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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Description
책소개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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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1947년 : 분열에서 분단으로

제1장 반탁독립투쟁위원회, 3·1절 유혈 사태
김구가 주도한 반탁 궐기대회 · 15 김구의 국민의회 결성 · 16 점점 멀어져 간 좌우 타협 · 18 38명의 사상자를 낳은 3·1절 · 20 제주의 3·1절 발포 사건 · 21 남산 메이데이 사건 · 23

역사 산책 1 명월관의 도색영화 사건 · 25

제2장 ‘트루먼 독트린’이 한국에 미친 영향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 28 이승만을 기쁘게 만든 ‘트루먼 독트린’ · 30 화려하게 치장된 ‘이승만 외교’ · 32 이승만의 귀국 환영대회 · 34

역사 산책 2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귀환 전재민 · 38

제3장 제2차 미소공위와 ‘6·23 반탁 데모’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 · 41 463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수가 7,000만 명 · 43 이승만과 김구의 ‘마지막 합작품’ · 46 “이승만은 태양, 김구는 달” · 47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 · 48 미국에 살던 서재필의 귀국 · 50

제4장 과도입법의원의 친일파 처벌법
민정장관이 된 안재홍 · 53 남조선과도정부 출범 · 54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 처단 특별법’ · 55 ‘김규식과 안재홍은 용공분자’ · 56

제5장 여운형 암살과 ‘테러 정치’
여운형 암살, 좌우 합작의 해체 · 59 여운형과 김구 · 62 중간파·좌익 인사들의 ‘테러 공포증’ · 64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테러 후원 · 66 ‘극우 테러의 최고 비호자는 미군정’ · 68

제6장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조선 문제의 유엔 이관 · 70 북한과 소련의 인구 남하 유도정책 · 72 장덕수 암살 사건 · 74 김구의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 · 77 김구와 김규식 · 79

제7장 지하로 간 좌익 언론과 예술
호남선 열차 강간 사건과 언론 탄압 · 81 공연·방송 분야 좌익 제거 작업 · 84 쫓고 쫓기는 ‘신문 전쟁’ · 85 미군정의 공보 물량 작전 · 87 〈아내의 노래〉, 〈신라의 달밤〉, 〈베사메무초〉 · 89 〈빈대떡 신사〉와 기생집의 전성시대 · 90

역사 산책 3 ‘마돈나’와 ‘모나리자’ · 93

제2부 1948년 :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제1장 유엔위원단 입국과 단독선거 확정
유엔위원단의 입국 · 99 극우파의 김구 비난 · 101 남로당의 2·7 파업과 김구의 2·10 읍고 · 102 ‘남산 위의 소나무’ 논쟁 · 104 크리슈나 메논과 모윤숙 · 106

역사 산책 4 공창제 폐지와 공창철폐연기운동 · 108

제2장 단독선거 반대운동과 토지개혁
‘7거두 공동성명’과 김구의 독설 · 111 미군정의 선거용 토지개혁 · 113 토지개혁의 시점에 대한 이승만의 불만 · 114 과도입법의원의 ‘보잘것없는 장난’ · 115

제3장 제주 4·3 항쟁의 비극
제주 인구의 10%가 죽은 대참사 · 117 평화협상을 깬 ‘오라리 사건’ · 119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 · 121 젊은이들을 산으로 내몬 ‘무차별 체포 작전’ · 123 ‘레드 헌트’의 시작 · 125

역사 산책 5 불야성을 이룬 도시의 요정 · 127

제4장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
이승만·미군정의 조소, 문화인 108명의 지지 · 129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 돼!” · 131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동’ · 133 김구의 자기모순과 때늦은 반전 · 135

제5장 5·10 남한 단독 총선거
유권자 등록 부정행위 · 138 향보단·족청의 활동과 5·8 파업 · 140 “투표는 애국민의 의무, 기권은 국민의 수치” · 142 한민당 기피, 무소속 약진 · 145 5·10 선거 거부는 옳았는가? · 147 북한의 단전 · 150 산의 적화와 생존형 절도·사기의 극성 · 154 ‘절도’와 ‘사기’의 경계를 넘나든 무역 · 156 민족 분열을 위한 기아 수입? · 158

