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
Description
책소개
인문학 전반에 지성적 자극을 준 대학자 얀 아스만
문화사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
역사학을 뛰어넘는 학문적 성취
독일의 이집트 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종교학자인 얀 아스만 교수의 이름이 낯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 아스만 교수처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성적 자극을 준 학자는 드물다.
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걸쳐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모범적으로 실천했으며 평생 25권의 저서를 출간해 역사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24년 2월 19일 85세로 별세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많은 부고 기사가 쏟아진 것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 핵심인 문화적 기억 이론은 역사학으로만 한정해도 진위 구명에 방점이 찍힌 실증적 연구에 균열을 내면서 그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문화사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
역사학을 뛰어넘는 학문적 성취
독일의 이집트 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종교학자인 얀 아스만 교수의 이름이 낯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 아스만 교수처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성적 자극을 준 학자는 드물다.
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걸쳐 다양한 학제 간 연구를 모범적으로 실천했으며 평생 25권의 저서를 출간해 역사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24년 2월 19일 85세로 별세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많은 부고 기사가 쏟아진 것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 핵심인 문화적 기억 이론은 역사학으로만 한정해도 진위 구명에 방점이 찍힌 실증적 연구에 균열을 내면서 그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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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ㆍ옮긴이 서문
ㆍ저자 서문(1992)
ㆍ저자 서문(2010)
서론
1부 이론적 기반
제1장│기억 문화: 예비적 고찰
1.
기억술과 기억문화
2.
과거에 대해 언급하기
3.
과거의 사회적 구성: 모리스 알박스
4.
집단기억의 형태
5.
문화적 기억의 선택지들: ‘뜨거운’ 기억과‘ 차가운’ 기억
제2장│문자 문화
1.
의례적 연속성에서 문헌적 연속성으로
2.
경전canon-개념 명확히 하기
제3장│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상상력
1.
정체성, 의식, 성찰
2.
집단 정체성의 기본 구조의 고양으로서 민족 형성
2부 사례 연구: 예비적 고찰
제4장│이집트
1.
이집트 문자 문화의 기본 특징
2.
‘카논’으로서 후기왕조 시대의 신전
제5장│이스라엘과 종교의 발명
1.
저항의 수단으로서 종교
2.
기억으로서 종교: 문화적 기억의 틀로서 〈신명기〉
제6장│법의 정신으로부터 역사의 탄생
1.
징벌과 구원 표지하에서 역사의 기호화
2.
의지의 신학 표지하에서 역사의 신학화
─‘카리스마적 사건’에서 ‘카리스마적 역사’로
제7장│그리스와 규율적 사고
1.
그리스와 문식성의 결과
2.
호메로스와 그리스 민족 형성
3.
휘폴렙시스Hypolepsis: 글쓰기 문화와 그리스에서 관념의 진화
결론―문화적 기억 요약
ㆍ해제: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 그리고 고대 중국과 한국
ㆍ주
ㆍ참고문헌
ㆍ찾아보기
ㆍ저자 서문(1992)
ㆍ저자 서문(2010)
서론
1부 이론적 기반
제1장│기억 문화: 예비적 고찰
1.
기억술과 기억문화
2.
과거에 대해 언급하기
3.
과거의 사회적 구성: 모리스 알박스
4.
집단기억의 형태
5.
문화적 기억의 선택지들: ‘뜨거운’ 기억과‘ 차가운’ 기억
제2장│문자 문화
1.
의례적 연속성에서 문헌적 연속성으로
2.
경전canon-개념 명확히 하기
제3장│문화적 정체성과 정치적 상상력
1.
정체성, 의식, 성찰
2.
집단 정체성의 기본 구조의 고양으로서 민족 형성
2부 사례 연구: 예비적 고찰
제4장│이집트
1.
이집트 문자 문화의 기본 특징
2.
‘카논’으로서 후기왕조 시대의 신전
제5장│이스라엘과 종교의 발명
1.
저항의 수단으로서 종교
2.
기억으로서 종교: 문화적 기억의 틀로서 〈신명기〉
제6장│법의 정신으로부터 역사의 탄생
1.
징벌과 구원 표지하에서 역사의 기호화
2.
의지의 신학 표지하에서 역사의 신학화
─‘카리스마적 사건’에서 ‘카리스마적 역사’로
제7장│그리스와 규율적 사고
1.
그리스와 문식성의 결과
2.
호메로스와 그리스 민족 형성
3.
