쟁 연구가 ‘국가의 의지’, ‘정권의 판단’, ‘지도자의 결심’에만 초점을 맞춰 온 결과, 실제로 그 전쟁을 가장 먼저 체감하고, 가장 직접적인 생활의 충격을 받고, 가장 현실적인 고민을 했던 보통 중국 시민들의 내면이 역사에서 지워져 왔다고 지적한다.
즉 “한국전쟁 당시 중국 시민은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가 한 번 지워지고, 그 뒤의 연구에서 다시 지워진 셈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의 다양한 계층-지식인, 노동자, 농민, 상공업자, 학생, 장병과 그 가족들-이 실제로 어떤 공포와 기대, 반대와 지지, 혼란과 화해의 감정을 경험했는지를 다층적으로 복원한다.
특히 과거 중국의 냉전사·외교사 연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시민들의 경제적 불안, 원자폭탄 공포, 전쟁 회피 심리, 동맹에 대한 의구심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발굴한다.
제1부는 전쟁 발발 직후 중국 사회에 퍼진 불안과 충격을 다루며, 중앙정부의 결정과는 별개로 일반 시민들이 제3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 투하 가능성에 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상공업자들과 도시 노동자들은 파병이 가져올 경제적 타격을 우려했고, 식량·생필품 가격 급등과 공장 운영 불안정, 징병 확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일상 자체가 뒤흔들렸다.
제2부는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압박 속에서 중국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어떻게 전쟁을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를 추적한다.
상공업 경영자들은 미국과의 전면 충돌 가능성을 경계하며 전쟁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지방의 민간인들은 전쟁이 자신들의 생애에 어떤 재난을 불러올지 깊은 비관에 빠졌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공식 입장에 호응하는 듯 보이나, 실상은 생존·경제·안전에 관한 실질적 불안이 시민들의 판단을 흔들고 있었다.
이어지는 제3부는 교육기관과 청년층의 반응을 통해 전쟁이 젊은 세대의 일상과 사고방식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학생들은 “괜히 관여했다가 손해만 보는 것 아니냐”라는 회의에서부터, 장기화될 전쟁이 학업·진로·가정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다양한 감정을 드러냈다.
전쟁을 둘러싼 정부의 선전과 실제 시민 감정 사이의 간극 역시 이 시기에 더욱 크게 드러났다.
제4부는 전쟁에 참여한 일선 병사들과 그 가족의 경험을 조명한다.
징집 통보를 받은 청년들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고, 가족들은 전쟁터로 보내는 아들을 두고 애도에 가까운 불안에 잠겼다.
이 장은 국가가 말하는 ‘정의로운 전쟁’과 개인이 체감하는 ‘상실의 공포’, ‘생계의 위기’ 사이의 긴장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제5부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중국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 사회 구조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보여준다.
지역 간 이동, 시장의 불안정, 공급 체계의 교란, 지역마다 다른 전쟁 인식 등을 통해 중국 사회의 복잡한 다층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쟁은 단일한 ‘국가적 사건’이 아니라, 지역과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르게 체험되는 다중적 현실이었다.
제6부는 쉬광야오라는 한 지식인의 생애사에 초점을 맞춰, 전쟁이 개인의 직업적 소명과 생사관을 어떻게 뒤흔드는지를 깊이 있게 제시한다.
소년병으로 참전했던 그는 문화장교이자 작가 지망생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금 ‘창작의 길’과 ‘당원·군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의 일기에 기록된 두 개의 내적 목소리, 그리고 전쟁 기억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전쟁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제7부는 이를 집대성하듯, 중국 시민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다층적이고 종종 모순적인 감정 세계를 정리한다.
전쟁을 지지하는 목소리, 회피하려는 심리, 국가의 선전과 개인의 현실적 판단이 충돌하는 지점, 동맹에 대한 의구심,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불안 등 시민들의 다양한 반응이 서로 얽혀 있다.
이 장은 한국전쟁이 단순히 국가의 전략적 선택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시민 각자의 두려움·희망·계산·윤리적 고민이 담긴 사회적 경험의 집합체로 파악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기존 연구들과 달리 이 책은 분석의 초점을 국가가 아니라 ‘시민’에 맞춘다.
지은이는 다양한 ‘직업’과 지역’의 중국 시민들이 ‘친미’와 ‘반미’뿐 아니라, 전쟁에 관한 ‘염증’, ‘반대’, ‘회피’ 등 다양한 생각과 감정(affect)을 가지고 행동했던 사정에 주목한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베이징만이 아니라, 톈진, 칭다오, 난징, 상하이, 푸저우, 우한, 충칭, 광저우, 홍콩, 선양, 창춘 등 주요 지역 도시의 사례를 통해 중국 시민들의 구체적인 반응을 발굴한다.
이러한 시도는 어떠한 효과를 낳을까? 바로, 기존 연구들에 대한 ‘도전’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state narrative)’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아래로부터의 시각’에서 중국 시민이 체감한 한국전쟁을 조명한 역작이다.