제6장 개신교의 반공친미주의
상층부를 점령한 개신교 · 161 우익 청년단체의 근간이 된 개신교 · 164 개신교의 체질적인 반공·친미주의 · 165 오기영의 ‘예수와 조선’ · 167

제7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과 ‘국민’ 채택 · 170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 · 171 한민당을 배제한 내각 구성 · 173 김구와 이승만의 ‘비분과 실망’ · 175 태극기 대신 인공기를 채택한 북한 · 17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 180 서재필의 이승만에 대한 선전포고 · 182 갑신정변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 183

역사 산책 6 ‘사바사바’와 통역관의 폐해 · 186

제8장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친일파 처단’을 둘러싼 뜨거운 갈등 · 188 김원일의 『불의 제전』에 묘사된 친일 경찰 · 189 친일파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 · 190 친일파 비판 의원은 공산당 프락치 · 191

역사 산책 7 스웨덴에 0대 12로 패한 한국 축구 · 194

제9장 이승만을 총재로 모신 대한청년단
130만 명의 단원을 거느린 족청 · 196 대한청년단의 발족 · 197 대동청년단의 건재 · 198 국가 운영의 이원 구조 · 200

제10장 여순사건의 비극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 203 경찰과 경비대는 견원지간 · 204 군경의 잔인한 보복극 · 206 ‘손가락 총’과 김종원의 참수형 · 209 이승만 정권의 여론 조작 · 211 사망자 2,600명 · 213 숙군 작업과 박정희 체포 · 216

제11장 국가보안법 공포
국가보안법 찬반 논쟁 · 219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해야 돼” · 220 군경 조직의 강화 · 221 친여·친야로 나뉜 우익지, 국영방송의 출범 · 222

제12장 제주에서 벌어진 ‘인간 사냥’
미군이 제안한 ‘초토화 작전’ · 225 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 227 토벌대의 집단 광기 · 230 ‘함정 토벌’, ‘대살’, ‘이름 빼앗기지 마라’ · 233 사살 연습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 사건 · 234 현기영의 『순이 삼촌』 · 236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는다” · 237 4·3의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 239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 기억의 타살 · 241 공포는 아직도 남아 있다 · 243 노무현의 사과, 희생자에 대한 배·보상 · 244

제3부 1949년 : 반공의 종교화

제1장 반민특위와 학도호국단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갈등 · 249 ‘파시스트적 통치 구조’의 3위 1체 · 252 안호상과 이승만의 일민주의 · 254 중앙학도호국단 결성 · 256 감시와 밀고의 ‘정보 정치’ · 258 한국형 과대 성장국가 · 259

역사 산책 8 ‘물가 폭등’과 ‘사바사바’ · 261

제2장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의 와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 · 263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 265 반민특위의 와해 · 267 친일파 문제가 국민성에 미친 악영향 · 268

제3장 국민보도연맹과 전향·충성 경쟁
가입자 할당량 채우기 경쟁 · 271 “인간 양심의 타락이야” · 273 전향·충성 경쟁 · 276 ‘민중 속에 침투한 정보망’ · 277

제4장 김구 암살
“남한이 통곡 속에 싸였다” · 280 누가 김구를 죽였는가? · 282 극단주의가 낳은 집단적 광기 · 285 싸늘한 세상인심 · 287

제5장 이승만 우상화
1949년 대한민국은 ‘인권유린의 천국’ · 289 민중의 전방위적 착취 · 291 학교엔 이승만 초상화, 생일엔 태극기 · 293 이조 왕정시대의 부활 · 295 이승만과 김구의 공통점 · 296 한국 현대사의 불행한 업보 · 299