휘폴렙시스Hypolepsis: 글쓰기 문화와 그리스에서 관념의 진화
결론―문화적 기억 요약
ㆍ해제: 『문화적 기억과 초기 문명』 그리고 고대 중국과 한국
ㆍ주
ㆍ참고문헌
ㆍ찾아보기
책 속으로
나는 카논을 사회의 ‘의식적 기억’으로 부르기 원하는데, 이는 그것을 초기 문명의 훨씬 유동적인 ‘전통의 물줄기’ 및 ‘탈경전’ 문화?문헌 전승이 구속력을 상실한 시대?의 자율적 기억과 대조하기 위해서다.
사회는 자아상을 가지고, 기억으로부터 문화를 빚어냄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대대로 유지한다.
많은 사회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초점이다.
--- p.26
전통 형성, 과거 원용, 정치적 정체성과 상상력 같은 모든 기능적 개념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용어 말이다.
그러한 용어가 바로 ‘문화적 기억’이다.
그것은 제도적으로, 인공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에 ‘문화적’이다.
또한 사회적 소통과 관련하여 그것은 개인 기억이 의식과 관련하여 기능하는 방식과 똑같이 기능하기 때문에 ‘기억’이다.
--- p.33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의식하게 해주는 많은 다른 요인들?이 중 상당수가 비언어적 요인들임?이 있다.
전통(연속성)의 모든 중요한 단절은 그것이 새로운 시작의 창출을 의미할 때마다 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같은 현상은 언제나 과거에 호소하여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문명들은 과거를 재발견하면서 미래를 개발하고, 산출하여, 구축해나간다.
--- p.43
이집트의 관리는 자신의 묘를 마련하고 거기에 회고록이 아닌 미리 쓴 추도사의 의미로 자신의 전기를 새기도록 했다.
최초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던 기억 문화의 형태로서 망자에 대한 이런 기억은 그저 종래의 ‘전통’ 개념으로는 다룰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 p.45
기억을 “가지는” 사람은 언제나 개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집단적으로 창출된다.
집단기억이라는 용어가 메타포로 읽히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집단 자체는 기억을 “가지지” 않지만, 집단이 그 구성원들의 기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개인적인 회상 조차도 소통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 p.47
기억 공동체를 형성한 사회 집단은 독특함과 내구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보존한다.
스스로 창출한 기억 형상을 통해 자신들이 내적으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차이를 외적으로 강조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정체성 의식을 형성하여 기억된 사실들이 일치 와 유사성, 연속성에 따라 항상 선별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 p.51
집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집단기억의 또 다른 요소로 그 재구성적 특성을 들 수 있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할 수 없고, “모든 시기의 사회에서 그때의 준거 틀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것들만 기억으로 보존된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기억 중 순수한 사실은 없다.”
--- p.52
역사가 오직 차이와 단절만 인지하는 반면, 집단기억은 유사성과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집단기억은 집단을 내부로부터 바라본다.
그래서 모든 단계에서 스스로를 식별할 수 있는 과거의 이미지를 갖추려고 애쓰며, 어떤 주요 변화도 배제한다.
반면에 역사는 그처럼 변화 없는 시기를 ‘공허한’ 막간으로 여겨 서사에서 빼버린다.
--- p.54
‘카논’이라는 단어의 고대와 근대의 다양한 용례들에서 공통적 요인은 바로 불변성이다.
어떤 의미로 쓰이든지 그것은 통일성, 엄밀성, 일관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임의성, 우연성, 분열을 배제함으로써 확고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불변성은 추상적인 규칙과 규범이나 구체적인 모델들―사람들, 예술작품들, 문헌들―의 지침을 통해 성취된다.
--- p.145
초기 교회가?수세기 동안 주저하다가?특히 계시적 문학의 양산으로 인해, 무엇이 성서로 선택되어야 하며 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카논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폐쇄적이고 변함없는 문헌 모음으로 탈바꿈시켰다.
--- p.146
경전적인 것과 외경적인 것 사이를 구별하는, 애초에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분리하는 가치 판단으로서 역사적 선을 그을 수 있고, 또 그어야 한다.
이로 인해 정통과 이단이 나뉘는데, 그런 구분은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적의 관계를 만든다.
이러한 지침이 더 이상 대상과 상황에만 제한되지 않고 사람들에까지 확장됨으로써, 그런 결정은 존재 자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이제는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 p.149
20세기는 다양한 형태의 재경전화를 거쳤다: 민족주의 파시스트주의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개념, 전후 반공과 로마 및 서유럽 중심 ‘서양’의 반민족주의 부활, 다양한 근본주의(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페미니즘과 흑인 연구, 성 소수자 권리 등과 같이 특정 소수자 정체성과 역사 작업에서 나타난 대중운동 및 그에 반하는 운동.