군인이자 작가였던 ‘쉬광야오’의 전쟁
중국 시민들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경험하고 받아들였는지를 다층적으로 조명한 『중국 시민의 한국전쟁』은 제6부에서 한 인물의 내면과 생애사를 통해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정신적 갈등과 선택의 순간을 집중적으로 비춘다.
이 장의 주인공인 쉬광야오(徐光耀)는 소년병으로 전장을 누비고, 이후 문화장교와 작가 지망생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일기와 기록은 전쟁이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직업적 소명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1925년 허베이의 중농 가정에서 태어난 쉬광야오는 루거우차오사변 직후 팔로군에 입대한 뒤, 어린 나이부터 참혹한 전투와 전우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 사이사이 문학적 재능을 발견해 작가의 삶을 꿈꾸었고, 신문에 단편을 투고하며 자신의 길을 모색했다.
1949년 톈진 주둔 시기에는 군의 대규모 소탕전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을 완성하기도 했다.
1950년 초여름, 그는 중앙문학연구소 설립 소식을 접하며 전업 작가가 되려는 희망에 한층 가까워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그의 삶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군 내부에서는 전선 지원과 후방 파견을 둘러싼 분위기가 고조됐고, 그는 ‘작가로서의 소명’을 따라 문학연구소 입소를 기다릴 것인지, ‘공산당원으로서의 의무’에 따라 한국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깊은 갈등에 빠졌다.
쉬광야오의 일기에는 이러한 갈등이 두 개의 내적 목소리로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하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학문·창작의 길로 나아갈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선에서 조선 인민의 국제주의 정신을 체험하고 군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일시적 충동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다독였지만, 그 어떤 결정도 마음을 가볍게 해 주지 못했다.
그의 내면을 더욱 무겁게 만든 것은 소년병 시절 겪은 전쟁의 참혹한 기억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전투 중 폭격으로 순식간에 사라진 전우들, “우박처럼 쓸려나가던 병사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악몽처럼 되살아났다고 기록했다.
이 트라우마는 한국전쟁 참여 여부를 앞두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을 다시 끌어올렸고, 그의 판단에 미묘하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
제6부는 쉬광야오의 경험을 통해 한국전쟁이 중국의 한 지식인에게 제기한 도전-소명과 의무 사이의 갈등, 전쟁이 남긴 심리적 상처, 그리고 시대적 격변이 삶의 방향을 흔드는 과정-을 한 인간의 목소리로 깊이 있게 담아낸다.
동시에 이는 전쟁의 구조적 서사 속에서 개별 시민이 어떤 자리에서 고민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창을 제공한다.
「신화사통신」의 『내부참고』를 기초로 시민의 감정을 실증적으로 복원하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철저하게 실증적 자료에 기반한 연구라는 점이다.
저자는 국가 통신사인 「신화사통신」이 중앙과 지방에 있는 각급 지도 기관의 정책 결정을 돕기 위해 사회 여론이나 상황을 수집해 보고하는 내부 간행물인 「신화사통신」의 『내부참고』, 중국 외교부 당안관(국가문서보관소) 자료, 지방 정부가 남긴 정책 보고서, 1950년대 도시·농촌 지역의 생생한 기록, 베이징대학과 각종 단체의 활동 문건,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시민들이 남긴 개인 일기와 회고록을 망라해 분석한다.
특히 『내부참고』는 일반 공개 자료와 달리 당시 지방·도시의 시민 반응을 그대로 기록한 1차 자료로, “전쟁을 어떻게 경험했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저자는 이러한 내부 자료를 바탕으로, 각 계층 시민이 파병 문제를 두고 어떤 논리를 펼쳤는지, 전쟁 공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는지, 지도부의 선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층위별로 재구성한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연구 경험-홍콩, 베이징, 충칭, 창춘 등지의 공문서관을 찾아다니며 일회성 기록조차 놓치지 않으려 했던 수십 년의 노력-을 통해 시민의 ‘단편적 발언’을 하나의 구조 속에 재배치한다.
이렇게 구축된 감정사(感情史)·정동사(情動史)는 기존 한국전쟁 연구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전쟁의 일상성과 개인의 선택, 사회적 감정이 어떻게 역사적 과정과 연결되는지를 새롭게 보여 준다.
이러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결론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맹국 또는 준동맹국의 요청에 따라 군사력을 해외에 파병하면, 그 사회 내부에서 정치, 경제, 사회, 시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집단적자위권 행사의 정당성, 긴급사태를 명분으로 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침해, 방위력 증강이 평화 산업과 시민의 일상에 미치는 압력, 징병과 생사의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시 중국 시민들에게도 예외 없이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특히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條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국 시민은 권력자와는 다른 위치에서 현실적 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이 책은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지금까지 간과돼 온 중요한 문제들에 접근한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11월 26일
- 쪽수, 무게, 크기 : 508쪽 | 152*225*245mm
- ISBN13 : 979119138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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