역사 산책 9 초등학교에서 과외수업 성행 · 301

제6장 ‘연설 정치’와 ‘혈서 정치’
연설은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 303 강원용의 활약 · 305 반탁학련과 미군정의 활약 · 307 혈서는 진실과 용기의 표현 · 309 ‘혈서 충성맹세’의 양산 · 311

제7장 6·25 전쟁 직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농지개혁과 6·25 전쟁 · 313 주한미군 철수와 북한의 선전 공세 · 315 38선 근처 무력 충돌과 북진통일론 · 317 6·25 전쟁 직전 국내외 정세 · 319 북한의 치밀한 전쟁 준비, 남한의 허풍 · 322 이승만 정권은 ‘국가’였을까? · 324

제8장 ‘여성 외교클럽’ 낙랑클럽의 활약
영어 잘하는 가정부인 중심의 클럽 · 328 한국·미국·유엔의 친선을 위한 행사 · 330 ‘호스티스’를 ‘술집 호스티스’로, ‘여흥’을 ‘접대’로 · 332 이승만 비난을 위한 언론의 선정적 낙인 · 334

역사 산책 10 ‘크리스마스 실’과 ‘크리스마스 트리’ · 336

맺는말 : ‘배신·변절’을 팔아먹는 매카시즘
“극단적 도그마와 성숙하지 않은 이념” · 338 공포·증오·혐오를 유발하는 딱지 붙이기 · 340 대중과 접촉하는 역사를 위하여 · 342 진정한 ‘주체’는 사실과 진실이다 · 344 ‘50대 50’의 책임 분담 · 346 김구 평가에 스며든 ‘안전의 욕구’ · 348 일제 잔재의 문화적 저주 · 350 ‘카오스의 도가니’에서 생존법 · 352 이제 ‘중간’으로 가야 한다 · 354

주 · 357

책 속으로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이 가시화되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미소공위 양측은 협의 대상 정당·사회단체의 허용 범위를 놓고 논란을 거친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6월 11일에 발표된 공동성명에 따르면, 미소공위 협의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사회단체는 모스크바 결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조선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를 고수하고 신탁통치에 관한 제안을 작성하는 데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하고 그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를 미소공위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좌파 진영과 중도파 진영은 이 성명을 반겼지만, 반탁 진영 내부에서는 미소공위 협의 참가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 「제1부 제3장 제2차 미소공위와 ‘6·23 반탁 데모’」 중에서

좌우합작위원회는 미소공위의 결렬과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으로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그 대신 중간 세력을 새롭게 결집시킨 민족자주연맹(민련)이 결성되었다.
1947년 12월 20일 천도교 강당에서 거행된 결성식에서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김붕준·홍명희·원세훈·이극로·김성규 등이 선임되었다.
이 당시 김구는 오락가락 또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일주일 후인 11월 30일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해 1시간 정도 요담(要談)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서북청년회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훈화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가던 시점인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 「제1부 제6장 이승만과 김구의 결별」 중에서

김구의 북한행은 놀라운 대반전이었다.
그는 그간 북한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북한은 “살인강도단 두목 김구·이승만 타도하자!”, “삼천만이 다 죽더라도 숙망(宿望)이던 황제 노릇 해보고야 말겠다”는 내용의 김구를 비방하는 포스터와 삐라를 김구가 오기 직전에서야 황급히 떼어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본회의 개막 시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가 합창되었고, 행사장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남북 요인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정치회담이 열렸다.
이 모임에서는 해방 이후 최초로 좌익과 우익, 중도계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 「제2부 제4장 김구와 김규식의 방북」 중에서

이승만이 반민법을 공포한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선 내무부 주관으로 ‘반공구국 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가 열렸다.
형식적으론 반공대회였지만 사실은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였으며, 군중의 상당수는 강제로 동원되었다.
경찰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오늘은 국기를 꽂아라.
오늘 서울운동장에 나오지 않으면 빨갱이다, 양곡 배급통장을 뺏는다”는 협박을 했다.
이 국민대회는 “동족 간의 화기를 손상케 하는 반민법을 시정하는 동시에 공산 매국분자를 소탕할 조문의 삽입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대회장 곳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뿌려졌다.
“국회에서 통과한 반민법은 반장이나 통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이것은 온 국민을 그물로 옭아매는 망민법이다.” “이런 민족 분열의 법률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다.” “국회 내의 김일성 앞잡이를 숙청해야 한다.”
--- 「제2부 제8장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중에서