우리는 결코 규범적·형성적 가치의 연결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이 더 이상 경전의 장벽들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대신, 그 장벽들의 구조를 분석하여 그것들이 규범적·형성적으로 자리 잡은 과정들을 밝히는 것이다.
--- p.154
‘사회적 정체성’이라고도 부르는 사회적 소속 의식은 공유된 지식과 공유된 기억에 의존한다.
그 지식과 기억은 공통의 언어에 의해 표현된다.
다시 말해 상징들의 공동 체계에 의해 소통된다.
--- p.168
격언들의 핵심은 “모든 세포가 유기체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연대의 실천이다.
그것은 기능적 공존으로 이끄는 규칙과 함께, 그리고 성공적 소통의 기저를 이루는 자명한 이치와 함께, 가치와 규범에 연관된다.
--- p.171
“국민, 국가 형성, 거대성”이라는 이러한 증후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이집트 제4왕조(서기전 2600년경)의 피라미드일 것이다.
이집트학자인 볼프강 헬크는 “…이러한 공통된 과업을 통해서 이제야 마침내 이집트 국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지닌 하나의 조직화된 독립체로 부상했다”라고 기술한다.
--- p.250
문화의 전수자가 되는 것은 큰 부담을 지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번영하여 삶의 당면 과제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모든 고대 사회에서 공통적이었다.
하층계급은 자신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에만 문화의 일부가 될수 있었다.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선행과 보살핌이 이집트와 근동, 성경 윤리에서까지도 중심 원칙이었다.
--- p.180
문화의 제한적 구조가 심화되면 그 위상이 종교의 위상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는 (비록 전형적인 상류층 종교 역시 존재하지만) 엘리트주의가 아닌 종족주의와 민족주의의 경우에 발생한다.
차별적으로 고양된 정체성의 종교적 요소는 ‘우리’ 의식을 뒷받침하는 배타성의 주장 속에 있다.
이 요소가 모든 개인과 그 개인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 p.188
이집트에는 글로 된 경전이 없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신전이 있었다.
이러한 신전들은 경전화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평면 배치 방식을 따랐고, 명문으로 가득하여, 기념비적 형식으로 전통을 성문화했다.
그것들의 높은 담장도 외부 세계와의 장벽을 제공하여, 유대인 율법의 기능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철의 장벽’에 정확히 시각적으로 상응한다.
이집트 신전의 담벼락은 의례, 이미지, 문자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을 위한 실용적 지침까지 담고 있다.
--- p.191
초기 문명의 문자, 이스라엘과 그리스의 글쓰기와 기억술, 인도 브라만의 기억술이 그러한 문화적 기술을 대변한다.
애초의 군사적 성취 결과를 통해서야 문화적 성격을 지니게 된 신아시리아(서기전 934~609)에서도 제국 건설은 문화적 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즉, 아시리아인들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으로 알려진 궁전 도서관을 발명한 것으로 믿어지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p.192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과 관련하여 “이 도시의 내역과 더불어 신전의 위대한 설계도는 합당한 위치에 있는 벽에 새겨져 있다.
그 설계도는 선조의 [지혜를] 완벽히 담은 것으로, 그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책과 신전의 개념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전은 전형적인 경전의 특징을 지니는 책의 3차원적인 기념비적 치환에 지나지 않는다.
--- p.213
임호테프는 제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조세르 왕 묘역의 설계자이자 석조 건축과 최초 피라미드 양식의 발명자로서 그와 동시대인들의 기록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화적 기억 속에서도 살아남아 신의 영광을 얻었다.
--- p.214
이집트 문헌들은 외국인들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실제로 그들이 신전이나 어떤 신성한 의식의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세트seth는외국인의 신으로 만들어졌고, 모욕적으로 “메디아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반反신’이 되었다.
이러한 신을 섬기는 외국인은 또한 “사악한 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 p.216
그것은 이전 시대의 신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에서 ‘백과사전’이었다.
글 자체만으로 백과사전적 규모를 가지게 되었는데, 문자의 수가 이전의 약 700개에서 7,000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각 신전은 자신의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는 상형문자 체계에 내재한 회화적 상징성에 토대를 두었다.
--- p.218
신전은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하늘의 책이 땅에서 구현된 것이었다.
즉, 건물로서 그것은 신성한 평면도를 구현했고, 신전의 명문과 이미지는 하늘 도서관 전체를 돌에 새긴 것이고, 그의례는 신의 규정들에 따른 것이었다.
‘건축물로 승화된 기억’으로서, 즉 역사의식의 가시화로서, 신전은 현재를 기원의 신화적 태고와 연결 했다.
신의 문자를 옮겨 적음으로써 신전은 동시에 ‘세계의 모델’이 되었고, 이에 그 세계가 동일한 원칙 위에 구축되었다.
--- p.222
유일신교로의 변화의 조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서기전 9세기다.
아사 왕(대략 서기전 875년 사망) 치하에서 청교도적 개혁이 있었던 것 같고, 이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박해한 그의 아들 여호사밧과 예언자 엘리 야에 의해 계승되었다.
여기서 ‘오직 야훼 운동’이 시작되었다.
뒤이은 수세기 동안 이 운동은 당시 잔존하다 재기한 바알신 숭배뿐만 아니라 계속된 다신교 관행에도 맞서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 p.245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확립됨에 따라, 무수한 이집트인들이 열 가지 재앙을 겪고 사망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일부 분파 역시 상습적 범행과 완고함으로 인해 가혹한 징벌을 받았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이 혈연, 가계, 타고난 권리만의 세습적 문제가 아니었음은 명확했다.
그 구분을 위한 뚜렷한 선은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 사이, 즉 이스라엘인과 “진정한” 이스라엘인 사이에 그어졌다.
따라서 출애굽 전통은 ‘기억 형상’으로서,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대결을 선명하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 p.254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선행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서술은 앞선 왕조가 애초에 천명을 받아 그것을 완수했지만, 뒤에 점차 궤도에서 이탈 하여 천명이 불가피하게 새로운 왕조로 넘어갔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여기서도 역시 과거는 죄의 표지하에 진행되었다.
--- p.303
언약 텍스트의 주기적인 대중 낭독이 그 기억이 유지되도록 도왔다.
세속적인 국가의 조약까지도 계약 당사자 앞에서 정기적으로 낭독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은 〈신명기〉에도 지속되어 7년마다 토라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도록 한 모세의 명령이 나온다.
--- p.305
알렉산드로스에게 강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여 의구심을 지니고 있던 스파르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안겨주었다.
“동일한 피와 언어, 공통의 신전과 의례, 동일한 관습을 지닌 그리스 세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소속감이 “한 명의 아테네인이라도 아직 살아있는 한 페르시아와의 협정은 없을 것이다”라는 확약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 세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326
호메로스가 그리스 문학에서 그랬듯이, 토라는 히브리 경전에서 ‘경전 내의 경전’, 즉 히브리 경전의 결정핵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호메로스 전통이 그리스에서 민족 형성의 과정으로 기능했듯이, 이스라엘에서 토라도 마찬가지였다.
텍스트의 고정이 민족적·문화적 소속감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동반했다.
--- p.334
경전화는 텍스트에 대한 기억 의무를 동반한다.
그때 문화적 기억술이 종교의 기반이 되었고, 희생제 의례가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에 대한 예배로 대체되었다.
“기억하라!”는 명령어가 동등하게 구속력을 지니는 두 가지 의무를 나타냈다.
그 첫 번째가 언약으로 맺어진 율법으 로, 어떤 상황에서나 그 모든 세부 사항을 순종해야만 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율법을 전달하고 정당화한 역사다.
율법이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 것은 역사를 통해서였다.
사회는 자아상을 가지고, 기억으로부터 문화를 빚어냄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대대로 유지한다.
많은 사회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중요한 초점이다.
--- p.26
전통 형성, 과거 원용, 정치적 정체성과 상상력 같은 모든 기능적 개념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용어 말이다.
그러한 용어가 바로 ‘문화적 기억’이다.
그것은 제도적으로, 인공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기에 ‘문화적’이다.
또한 사회적 소통과 관련하여 그것은 개인 기억이 의식과 관련하여 기능하는 방식과 똑같이 기능하기 때문에 ‘기억’이다.
--- p.33
옛것과 새것의 차이를 의식하게 해주는 많은 다른 요인들?이 중 상당수가 비언어적 요인들임?이 있다.
전통(연속성)의 모든 중요한 단절은 그것이 새로운 시작의 창출을 의미할 때마다 과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같은 현상은 언제나 과거에 호소하여 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문명들은 과거를 재발견하면서 미래를 개발하고, 산출하여, 구축해나간다.
--- p.43
이집트의 관리는 자신의 묘를 마련하고 거기에 회고록이 아닌 미리 쓴 추도사의 의미로 자신의 전기를 새기도록 했다.