한독당 당원이자 서북청년단 단원이기도 했던 안두희는 범행 후 김구가 이끄는 한독당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하고 소련의 주장에 따라 미군 철수를 추진하고 있어, 그 위험성이 절박해왔다고 느껴 살해하게 되었노라고 밝히고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구 암살 이틀 후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서울지검장인 최대교도 모르는 사이에 조직부장 김학규 등 한독당 간부 7명에게 살인교사죄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아무 조사도 하지 않고 증거도 없이 검찰총장 김익진이 ‘경무대 노인이 최대교 모르게 하라’고 지시해서 김익진 자신이 직접 영장을 발부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장흥이 훗날 증언한 바와 같이, 김구 암살을 한독당 집안 싸움으로 돌리기 위한 음모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그러한 음모는 9월 30일에 이르러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 「제3부 제4장 김구 암살」 중에서

이즈음 개성에서는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국군 제1사단 특공대 10명이 인민군 토치카(tochka)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산화한 ‘육탄 10용사 사건’이 일어났다.
『자유신문』 1949년 5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낙랑클럽 회원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을 방문해 유가족들에게 가구당 10만 원씩 후원해 달라며 100만 원의 성금을 전달했다.
이튿날에는 제1사단을 ‘위문 방문’했고, 일주일 후에는 이화여대 동창회 주최로 ‘10용사 유가족 원호 음악회’를 열어 수입금 전액을 유가족에게 보냈다.
『경향신문』 1949년 8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재경(在京) 외국인 클럽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내외빈을 ‘위문(entertain)’하기 위해 덕수궁 광장에서 고전극 〈선덕여왕〉을 비롯한 음악·무용 공연을 무대에 올렸고, 『동아일보』 1949년 8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군사사절 단장을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과 미국과 유엔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주관했다.
--- 「제3부 제8장 ‘여성 외교클럽’ 낙랑클럽의 활약」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4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1945년 해방 이후의 정국은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전쟁터였다.
타협과 화합은 정상적인 시절을 살고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전투성만 돋보였고, 중간은 허용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저질러진 학살의 예비 연습은 이미 1940년대 후반에 충분히 이루어졌다.
규모의 차이만 있었을 뿐, 그 잔인성에서 다를 건 없었다.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 할 폭력국가의 유산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복종적인 의식과 행동이 별로 극복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양극의 충돌이 해방정국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펼쳐졌다.

물론 1945년 해방 이후의 극단적인 정국은 타협을 거부한 좌우(左右) 양쪽의 책임이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욕망’에 더 치우쳤던 우익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우익은 일제와는 타협했어도 좌익과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온건 우익은 소수였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강경 우익에게 일제와의 타협은 자신들에게 권력과 금력을 가져다줄 수 있었지만, 좌익과의 타협은 권력과 금력을 차지하는 데에 위협이 되거나 그걸 나눠먹어야 하는 타협이었다.
바로 이런 이해관계가 이데올로기에 우선했거나 이데올로기와 혼재되었을 것이다.
민중들은 쌀밥 한 숟가락을 위해, 어떤 이들은 더 잘 먹고 출세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은 모두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45년과 1946년, 제2권은 1947년과 1948년과 194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1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여운형 암살과 ‘테러 정치’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미국으로 돌아가는 재미 조선사정협의회 회장 김용중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중에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18일부터 테러를 당하기 시작해 그간 10번의 테러를 당했는데, 11번째 테러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여운형의 암살범은 김두한이 고문으로 있던 백의사의 멤버인 극우 청년 한지근이었다.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여운형은 1946년 2월 9일 북한을 방문한 이래 다섯 차례에 걸쳐 방문했으며, 매번 김일성을 만났다.
바로 이 점이 훗날 남한에서 여운형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여운형에 대한 언급을 조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야말로 여운형의 장점이요 강점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국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운형에 대한 테러는 중간파와 좌익 지도자들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효과를 낳았다.
좌익 지도자들은 더욱 심각했다.
여운형 암살 사건이 일어난 1947년 여름은 해방정국을 내내 강타했던 테러가 유난히 기승을 부린 시절이었다.
7월 한 달 동안 모두 128건의 테러가 발생해 36명이 사망하고 385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에는 68건의 테러로 17명이 죽고 158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68건 중 37건은 우익에서 저질렀고 16건은 좌익에서, 나머지 15건은 불명이었다.
또한 좌익 청년단체보다는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과 테러가 더 심했는데, 이는 우익 청년단체가 경찰의 비호를 받는 동시에 좌익 청년단체와는 달리 중앙과 지방의 명령 계통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었다.
가장 왕성한 테러 활동을 벌인 게 바로 서북청년회였으며, 이승만은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제주 4·3 항쟁의 비극