최초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던 기억 문화의 형태로서 망자에 대한 이런 기억은 그저 종래의 ‘전통’ 개념으로는 다룰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 p.45
기억을 “가지는” 사람은 언제나 개인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집단적으로 창출된다.
집단기억이라는 용어가 메타포로 읽히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집단 자체는 기억을 “가지지” 않지만, 집단이 그 구성원들의 기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장 개인적인 회상 조차도 소통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생한다.
--- p.47
기억 공동체를 형성한 사회 집단은 독특함과 내구성이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보존한다.
스스로 창출한 기억 형상을 통해 자신들이 내적으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차이를 외적으로 강조한다.
또한 시간을 두고 정체성 의식을 형성하여 기억된 사실들이 일치 와 유사성, 연속성에 따라 항상 선별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한다.
--- p.51
집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집단기억의 또 다른 요소로 그 재구성적 특성을 들 수 있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보존할 수 없고, “모든 시기의 사회에서 그때의 준거 틀 속에서 재구성할 수 있는 것들만 기억으로 보존된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에 따르면 “기억 중 순수한 사실은 없다.”
--- p.52
역사가 오직 차이와 단절만 인지하는 반면, 집단기억은 유사성과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집단기억은 집단을 내부로부터 바라본다.
그래서 모든 단계에서 스스로를 식별할 수 있는 과거의 이미지를 갖추려고 애쓰며, 어떤 주요 변화도 배제한다.
반면에 역사는 그처럼 변화 없는 시기를 ‘공허한’ 막간으로 여겨 서사에서 빼버린다.
--- p.54
‘카논’이라는 단어의 고대와 근대의 다양한 용례들에서 공통적 요인은 바로 불변성이다.
어떤 의미로 쓰이든지 그것은 통일성, 엄밀성, 일관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임의성, 우연성, 분열을 배제함으로써 확고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불변성은 추상적인 규칙과 규범이나 구체적인 모델들―사람들, 예술작품들, 문헌들―의 지침을 통해 성취된다.
--- p.145
초기 교회가?수세기 동안 주저하다가?특히 계시적 문학의 양산으로 인해, 무엇이 성서로 선택되어야 하며 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카논을 최고의 권위를 지니는 폐쇄적이고 변함없는 문헌 모음으로 탈바꿈시켰다.
--- p.146
경전적인 것과 외경적인 것 사이를 구별하는, 애초에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본질적인 것을 분리하는 가치 판단으로서 역사적 선을 그을 수 있고, 또 그어야 한다.
이로 인해 정통과 이단이 나뉘는데, 그런 구분은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와 적의 관계를 만든다.
이러한 지침이 더 이상 대상과 상황에만 제한되지 않고 사람들에까지 확장됨으로써, 그런 결정은 존재 자체의 문제와 연관되어, 이제는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 p.149
20세기는 다양한 형태의 재경전화를 거쳤다: 민족주의 파시스트주의자와 마르크스-레닌주의자 개념, 전후 반공과 로마 및 서유럽 중심 ‘서양’의 반민족주의 부활, 다양한 근본주의(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페미니즘과 흑인 연구, 성 소수자 권리 등과 같이 특정 소수자 정체성과 역사 작업에서 나타난 대중운동 및 그에 반하는 운동.
우리는 결코 규범적·형성적 가치의 연결망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이 더 이상 경전의 장벽들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대신, 그 장벽들의 구조를 분석하여 그것들이 규범적·형성적으로 자리 잡은 과정들을 밝히는 것이다.
--- p.154
‘사회적 정체성’이라고도 부르는 사회적 소속 의식은 공유된 지식과 공유된 기억에 의존한다.
그 지식과 기억은 공통의 언어에 의해 표현된다.
다시 말해 상징들의 공동 체계에 의해 소통된다.
--- p.168
격언들의 핵심은 “모든 세포가 유기체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 즉 연대의 실천이다.
그것은 기능적 공존으로 이끄는 규칙과 함께, 그리고 성공적 소통의 기저를 이루는 자명한 이치와 함께, 가치와 규범에 연관된다.
--- p.171
“국민, 국가 형성, 거대성”이라는 이러한 증후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이집트 제4왕조(서기전 2600년경)의 피라미드일 것이다.
이집트학자인 볼프강 헬크는 “…이러한 공통된 과업을 통해서 이제야 마침내 이집트 국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지닌 하나의 조직화된 독립체로 부상했다”라고 기술한다.
--- p.250
문화의 전수자가 되는 것은 큰 부담을 지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번영하여 삶의 당면 과제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모든 고대 사회에서 공통적이었다.