제주 4·3 항쟁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3만 명은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게다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했는데, 19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되었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민심이 동요했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대한 도민들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북청년단 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미군정 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민중을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고,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 핵심은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위원회는 유혈 사태를 초래한 초토화 작전과 집단 인명피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국가보안법 공포

1948년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도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 세력의 연합에 의해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해야 돼”라고 격려했다.

외무부 장관 장택상이 유엔위원단에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인원은 8만 9,700여 명이었다.
1949년 한 해에만 체포된 인원은 11만 명 이상이었다.
국가보안법이 조장한 사회적 분위기에 자극되어 군 내부의 숙군 작업은 더욱 거세졌다.
1949년 1월 2일 육군 정보국에 특별수사과와 그 예하의 15개 지역파견대를 설치하고, 1949년 10월 21일에는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했다.
기존의 군과 경찰력 강화 프로그램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7년 말 경비대는 1만 7,000명 수준이었으나 1948년 여름에는 5만 명, 1949년 초에는 6만 5,000명으로 증강되었다.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되었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뒤 12월 15일 국군이 정식 법제화되었다.
경찰력도 1948년 초 3만 명, 1949년 3월에는 4만 5,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승만 우상화

1949년부터 이승만의 귀환일과 생일은 국경일처럼 경축되었다.
이승만의 생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 주도로 공식적인 ‘대통령 탄신 경축대회’를 열었다.
그의 생일은 탄신일로 불렸으며 군경 합동의 육해공군 삼군 사열까지 받았다.
모든 국민은 집집마다 국기를 달아야 했다.
신문들의 아첨도 지극했다.
학교마다 이승만의 초상화가 내걸리고, 이승만의 생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는 건 결코 가볍게 넘겨도 좋을 문제가 아니다.
제왕주의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지도자를 섬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승만 체제는 이조 왕정시대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걸 웅변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민당 인사들과 평안도 출신 반공 세력 등 많은 우익 세력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이후 그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고 자신의 ‘친위 그룹’ 또는 ‘가신 그룹’으로 대체시켜 나갔다.

이승만의 전통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으로서 그건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이른바 ‘승자 독식주의’라는 것이다.
일단 절대 승자가 탄생하면 절대 복종하고 승자를 우상화하는 문화는 이후 반세기 이상 한국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게 거쳐야 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도약한 역사의 업보라는 것이다.
이승만의 시계는 구한말에 멈춰져 있었다.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남한 사회를 왕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하게 된다.
이런 우상화 또는 지도자 숭배증은 강압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통제와 조작은 가해졌을망정, 왕조 시대처럼 지도자를 숭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중의 강렬한 정서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GOODS SPECIFICS
- 발행일 : 2025년 08월 18일
- 쪽수, 무게, 크기 : 400쪽 | 153*224*30mm
- ISBN13 : 9788959068074
- ISBN10 : 8959068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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