하층계급은 자신들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에만 문화의 일부가 될수 있었다.
궁핍한 사람들에 대한 선행과 보살핌이 이집트와 근동, 성경 윤리에서까지도 중심 원칙이었다.
--- p.180
문화의 제한적 구조가 심화되면 그 위상이 종교의 위상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는 (비록 전형적인 상류층 종교 역시 존재하지만) 엘리트주의가 아닌 종족주의와 민족주의의 경우에 발생한다.
차별적으로 고양된 정체성의 종교적 요소는 ‘우리’ 의식을 뒷받침하는 배타성의 주장 속에 있다.
이 요소가 모든 개인과 그 개인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 p.188
이집트에는 글로 된 경전이 없었지만, 그것을 대체할 신전이 있었다.
이러한 신전들은 경전화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평면 배치 방식을 따랐고, 명문으로 가득하여, 기념비적 형식으로 전통을 성문화했다.
그것들의 높은 담장도 외부 세계와의 장벽을 제공하여, 유대인 율법의 기능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철의 장벽’에 정확히 시각적으로 상응한다.
이집트 신전의 담벼락은 의례, 이미지, 문자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을 위한 실용적 지침까지 담고 있다.
--- p.191
초기 문명의 문자, 이스라엘과 그리스의 글쓰기와 기억술, 인도 브라만의 기억술이 그러한 문화적 기술을 대변한다.
애초의 군사적 성취 결과를 통해서야 문화적 성격을 지니게 된 신아시리아(서기전 934~609)에서도 제국 건설은 문화적 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즉, 아시리아인들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으로 알려진 궁전 도서관을 발명한 것으로 믿어지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p.192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과 관련하여 “이 도시의 내역과 더불어 신전의 위대한 설계도는 합당한 위치에 있는 벽에 새겨져 있다.
그 설계도는 선조의 [지혜를] 완벽히 담은 것으로, 그것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책과 신전의 개념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전은 전형적인 경전의 특징을 지니는 책의 3차원적인 기념비적 치환에 지나지 않는다.
--- p.213
임호테프는 제3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인 조세르 왕 묘역의 설계자이자 석조 건축과 최초 피라미드 양식의 발명자로서 그와 동시대인들의 기록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화적 기억 속에서도 살아남아 신의 영광을 얻었다.
--- p.214
이집트 문헌들은 외국인들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비난했고, 실제로 그들이 신전이나 어떤 신성한 의식의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세트seth는외국인의 신으로 만들어졌고, 모욕적으로 “메디아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반反신’이 되었다.
이러한 신을 섬기는 외국인은 또한 “사악한 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 p.216
그것은 이전 시대의 신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에서 ‘백과사전’이었다.
글 자체만으로 백과사전적 규모를 가지게 되었는데, 문자의 수가 이전의 약 700개에서 7,000개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각 신전은 자신의 문자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는 상형문자 체계에 내재한 회화적 상징성에 토대를 두었다.
--- p.218
신전은 이집트인의 관점에서 하늘의 책이 땅에서 구현된 것이었다.
즉, 건물로서 그것은 신성한 평면도를 구현했고, 신전의 명문과 이미지는 하늘 도서관 전체를 돌에 새긴 것이고, 그의례는 신의 규정들에 따른 것이었다.
‘건축물로 승화된 기억’으로서, 즉 역사의식의 가시화로서, 신전은 현재를 기원의 신화적 태고와 연결 했다.
신의 문자를 옮겨 적음으로써 신전은 동시에 ‘세계의 모델’이 되었고, 이에 그 세계가 동일한 원칙 위에 구축되었다.
--- p.222
유일신교로의 변화의 조짐이 처음 나타난 것은 서기전 9세기다.
아사 왕(대략 서기전 875년 사망) 치하에서 청교도적 개혁이 있었던 것 같고, 이는 바알의 제사장들을 박해한 그의 아들 여호사밧과 예언자 엘리 야에 의해 계승되었다.
여기서 ‘오직 야훼 운동’이 시작되었다.
뒤이은 수세기 동안 이 운동은 당시 잔존하다 재기한 바알신 숭배뿐만 아니라 계속된 다신교 관행에도 맞서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 p.245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이 확립됨에 따라, 무수한 이집트인들이 열 가지 재앙을 겪고 사망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일부 분파 역시 상습적 범행과 완고함으로 인해 가혹한 징벌을 받았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이 혈연, 가계, 타고난 권리만의 세습적 문제가 아니었음은 명확했다.
그 구분을 위한 뚜렷한 선은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 사이, 즉 이스라엘인과 “진정한” 이스라엘인 사이에 그어졌다.
따라서 출애굽 전통은 ‘기억 형상’으로서, 역사 속에 출현한 모든 대결을 선명하게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 p.254
중국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선행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서술은 앞선 왕조가 애초에 천명을 받아 그것을 완수했지만, 뒤에 점차 궤도에서 이탈 하여 천명이 불가피하게 새로운 왕조로 넘어갔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여기서도 역시 과거는 죄의 표지하에 진행되었다.
--- p.303
언약 텍스트의 주기적인 대중 낭독이 그 기억이 유지되도록 도왔다.
세속적인 국가의 조약까지도 계약 당사자 앞에서 정기적으로 낭독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관습은 〈신명기〉에도 지속되어 7년마다 토라를 대중 앞에서 낭독하도록 한 모세의 명령이 나온다.
--- p.305
알렉산드로스에게 강한 거부 의사를 표명하여 의구심을 지니고 있던 스파르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안겨주었다.
“동일한 피와 언어, 공통의 신전과 의례, 동일한 관습을 지닌 그리스 세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소속감이 “한 명의 아테네인이라도 아직 살아있는 한 페르시아와의 협정은 없을 것이다”라는 확약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 세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p.326
호메로스가 그리스 문학에서 그랬듯이, 토라는 히브리 경전에서 ‘경전 내의 경전’, 즉 히브리 경전의 결정핵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호메로스 전통이 그리스에서 민족 형성의 과정으로 기능했듯이, 이스라엘에서 토라도 마찬가지였다.
텍스트의 고정이 민족적·문화적 소속감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동반했다.
--- p.334
경전화는 텍스트에 대한 기억 의무를 동반한다.
그때 문화적 기억술이 종교의 기반이 되었고, 희생제 의례가 하나님의 신성한 말씀에 대한 예배로 대체되었다.
“기억하라!”는 명령어가 동등하게 구속력을 지니는 두 가지 의무를 나타냈다.
그 첫 번째가 언약으로 맺어진 율법으 로, 어떤 상황에서나 그 모든 세부 사항을 순종해야만 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율법을 전달하고 정당화한 역사다.
율법이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 것은 역사를 통해서였다.
--- p.356
출판사 리뷰
전통과 과거 혹은 역사와 신화를 포괄하다
문화적 기억이란 말 그대로 문화적으로 창출된 기억이다.
집단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 속에 담겨있다.
이 책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고대 이래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 발전, 변이, 망각, 재생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핵심 고대문명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고찰한다.
무엇보다 아스만은 초창기 문명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이끈 다양한 문화적 요소 중, 우리가 전통, 과거 혹은 역사의식, 신화적 세계관, 자기 인식 등으로 부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문화적 기억”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대문명의 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된 그러한 문화적 요소들을 역사/신화전설의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가 고대보다는 근현대의 사례들에서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양상을 추구하듯이, 그의 이론은 실상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고 있다.
카논(경전)의 성립에서 유지, 발전으로 본 문명사
아스만은 모리스 알박스가 제시한 “집단기억”을 “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으로 구분한다.
대략 80년을 넘지 않은 동시대인이 공유한 기억인 소통적 기억과 달리, 문화적 기억은 다양한 기억술을 동원하여 수천 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담아 조성한 구성적 기억이다.
과거를 원래 그대로 보존할 수 없는 문화적 기억은 신화와 역사 사이의 구분 없는 기억된 역사일 뿐이다.
아스만은 이러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에서 문자와 글쓰기 문화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다.
초창기 문자는 수백 년 동안 일상생활 문서로 사용되다 다양한 장르의 문학성 문헌을 분출한다.
이들 중 일부가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전의 일종으로 자리 잡은 이후, 정치?문화?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경전이 출현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고대문명 각각의 경전이 형성, 유지, 발전되는 다른 양상이 고유한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을 낳아 그 성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역사 해석의 틀
그런데 그 경전이 반드시 문헌일 필요는 없다.
아스만은 예컨대 20세기를 이끈 핵심 동력인 민족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공, 페미니즘 등도 재경전화된 양상으로 주목한다.
많은 사회가 그러한 다른 경전을 만들어내고 내면화하는 과정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기억 문화를 빚어내며 각각 다른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한국사와 한민족 정체성을 되돌아보면 어떤 새로운 그림이 나타날까? 역사와 신화전설이 뒤섞인 교과서 버전 거대 고조선 서사는 문화적 기억의 전형인가? 그 고조선을 필두로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여러 정치체를 아우르며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는 매듭 많은 단선적 고대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거쳐 20세기 후반 완성된 단선적 고대사를 가능케 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는 무엇일까? 21세기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일조했을 한민족 정체성을 추동한 문화적 기억의 경전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기억 연구 기반
1부 이론적 성찰과 2부 사례 연구로 나뉜 책의 구성은 독특하고 문체는 난해하다.
하지만 고대 근동사와 고대 중국사 전문가인 역자들이 힘을 합친 이 번역서의 출간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사실 그의 문화적 기억 이론은 서양사 학자들에 의해 2000년대 초반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경북대학교 변학수 교수가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그린비, 2010)과 함께, 그의 부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 2011)까지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제 그 원조 격인 이 책이 번역, 출간되어 더욱 탄탄한 기억 연구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니 우리 역사학계를 위한 반가운 선물이라 할 만하다.
문화적 기억이란 말 그대로 문화적으로 창출된 기억이다.
집단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 속에 담겨있다.
이 책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고대 이래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 발전, 변이, 망각, 재생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기능을 수행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핵심 고대문명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고찰한다.
무엇보다 아스만은 초창기 문명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이끈 다양한 문화적 요소 중, 우리가 전통, 과거 혹은 역사의식, 신화적 세계관, 자기 인식 등으로 부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문화적 기억”을 제안한다.
나아가 고대문명의 성쇠와 밀접하게 연관된 그러한 문화적 요소들을 역사/신화전설의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가 고대보다는 근현대의 사례들에서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양상을 추구하듯이, 그의 이론은 실상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고 있다.
카논(경전)의 성립에서 유지, 발전으로 본 문명사
아스만은 모리스 알박스가 제시한 “집단기억”을 “소통적 기억”과 “문화적 기억”으로 구분한다.
대략 80년을 넘지 않은 동시대인이 공유한 기억인 소통적 기억과 달리, 문화적 기억은 다양한 기억술을 동원하여 수천 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와 미래의 희망을 담아 조성한 구성적 기억이다.
과거를 원래 그대로 보존할 수 없는 문화적 기억은 신화와 역사 사이의 구분 없는 기억된 역사일 뿐이다.
아스만은 이러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에서 문자와 글쓰기 문화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다.
초창기 문자는 수백 년 동안 일상생활 문서로 사용되다 다양한 장르의 문학성 문헌을 분출한다.
이들 중 일부가 중요성을 인정받아 고전의 일종으로 자리 잡은 이후, 정치?문화?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는 경전이 출현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고대문명 각각의 경전이 형성, 유지, 발전되는 다른 양상이 고유한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을 낳아 그 성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역사 해석의 틀
그런데 그 경전이 반드시 문헌일 필요는 없다.
아스만은 예컨대 20세기를 이끈 핵심 동력인 민족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공, 페미니즘 등도 재경전화된 양상으로 주목한다.
많은 사회가 그러한 다른 경전을 만들어내고 내면화하는 과정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기억 문화를 빚어내며 각각 다른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문화적 기억의 관점에서 한국사와 한민족 정체성을 되돌아보면 어떤 새로운 그림이 나타날까? 역사와 신화전설이 뒤섞인 교과서 버전 거대 고조선 서사는 문화적 기억의 전형인가? 그 고조선을 필두로 만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여러 정치체를 아우르며 통일신라까지 이어지는 매듭 많은 단선적 고대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신채호의 민족사학을 거쳐 20세기 후반 완성된 단선적 고대사를 가능케 한 문화적 기억의 연결구조는 무엇일까? 21세기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일조했을 한민족 정체성을 추동한 문화적 기억의 경전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기억 연구 기반
1부 이론적 성찰과 2부 사례 연구로 나뉜 책의 구성은 독특하고 문체는 난해하다.
하지만 고대 근동사와 고대 중국사 전문가인 역자들이 힘을 합친 이 번역서의 출간은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학계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사실 그의 문화적 기억 이론은 서양사 학자들에 의해 2000년대 초반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경북대학교 변학수 교수가 얀 아스만의 『이집트인 모세: 서구 유일신교에 새겨진 이집트의 기억』(그린비, 2010)과 함께, 그의 부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그린비, 2011)까지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제 그 원조 격인 이 책이 번역, 출간되어 더욱 탄탄한 기억 연구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니 우리 역사학계를 위한 반가운 선물이라 할 만하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6월 09일
- 쪽수, 무게, 크기 : 496쪽 | 732g | 152*224*25mm
- ISBN13 : 9791156122951
- ISBN10 : 115612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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